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 ‘임기 후반’ 앞두고 뜬금없이 현실성 없는 제안
'야당 심판론 불붙이기’ ‘보험용’에 정권의 오만함 가득 차

홍찬식 객원 칼럼니스트
홍찬식 객원 칼럼니스트

새해 들어 문재인 정부가 내세우는 ‘협치’ 문제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문 대통령은 신년사에서 “우리 사회가 내부적으로 더 통합적이고 협력적이 되어야 하며 보수와 진보가 서로 이해하며 손잡을 수 있어야 한다”고 운을 뗐다. 1월 14일 신년 기자회견에서는 “(4.15) 총선이 지나고 나면 야당 인사 가운데서도 내각에 함께 하는 노력을 하겠다”며 더 구체적으로 나왔다. 

1월 16일에는 노영민 청와대 비서실장이 라디오에 출연해 “바다는 모든 강물을 받아들인다”는 뜻의 ‘해납백천(海納百川)’을 올해의 사자성어로 꼽았다. 1월 30일에는 문 대통령이 야당과의 협치를 위해 발탁했다고 스스로 밝힌 정세균 국무총리가 스웨덴의 사회적 대화 모델인 ‘목요클럽’ 같은 것을 한국에도 만들겠다며 관련 전문가들을 총리 공관으로 불러 모았다. 우한 폐렴 사태로 인해 관심사에서 다소 비껴나 있지만 문 정권의 ‘협치’ 드라이브가 강하게 걸려 있는 상태다. 

이런 움직임은 문 정권이 출범 이후 1000일 동안 보여 왔던 행적을 생각하면 참으로 가증스럽다. 사회학자인 이재열 서울대 교수는 한국 사회를 불신, 불만, 불안의 ‘3불(不) 사회’로 정의한다. 이 속에서 모래알처럼 흩어진 사람들은 사회적 고립을 넘어 적대적 공존의 수준까지 이르러 있다는 것이다. 누구라도 주변을 한번 돌아보게 되면 공감하지 않을 수 없는 뼈아픈 지적이다. 문 정권은 가뜩이나 분열된 나라를 ‘내 편’과 ‘네 편’로 더 쪼개놓고 증오와 대결의 불씨를 곳곳에 바이러스처럼 흩뿌려 놓았다.  

특히 호남 표를 확실히 붙잡아 ‘좌파+호남’ 정권을 만들면 20년, 50년 장기 집권도 가능하다는 정치공학적 접근으로 편파 인사 등 지역감정을 극대화하고 있는 것은 용서 받을 수 없는 과오다. 선거법 공수처법도 지난 연말 이런 방식으로 강행 처리를 한 뒤 여의도의 남도 음식점에서 축배를 들었던 그들이다. 이런 정권이 돌연 야당을 향해 “손뼉을 치고 싶어도 한 손으로는 칠 수 없지 않겠느냐”며 ‘협치’를 주장하는 것은 진정성 면에서 인정받을 수 없다. 

더구나 이 정권 사람들이 자주 입에 올리는 ‘평등’ ‘공정’ ‘정의’ ‘포용’ 같은 아름다운 단어들은 일반인들이 전부터 익히 알고 있던 같은 단어의 의미와는 많이 다르다는 걸 실감하는 중이다. 그들끼리의 평등이자 상생이고 자신들을 위한 정의이자 포용인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협치’라는 단어도 ‘권력을 잡은 정치세력이 정치적 견해가 다른 야당과 소통 협조하며 국정을 운영하는 것’ 쯤으로 보통 사람들은 이해하고 있지만 좌파 집단에서는 그런 의미가 아니다. 

‘협치’와 ‘혁신’을 2대 시정(市政) 목표로 내세웠던 박원순 서울시장이 말하는 협치는 알고 보니 ‘야당과의 협치’가 아니라 ‘시민단체와의 협치’였다. 박원순 시장에게 협치는 ‘권한과 책임을 시민과 나누는 것’이었고 그 시민이란 좌파 시민단체들을 의미했다. 협치의 뜻을 자의적으로 비틀어버렸다. 시민단체 출신 인사들이 대거 서울시로 진입했다. 이들에게 협치는 지자체 내에 배타적인 좌파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었다는 점에서 오히려 진짜 협치와는 정반대 위치에 있다. 

문재인 정부도 다르지 않았다. 시민단체인 참여연대 인사들이 우르르 청와대로 몰려들어 참여연대의 본질은 시민단체가 아니라 ‘권력 참여연대’였음을 다시 한 번 드러냈다. 청와대 내부는 운동권 출신 인사들로 채워졌고 청와대가 국정 권한을 틀어쥐는 독주가 이어지면서 행정부의 장관들마저도 ‘인형’과 ‘들러리’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같은 편끼리만 철저히 나눠먹는 이런 시스템에서 ‘협치’ 주장은 가당치 않고 실현될 수도 없는 일이다. 혹시라도 ‘협치’ 제안에 진심이 들어 있다면 그간의 행태부터 반성하고 바로잡은 뒤 말을 꺼내야 할 것이다. 

협치가 공감대를 얻을 수 있는 기회가 그동안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제 와서 부질없는 얘기이지만 이 정권의 출범과 함께 대대적인 포용과 통합의 정치에 나섰더라면 국내 상황은 많이 달라졌을 것이고, 정권에 대한 평가도 변할 수 있었다. 또 한 번의 기회는 2018년 6.13 지방선거 때 여당이 ‘싹쓸이 승리’를 거둔 뒤였다. 문 대통령은 그동안에도 몇 번에 걸쳐 야당 인사들에게 입각 제의를 했으나 수락을 얻지 못했다고 변명하지만 그 정도를 협치라고 생각하는 상상력의 부재가 한심할 뿐이다. 대통령 취임사 등에서 수없이 쏟아놓은 말들이 있으니 한번 생색이라도 내보자는 것 아니었나. 

이번 협치 건은 더 허접한 수준을 드러낸다. 요약한다면 총선이 끝난 뒤 야당 쪽 사람들을 몇 명 입각시키겠다는 것인데 먼저 현실성 면에서 불가능한 일이다. 여당이 총선에서 승리할 경우 임기가 2년 정도 남은 정권에 참여하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은 우파 야당 쪽에는 아마 없을 것이고, 있다면 여당과 한 통속으로 공조해온 범여권 정당 정도일 것이다. 이건 포용과는 아무 상관없는 ‘박원순 식 동거’에 불과하다. 반대로 총선에서 우파 야당이 여당을 이기는 상황이 벌어지면 권력의 판도가 바뀌는 마당에 야당이 협치에 응할 리 없다. 

그렇다면 왜 이 시점에 문 정권이 협치 얘기를 꺼내는 것인지 그 속셈을 따져보지 않을 수 없다. 우파 야당이 예산 인사 등 국정에 협조를 안 하고 있다는 걸 부각시켜 총선에서 ‘야당 심판론’을 우회적으로 제기하려고 할 가능성, 그동안 저질러놓은 자신들의 ‘독재 정치’에 뒷감당이 두려운 나머지 뒤늦게 협치를 꺼냈을 가능성 등이 있다. 문 대통령이 최근 들어 “국민을 분열시키고 갈등을 조장하고 있다”며 계속 야권을 공격해 왔다는 점에서 전자 쪽에 무게가 실린다. 어느 쪽이라도 새해 벽두의 협치 타령은 정치적 사기와 다름없는 일이다.  

또 하나 불순한 것은 이번 총선에 대한 문 정권의 강한 자신감이 이 안에 들어 있다는 점이다. 협치 제안은 집권 여당이 총선에서 승리한다는 전제 아래 내놓을 수 있는 일이다. 내가 힘이 있어야 남에게 손을 내밀 것 아니겠는가. 지금도 청와대는 연일 여론조사 결과를 파악하며 자신들이 이길 거라는 계산서를 손에 쥐고 있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무능하고 사악하며 오만하기까지 한 정권이 심판받지 않는다면 이 땅에 정의는 사라질 수밖에 없다.

홍찬식 객원 칼럼니스트(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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