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혁춘추: 현대중국의 슬픈 역사] 44회. "대반란의 쓰나미, 독초들의 저항"
[文革春秋: 現代中國의 슬픈 歷史]: “大反亂의 쓰나미: 毒草들의 抵抗"

 

1. 팽진(彭眞, 1902-1997, Peng Zhen)의 저항

1965년 11월 초 <<인민일보>>를 비롯한 북경의 주요언론들은 모두 요문원의 글을 거부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요문원의 글은 부득이 1965년 11월 10일 상해의 <<문회보>>에 실릴 수밖에 없었다. 그 후 거의 3주가 지난 11월 29일 <<북경일보>>와 <<해방일보>>에, 11월 30일 <<인민일보>>에 요문원의 같은 글이 게재됐다.  그 20여일의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을까? 강력한 권력자가 북경의 언론사에 외압을 넣었으며, 북경의 언론사들은 저항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언론사에 외압을 행사한 주체는 모택동의 부인 강청(江靑, 1914-1991, Jiang Qing)이었다. 강청은 그러나 문혁 4인방의 재판장에서 스스로 진술했듯 모택동의 "애완견"일 뿐이었다. 강청은 “모주석이 누군가를 가서 물라고 하면 가서 물었던” 죄밖에 없다며 자기변호를 한 바 있다. 강청의 뒤에는 늘 모택동이 있었다. 

 

모택동의 지시인 줄 다 알면서도 강청의 외압에 저항했던 인물은 다름 아닌 중국공산당 북경시위원회 제1서기장 팽진이었다. 북경의 시장으로서 팽진은 인민일보의 편집에 결정적 영향을 행사했다. 북경의 부시장이었던 오함은 팽진과 정치적으로, 학술적으로 밀접하게 연관된 막역한 사이였다. 이미 강청은 1962년부터 <<해서파관>>의 반혁명성을 지적하면서 오함을 공격해왔다. 그때마다 팽진은 모택동에 직접 호소함으로써 오함에 가해지는 부당한 좌파세력의 헐뜯기와 흠집내기를 막아줬다. 이번에도 결국 팽진이 모택동과 맞서고 있는 형국이었다. 

 

북경의 언론이 반발하자 모택동은 요문원의 비평문을 "소책자로 만들어 배포하라!"는 지시한다. 모택동의 명령에 따라 11월 24일 상해의 신화서점은 전국 각지의 지점에 요문원의 비평문을 소책자로 만들라는 급전을 쳤는데, 북경의 신화서점은 묵묵부답으로 시간을 끌고만 있다가 상부의 압박이 계속 가해지자 발간 거부의 의사를 표명한다. 북경의 일개 서점이 모택동의 지시에 반발하고 있었던 셈이다. 모택동으로선 용납할 수 없는 권력의 누수였다. 물론 그 역시 북경시장 팽진의 결정이었음이 분명해 보인다. 팽진은 늘 그렇게 정치력을 발휘해서 사상문화계에 가해지는 중앙당의 공격을 유야무야 넘겨 왔다. 

 

이번에는 그러나 그 방법이 통하지 않았다. 국무원 총리 주은래까지 나서서 오함의 <<해서파관>>을 비판하며 요문원의 평론을 출판하라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주은래는 물론 모택동의 강력한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상황이 악화되자 팽진으로선 일단 <<인민일보>>에 요문원의 평론을 게재할 수밖에 없었으나 편집자의 견해란을 빌어 1957년 모택동의 연설문을 빌어 "자유로운 사상토론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팽진은 모택동의 어록을 방패 삼아 모택동이 내지르는 창을 막으려 했다. 모택동이 사상자유를 강조했던 이상, 오함의 역사극을 반혁명이라 몰아갈 순 없다는 항변이었다. 

 

 

팽진과 그의 부인(張洁清, 1912-2015)의 모습.
팽진과 그의 부인(張洁清, 1912-2015)의 모습.

 

팽진은 누구인가? 본명은 부무공(傅懋恭). 산서성 출신. 20세 때 지방 학교에서 마르크주의를 접한 후, 1923년 만 21세의 나이로 공산당에 가입한 인물이다. 그는 1920-30년대 중국공산당 산서(山西)조직을 건설하고, 항일전쟁 기간 중공중앙 조직부 부장 및 중공중앙 당교(黨校)의 부교장 역임했다. 1936년 4월 유소기가 연안에서 천진으로 가서 중공중앙북방국을 건설할 때, 그는 조직부 부장에 위임된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팽진은 삼반(三反)운동·오반(五反)운동 등 여러 정치 캠페인을 지휘하면서 맹활약한다. 또 그 성과를 인정받아 1951년 북경시시장의 지위에 오른다. 1955년 팽진은 중공 북경시위원회의 제1서기로서 당과 정부를 장악했다. 그는 문혁초기 이른바 문화대혁명 5인소조의 리더로서 1966년 2월 모택동에게 그 유명한 항거의 성명서 “2월 제강(提綱)”을 제출한다. 팽진은 그 직후 반당집단의 수괴로 몰려 파면됐으며, 문혁 초기 홍위병 집회에 불려나가 이른바 "비투(비판투쟁)"에 시달렸다. 문혁 기간 내내 그는 감금 상태로 지내야 했다. 결국 팽진은 1978년 등소평 집권 직후 복권되었고, 1980년대에 이르러서는 중국공산당 8대 원로(元老) 중 한 명으로 칭송되었다.  

 

팽진의 이력에서 특히 1936년에 중공중장북방국에서 맺어진 유소기와의 유대관계에 주목해야 한다. 모택동의 입장에서 보면, 팽진이 유소기의 사람이었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모택동은 문혁 개시 직전 팽진의 입에 우선 재갈을 물렸다. 그가 장악한 북경의 중앙 언론매체를 빼앗고 그와 결탁된 문예계의 인사들을 모두 굴비 엮 듯 엮어서 숙청하기 위함이었다. 오함은 북경시 부시장이었다. 팽진의 사람이란 이야기다. 그런 팽진은 모택동의 의도를 이미 간파하고 있었다. 모택동이 <<해서파관>>에 격분해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고, 무엇보다 오함을 향한 공격의 예봉이 곧 자신의 목을 겨누고 있음도 눈치 채고 있었다. 

 

팽진의 입장에선 “사상토론의 자유”를 내걸고 오함으로 하여금 적극적인 자기방어를 하도록 하는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팽진은 요문원의 비평문 위에 실린 편집자의 견해에 모택동이 스스로 번복해버린 1957년 3월 12일 그 음흉한 계략의 언어를 모택동 눈앞에 제시한 듯하다. 물론 오함 스스로 요문원공격에 대응할 수 있도록 <<인민일보>> 사상전의 지면을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요컨대 수세에 몰린 팽진이 쓸 수 있는 최후의 사상적 무기는 바로 모택동에게 전해 받은 바로 그 보도(寶刀), 바로 “백화제방, 백가쟁명”의 방침이었다. 

문혁 당시 홍위병 집회에 끌려나가 "비투"(비판투쟁) 당하는 팽진의 모습. 그의 목에 "삼반분자(三反分子) 팽진"이라는 팻말이 걸려 있다. 여기서 삼반이란, "反당,  反사회주의,을 의미한다.
문혁 당시 홍위병 집회에 끌려나가 "비투"(비판투쟁) 당하는 팽진의 모습. 그의 목에 "삼반분자(三反分子) 팽진"이라는 팻말이 걸려 있다. 여기서 삼반이란, "反당, 反사회주의, 反모택동"을 의미한다. 팽진의 이름 위에 "X"가 그어져 있다. 문혁 당시 집회에서는 이름에 엑스자를 치거나 이름자를 뒤집어서 써서 인격적 모욕을 가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2. <<인민일보>> 편집자의 저항


1965년 12월 한 달 동안의 <<인민일보>>를 통독해 보면 모택동의 의도를 간파한 팽진은 편집권을 통해서 처절하게 저항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965년 12월 15일 <<인민일보>>는 오함과 그의 역사극 <<해서파관>>을 둘러싼 심층탐사 기사를 한 편 내보냈다. 극한의 이념투쟁 상황에서 <<인민일보>>의 편집자는 다시금 차분히 “백화제방, 백가쟁명”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진리란 밝힐수록 밝아진다. 우리는 믿는다. 오직 백화제방과 백가쟁명의 방침을 견지함으로써 신중하게 실사구시의 토론을 전개한다면, 이러한 문제는 반드시 해결될 수 있다고.”

 

<<인민일보>>의 편집자에 의하면, 이 토론은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둘러싸고 극단적으로 대립하고 있다. 1) 해서파관은 무엇을 선양하는가? 2) 이 역사극은 역사의 진실을 반영하는가? 3) 이 역사극은 어떤 계급적 입장에 서 있는가? 4) 해서는 어떤 계급적 입장에 서 있는가? 적어도 12월 15일까지 <<인민일보>>는 광기의 마녀사냥 속에서 오함을 감싸고 돌았다. 예컨대 <<해서파관>>이 계급투쟁을 약화하는 개량주의적 작품이여, 봉건도덕을 선양한다는 견해에 대해선. 편집자들은 오히려 “오함이 거악과 투쟁하는 강직하고 용감한 인간”으로서 “인민의 희망을 표현하고 당시의 계급투쟁을 그렸다”고 반박한다. 

 

오함이 해서를 영웅으로 만들면서 역사를 왜곡하고 결국 봉건지주계급을 칭송하는 오류를 범했다는 견해에 대해선, 예술은 과장할 수 있으며, 당시의 한계 속에서 농민을 위하는 해서야 말로 혁명적 인물일 수 있다고 되받는다. 1960-1961년 당시의 현실에서 <<해서파관>>은 봉건주의 및 자본주의의 복원 시도였다는 비판에 대해선, 오함은 역사적 근거 위에서 극을 구성했으며, 오함은 사회주의 혁명에 복무한 건전한 동기의 작가라고 반박한다. 해서는 봉건통치계급의 인물이며, 봉건지주계급의 입장을 벗어날 수 없다는 입장에 대해선, 해서는 인민을 동정하는 인물이며 결국 농민의 편에 섰던 영웅이라는 항변을 한다.

 

최소한 그해 12월 중순까지 <<인민일보>>편집진은 여전히 오함을 적극적으로 변호하고 있다. 물론 팽진의 지시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인민일보>>에 대한 팽진의 영향력을 잘 알고 있는 모택동은 예상대로 팽진이 그에 맞서 저항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터였다. 그런 맥락에서 모택동이 문혁 개시 직후 팽진에 가했던 극심한 정치적 박해도 쉽게 설명된다.

 

3. 오함(吳晗)의 자기변호

 

드디어 12월 30일 한 달 간 전국적으로 광열하게 진행된 뜻밖의 논쟁에 대해 <<해서파관>>의 작자 오함이 <<인민일보>>에 비장한 어조로 “<<해서파관>>에 관한 자아비평”을 발표한다. 200자 원고지 120장이 넘는 장문의 반성문이다. 아니, 반성문이 아니라 반성문의 형식을 띈 자기변호의 “논문”이라 할 수 있다. 북경시 부시장으로, 역사학자로서, 극작가로서 한 몸에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었던 오함은 한 달간 전국적으로 전개된 이념공세로 자존감이 무너지고 전의가 상실된 듯하다. 그는 도입부터 한 달 간 많은 비판을 받고 스스로의 착오를 교정할 수 있었다는 저자세의 반성에서 글을 시작한다.

 

문혁 직전 역사학자 오함의 모습
문혁 직전 역사학자 오함의 모습

 

오함은 크게 세 가지 논점에 대해 조목조목 반박한다. 첫째, <<해서파관>>이 계급투쟁의 관점을 버리고 봉건관료를 영웅으로 만들었다는 비판이다. 둘째, 해서가 농민들에게 서계가 불법으로 강탈한 땅을 농민들에게 되돌려주는 이른바 “퇴전”의 장면이 대약진운동 당시 인민공사를 조롱하는 풍자의 장치라는 지적이다. 셋째, <<해서파관>>이 1959년 8월 여산회의에서 파면된 팽덕회 등 “우파기회주의”에 대한 옹호라는 비판이다. 이 세 가지 비판에 대해서 오함은 각각 다른 방법으로 대응한다. 우선 오함은 과감하게도 1959년 당시 해서 관련 논문들을 집필하면서 “계급투쟁”의 관점을 잠시 잊었음을 인정하고 계급적 도덕관을 다음과 같이 피력한다.

 

“도덕이란 계급의 도덕이며, 서로 다른 계급은 서로 다른 도덕을 갖는다. 피통치계급의 도덕과 통치계급의 도덕은 대립된다. 무산계급은 봉건도덕, 자산계급의 도덕에 대해선 비판만 할 수 있을 뿐 계승할 수는 없다. 둘째, 도덕은 상부구조이다. 서로 다른 사회, 서로 다른 경제 기초 위에서 생산, 발전하고 다시 하부구조에 복무해서 본 계급의 이익을 보호한다. 셋째, 무산계급도덕의 경제적 기초는 전 인민소유제이다. 전 인민소유제는 계급혁명, 생산투쟁, 과학실험 등 3대 혁명을 통해서 성장하고, 융성하고, 제고되고, 발전한다. 이 말은 계급투쟁을 통해서 실천하면서 형성된다. 이는 봉건 및 자산계급의 도덕과는 전혀 공통점이 없다.

 

문혁 당시 집회에서 비투 당하는 오함
문혁 당시 집회에서 비투 당하는 오함 (왼쪽)

 

해서가 농민들에 땅을 되돌려 준 사건에 대해선, 오함은 역사적 근거를 조목조목 밝힌다. 대약진운동 당시 인민공사의 실패를 조롱하기 위해 해서를 농민들에게 “땅을 돌려주는”(퇴전) 인물로 그리지 않았음을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자신이 팽덕회 등의 옹호를 위해 해서연구를 했다는 비판에 대해선, 1959년 발표된 해서 관련 칼럼 등을 통해 자신이 스스로 이미 우경기회주의를 비판했음을 강조한다. 무엇보다 그가 1959년 8월2일-16일 중국공산당 제8기 중앙위원회 8차 전체회의에서 발표된 공보(公報)에 읽고 그에 입각해서 “우파기회주의”를 분명히 비판했음을 강조했다. 그의 입장에서 농민에게 땅을 돌려주는 해서는 좌파이고, 농민에게서 땅을 빼앗은 서계는 우파의 인물이다.

 

50년도 더 지난 오늘의 관점에서 야릇하지만, 당시의 중국사회는 이념적으로 계급혁명의 늪에 빠져 있었다. 상연 당시 경극 <<해서파관>>을 직접 박수치며 보았던 수많은 사람들은 당시엔 그 작품의 “반계급성” 혹은 “무계급성”을 눈치조차 채지 못했었다. 아닌 밤 중국사회를 뒤엎은 문혁의 회오리는 계급혁명을 잠시 망각했던 인민들을 다시금 긴장시켰다. 그 분위기를 감지한 오함으로선 해서 관련 논문들과 역사극에서 계급투쟁을 충분히 부각시키지 못했다는 처절한 자아비판을 해야만 했다. 그 길만이 유일한 살 길이었다. 인민공사를 조롱했다거나 팽덕회를 옹호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오함은 반혁명의 굴레를 쓰고 파멸의 심연으로 추락할 수밖에 없었다. 오함으로서 “자아비판”은 살기 위한 발버둥이었지만, 제 무덤을 파는 첫 삽질이기도 했다. <계속>

 

문혁 당시 홍위병 집회의 폭력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선전포스터. 자기방어권을 상실한 희생자가 건장한 두 명의 홍위병에 끌려나와 대중 앞에서 비투당하는 모습.
문혁 당시 홍위병 집회의 폭력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선전포스터. 자기방어권을 상실한 희생자가 건장한 두 명의 홍위병에 끌려나와 대중 앞에서 비투당하는 모습.

 

<참고문헌>

高皐, 嚴家其, 《文化大革命十年史 1966-1976》 (天津人民出版社, 1988).

錢庠理, 《中華人民共和國史: 第五卷 歷史的變局──從挽救危機到反修防修(1962-1965)》 (港中文大學當代中國文化研究中心, 2008).

楊繼繩, 《天地翻覆——中国文化大革命史》 (香港: 天地圖書, 2018).

Byung-Joon Ahn, "The Politics of Peking Opera, 1962-1965," Asian Survey, Vol. 12 No.12, (Dec. 1972), pp. 1066-1081.

Mary G. Mazur, Wu Han, Historian: Son of China's Times (Lanham, MD: Lexington Books, 2009).

Roderick MacFarquhar and Michael Schoenhals, Mao's Last Revolution (Cambridge, Mass.: Harvard University Press.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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