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의소리/이자성] 역사의 반복에서 느끼는 비애
[독자의소리/이자성] 역사의 반복에서 느끼는 비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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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이 재산권보다 위에 있는 나라, 그리고 이념에 사로잡힌 유토피아주의자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옳다고 여기는 주장을 법을 통해 강요하도록 허용하는 우리나라와 같은 체제에서는 자연이 인간에게 선사한 예지와 분별력이 경제발전을 해치는 방향으로 작용할 것이다. 이런 나라에 어느 투자자가 감히 공장을 세우려 하고, 누가 기업을 시작하려 하겠는가, 어제는 하루에 몇 시간 이상을 일해서는 안된다는 법을 만들고, 오늘은 또다시 어떤 직종에 대해서는 얼마 이상의 임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법을 만든다. 내일, 모레 계속해서 어떤 법들이 만들어질지 누가 알 수 있겠는가, 정치인들이 국민과 괴리되어 독단적인 존재가 되고, 그들이 타인의 재산권을 마치 자신들의 것처럼 마음대로 요리할 수 있다고 맏는 한, 법이 자신의 처지를 어떻게 바꾸어갈지에 대해서 자신할 수 있는 사람이 있겠는가, 이런 상황에서 과연 누가 새로운 사업을 벌일 수 있겠는가"

이 글은 자유기업원이 발행한 프랑스의 자유주의 사상가 끌로드 프레데릭 바스티아의 논문집, '법'에 실린 '재산권과 법'의 일부다. 바스티아는 1850년에 4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이 글은 1868년이 되어서야 출판되었지만 원고 완성은 사망 직전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법과 재산권'에 대한 바스티야의 논문은 약 170년 전 당시 프랑스의 사회상을 보여준다. 상당한 시간차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스티야의 주장이 2020년을 살고 있는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주는 통절함은 경이의 차원을 넘어 전율과 슬픔까지 느끼게 한다.

바스티아의 글이 복잡한 감정을 유발시키며 격하게 다가오는 것은 시공간을 초월해서 2020년 우리 대한민국의 현실을 적확하게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려 두 세기 전에 살다간 외국 사람의 글이 어쩌면 이렇게도 대한민국의 민낯을 족집개로 집어내듯 까발릴 수 있는지 놀라울 뿐이다. 학문의 위대함과 진리는 영원하다는 경외감마저 엄습한다. 역사의 반복이 괜한 말이 아니다.

하이에크는 자유주의 사상을 담은 불후의 저서 '노예의 길' 서문에서 역사적으로 유사한 혹은 동일한 사건이 시간, 장소를 달리해서 반복적으로 일어난다고 언급했다. 그는 1899년 오스트리아 시민으로 태어나 전체주의 나치의 발흥과 집권을 직접 목격했고, 1938년에는 나치를 피해 영국으로 망명했다. 그러나 하이에크는 독일에서 경험했던 전체주의 세력의 준동이 영국에서도 맹위를 떨치는 것을 또다시 목격하게 된다. 이후 그는 전체주의에 뿌리를 둔 사회주의의 생명력이 얼마나 끈질기게 인류를 지배해 왔는지, 사회주의가 얼마나 허무맹랑한 주장이며 자유주의야말로 인간의 존엄성과 경제적 풍요를 보장하는 이념임을 줄기차게 주장하며 학문적으로 외로운 길을 걸었다. 그의 주장은 구소련이 붕괴하면서 실현되었다. 그때 하이에크는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거봐 내 말이 맞잖아"

역사의 반복이 대한민국에서도 유령처럼 배회하고 있다. 하이에크가 자신의 말이 맞다고 외친지 한 세대가 지나간다. 대한민국은 하이에크가 80년 전 영국에서 경험했던 기괴한 역사의 반복을 되살리고 있다. 무려 170년 전 바스티야가 절규했던 프랑스의 암울했던 오류가 대한민국에서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대한민국 사람들은 뭔가 근본적인 결함이 있어 역사로부터 배우고 그 교훈을 실천할 수 없는 사람들처럼 보인다. 2020년을 사는 우리 대한민국이 무려 두 세기 전의 혼미했던 프랑스의 과오를 그대로 답습하다니 그저 망연자실 할 뿐이다.

이는 명백한 역사의 후퇴다. 문재인 정부는 과거로부터의 배움, 전통적 가치를 인정하면서 나름의 독창적이고 자주적인 국정을 펼치는 것이 아니다. 엉터리 이념으로 오염되었던 170년 전 프랑스를 이 땅에 100% 그대로 재현시키고 있을 뿐이다. 몽상적 사회주의자들이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말도 안되는 엉터리 정책을 남발하며 프랑스와 전 국민을 상대로 무모한 실험을 하던 혼란과 야만의 시대로 대한민국을 회귀시켰다. 1789년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면서 시작된 프랑스 혁명의 끝자락 어딘가로 대한민국을 후퇴시켰다. 비록 의도는 선할지 몰라도 원칙이 사악하다. 경제적 자유를 훼손하는 무분별한 국가의 간섭은 공산주의의 전주곡이다. 공산화는 북한에 굴복할 때만 닥칠 재앙이 아니다. 무지와 탐욕이 우리 스스로 그 길을 선택하도록 강요할 수도 있다. 자유를 버린 국가가 갈 길은 가난을 골고루 나눠가지는 궁핍의 길 뿐이다.

이제 대한민국의 자랑스런 성취와 명예는 사라지고 있다. 남은 것은 서구사회가 겪었던 불명예스런 시행착오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반복하는 어리석음과 혼돈으로 뒤덮인 어둠의 시대가 불러올 신음 뿐이다. 현실을 바르게 인식할 수 없는 대한민국 국민은 자신들이 왜 어렵고 힘들게 살아야하는지 이유조차도 모른채 절망과 피로에 절은 몸을 끌며 하루하루를 연명해 갈 것이다. 우리가, 대한민국이 겪고 있는 시련의 본질을 깨닫는 것이 난국타파의 지름길이다. 그것만이 희망이다.

대한민국은 국가의 통치자를 국민이 선출하는 민주정치의 시대에 걸맞게 지혜롭고 성숙한 유권자로서의 자질을 개발하고 향상시키려는 노력을 게을리한 응분의 업보를 받아야 한다. 대중이 정치의 전면에 나서고 다수의 힘으로 정파적 이득 추구의 수단으로 민주주의를 맹종하는 국가라면 절대로 피할 수 없는 외통수의 길이다. 민주주의는 절대선이 아니다. 민주주의라는 양날의 칼을 지고도 안전하게 목적지까지 갈 수 있는 유권자의 의식이 미흡했다. 허구헛날 거짓과 선동을 일삼는 엉터리 권력집단에게 대한민국을 저당잡히고 우리는 현재의 삶과 미래세대의 희망까지 포획당하는 어리석은 역사의 전철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대한민국 국민은 프랑스인들이 밟았던 암흑의 길을 무려180년이 지난 2020년 오늘 그때 그 모습 그대로 걷고 있다. 바스티아도 하이에크도 대한민국의 오늘을 보면서 '역사의 반복'과 '역사의 저주'를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창자가 끊어질만큼 고통스럽고 통탄스런 일이다. 대한민국을 구원할 진리는 아득히 먼 곳에서 꺼져가는 등불처럼 위태롭게 깜박거리고, 거짓과 선동은 서치라이트처럼 눈부시다. 가슴 아픈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그런데....칠흑 같은 어둠은 동트는 새벽과 동시에 존재한다더니 꺼져버린듯하던 등불이 살아나고 있다. 절망 속에 희망이 자라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깨어나는 소리가 들린다. 국민적 각성이 뒤따르고 있다. 대한민국은 그렇게 쉽게 무너질 나라가 아니다.

이자성 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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