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에서 17년 간 ‘미국인 사업가’로 이명박-박근혜 정부와 美정보당국 위해 첩보활동
"김정일, 비밀 집무실에서 사망...김정은, 아버지 측근 거의 다 숙청"
“北, 지하 핵 실험실 1만 개가 넘어...핵무기 10~15개 보유”
‘최고 존엄 모독죄’ 등으로 北감옥에 31개월 억류...美정부의 끈질긴 노력으로 2018년 석방
“대한민국, 자국민 구출할 생각 않는 아주 나쁜 국가”

김동철 목사가 펜앤드마이크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사진=양연희).
김동철 목사가 펜앤드마이크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사진=양연희).

그와의 인터뷰는 5시간 동안 계속됐다. 퍽 긴 시간이었다. 그는 신중하게 단어를 골랐고, 천천히 문장을 이어갔다. 북한에 관한 많은 정보를 말해줬지만 이미 언론에 알려진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한국과 미국의 정보당국의 첩보원으로 활동했지만, 북한정권을 위해서도 많은 일을 했다고 스스로 밝혔다. 김정일은 그에게 3번이나 감사의 표창을 수여하지 않았던가. 혼란스러웠다. 도대체 그는 누구인가. 맞은편에 앉은 초로의 남자는 쌍꺼풀이 없는 전형적인 한국인의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거리에서 수없이 마주치는 평범한 인상이었다. 창밖을 보니 벌써 어스름이 내려앉고 있었다. 문득 그의 삶은 북한선교의 딜레마를 보여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북한 동포들을 돕기 위해 독재정권을 돕는 그 ‘역설’ 말이다.

영등포의 한 커피숍에서 만난 김동철 목사(66)는 짧은 스포츠형 머리에 편안한 정장 차림이었다. 그는 일부러 머리를 짧게 유지한다고 했다. 북한에 억류됐던 31개월을 잊지 않기 위해서다. “나는 사선을 넘어온 사람입니다. 그때 그 시절을 잊기 싫어서 일부러 머리를 기르지 않고 있습니다...” 김 목사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김동철 목사는 1953년 한국에서 태어나 아버지의 권유로 1980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댈러스 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고 미국 시민권자가 됐다. 미국에서 클리닝 사업으로 돈도 꽤 모았다. 2001년 조선족 아내와 중국 옌지로 건너가 무역을 하다 북한에 들어갔다. 그는 북한에서 ‘미국인 사업가’로 나진-선봉 무역특구에서 외국인 전용 두만강 호텔을 운영하는 등 ‘남 부러울 것 없는’ 17년을 보냈다. 그는 “내가 북한에 들어가게 된 것은 미스터리”라며 “자세한 내용은 밝힐 수 없다”고 했지만 그의 아내가 북한의 혁명 1세대들과 친인척 관계라고 했다.

아내는 김일성의 빨치산 투쟁 동지였던 황순희(조선혁명박물관장)와 친척이었다. 아내의 사촌오빠 김영지는 김일성의 어머니 강반석의 묘가 있는 소사하 촌장이었다. 아내의 사촌은 최룡해(국무위원회 제1부위원장 겸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의 아버지 최현하고 가까운 친인척이다. 또한 아내의 큰 아버지는 북한의 현영철 인민무력부장과 이종사촌지간이다. 그들의 가장 큰 뒷배였던 현영철은 김정일이 사망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2015년 김정은으로부터 숙청당했다. 김 목사는 “당시는 북한은 일촉즉발의 사회였다”며 “나는 미국에 만약 북한을 무력으로 진압할 생각이 있다면 때는 바로 지금이라고 알렸다”고 말했다.

기자: 그 때가 언제였나요?

김동철: 2013년이었습니다. 김정일의 사망으로 정권이 갑자기 이양되면서 북한은 큰 혼란에 빠졌습니다. 산속의 호랑이가 죽고 토끼만 남은 것이죠. 김정일이 죽고 나자 군부와 당이 서로를 견제하기 시작했습니다. 김정은을 사이에 두고 분란이 생긴 것입니다. 나는 한미 정보당국에 북한을 해체하려면 바로 ‘지금’이라고 알렸습니다.

기자: 김정일은 어떻게 사망했습니까?

김동철: 2011년 김정일은 심장 쇼크사로 죽었습니다. 김정일은 항상 두려움과 스트레스에 시달리다보니 병이 많았습니다. 특히 심장, 신장, 콩팥이 안 좋아서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결국 갑작스럽게 죽었습니다. 나는 김정일의 병에 좋은 약과 의료기기를 직접 외국에서 구해 선물을 했습니다. 그 까닭에 표창을 3번이나 받았습니다. 당시 저는 김정일이 갑작스럽게 죽을 수 있다고 판단해 그런 내용의 첩보를 작성하기도 했습니다. 김정일이 사망한 후에도 한국과 미국에서 관련 정보를 많이 요구해서 감찰 보고서를 작성해 보냈습니다.

기자: 김정일은 정말로 달리는 열차에서 사망했나요? 아니면 자신의 딸 집에서?

김동철: 아닙니다. 김정일은 노동당 청사 안에 있는 자신의 비밀 집무실에서 사망했습니다. 김정일의 집무실은 금수산기념궁전 외에 노동당 청사 안에도 있습니다. 노동당 청사 뒤 만경대 구역에는 김정일만 출입할 수 있는 지하 통로가 뚫려 있는데 외부에서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는 이곳에서 심장마비로 갑작스럽게 사망했습니다. 김정일은 자신의 죽음을 예측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들 김정은에게 특별한 지시를 하지 못한 것을 보면요. 김정은은 당시 어린 마음에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나름대로 꾀를 내서 처단할 사람은 다 처단하고 자기 사람들을 세우기 시작했죠.

기자: 김정은 집권 후 얼마나 많은 엘리트들이 숙청됐습니까?

김동철: 아버지 세대의 거의 모든 인사들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다 죽였습니다. 제일 많이 죽은 것은 군 출신 인사들입니다. 북한에서 나고 자란 김정은은 북한의 생리를 잘 압니다. 이대로 둬서는 안 된다고 판단한 것이지요. 적어도 내가 붙잡히기 전인 2014년까지는 계획적으로 숙청을 계속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제가 알고 지내던 3~4명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아내와 이종사촌지간인 현영철 인민무력부장이 숙청당했고, 황병서 노동당 조직지도부장도 결국 김정은에게 이용당한 뒤에 숙청당했습니다. 장성택은 그 전에 죽었고요. 나는 처음에 북한에서 ‘장성택 계열’로 일했습니다. 장성택은 김정일의 신임을 받았고 행정부장으로 북한의 모든 경제와 무역을 틀어쥐고 있었습니다. 그는 내게 나진·선봉 무역경제특구를 활성화하는 일을 맡겼습니다.

기자: 장성택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김동철: 장성택은 곁가지입니다. 백두혈통이 아니니까요. 실권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부인 김경희가 김일성의 딸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건드리지는 못 했습니다. 김정일과도 매형-처남 사이니까 가깝고... 장성택은 여러 차례 구설수에 올랐습니다. 그가 특별히 무엇인가를 잘못했기 보다는 옆에서 자꾸 옆에서 이 사람을 씹어대며 견제한 것이죠. 북한 사람들은 대단히 시기, 질투가 많습니다.

기자: 김경희는 살아있습니까?

김동철: 아직 살아있다고 봅니다. 김경희는 백두혈통이기 때문에 함부로 죽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여성이 아무리 권력이 있어도 소용없습니다. 북한에서 여성으로 태어나면 불행합니다. 북한에서 여성은 그야말로 노예와 같은 처지입니다.

기자: 북한은 핵 역량은 어느 정도 수준입니까?

김동철: 북한은 핵무기 10~15개 정도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핵연료로 쓰이는 우라늄은 추출이 쉽습니다. 며칠이면 됩니다. 실험도 필요 없죠. 컴퓨터 시뮬레이션만 돌리면 됩니다. 북한은 무산광산 등 우라늄 광산을 많이 보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김정은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영변 핵 시설을 폐기하겠다고 한 것입니다. 북한은 바보가 아닙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생명줄인 영변 핵시설을 폐기하겠다고 할 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북한은 여전히 기폭장치 기술 개발에 어려움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라늄 핵탄두의 경량화, 최소 1kg 이상의 핵탄두 탑재 가능한 미사일 개발을 위해서도 여전히 실험을 하고 있습니다. 김정일의 가장 큰 성과는 핵 과학자들을 직접 양성했다는 것입니다. 그 전에는 과학자들이 외국 유학을 가서 핵 기술을 배워와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유학생들이 북한으로 돌아온 뒤에는 후대를 직접 양성하기 시작했습니다. 북한은 이제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핵을 만들어낼 수 있는 기술력을 확보했습니다.

기자: 북한에는 핵 과학자들이 몇 명이나 있습니까?

김동철: 정확한 숫자 파악은 어렵지만 내가 알기로는 약 4만 명의 핵 기술 과학자들이 존재합니다. 지하 핵 실험실 ‘땅굴’은 1만 개가 넘습니다. 내가 정확하게 파악한 숫자만 해도 8천개 정도입니다. 북한의 핵 과학자들은 인공위성으로도 포착되지 않는 땅굴 속에 들어가 핵 기술을 실험합니다.

기자: 북한이 최근 단거리 탄도미사일이나 방사포 실험을 자주 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김동철: 북한은 다양한 무기체계를 보유하고 있고 시뮬레이션을 비롯해 많은 실험을 합니다. 핵탄두 경량화, 미사일 고도화 및 사거리 증가를 위해서 많은 실험을 하는 것이죠. 그러나 북한 특유의 인간성으로 미뤄볼 때 나는 북한의 최근 잇따른 무력도발을 ‘허풍’이라고 봅니다. 무기를 앞세워 자신의 약점을 감추고 있는 것이죠. 마치 자신이 강한 것처럼 한국과 미국에 대고 엄포를 놓는 것입니다.

기자: 박근혜 전 대통령은 정말로 김정은 참수 계획을 세웠습니까?

김동철: 내가 수집한 정보에 따르면 박근혜 정부는 ‘김정은 참수계획’을 시행할 정도의 특수조직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최고지도자 참수라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북한은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통제의 그물이 얽혀있는 곳입니다. 외부에서 들어온 사람은 활동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북한은 나 같은 ‘외국인 간첩’이 존재했다는 사실에 경악했습니다. 내가 체포된 후 북한 전역이 떠들썩했다고 합니다. 며칠씩 학습시간에 나에 대한 공개 비판을 했다고 합니다. 김정은 집권 초기의 큰 사건이었죠.

기자: 북핵 등 민감한 정보는 어떻게 수집하셨나요?

김동철: 나는 이명박, 박근혜 정부 때 정보원으로 일했습니다. 북한과 같은 감시 사회에서 스파이 노릇을 하는 것은 한국 같은 자유세계에서 스파이 노릇을 하는 것과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한국, 미국 정보당국과는 특수장치를 통해 연락을 했습니다. 김정일이 죽었을 때는 손목시계로 북한주민들이 비를 맞으며 그를 애도하는 광경을 촬영해 KBS 등에 보내주기도 했습니다. 개성공단, 통진당 해체와 관련된 정보도 넘겼습니다.

내게는 많은 정보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점조직으로 운영했습니다. 내가 직접 상대했고 정보원들끼리는 서로 모르게 했습니다. 가장 예민한 정보 수집과 북한 고위층 상대는 내가 직접 했습니다. 내가 체포되고 나서 정보원 6명도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 중 한 명이 저를 밀고한 ‘배반자’였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잘 해주려고 했지만 상황이 여의치 못해서 잘해주지 못한 점도 있습니다. 그래서 나를 밀고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기자: 돈 때문에 밀고했다는 건가요?

김 목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2016년 간첩행위 혐의로 노동교화형 10년을 선고 받고 31개월 동안 노동교화소에 감금됐다. 위치가 어딘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거리로 짐작하건데 평성 근처라고 했다. 그는 미국인으로서는 가장 오랫동안 억류됐다. 북한당국이 그에게 붙인 죄목은 17가지. 그 중에서 가장 큰 죄목은 ‘최고 존엄 모독죄’였다고 한다. 김 목사가 김정은 정권에 대해 ‘얼마 가지 못 한다’고 말한 것을 도청한 것이다.

기자: 체포된 후에는 고문도 받으셨죠?

김동철: 손을 뒤로 묶고 욕조 안에 머리를 집어넣는 물고문을 받았습니다. 북한 사람들은 고문을 하도 많이 해봐서 언제 빼내야 죽지 않는지 압니다. 숨이 끊어지기 직전에 머리를 끄집어 올리는데 이때 숨을 쉬면 물이 코와 입으로 딸려 들어갑니다. 이런 방식으로 한번에 4~5 차례나 고문을 가합니다. 나는 총 4번 물고문을 당했습니다. 당시 나는 생사를 포기했습니다. 나는 사람이 아니다. 나는 죽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한편으로는 마음속에서 내게 고문을 가하는 사람들에 대한 분노가 폭발했습니다. ‘나는 너희들이 이렇게 고문을 가할 위치에 있는 사람이 아니다. 나는 너희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했다...’

기자: ‘너희를 위해서’라면 ‘북한을 위해서’라는 뜻입니까?

김동철: 나는 그동안 언론에 솔직히 다 이야기 했습니다. 한국과 미국을 위해 첩보활동을 했지만 북한체제를 위해서 일하기도 했습니다. 군 관계자들과의 거래에서 군자금을 만들어주기도 했고 노동당을 위해서도 약간의 외부 세계에 대한 동향파악 등도 해줬습니다. 그래서 북한에 17년씩이나 거주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기자: 북한 감옥에서의 억류생활은 어땠습니까?

김동철: 죽지 못해 살았습니다. 얼마나 배가 고팠는지 모릅니다. 배고픔이 무엇인지 알고 싶으면 내 이야기를 들어야 합니다. 배고픔은 인간을 망가뜨립니다. 양심을 부정하게 만듭니다. 내가 겪어봐서 압니다. 북한정권이 주민들의 식량을 통제하는 이유는 양심을 짓밟기 위해서입니다. 양심이 살아나지 못하도록, 체제에 순응하게 만들기 위해서 양식을 제한하는 것입니다. 결코 식량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그런 식으로 북한정권은 인간성을 말살합니다. 나는 배고픔이 얼마나 괴로운 것인지 실제로 경험해봤기 때문에 압니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낫습니다. 정신이 혼미해집니다. 살아있는 한은 배고픔을 견디기 힘듭니다. 나는 겨울에도 밖에서 일을 하는 것이 더 좋았습니다. 벌레나 나무열매, 땅 속의 곡식 알갱이 등 무엇이든 주워 먹으면 조금이라도 허기를 면할 수 있었으니까요.

나는 감옥에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정확한 위치는 모르지만 평양에서 멀리 떨어진 평성 근처였다고 생각이 듭니다. 방이 9개 있었지만 수감자는 저 혼자였습니다. 나를 지키는 군인들은 8명이나 됐습니다. 그곳에서 지난 세월을 들춰보니 한 일이 별로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 위한 일꾼으로 부름을 받은 후에 도대체 내가 한 일이 무엇인가. 나는 주의 온전한 종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습니다. 이것이 회개였을까요. 괴로웠습니다. 나는 목사였지만 그때까지 회개가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했고 사명을 위해 북한선교를 한다고 했는데 다 거짓말이었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동안에도 누군가가 나와 함께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처참한 그곳에서도 나를 떠나지 않고 위로해주는 존재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런 느낌이 들자 마음이 평온해졌습니다. 내가 만약 살아 돌아갈 수 있다면...

2018년 5월 김 목사는 마침내 석방됐다. 폼페이오 장관의 3번의 방북과 미국정부의 끈질긴 노력에 덕분이었다. 김 목사는 “마지막 방북에서 폼페이오 장관은 나를 구해낼 때까지 평양에 머물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기자: 석방되실 때 기분이 어떠셨습니까?

김동철: 아침 9시쯤 문화궁전으로 불러나갔는데 저녁 7시까지 석방 결정이 안 났습니다. 나는 너무 불안해서 기절을 했습니다. 의사들이 나를 커피숍에 눕혀놓고 응급처치를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곧 석방 결정이 내려왔습니다. 회의실로 들어가니 미국사람 3명이 앉아 있고, 북한의 조직지도부, 보위부 요원들이 보였습니다. 최고법원 판사가 내개 “장군님의 배려에 의해서 석방조치를 한다”며 “이 사람의 신병을 미국 측에 인도한다”고 말했습니다. 비행기가 미국에 도착한 후 트럼프 대통령과 15분 면담을 했습니다. 첫 인상이 ‘정치인’으로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정상적인 상식이 살아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북한에서 하도 단련을 받아서 사람 볼 줄을 압니다.

기자는 마지막으로 그에게 북한에 억류된 6명의 한국인 선교사들과 중국 국적의 조선족 장만석 선교사들에 대한 우리 정부의 구출 노력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는지 질문했다. 김 목사는 “대한민국은 자국민을 구출할 생각을 하지 않는 아주 나쁜 국가”라며 “어떻게 이런 국가를 믿고 밖에 나가서 국민이라고 자랑스러워하겠는가”라고 반문했다.

“국가가 할 일은 자국민의 신변보장입니다. 국가가 나서서 자국민을 구출해 내는 일에 관심을 갖지 않거나 아예 포기했다고 하는 것은 국가가 아닙니다. 나는 대한민국에 태어났지만 국적을 바꿔서 미국인이 됐습니다. 그래도 태어난 곳이 한국이라 위해서 협력해줬는데 지금은 아무도 나를 찾지 않습니다. 버림받은 것이죠. 씁쓸합니다. 그분들이 북한에서 고초를 겪고 있는 것에 대해 가족들은 얼마나 애가 타겠습니까. 그런 면에서 한국은 마땅히 지탄을 받아야 합니다.”

양연희 기자 yeonhee@pennmik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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