불교의 중국 정복 (The Buddhist Conquest of China) (上) [유태선 시민기자]
불교의 중국 정복 (The Buddhist Conquest of China) (上) [유태선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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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초승인 2020.02.12 09:35:47
  • 최종수정 2020.02.12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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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에 많은 업적을 남겼던 한(漢), 당(唐), 송(宋)의 황금 시대를 기억하는 중국인들은 과거에는 자신들이 전세계의 중심이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8세기의 당나라는 세계 최고 수준의 문명국가였다.

중국인들이 세계질서를 주도하던 시기는 불교(佛敎)가 중국에서 융성하였던 시기와 거의 일치한다. 즉, 불교는 유교(儒敎)와 도교(道敎) 일색이던 한나라 말기에 중국에 전래되어 남북조 시대에 중국화된 후 당나라 시대에 최고조에 이르렀다가 송나라 시대에 접어들자 유학의 분파인 주자학(朱子學)에 밀려 점차 교세가 약해진다.

1958년 네덜란드의 중국학자 에릭 쥐르허(Erik Zürcher)가 라이덴 대학에서 박사학위 논문으로 저술한 [불교의 중국 정복]은 인도에서 유래한 불교가 중국 대륙에 전파되어 수용되고 중국화되는 과정을 분석하고 있다.

산스크리트어와 중국어를 모두 해독할 수 있는 저자는 자신의 논문을 통하여 '인도 세계에서 발전된 불교가 어떻게 중국의 생활양식에 적응할 수 있었는가'에 대한 독자적인 입장을 제시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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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나라 시대의 불교

장기간에 걸쳐 중국 불교의 기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일화가 역사적 사실로 인정되어 왔으나 최근 들어 이는 후대에 만들어진 전설에 불과하다고 보고 있다.

"후한의 제2대 황제 명제(明帝: 서기 58년-서기 75년)는 꿈에서 금으로 된 사람을 보았는데 신하들이 그가 바로 부처라고 알려 주었다. 황제는 사신들을 실크로드에 위치한 월지국(月支國)으로 보내 불경을 받아오게 하였는데 사신들의 귀국길에 함께 들어온 외국인 승려 섭마등(攝摩騰)과 축법란(竺法蘭)이 낙양의 백마사(白馬寺)에 머물며 중국 대륙에 불교를 전파하기 시작했다."

낙양 백마사

불교는 인도에서 중국으로 직접 전파된 것이 아니라 실크로드를 통하여 돈황, 하서회랑, 관중 지역을 거쳐 후한의 수도 낙양까지 전파되었다고 추정된다. 하지만 한나라 시대의 불교는 중국의 중심지인 장안과 낙양에 거주하던 외국인들의 종교에 머물렀다.

명제의 동생, 초왕(楚王) 유영(劉英)이 서기 65년에 부처를 위하여 금식하고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으나 유영은 불교를 도교의 육체적 불사를 위한 수련법인 황로신앙(黃老信仰)의 하나로 인식한 것으로 보인다.

한나라 시대의 중국 민중들은 불교와 도교를 구분하지 못 하고 불교를 도교의 분파로 인식하였기에 2세기 후반부터 "도교의 성인 노자(老子)가 말년에 인도로 가서 부처가 되었다"고 믿는 화호설(化胡說)이 도교를 신봉하는 사람들 사이에 퍼져 나갔다.

* 한나라 시대 중국 대륙에 전파된 불교는 부처의 제자들에 의하여 인도 전역에 전파되는 과정에서 여러 종파로 분화되었던 부파불교(部派佛敎)를 비판하며 부처의 가르침에 기반한 불교를 주장하던 대승불교(大乘佛敎)였다. 대승불교 승려들은 부파불교를 소승불교(小乘佛敎)라고 부르며 자신들이야말로 부처의 진정한 가르침을 실천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 대승불교와 소승불교의 관계는 기독교 내의 개신교와 천주교의 관계와 유사한데 대승불교는 부처의 가르침과 멀어져 가던 소승불교에 대하여 매우 비판적이었던 반면 소승불교는 자신들이 불교의 정통파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어서 대승불교에 대하여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2. 삼국 시대의 불교

서기 184년의 황건적의 난으로부터 시작된 대혼란은 한나라가 조조(曹操: 서기 187년-서기 220년)의 위(魏), 손권(孫權: 서기 182년-서기 252년)의 오(吳), 유비(劉備: 서기 166년-서기 222년)의 촉(蜀)으로 분할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조조와 그의 후계자들은 한나라 시대의 유교 대신에 법가(法家)를 통치이념으로 채택하면서 '실력주의'를 도입하려 하였으나 서기 249년 사마의(司馬懿: 서기 179년-서기 251년)가 쿠데타를 통하여 실권을 장악하면서 유교가 다시 부활하게 되는데 기존의 경전 해석을 비판하면서 원래의 내용에 충실하고자 하는 고문학파(古文學派)가 주류를 형성한다.

이제 유교는 형이상학의 비중이 축소되고 정치사상에 머무르게 되었고 그에 따른 공백을 초기 도교의 [노자]와 [장자]를 재해석하는 현학(玄學)이 파고 들었다. 현학이 교양 있는 사족들에게 퍼져감에 따라 공(空)과 무(無)에 대한 담론이 유행하게 되는데 이는 불교가 중국 대륙을 장악하게 되는 기반을 열어준 것이었다.

조조와 유비가 불교를 어떻게 바라보았는지는 불분명한 반면 손권의 경우 월지인의 후예인 불경 번역가 지겸(支謙)과 소그드인 승려 강승회(康僧會)를 우대했던 사실이 문헌상 기록으로 남아있다.

3. 서진(西晉) 시대의 불교

중국을 다시 통일한 서진의 무제(武帝: 서기 236년 - 서기 290년) - 사마의(司馬懿)의 손자인 사마염(司馬炎) - 가 통치하던 서기 265년부터 서기 290년 사이에 중앙아시아와의 교류가 확대되면서 외국 승려들과 불교 문헌들이 대대적으로 유입되었다. 같은 시기에 불교는 외국인들의 종교에서 벗어나 황족인 사마씨를 비롯한 상류층 사족들에게 수용되기 시작했다.

서기 300년경 중원 지역에 다시 혼란이 시작되어 서기 316년에 서진이 멸망한다. 중국 북부 주민들의 남부로의 대규모 피난과 동진의 수립을 계기로 낙양의 불교가 양자강 하류지역, 과거 손권의 오나라 영토에 그대로 이식되었다.

중국 북부 지역에서는 흉노족 지배자 후조(後趙)의 석륵(石勒: 서기 274년-서기 333년)이 불교를 자신의 궁정에 수용하였다. 이를 계기로 왕실이 불교를 경제적으로 후원하면서 필요에 따라 그 활동을 통제하는 특수한 형태의 북조 불교가 시작되었다.

중국 남조의 불교에서는 국가와 교단 사이에 승려들이 '세속의 법령을 그대로 따라야 하는가 아니면 예외를 인정받아야 하는가'에 대한 논쟁이 계속되었던 반면 중국 북부에서는 황제의 신앙심에 따라 불교의 세력이 강화되기도 하고 약화되기도 한다.

4. 동진(東晉) 시대의 불교

동남쪽으로 피난 온 중국 사족들을 중심으로 한 동진의 지배층들 사이에 철학에 대한 수사적 토론을 즐기는 청담(淸談)의 풍조가 유행하였는데 불교 승려들이 이들의 모임에 초대되기 시작하면서 불교의 사상과 이론이 급속도로 퍼져 나갔다.

동진 시대의 불교는 수도인 건강(建康)을 중심으로 한 현재의 강소성(江蘇省) 및 절강성(浙江省), 양양(襄陽)을 중심으로 한 현재의 호북성(湖北省) 그리고 여산(廬山)을 중심으로 한 현재의 강서성(江西省)의 세 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지둔(支遁), 도안(道安), 혜원(慧遠)은 각각의 지역을 대표하는 고승들이다.

(1) 지둔(支遁: 서기 314년-서기 366년)

수도인 건강에서 귀족들의 청담 모임의 단골 손님이었던 승려 지둔은 수많은 제자들을 키워내면서 즉색의(卽色義)라는 불교의 해석 방식을 제시하였다.

"색(色)의 본질은 색이 스스로 색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비록 색으로 실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색은 공(空)이다. 그러므로 색은 공과 같으며 또한 실재하는 것처럼 보이므로 공과 다르다고 이야기된다."

지둔은 명필 왕희지(王羲之) 등 명사들과 평생 절친한 사이였는데 승려들과 사족들의 교류가 빈번해짐에 따라 불교는 동진의 최상층 사이에 굳건히 뿌리 내리게 되었다.

(2) 도안(道安: 서기 314년-서기 385년)

중국 북부에서 후조의 국왕 석륵을 불교로 인도했던 고승 불도징(佛圖澄: 서기 232년-서기 348년)의 제자 도안은 전란을 피하여 오백여 명과 함께 양양으로 내려와 정착한 후 15년간 불교 경전을 강의했다. 그가 불교 경전에 붙인 주석(註釋) 덕분에 문자를 해독할 줄 아는 식자층들이 불교에 대하여 제대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서기 379년 전진(前秦)의 부견(苻堅: 서기 338년-서기 385년)이 남하하여 양양을 함락시키는데 도안은 그의 제자들을 다른 곳으로 피신하도록 하였으나 자신은 부견의 포로가 되고 만다.

불심이 깊은 부견은 도안을 전진의 수도 장안으로 모신 후 중앙아시아에서 실크로드를 통하여 중국에 온 외국 승려들의 불경 번역 작업을 감독하도록 한다.

(3) 혜원(慧遠: 서기 334년-서기 416년)

도안의 수제자였던 혜원은 전진의 군대가 양양을 공격하려 하던 서기 378년에 양양을 떠나 동남쪽으로 향하여 자신의 제자들과 함께 여산에 불교 공동체를 건설한다. 그는 37년간 여산에 머무르면서 불교 이론을 강의하고 염불을 지도하는 일에 전념했다.

혜원은 장안의 외국인 승려들과의 교류를 통하여 불경 번역 과정에서 습득된 새로운 지식을 동진에 가장 먼저 도입한 후 그의 제자들을 통하여 남중국 전역에 전파하는데 그의 명성이 높아짐에 따라 불교 교단의 특권적 지위가 확립된다.

* 중앙아시아에서 후진(後秦)의 수도 장안으로 끌려온 승려 구마라습(鳩摩羅什 = 쿠마라지바: 서기 344년-서기 413년)이 산스크리트 불경을 한문으로 번역하면서 중국인들은 비로소 기존의 격의불교(格義佛敎)에서 벗어나 부처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기 시작한다.

* 격의불교란 불교의 ‘공(空)’을 노장의 ‘무(無)’와 동일한 것으로 설명하는 등 불교 이외의 가르침에 불교 교리의 개념을 대응시켜 불교를 이해하려는 것을 말한다.

유태선 시민기자 (개인사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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