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동근 칼럼] 4.15 총선, 국가명운을 가르는 '체제전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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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초승인 2020.01.30 10:35:44
  • 최종수정 2020.01.31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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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민주주의에서 '자유' 삭제하려는 시도 잊어선 안돼...이번 총선은 '체제 전쟁'
민주주의 이전 확립한 '입헌적 자유주의' 통해 다수독재 경계해야
지난해 10월 광화문 광장에서 표출된 분노는 '자유 시민'의 각성
김형오 공관위원장의 통합론은 '자유우파'의 정체성을 지키지 못하면 아무 의미없어
조동근 객원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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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체제전쟁인가. 그 이유는 간명하다. 더불어민주당이 오는 4.15 제 21대 총선에서 승리한다면 그들이 무엇을 시도할 것인가를 유추하면 된다. 대한민국을 실질적으로 해체하는 ‘사회민주주의 개헌’을 시도할 것으로 예측된다. 정세균 국무총리도 국회 인사청문 과정에서 ‘21대 국회 개시 1년이 개헌 적기’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들은 이미 2018년 3월에 개헌을 시도했다. 

O 2018년 3월 개헌시도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 권력구조 변경 아닌 체제 전환  

정권이 ‘국가 위에’ 위치할 수 없으며 정권이 국민일 수 없음에도, 더불어민주당은 개헌의 ‘내재적 한계’를 뛰어 넘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골격에 손을 대려 했다. 그들은 공론화 과정을 거치지 않고 임의기구인 ‘헌법자문특별위’ 자문형식을 빌어 개정헌법 골격을 마련했다. 

중차대한 헌법개정을 ‘헌법자문특별위원회’에서 논의하게 한 것 자체가 초법적이다. 좌파들이 전범으로 삼는 프랑스헌법 제3조 1항은 “국가주권은 국민에게 있으며, 국민은 대표자나 국민투표를 통해서 국가주권을 행사한다”고 명기하고 있다. 제3조 2항은 “국민의 일부나 특정 개인이 주권의 행사를 특수하게 부여 받을 수 없다”고 기록하고 있다. 프랑스 헌법 기준에 따르면, 정체(政體)를 흔들 수 있는 각종 위원회의 설치와 운영은 그 자체가 위헌이다. 국민은 헌법개정자문위원회와 원전공론화위원회에 정책 결정권을 부여한 적 없다. 

2018년 3월 개헌 시도는 권력구조 개편을 꾀한 이전의 개헌과는 결을 달리한다. ‘자유민주주의’에서 자유를 빼 ‘민주주의’로 바꾸고 '사람 중심'을 내세우면서 자유시장 경제에 반(反)하는 경제조항을 삽입하려 했다. 구체적으로 ‘정리해고 반대’ 파업권을 헌법에 보장해 민노총에 날개를 달아 주려했다. 그러면 구조조정은 올 스톱될 것이고, 기울어진 운동장은 ‘뒤집혀진 운동장’이 될 것이다. 그리고 토지공개념을 강화하려 했다. “국가는 토지의 공공성과 합리적 사용을 위해 법률로써 ‘특별한 제한’을 하거나 의무를 부과할 수 있다”는 조항을 신설하려 했다. 무엇을 겨냥하는 지 읽힌다. 

2018년 3월 개헌시도가 막힌 것은, 그해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지방자치단체를 지방정부로 격상시키는 지방분권형 개헌”을 발의한 것 자체가 개헌이 ‘선거 전략’으로 전락한 것이라는 반대 여론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여론에 밀려 잠시 개헌안을 접은 상태이다. 하지만 4.15 총선에서 이기면 다시 개헌 논의를 이어갈 것으로 판단된다. 

O 다수결주의 함정에 빠진 한국의 민주주의 

한국의 민주주의는 ‘다수결주의(majoritarianism) 함정에 빠져 있다. 민주주의는 정권창출 및 정책결정의 절차일 뿐, 그 자체가 절대선(絶對善)일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지지한다고 그것이 반드시 옳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선거로 창출된 정부가 비효율적이고, 부패하고, 무책임, 무능하다 하더라도 그런 정부가 덜 민주적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99%의 사람들이 1%의 소수자 제거를 투표로 결정한다면, 그 역시 민주적 결정이다. 

민주주의는 다수결주의의 환상에서 벗어나 ‘입헌자유주의’에 의해 제약돼야 한다. 즉 ‘자유민주주의’체제가 아니면 민주주의는 민주(대중)독재로 흘러가기 쉽다. 정치사상 및 정치 제도적으로 ‘입헌적 자유주의가 민주주의 이전’에 확립되었다. 서구에서 영국 명예혁명(1668년)과 프랑스 시민혁명(1789년) 그리고 미국 독립선언(1776년) 등을 거쳐 1840년 후반 ‘입헌적 자유주의’(constitutional liberalism) 골격이 완성됐다. 그 후 2차 대전이 끝난 1940년대 후반에  보편적 참정권이 반영된 ‘민주주의’가 확립된 것이다. 따라서 입헌적 자유주의라는 피로 이룩한 컨텐츠를 빼면 민주주의는 ‘국민의 비밀, 직접, 평등, 보통 선거’라는 외형만 남게 된다. 

민주주의에는 ‘입헌적 자유주의’가 핵심이다. 입헌적 자유주의는 인간은 천부의 인권을 가지며 ‘정부의 권력’은 법에 의해 제한돼야 한다는 것이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는 갈등을 빚을 소지가 충분하다. 18~19세기에 이미 여러 정치 사상가들과 선각자들은 ‘민주주의가 자유를 침해’하는 다수독재(tyranny of the majority)를 경계했다. ‘입헌적 자유주의’ 없는 ‘민주주의’는 인민독재의 시작이다. 자유 침해, 권력의 오남용이 수반된다. ‘차베스와 마드로’는 선거로 당선된 민주 지도자이다. 민주주의의 역설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점에서 한국의 정치 지형도 혼미스럽기는 마찬가지다. 

O 10월 광화문 자유시민 항쟁, 분노 표출 기저에 깔린 시대정신을 읽어야 

2019년 10월 항쟁에 그렇게 많은 시민들이 광화문 광장에 모인 이유는 무엇인가. ‘분노’했기 때문이다. 정의와 공정의 가면에 가려진 문재인정부의 거짓과 위선을 국민들은 ‘조국사태’를 통해 철저히 목도했다. 정의와 공정에 반(反)하는 인사를 ‘의혹만으로 임명하지 않는다면 나쁜 선례가 된다’며 자신을 ‘자유주의자면서 사회주의자’라고까지 말한 조국을 대한민국 체제의 파수꾼이어야 할 법무장관에 임명한 문재인 대통령의 그 오만과 독선에 항거하기 위해서다. 문대통령은 임기 반환점(2019.11)을 돌면서 “무너진 나라를 다시 세워 국가를 정상화했고, 정의와 공정의 가치를 사회 전(全)영역으로 확산시켜 나갔다”고 자평했다. 하지만 반환점을 돈 ‘바로 그날’ 검찰은 조국 부인 정경심을 ‘미공개 정보를 이용한 주식 취득과 범죄수익은닉 혐의’로 기소했다.

더 큰 이유는 ‘공수처 신설’과 ‘공직선거법 개정’을 개혁으로 포장한 범여권의 지록위마(指鹿爲馬)의 위선에 분노했기 때문이다. 검찰이 살아있는 권력 수사에 나서려 하자 민주당은 정권 보위를 위해 검찰을 무력화시키는 수단으로 공수처 신설을, 군소 정당은 의석수 확보를 위해 연동형 선거법 개정을 주장한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공수처법과 선거법 통과가 ‘반(反)민주적 폭거’인 이유는 범여권 정당 간에 ‘정치적 이익’을 위해 두 법안을 맞교환했기 때문이다. 전형적인 ‘정치 거래’인 것이다. 위민(爲民)의 숙고와 논의 대신 ‘정파적 이해’에 의해 국가의 근본 틀이 농단되었다.

공수처 신설과 검경수사권 조정은 개혁과 무관한 ‘대통령의 권한’을 강화시키려는 국가권력 구조의 편법적 변경에 지나지 않는다. 고민정 청와대 대변인은 “검찰의 자의적이고 위협적인 권한 행사에 대해 견제와 균형이 필요하다”고 국민이 판단했기에 공수처가 출범할 수 있었다고 논평했다. 그렇다면 ‘검찰의 무엇이 자의적이고 위협적인 권한 행사였는지를 특정’해야 한다. 하지만 그녀는 이를 특정하지 못했다. 그녀의 ‘지력의 한계’는 거기까지다. 

추미애 법무장관은 취임하자마자 전광석화같이 인사권을 행사해 ‘청와대 지방선거개입 의혹’을 수사하고 있는 윤석열 검찰총장의 수족을 모두 제거했다. 그녀는 개선장군인양 처신하고 있다. 인사권 전횡은 인사권 남용이 아닐 수 없다. 문재인 정부 치하에서 자유 시민들이 통절한 것은 ‘법치 실종과 그에 따른 민주주의 타락’이다.

10월 항쟁 이후 지금도 수많은 시민이 광화문에 모이는 것은 ‘분노’만은 아니다. 그들은 좌파들이 고의적으로 폄훼하는 ‘태극기 부대’가 아니다. ‘10월 항쟁’을 계기로 각성된 ‘자유주의 시민세력’인 것이다. 10월 항쟁의 분노의 기저에 깔린 ‘자유 시민’의 각성을 읽어야 한다. 

O 자유한국당 김형오 공관위원장의 정치 인식  

선거는 총칼을 들지 않은 전쟁이다. 군사혁명을 배제한 상태에서 한 나라의 진운(進運)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혁명은 선거혁명이다. 정치 세력 간의 전선(戰線) 형성은 분명할수록 좋다. 정치 지형은 ‘자유주의’와 ‘국가주의’ 중 어디에 방점을 찍느냐에 따라 형성된다. 

최근 자유한국당 김형오 공관위원장은 “어느 시대인데 보수니, 진보니 케케묵은 논리를 따지나"고 일갈했다. 그리고 그는 “국민을 위한 국회의원을 공천 하겠다”고 했다. ‘국민을 위한 국회의원을 공천 하겠다’는 것은 동어반복의 당연선(當然善)이기에 재론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보수와 진보’를 진영논리로 폄훼(貶毁)해서는 안 된다.

진영논리는 주장의 객관성, 합리성, 논리성을 논하기에 앞서 ‘자신이 속한 진영에 속하느냐, 속하지 않느냐’를 따지는 것이다. 진영논리의 동의어는 ‘패거리주의’, 즉 ‘우리가 남이가’이다. 진영논리에 빠지면 자신이 미워하는 상대진영의 인사를 ‘공공의 적’으로 몰아 ‘자신의 분노’를 정당화시킨다. 자유주의와 보수주의를 진영논리로 간주한다면 ‘이론의 궁핍, 철학의 빈곤, 정치적 상상력의 부재, 역사지식의 결핍’을 드러낸 것이다.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와 김형오 공관위원장의 정치적 포지션은 ‘반문(反文) 연대’을 통한 ‘중도통합론’으로 압축된다. 하지만 ‘야권 통합’, ‘외연 확장’, ‘중도 포용’으로 등치를 키운 들, '자유우파'의 정체성을 지키지 못하면 ‘초식공룡’이 될 뿐 아무 의미가 없다. 중도통합론은 암묵적으로 ‘집토끼와 산토끼’의 2분법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이 같은 2분법은 ‘치명적 인식 오류’를 범하고 있다. “집토끼는 늘 그 자리에 있을 터이니” 산토끼를 잡아야 한다는 사고는 ‘집토끼’에게 깊은 상처를 줄 뿐만 아니라 정당의 이념 정체성을 스스로 훼손시킨다. ‘산토끼를 집토끼’로 만들어야 한다. ‘레이건’과 ‘대처’가 표심을 잡겠다고 좌클릭한 적 있는 가? 그들은 이념과 가치의 정체성을 분명히 함으로써 ‘산토끼를 집토끼’로 만든 것이다.  

이념지형에 ‘제3의 길’은 없다. 중도는 ‘방향’(direction)이 아닌 ‘정도’(degree)의 문제이다. 중도는 ‘지나치지 말자’는 중용 내지 과유불급의 의미이다. 경제학의 공공선택론에서 나오는 ‘중위투표자이론’(median voter theorem)은 ‘중간 값’을 선점해야 선거에서 이긴다는 것으로 중도에 위치한 ‘제3의 길’을 차지하라는 것이 아니다.  

O 책임 있는 정치인이라면 자신의 행동을 설명할 수 있어야 

야권 통합을 위해서는 ‘탄핵을 불문에 붙이고’ 갈 수는 없다. ‘탄핵의 강’을 건너자는 데 어떻게 건널 것인가. 그리고 탄핵을 역사의 평가에 맡긴다면 모든 것을 역사에 맡겨야 한다. 그러면 현실정치는 존재하지 않는다. 책임 있는 정치인이라면 탄핵사태에 대해 입장을 표명할 수 있어야 한다. “당시 충분히 숙고하지 못해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정적(政敵)에게 집권의 빌미를 주었음을 성찰한다”고 용기 있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통합의 물꼬가 열리는 것이다. 고해성사는 치욕이 아니며, 그 자체가 가장 가치 있는 용기이다. 그리고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이 ‘상대방에게 정치생명’을 내 놓으라고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유승민 의원 등의 복당은 변수가 돼서는 안 된다. 복당은 ‘집 나간 탕자가 돌아 온 것’일 뿐이며, 잔류를 희망하면 ‘백의 종군’해야 한다. 10월 자유시민 항쟁에 그들이 기여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따라서 통합의 주체와 대상은 ‘자유주의 시민세력’이어야 한다. 

통합이 이뤄지려면 견지하는 가치에 대한 확인이 필요하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헌법 가치에 대해 확실히 동의하는 지 여부를 분명히 따져야 한다. ‘안보는 보수, 경제는 진보’ 식의  취사적(取捨的) 가치선택은 기회주의일 뿐이다.  

O 에필로그: 4.15 총선이 체제전쟁인 이유

문재인 정부 들어 경제 활력이 살아나지 못하는 이유는 ‘국가개입주의’라는 좌파 이데올로기를 붙들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가 전지전능하다’는 믿는 순간 국가개입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다. 국가개입주의에 빠져 정부가 일자리를 만든다고 나설수록 ‘재정은 탕진되고 일자리 질’은 낮아지며, 국민의 국가에 대한 의존은 타성화 된다. 모든 국민을 ‘사회적 약자’로 만들었으니  경제활력이 살아날 수가 없다. 

국가개입주의 시각으로 보면 모든 것이 ‘사회적’이다. ‘정의’(justice)가 “우리 모두 동일한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주장이라면 ‘사회적 정의(social justice)’는 “어떤 사람은 추가 부담을 져야하고 다른 사람은 사회적 특혜를 누려야 한다”는 주장으로 변용된다. 사회적 정의는 기업인, 납세자, 시민을 특정 계층의 복지를 위한 수단으로 삼는다. 현금살포 복지지출은 후속세대에게 부담을 안기는 기성세대의 가장 비도덕적인 ‘미래 착취행위’에 다름 아니다. 

문재인 정부 치하에서 얻은 가장 소중한 소득은 ‘입헌적 자유주의 없는 민주주의’, 즉 ‘자유에 의해 제약되지 않는 민주’는 민주독재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달았다는 것이다. 자유침해, 인권경시, 권력의 오·남용 등은 ‘다수지배’에서 오는 것이다.

국민의 안위와 민복(民福)이 아닌 집권연장을 위해 ‘다수지배’라는 미명하에 국가 조직과 권력을 수단화하고 국민 위에 군림하는 치자(治者)는 필패(必敗)한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정치는 사상의 싸움이다. 저울이 어느 쪽으로 기우느냐에 따라 그 나라의 진운이 결정된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그리고 그 반대세력의 싸움이 이번 4.15 총선의 역사적 의미인 것이다. 그래서 4.15 총선은 체제전쟁인 것이다. 이기지 못하면 '사회주의'로의 길에 들어설 수도 있다.

조동근 객원 칼럼니스트 (명지대 경제학과 명예교수, 바른사회시민회의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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