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호명 ‘D’, 독일계 유대인 출신 ‘드레퓌스’ 반역혐의로 종신형 선고한 佛 군사법원...‘진범’ 잡히자 12년만에 결과 뒤엎어
독일 나치 선전장관 괴벨스, “선동은 문장 한 줄로도 가능...반박에는 수십 장의 문서와 증거를 필요로 해”...‘가짜뉴스’ 위험한 이유
정치적 타겟 돼 억울함과 명예훼손 겪은 사람들의 억울함은 누가 풀어주나?...특히 ‘무고죄’ 엄중 처벌해야

황인희 객원 칼럼니스트

19세기, 전쟁을 치른 프랑스와 독일은 서로 사이가 틀어질 대로 틀어져 있었다. 특히 전쟁에 패하고 배상금까지 독일에게 간신히 물어준 프랑스의 반(反) 독일 감정은 높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청소부가 문서 하나를 발견했다. 군사 기밀이 담긴 문서였다. 문건에서 발견된 암호명 ‘D’. 이내 사람들은 프랑스 육군의 포병 대위였던 알프레드 드레퓌스를 범인으로 지목했다. 그는 유대인이었고 독일계 프랑스 인이었다. 더구나 성의 이니셜은 ‘D’였다.

반유대주의와 반독일주의가 팽배한 당시 분위기에서 드레퓌스는 졸지에 군사 기밀을 팔아넘긴 반역자가 되어버렸다. 군사재판에 회부되었지만 변호인을 부르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고 재판의 내용도 ‘국가기밀’이라는 명목 아래 공개되지 않았다.

재판 과정에서, 서명이 드레퓌스의 글씨체와 다르다는 이의가 제기되었다. 그러나 재판부는 그가 글씨체를 바꾸어 썼다며 이의를 묵살해버렸다. 결국 1894년 12월22일 프랑스 육군 군법회의는 그에게 반역죄로 유죄 판결을 내렸고 종신형을 선고하였다. 강제로 불명예 전역된 후 그의 치욕적인 군적 박탈식이 군중이 모인 가운데 공개적으로 거행되었다. 드레퓌스는 끝까지 자신의 무죄를 외쳤지만 군중은 “유대인을 죽여라”, “독일 놈을 몰아내라”라고 외칠 뿐 그의 호소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는 적도 근처에 있는, 프랑스령 기아나 앞바다의 악마섬으로 유배당하였다. 영화 ‘빠삐용’에 나오는 바로 그 지옥 같은 섬이다. 누명을 쓴 드레퓌스가 얼마나 억울하고 고통스러웠을지는 ‘빠삐용’을 생각하면 상상해낼 수 있다.

이후 소령인 페르디낭 에스테라지가 진범임이 밝혀졌다. 결국 12년만인 1906년 6월에 드레퓌스를 재판한 상고법원은 지금까지의 그에 대한 모든 판결 내용을 뒤집었다. 7월22일 그는 공식적으로 복권되었고 제1차 세계대전 때까지 군 복무를 계속하다가 전쟁이 끝나자 중령으로 예편했다.

21세기의 대한민국에도 드레퓌스 정도의 극심한 억울함을 겪는 사람이 숱하다. 이른바 적폐청산이라 하여 자신들의 코드에 맞지 않는 사람들을 잡아가두고 해고하고 마구잡이로 고소하며 지어낸 말로 망신 주는 일이 모래알만큼이나 흔해졌기 때문이다. 그런 일이 흔하다 하여 일을 당하는 개개인의 충격이 작아질 수는 없다. 일생 힘들게 쌓아온 명예가 한 순간에 속절없이 무너져버리기도 하고 가정이 파괴되기도 한다. 때로 억울함과 충격을 못 이겨 목숨을 끊는 극단적인 선택까지 한다.

법 없이 살 수 있는 선량한 사람들로 세상이 채워지기 전까지는 강력한 법이 필요하다.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이다.(사진=서울중앙지방법원)

예전엔 자신만 결백하면 법에 호소하여 시비를 제대로 가릴 수 있었다. 그런데 요즘에는 그 ‘법’도 ‘법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코드에 맞춰 멋대로 춤을 추는 느낌이다. 그러니 찌르면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버린 것이다.

대충 수순은 이런 것이다. 제거할, 혹은 괴롭힐 목표가 정해지면 가짜뉴스를 터트린다. 그러면 가해자와 코드가 맞는 언론들이 그 가짜뉴스를 받아 대서특필한다. 재판이라도 벌어지면 지난한 세월을 겪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죄가 있으면 대가를 치르겠지만 죄가 없어도 시달림을 당할대로 당한 후에 간신히 ‘죄 없음’이 밝혀진다.

그런데 무혐의 등의 결백을 알리는 뉴스는 어딘가 귀퉁이에 조그맣게 실리거나 아예 뉴스거리가 되지도 않는다. 게다가 인터넷상에는 예전 뉴스가 계속 살아남아 여전히 그 사람이 중범죄자이거나 파렴치한 인간이라 대서특필하며 떠돌아다닌다. 결백이 세상에 알려진다 해도 한번 깨진 항아리처럼 좀처럼 원상으로 돌아가기는 어렵다.

나치의 선전장관 요제프 괴벨스가 말했다.

“선동은 문장 한 줄로도 가능하지만 그것을 반박하려면 수십 장의 문서와 증거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것을 반박할 때는 사람들은 이미 선동당해 있다.”

한번 가짜뉴스에 “이럴 수가?”하고 놀란 사람들은 상황이 끝난 후에도 여전히 그 뉴스를 믿거나 아니면 “아니 땐 굴뚝에 연기날까?”하며 의혹을 거두지 않는다. 그러니 한 번 걸리면 피해자가 어떤 대처를 하든 이미 가해자가 노리는 바는 다 성취되는 셈이다.

최근 발간된, 김장겸 전 MBC 사장의 증언 《정권의 품에 안긴 노영(勞營) 방송 MBC》(김장겸, 서울: 펜앤북스, 2019)에는 자신과 주변 사람들이 겪었던 악의적 모함과 거짓 폭로의 피해가 다양하게 소개되어 있다. 그 중 하나는 가해자가 현직 국회의원이었다. 김장겸 전 MBC 사장이 성추행 전력이 있다고 허위 폭로한 것이다. 면책 특권을 이용하여 ‘아님 말고’식의 폭로 공세를 했던 국회의원은, 여비서가 잘못된 자료를 가져다준 것을 확인하지 못했고, 고의성이 없었다며 나중에 사과문을 올렸다. 하지만 그 사과문이 피해자의 명예회복에 큰 도움이 되는지는 미지수이다.

역시 이 책에 실려 있는 또 하나의 예는, 자신들과 반대의 입장에 서 있는 방송문화진흥회 이사를 공격한 가짜뉴스였다. 방문진 이사가 미국에서 전 MBC 미주 법인 사장으로부터 여성 도우미 접대를 받았다는 뉴스였다. 그 이사는 해당일인 2014년 4월 4일 출국조차 한 적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출입국 사실 증명원’을 공개했다. 이런 사안이면 뉴스 생산자가 회사든 언론이든 본인에게 확인 절차를 거쳐야 하는 것이 상식이다. 사전에 확인하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책의 저자의 말대로 처음부터 진실 여부 자체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 그저 ‘아님 말고’ 식의 망신주기가 목적이었을 테니 말이다.

또 이 책에서 김장겸 전 사장은, 사장직에서 해임된 뒤에도 고소, 고발이 계속되었다고 했다. 정확히 몇 건인지 파악하지 못할 정도인데, 잊을 만하면 ‘증거 불충분’ ‘공소권 없음’ ‘무혐의’ 등의 처분 결과 통보서가 이어지고 있다고 했다. 당하는 사람에게는 그동안 엄청난 고통을 주었을 것이고 그의 명예에 커다란 흠집을 냈을 고소, 고발도 이렇게 ‘통보서’ 하나로 간단하게 끝난다. 그래서 ‘죄가 없음’은 뉴스거리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죽어도 거짓말하지 마시오. 농담으로라도 거짓말하지 마시오. 꿈에서도 거짓말하지 마시오”라고 청년들에게 당부하였다.

거짓 폭로를 하고 가짜뉴스를 만들며 남을 무고(誣告)한 사람들에 대한 처벌이 가벼워서일까? 요즘 세상에는 말의 무게가 참을 수 없이 가볍다. 우리 민족에게 정신적 등불을 비춰준 도산 안창호 선생은 “죽어도 거짓말을 하지 마시오. 어떤 이는 거짓말이 탄로 나면 농담이었다고 뻔뻔하게 얼버무리기도 하는데 농담으로라도 거짓말을 하지 마시오. 꿈에서도 거짓말을 하지 마시오”라고 청년들에게 당부하였다. 거짓말이 망국에 이르게 할 ‘엄청난 나쁜 짓’임을 늘 강조했다. 그런데 요즘은 ‘말의 책임’이라는 걸 가정에서, 학교에서, 사회에서 도무지 가르치지 않는 것 같다. 거짓말이 들통 나도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 “믿거나 말거나, 아니면 말고…” 식의 가짜뉴스나 거짓 폭로, 악성 댓글은 정치적인 문제에만 국한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것들 때문에 자살하는 연예인도 크게 늘고 있다.

정치적 타겟이 되어서 혹은 그 외의 다른 목적 때문에, 아니면 단순한 장난으로 억울함을 겪고 명예훼손을 겪는 그 많은 사람의 억울함은 누가 풀어주고 그들이 평생을 쌓아온 명예는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까? 단순히 ‘죄가 없음’이 밝혀지는 것은 명예회복에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 내가 생각하는 가장 큰 명예회복은, 가해자가 그 건에 대해 확실하게 책임을 지고 응징을 당하는 것이다.

가짜뉴스를 막는 가장 확실한 방법도 당연히 그 생산자를 확실하게 처벌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가짜 정보를 제공하여 소송이 시작되었는데 그 정보가 거짓이라는 것이 판명되면 혹은 무죄나 무혐의 판결이 났다면 가짜 정보를 제공한 상대에게는 자동으로 무고죄가 적용되어야 한다. “아니면 말고” 식이 절대 아니라, 진실이 아니면 내가 죽는다는 식으로 책임감을 가지고 말하고 행동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앞에서 언급한, 김장겸 전 MBC 사장에 대해 거짓 폭로했던 그 의원은 민사소송 결과 대법원에서 500만 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받았다. 물론 그가 끼친 피해는 500만 원과 사과문 쪼가리에 비하면 엄청나게 크다. 그가 피해자에게 고통을 준 것 못지않게 커다란 잘못은, 국회의원이라는 위치에 있는 사람으로서 더 엄중해야 할 말의 무게와 가치를 땅에 떨어뜨린 것이다. 그 정도면 의원직을 걸었어야 한다. 그런 각오로 행동한다는 것을 보여줘야 여비서도 ‘실수’를 하지 않는다.

국회의원의 거짓말은, 그 위치에 있는 사람으로서 더 엄중해야 할 말의 무게와 가치를 땅에 떨어뜨리는 것이기에 더 나쁜 짓이다.(사진=대한민국 국회)

더러 강단 있는 사람들은 가짜뉴스 생산자나 악성 댓글러를 끝까지 찾아내 응징하고 있다. 추적해보면 가해자 중에는 아주 사소한 장난으로 생각하고 시작한 ‘머저리’도 많다. 개구리가 사는 연못에 돌을 던지면서 자기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인간들이다. 그런 부류일수록 더욱 강력한 응징이 필요하다. 또 말실수가 얼마나 엄중한 것인지, 자신의 실수가 절대 단순한 실수일 수 없다는 것도 가르쳐야 한다. 그래야 그런 짓을 절대 해서는 안 된다는 일생일대의 교훈을 얻을 테니 말이다. 또 어리다고 쉽게 용서해주면 안 된다. 어릴수록 두고두고 죗값을 치르게 해야 그 안에서 자라고 있는 ‘악(惡)’의 싹을 일찌감치 제거할 수 있다. 어리다고 다 그런 짓을 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장난으로 한 말에도 엄중한 책임을 져야 하다니 세상이 너무 각박해지는 것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다. 또 그런 것까지 법의 힘의 빌리느냐고 말할 수도 있겠다. 물론 세상 모든 일을 법으로 다스릴 수는 없다. 그러나 무조건 법이 없다고 평화롭고 이상적인 사회는 아니다.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은 선량한 사람이다. 진짜 법 없이 살 수 있는 선량한 사람들로 세상이 채워지기 전까지는 강력한 법이 필요하다. 법 없이 살 수 있는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이다. 책임 있는 말이 지배하는 세상, 법이 없어도 선량한 사람 모두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당분간 강력한 법이 필요해 보인다. 특히 무고죄를 엄중히 처벌하는 법이 말이다.

앞에 소개한 드레퓌스 사건에서는 진범이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드레퓌스의 명예가 회복되는 데 시간이 걸렸다. 은폐하려는 군부와 진실을 밝히려는 지식인들의 싸움이 계속되었고 급기야 프랑스를 분열시키는 사회 문제로 커지기도 했다. 이 문제는 이미 드레퓌스 개인적인 문제를 넘어선 것이다.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특히 에밀 졸라, 마르셀 푸르스트 등 프랑스의 지식인들이 적극적으로 나섰다. 불의를 덮는 데 눈감는 것을 ‘지식인의 양심’으로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언론에 공개될 정도의 억울한 사건에 대한 명예회복은 이미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당사자끼리 투덕거리다 끝난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사건으로 펼쳐졌다면, 그래서 사회구성원들의 평가에 의해 명예에 흠집을 입었다면 그 회복에도 사회가 관여해야 한다. 우리나라에도 ‘지식인의 양심’이란 게 남아 있다면 특히 지식인들이 이 문제에 적극 나서야 한다. ‘지식인’이니까.

죄 없음이 밝혀졌어도 ‘그들’은 아직도 억울하다. 그들은, 원래부터 죄가 없었는데도 그런 엄청난 일을 당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명예회복을 위해 사회 구성원인 ‘우리’가, 혹은 무심코 명예훼손에 동조했을지도 모르는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한다. 명예는 철저히 사회적 산물이기 때문이다.

황인희 객원 칼럼니스트 (다상량인문학당 대표 · 역사칼럼니스트) / 사진 윤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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