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핵은 자유한국당의 죄(sin)이고, 동시에 언론과 종북 단체의 범죄(crime)이기도 하다.
‘보수 통합을 위해 탄핵을 덮고 가자.’는 건 나의 죄를 면하기 위하여 다른 범죄자를 용인해주자는 격
한국당이 국민에게 속죄하고 탄핵에 대한 입장을 표명하는 것이 정치적으로 오히려 유리하지 않을까?

윤용준 美조지메이슨대 교수

“만약 신이 없다면 인간이 못할 짓은 없다.”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 나오는 말이다. 그러나 인간은 감당할 수 없는 잘못을 저질렀을 때, 죄의식에서 헤어 나오기 힘든, 정신적 공황(panic)에 빠지는 것도 사실이다. 사이코패스(psychopath)가 아니라도, 그러고도 인간은 어떻게든 살아가기 마련이다. 자기 합리화가 한 방법이다. 또 한 길은 기독교의 속죄(atonement)이다. 하야시 교코(林京子)의 소설에서 그리고 박근혜 탄핵에서 ‘속죄’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소설 얘기부터 하자.

하야시 교코(1930-2017)는 1945년 8월 나가사키 원폭의 생존자이다. 그녀가 15세 때 일이고, 30대에 들어서 소설을 쓰기 시작하여 일본의 아쿠타가와 문학상을 받은 바 있다. 그녀의 중편소설 『두 개의 묘비』에 등장하는 ‘와카코’와 ‘요코’는 나가사키 북쪽에서 오렌지 농사를 짓는 시골 마을의 여고생이다. 전쟁으로 동원되어 나가사키의 군수공장에서 일을 하다 원폭을 맞는다. 사람들은 무너지는 건물, 화재의 아비규환 속에서 서로 살려고 밀치고 달린다. 와카코와 요코는 다행히 빠져나와 고향을 향하여 걷기 시작한다. 걸어서 2-3일은 걸리는 거리이다. 나가사키 북쪽의 산을 넘으며 거기서 밤을 새운다. 요코는 등에 파편이 박혀 심한 상처를 입고 상처에서 구더기가 끓는다. 와카코는 구더기가 자기에게로 떨어지는 것을 보고 질겁을 한다. 구더기를 발로 밟는 와카코를 보고 요코는 그러지 말라고 한다. 자기 몸의 일부라고 한다. 요코는 이미 정상적인 정신 상태가 아니었다. 와카코는 죽음의 공포에 떨며 도망친다. 요코는 여기서 죽는다.

며칠을 걸어서 마을에 도착한다. 요코의 행방을 묻는 요코의 어머니, 그리고 마을에서는 루머가 돈다 – 와카코가 요코를 버렸다는. 몸도 마음도 온전치 못한 딸을 간호하는 어머니는 적극 와카코를 변호한다. 요코의 49재가 지나고 와카코도 원자병으로 죽는다. 이 49일 동안 와카코는 엄청난 정신적 고통에 시달린다. 누워 있는 방 천정의 무늬가 수백 개의 요코가 되어 자기를 바라본다. 아무리 돌아누워도 피할 수 없다. 와카코의 어머니는 와카코를 요코 옆에 묻고 두 묘비를 나란히 세운다.

우리들 동양인에게는 속죄(atonement)를 구할 신(절대자)을 가지지 못한 비극이 있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와카코는 자기가 생존한 것에 죄의식을 느끼고 자기의 죽음으로 속죄된다고 믿는다. 북미와 서유럽에서 볼 수 있는 속죄의 개념은 기독교에 뿌리를 두고 있다. 죄를 짓는 것은 신에게 빚을 지는 것이고 예수를 통해서 빚을 갚는다, 즉 속죄된다고 믿는다. 나가사키는 일본서 기독교의 영향이 가장 깊은 곳이다. 이 소설의 저자가 나가사키 출신인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본래 Atonement란 말은 서양 중세의 법률용어로 빚을 갚는다는 말이고 attorney(변호사)와 어원이 같다.

한국에서의 박근혜 탄핵은 셰익스피어의 비극같은 사건이다. 조갑제, 그리고 김평우 채명성 등 탄핵 재판에 참여했던 변호인들의 책이 계속 나오고, 이에 의하면 탄핵 전후의 정치변란은 아직 해결되지 못한 살아 있는 문제이다. 탄핵은 자유한국당의 죄(sin)이고, 동시에 언론과 종북 단체의 범죄(crime)이기도 하다. 이것이 문제의 핵심이 아닐까? 그렇다면 ‘보수 통합을 위해 탄핵을 덮고 가자.’는 건 나의 죄를 면하기 위하여 다른 범죄자를 용인해주자는 격이다. 한국당이 국민에게 속죄하고 탄핵에 대한 입장을 표명하는 것이 정치적으로 오히려 유리하지 않을까?

물론 정치인 개개인의 정치적 이익을 고려한다면 보통의 정치에서는 이루기 어려운 타협이 ‘속죄’일 것이다. 그러나 지금 한국은 난세이지 결코 보통의 정치 상황이 아니다. 거짓과 공갈에 찌든 국민들을 종교적인 진실성으로 보호해야 할 때이다. 보호한 만큼 표를 받는 것이 아닐까?

윤용준(미국 조지메이슨대 경제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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