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9년 12월14일, ‘낙원’ 부푼 꿈 안은 재일교포 975명 실은 '귀국선’, 日 니가타港에서 첫 출항
25년 간 총 10만여명의 재일교포와 배우자들이 北으로 갔다
“의식주 걱정이 없는 곳”...일본 내 북한 괴뢰 단체 ‘조총련’ 선전·선동에 속아 ‘북한行’ 택해
北 청진항 발 내린 재일교포들이 마주한 현실은 ‘생지옥’...최하 계급인 ‘동요계층’으로 분류돼 모진 가난과 박해에 시달려
民團, “당시 우리더러 ‘인도주의 사업을 방해하는 반동’이라 했지만 현실은 어땠는가?”...‘조총련’ 뿐 아니라 日 정부, 언론, 국제적십자연맹에 책임 추궁
‘거주 이전의 자유’ 내세운 北, 일본에 남은 가족들과 왕래조차 못 하게 해...南北 이산가족만 있는 것 아냐
‘대한민국 근대사’ 조명 받지 못한 北送 재일교포 문제, ‘귀국선’ 첫 출항 60주년 맞아 펜앤드마이크 특별기획

재일교포들을 실은 소련 여객선 크레리옹호가 일본 니가타항(港)을 출항해 북한 청진항으로 향하고 있다.(사진=일본 정부 <사진공보> 1960년 1월15일 호)

‘부웅—.’

1959년 12월14일. 겨울이면 새하얀 눈으로 뒤덮여 버리는 ‘설국’(雪國), 일본 니가타(新潟)의 항구에는 뱃고동이 울려 퍼졌다.

북한 당국이 재일교포들을 위해 소위 ‘귀국선’(歸國船)으로 마련한 소련적(籍) 여객선 크레리옹호(號) 난간에 걸린 팻말에는 큼지막한 글씨로 ‘재일 조선 공민들의 귀국을 열렬히 환영한다’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한겨울 동해(東海)의 찬 바람을 맞으며 부둣가에서 승선만을 기다리던 975명의 재일교포들은 새로운 사회주의 조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돌아간다는 환희와 즐거움으로 들떠 있었다. 부둣가 한 켠에는 취주악단이 쿵짝거리며 이들의 흥을 북돋았다.

한반도 출신이면서 일본 문화의 영향 아래 있었고, 동시에 미국식 자본주의의 생활 양식에 익숙해 있었던 이들은 공교롭게도 ‘대한민국’이 아닌 ‘북한’을 조국으로 택했다. ‘북한으로 보내졌다’는 의미에서 이들에게는 ‘북송’(北送)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2019년은 ‘북송’ 동포들을 실은 첫 ‘귀국선’이 니가타항(港)을 떠나 북한 청진항으로 향한 지 꼭 60주년이 되는 해다. 독특한 정체성 탓인지 한국 근대사의 조명을 제대로 받지 못한 ‘북송’(北送) 재일교포들은 과연 그들이 기대했던 바와 같이 ‘사회주의 낙원’에서 행복한 삶을 살았을까?

그곳에 ‘낙원’(樂園)은 없었다

북한 청진항의 위치.(지도=구글 지도)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꼈습니다.”

지난 11월29일, 59년만에 니가타항을 찾은 가와사키 에이코(77) 씨는 한 언론 인터뷰에서 ‘귀국선’을 타고 북한 청진항에 입항하던 날을 이렇게 회상했다. 그는 고등학교 3학년이 되던 1960년 ‘귀국선’에 몸을 실었다.

잿빛으로 뒤덮인 청진항 일대에서는 고층 건물이라고는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 ‘동포’들의 귀국을 환영한다고 마중 나온 이들 가운데는 쌀쌀한 날씨였음에도 불구하고 옷 하나 제대로 입은 이가 없었던 사실을 가와사키 씨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조선학교 학생들은 단 한 명도 내리지 말고 그 배를 타고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라.”

가와사키 씨는 ‘귀국선’이 청진항 부두에 접안할 무렵 선착장에서 북한 군인들이 알아듣지 못 하게 일본어로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던 학교 선배의 모습을 아직도 머릿속에서 지울 수가 없다. 자신보다 먼저 ‘귀국선’에 올라 북한에 도착한 그 선배는 이제 막 북한 땅을 밟은 이들에게 “내리지 말라”고 외쳤다고 한다.

일본 니가타 적십자센터에 붙은 공고문.(사진=재일본대한민국민단)

지난 1987년 북한에서 결혼해 1남4녀를 둔 가와사키 씨는 남편이 사망하고 1990년대 ‘고난의 행군’ 시기를 경험하며 탈북을 결심, 2000년대 초반 딸 하나만 데리고 사선(死線)을 넘었다. 그가 ‘가와사키’라는 이름을 사용하며 한국명을 밝히지 못 하는 이유는 아직 북한에 남아 있는 가족들의 안위를 걱정해서라고 밝혔다.

“북송선을 탔던 재일교포 9만명에게 시간을 되돌려 다시 물어본다면 단 한 명도 북한에 가지 않겠다고 할 것입니다.”

가와사키 씨는 ‘귀국선’을 타기 전 국제적십자연맹에서 나온 스위스 출신 여성 심사관이 ‘본인 의사로 가느냐’는 형식적인 인터뷰를 한 것이 ‘북한행(行)’의 처음이자 마지막 관문이었다고 말한다. 그는 그때 제대로 심사가 이뤄졌다면 많은 사람들의 운명이 바뀌었을 것이라며 애석히 여겼다.

그는 혹시라도 자신의 신변에 이상이 생길 경우를 대비해 지난 2006년 일부러 일본 국적을 취득하고 ‘북송 사업’ 피해자들을 위한 운동을 벌이고 있다.

그들은 왜 북한으로 보내졌나: 재일교포들의 사정

데라오 고로의 저서 《38도선의 북쪽》(1959) 표지.(사진=아마존 재팬 도서 정보)
데라오 고로의 저서 《38도선의 북쪽》(1959) 표지.(사진=아마존재팬 도서 정보)

‘지긋지긋한 가난은 언제면 끝이 날까?’

6.25전쟁이 끝난 뒤인 1950년대 한국의 정치·경제 현실은 절망스러웠다. 반면 북한은 소련 등 공산권 국가로부터 막대한 원조를 받고 있었기에 사정이 나았다.

한편, 같은 시기 재일교포 사회는 상황이 복잡했다. 일제강점기 시절 학업, 취업 등의 이유로 일본에 건너온 이들부터 6.25전쟁이 벌어진 가운데 ‘공산주의자’로 찍혀 도망쳐 밀항한 경우까지, 각기 다양한 이유로 많은 이들이 일본으로 건너와 정착해 살고 있었다. 특이한 점은 그 대부분이 38선 이남 출신이었다는 것이다.

재일교포 가운데에는 더러 경제적으로 성공한 이들도 나왔지만 대부분은 가난한 삶에 찌들어 있었다. 거기에 ‘조선출신’이라는 낙인까지 찍혀 일본 사회에서 차별을 받아온 터였다. 이런 가운데 1956년 일본 정부가 생활보호비를 삭감한 데 이어 1957년과 1958년 사이 일본을 엄습한 불황(不況)으로 인해 재일교포들이 받은 타격은 만만치 않았다.

1959년 4월 출판된 데라오 고로의 《38도선의 북쪽》(38度線の北)은 궁핍한 나날을 이어가던 재일교포들의 눈을 번뜩이게 했다. 그의 저서에서 데라오는 “일본이 동양 제일의 공업국을 자부할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올해 아니면 내년까지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 “소련은 미국을 넘어설 것이고 중국은 영국을 넘어설 것이며 조선은 그 북반부만으로도 일본을 넘어선다고 한다면 세계는 어떻게 바뀔까”, “아무리 늦어도 1963년이나 1964년에는 남과 북의 통일은 어떤 형태로든지 이뤄질 것으로 예상된다” 등의 표현으로 북한을 찬양했다.

이런 와중에 재일교포 사회에 들려온 북한의 ‘천리마 운동’ 소식은 재일교포들이 ‘사회주의 지상 낙원’ 북한에 대한 환상을 품게 하는 데에 기폭재가 됐다.

‘우리는 북한으로 간다.’

그들은 왜 북한으로 보내졌나: 김일성의 사정

일본에서 북한 입장을 대변하는 꼭두각시 단체인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는 재일교포들에게 북한을 ‘지상 낙원’으로 소개하며 ‘북한행’을 꼬드겼다.(사진=구글 이미지 검색) 

‘재일교포들을 북한으로 데려오자.’

북한의 수괴 김일성(金日成)은 한 가지 꾀를 냈다. 재일교포들을 북한을 위한 기술원이자 자금원으로 활용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조선학교’를 건립하는 등 재일교포 사회를 적극적으로 후원해 오던 차였다.

자유주의 시장경제와 사회주의 계획경제 사이의 극심한 체제 경쟁의 한가운데서 시장경제 체제에 속해 있던 사람들을 대거 사회주의 세계로 끌고 들어올 수만 있다면 이보다 더 효과적인 체제 선전은 있을 수 없다고 김일성은 판단했다.

북한이 누릴 수 있는 이점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일본과의 국교정상화를 염두에 두고 있던 김일성은 일본과의 대화 채널을 확보하고 싶어했다. ‘국교정상화’를 추진하던 ‘남조선 정부’를 견제할 목적도 있었다.

이에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곧 ‘조총련’은 ‘가난’이라는 틈을 비집고 재일교포 사회로 들어가 북한을 ‘지상 낙원’, ‘의식주 걱정이 없는 곳’이라며 선전 활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물론 ‘조총련’의 배후에는 김일성이 있었다. ‘조총련’ 자체가 북한 당국이 자신들의 대변자 역할을 맡기기 위해 1955년 일본 현지에 세운 단체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달콤한 속삭임은 궁핍한 삶에 허덕이고 있던 재일교포 사회를 뒤흔들어 놓기에는 충분한 것이었다.

일본 측에 먼저 접근한 것은 북한이었다.

‘우리가 비용을 부담할 테니 재일조선인들을 북한으로 돌려보내 주시오.’

그들은 왜 북한으로 보내졌나: 일본의 사정

‘북송 사업’이 논의되고 있던 1955년에서 1959년 사이 일본 자민당 소속 정치인들. 상단 좌측으로부터 시계 방향으로 하토야마 이치로, 이시바시 단잔, 고이즈미 준야, 기시 노부스케.(사진=구글 이미지 검색)

‘골치 아픈 재일조선인들을 북한에 처분해 버리자.’

일본의 속사정은 다음과 같았다.

당시 일본은 재일교포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재일교포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공산주의에 친화적인 태도를 보인 데다가 ‘승전국 국민’임을 내세우며 일본인들보다 더 많은 권리를 누려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패전 직후 한국과 마찬가지로 사정이 여의치 않은 상황에서 재일교포들을 부양해야 하는 부담을 떠맡고 있던 일본으로서는 여간한 짐이 아닐 수 없었다. 그들의 높은 범죄율도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됐다.

일본 정부는 재일교포들이 한국으로 되돌아가기를 바랐지만 6.25전쟁이 남긴 상처를 복구하는 데에 여념이 없던 이승만 정부로서는 재일교포들을 받아들일 여력이 전혀 없었다.

많은 재일교포들이 ‘조총련’의 감언이설에 넘어가고 있을 때, 북한 측이 재일교포들의 ‘순차적 북송’을 제안해 왔다. ‘북송 사업’에 드는 비용은 전부 북한이 부담한다는 내용이었다.

‘옳거니’—일본 정부는 쾌재를 부르며 북한의 제안을 흔쾌히 수락했다.

각자 추구하고자 하는 바는 달랐지만 북한이 제안한 ‘북송 사업’에 일본 정치계는 좌우를 막론 쌍수 들고 환영 의사를 표했다. 재일교포들의 ‘북송’을 위해 결성된 ‘재일조선인 귀국협력회’에는 일본 사회당, 일본 공산당과 같은 좌익 계열 정당에 속한 국회의원들뿐만 아니라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前) 일본 총리의 부친인 고이즈미 준야, 하토야마 유키오 전 일본 총리의 조부인 하토야마 이치로 전 일본 총리 등 자민당 소속의 정치인들도 대거 포함됐다.

우리 정부는 크게 반발했다. 진행중이던 한일 간 국교정상화 협상도 일시 중단됐다. 그러나 국제적십자연맹을 등에 업은 북한과 이를 추종하는 일본은 ‘거주 이전의 자유’를 전면에 내세워 ‘북송 사업’을 그대로 추진했다.

배반당한 ‘지상 낙원’의 꿈

이렇게 북한과 일본 사이의 이해관계가 서로 맞아떨어지면서 재일교포들을 북한으로 보내는 사업(‘북송 사업’)이 시작됐다. 지난 1959년 12월14일 첫 ‘귀국선’이 니가타항을 떠난 이래 1984년 ‘북송 사업’이 종료될 때까지 180여차례에 걸쳐 총 9만3340명의 재일교포와 그들의 배우자 및 피보호자 6839명이 니가타항을 통해 북한으로 보내졌다. 모두 합하면 10만명이 넘는 규모다. ‘북송 사업’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매주 1000명 규모의 재일교포들이 ‘부푼 꿈’을 안고 니가타항을 찾았다.

“결과적으로는 내가 그들을 ‘지옥’으로 보내는 데 일조한 것이었습니다.”

고지마 하루노리(88) 씨는 회한(悔恨) 가득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귀국선’을 타는 순간 재일교포들에게는 지옥이 시작된 것입니다. 당시에는 모든 일본 신문과 텔레비전이 ‘북한은 지상낙원’이라고 선전해 그 사실을 몰랐습니다.”

1959년 12월14일 이뤄진 첫 북송을 보도한 일본 언론들의 기사.(사진=재일대한민국민단)

실제로 1959년 12월24일 일본 산케이신문(産經新聞)에 실린 ‘북송’ 재일교포 관련 기사는 그로부터 12일 전 니가타항을 떠나 북한에 도착한 재일교포들의 모습을 이렇게 전했다.

맞이하러 나온 사람은 인구 25만명인 이 도시에서 5만명. 손에 손마다 복숭아색 조화(造花), 국기를 들고 항구 일대부터 연도(沿道)에는 환호의 행렬로 가득 채워졌다. (중략) 우리가 보아 감명을 받은 것은 5만명이나 되는 인파가 서로 밀고 밀리는 혼란도 없이 질서 정연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모두가 동포들을 맞는 기쁨으로 넘치고 있었다.

또 재일교포 남편들을 따라 ‘북송’ 길에 오른 일본인 아내들을 취재한 일본 요미우리신문(讀賣新聞)은 1960년 1월9일 <북한으로 돌아간 일본인 아내들>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북한에서 생애 첫 설날을 보낸 모씨의 이야기를 이렇게 보도했다.

남편이 조선인이라서 몇 번이나 직업을 잃은 데다가 자식이 넷이나 딸려 있는 상황에서 이렇게나 만족스러운 설날을 보낸 적이 없고 (중략) 일본에서의 차가운 시선을 떠올리자면 어느 쪽이 ‘진짜 조국’인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순수한 일본인인 나조차도 그렇게 느낄 정도이니, 조선 국적을 가진 아이들이 얼마나 기뻐하는지 모르겠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하지만 고지마 씨의 증언은 이같은 기사들이 전하는 내용과 매우 달랐다. 일본 공산당 소속으로 1959년부터 ‘재일조선인귀국협력회 니가타지부’ 사무국장을 맡아 ‘니가타협력회 뉴스’의 편집장으로 활동하며 ‘귀국선’이 부두를 떠날 때마다 현장을 취재한 그였다.

일본 공산당 소속으로 재일교포들의 ’북송’ 사업에 관여해 온 그는 1960년대 북한을 방문하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사진은 그가 취재한 사진과 기사들을 모아 출판한 책들. 왼쪽에서부터 《사진으로 말하는 북한 귀국 사업의 기록—귀국자 9만3000여명: 최후의 이별》(2017), 《환영의 조국으로 여행을 떠난 사람들—북한 귀국 사업의 기록》(2014).(이미지=아마존재팬 도서 정보)

“북한 체제는 잘 산다고 하는데, 그게 아니었다”며 고지마 씨는 그가 직접 눈으로 본 북한의 실상을 전했다. 그는 “사람의 얼굴은 거짓말을 안 한다, 가서 만나 보니 모두 영양실조 얼굴이었다”는 말도 덧붙였다.

고지마 씨 스스로가 북한에 대한 태도를 바꾼 것은 1960년대 3주간 북한을 방문한 뒤라고 한다. 북한에서 돌아온 그는 ‘귀국협력회’ 활동을 중단하고 일본 공산당 당적도 버려버렸다. 고지마 씨는 1997년부터 13세의 나이로 북한에 납치당한 일본 니가타시(市) 출신 여중생 요코다 메구미 씨의 구출을 위한 사업에 뛰어들었다고 한다.

그는 “‘북송 사업’은 재일교포뿐만 아니라 일본인 처(妻)와 자녀 6000여명도 관련된 일”이라며 “9만명이 지옥에 있는 것을 모른 척하면 아베 총리는 비웃음을 당할 것”이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지상 낙원’을 약속 받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조국으로 삼기로 한 재일교포들이었지만 그들이 북한 땅을 밟았을 때 눈앞에 펼쳐진 것은 ‘생지옥’이었다.

만성적인 물자부족을 겪고 있던 북한이었기에 ‘절반은 왜놈이며 자본주의 맛을 본’ 남조선 출신 ‘북송’ 재일교포들에게 돌아갈 몫은 없었다. 어쩌다가 일본 공산당의 당적을 가졌다는 이유로 ‘핵심계층’에 속하게 돼 신분 상승을 이룬 이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동요계층’으로 분리돼, 일본에서 겪은 ‘민족차별’은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심한 ‘계급차별’을 받았다. 북한 사회에 불만을 가진 이들은 ‘강제수용소’로 보내졌으며 일부는 소식이 끊겨버렸다.

실상을 안 이들 가운데에는 용케 북한을 탈출하는 데에 성공한 ‘재일교포’ 탈북민들도 등장했다. ‘출신성분’이 중요한 북한 사회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니가타항을 떠날 때만 하더라도 자신들이 받게 될 ‘차별’을 그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이윽고 이같은 북한 내부 소식이 그때까지 ‘북한행’을 결심하지 못 하고 있던 재일교포들에게 알려지자 ‘북송 사업’은 점차 활기를 잃어가다가 1984년 종료됐다. 일본이 경제 대국으로 성장하고 한국 경제도 북한을 추월하면서 재일교포들에게 있어 ‘북한행’은 매력 없는 선택지로 전락해 버린 것이었다.

북한과 ‘조총련’의 사기극에 놀아나 ‘북한행’을 택하고 만 재일교포들을 북한은 ‘거주 이전의 자유’를 내세우며 데려갔지만, 일단 북한 땅에 발을 디딘 이상 그들에게 적용될 ‘거주 이전의 자유’와 같은 국제법상의 권리 따위는 없었다.

첫 ‘북송’으로부터 60년…여전히 아픔 겪는 재일교포 사회

북한 당국은 현재까지도 ‘북송’ 재일교포들에게 ‘일시 귀성(歸省)’조차 허락하지 않고 있다. 이 때문에 적지 않은 수의 재일교포들이 ‘이산가족’으로 전락해 60년 간 생이별을 겪고 있다. 1959년 첫 ‘북송’ 당시 20대였던 이가 지금까지 살아있다면 80세는 족히 넘겼을 긴 시간이 흐른 것이다.

사실 이는 북한이 일본 측에 재일조선인 귀국 사업을 제안하며 ‘순차적 북송’을 말했을 때부터 예견된 것이기도 했다. 애초부터 북한의 ‘노림수’는 ‘북송’ 재일교포들을 인질 삼아 일본에 남아 있는 그들의 가족들로부터 무엇이든 최대한 뜯어내는 데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 사이, 일본 정부는 ‘인도주의’라는 허울을 뒤집어씌워 사실상 재일교포 ‘추방사업’의 일환으로 북한이 벌인 ‘북송 사업’을 후원하고 밀어붙였으며, 이를 알면서도 국제적십자연맹은 ‘북송’에 힘을 보탰다면서 일본 정부와 국제적십자연맹에 ‘북송’ 관련 사태의 책임을 묻는 이들도 있었다.

지난 2001년과 2008년에는 각각 ‘북송’ 사업으로 북한에 건너갔다가 북한의 실상을 알고 탈북한 이들에 의해 ‘조총련’을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제기되기도 했지만 일본 법정은 이들 소송을 모두 기각했다.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난 탓에 청구권이 소멸됐다는 취지에서였다.

지난 11월13일 일본 도쿄 소재 YMCA 아시아 청소년센터에서 재일대한민국민단이 개최한 <‘북송’ 60년 역사적 검증 특별 심포지움>의 모습.(사진=재일대한민국민단) 

한편 일본 현지에서 재일한국인들의 권리 보호에 앞장서고 있는 ‘재일대한민국민단’(이하 ‘민단’)은 지난 2003년 ‘탈북자 지원 민단 센터’를 개소하고 ‘북송 사업’의 일환으로 북한으로 보내졌다가 탈북에 성공, 일본으로 돌아온 이들을 지금껏 지원해 오고 있다.

‘북송’ 60주년을 맞아 지난 11월13일 ‘민단’이 개최한 특별 심포지움에서 여건이(呂健二) ‘민단’ 단장은 “당시 기시 노부스케  정권이 ‘북송’을 후원한 것은 순수한 인도주의 차원의 조치가 아니라 ‘귀찮은 존재’들을 내쫓는다는 사회·경제적 측면이 훨씬 더 작용했다”며 일본 정부의 책임을 물었다.

여 단장은 또 “당시 일본 대중 매체들도 ‘지상 낙원’이라며 북한 체제를 찬양하는 한편 ‘민단’에 대해서는 ‘인도주의 사업을 방해하는 반동’, ‘폭력집단’ 등으로 비난했지만 결과적으로 북송된 동포들은 북한에서도 최하층에 속하게 돼 새로운 빈곤과 박해에 직면했다”며 ‘조총련’의 선전·선동에 놀아난 당시 일본 언론들의 행태를 지적하는 동시에 ‘북송’ 동포들의 안부 확인과 그 일본인 가족들의 자유왕래 실현을 촉구했다.

박순종 기자 francis@pennmik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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