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희 칼럼] 12월, 러시아의 데카브리스트를 생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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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초승인 2019.12.05 13:41:06
  • 최종수정 2019.12.30 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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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브리스트-러시아의 젊은 청년 장교들, 1825년 12월14일 농노 해방 꿈꾸며 ‘자유로운 러시아’ 건설 위해 봉기...실패
시베리아로 유배된 장교들 따라 나선 아내들, 새로운 농법 보급하고 학교 열며 시베리아 선진화...‘노블레스 오블리주’ 모범
2019년 한 해를 마무리하는 12월, ‘데카브리스트’ 떠올리며 ‘가진 자’로서 할 수 있는 ‘희생과 헌신’이 무엇인지 고민 필요
황인희 객원 칼럼니스트

1825년 12월 14일 러시아에서는 장교들의 반란이 일어났다. ‘데카브리스트의 난’이다. ‘데카브리스트’는, 러시아어에서의 12월인 ‘제카브르(декабрь)’의 미국식 발음에서 온 말이다. 이는 12월의 봉기 가담자들을 말한다.

20~30대의 젊은 귀족으로 이뤄진 데카브리스트는 대부분 1812년의 나폴레옹 전쟁에 참전했던 정예 부대 장교들이었다. ‘위대한 애국 전쟁’이라고도 불리는 나폴레옹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이끌어낸 사람들이다. 좋은 가문에서 훌륭한 교육을 받은 이들은 퇴각하는 나폴레옹 군대를 뒤쫓아가 프랑스 파리에 입성하는 벅찬 감동을 맛보았다. 그들은 그 과정에서 선진화된 유럽의 문물과 프랑스 혁명으로 야기된 자유의 물결을 몸으로 체득할 수 있었다.

그들은 당시 유럽을 휩쓸고 있던 나폴레옹의 독재와 독선에 대항하여 목숨 바쳐 싸웠다. 그리고 유럽의 그 어떤 나라도 이루지 못했던 나폴레옹에게의 승리를 이뤘다는 자부심을 안고 조국으로 귀환했다. 그러나 정작 자신들의 조국 러시아는 여전히 차르라 불리는 황제의 압제와 전근대적 제도 아래서 시달리고 있었다. 그때 데카브리스트는 절대 왕정을 폐지하고 입헌군주제나 공화제를 수립하고 농노를 해방하는 근대화된 러시아를 꿈꾸게 되었다.

데카브리스트는 차르에게 러시아의 개혁을 건의했다. 당시 차르였던 알렉산드르 1세는 귀족 자제들인 데카브리스트와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친구이기도 했다. 그런 이유에서나 그동안 알렉산드르 1세가 보여줬던 개혁의 의지로 보나 어느 정도의 낙관적인 답변을 기대할 만했다. 그러나 차르의 개혁 시도는 귀족들의 극심한 반대에 부딪혔다. 그 과정에서 차르조차도 개혁 의지를 버리고 말았다. 기득권을 가진 귀족들이 농노 해방에 찬성표를 던질 리 없었다. 결국 데카브리스트의 적(敵)은 황제보다 더 보수적으로 깊이 뿌리박힌, 기득권을 놓지 않는 귀족들이었던 것이다.

데카브리스트 박물관(치타).

1825년 11월 19일 알렉산드르 1세가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그에게는 뒤를 이을 아들이 없었고 후계 구도가 확실치 않아 러시아는 더욱 심한 혼란에 빠져들었다. 결국, 동생 니콜라스 1세가 차르로 결정되었지만 데카브리스트에게는 그 혼란이 반란을 일으킬 절호의 기회로 받아들여졌다.

한 달 후 12월 14일 운명의 날이 밝았다. 그 날은 군대가 새로운 차르 니콜라스 1세에게 충성을 서약하기로 한 날이었다. 데카브리스트는 세르게이 트루베츠코이를 선봉에 세웠다. 만일 그날의 거사가 성공하면 왕정을 폐지하고 다섯 명의 지도자를 앞세운 민주공화국의 임시정부를 수립할 계획도 세웠다. 민주공화국의 헌법은 농노 해방은 물론 모든 사람이 평등하고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새로운 러시아를 지향하고 있었다. 거사 당일의 구호는 “콘스치투치야(конституция)!”였다. 러시아어로 ‘헌법’이라는 뜻이다. 이들이 헌법 제정을 얼마나 갈망했는지 이 구호만으로도 확실히 알 수 있다.

그날 아침 3천여 명의 군인이 페테르부르크의 상원광장에 집결했다. 그곳은 러시아 근대화의 아버지 표트르 대제의 기마상이 서 있는 도시의 심장부였다. 12월 중순의 혹독한 날씨에 군인들은 모였는데 지휘관인 세르게이 트루베츠코이는 나타나지 않았다. 반군들은 지휘관이 없는 상태에서 구호만 외치고 서 있었다.

곧이어 1만여 명의 정부군이 나타났다. 이들은 몇 시간 동안 서로 대치하며 서 있었다. 지휘관이 나타나지 않아 이미 동요가 일어난 데카브리스트 중에는 앞장서서 반란군을 이끄는 사람이 없었다. 대치와 투항 설득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종료되지 않았다. 그러다 해가 지기 시작했다. 12월 초의 러시아는 오후 네 시면 해가 져서 컴컴해진다. 결국 차르는 최후의 수단으로 대포 발사를 명령했다. 난장판이 된 상원광장을 밤 동안 원상 복귀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왕실의 명령을 받은 경찰과 군인은 ‘정리’를 위해 시체는 물론 부상자들까지 차디찬 네바 강에 던져 넣었다. 이렇게 해서 이날 사망자가 1천3백여 명에 이르렀다.

즈나멘스키 수도원에 있는 데카브리스트 아내와 자녀들의 묘(이르쿠츠크).

차르 니콜라이 1세는 겨울궁전에서 주동자급의 데카브리스트와 만났다. 차르는 그들에게 몇 차례나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수사에 최대한 협조하면 너의 목숨을 살려줄 수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장교는 다음과 같이 당당하게 말했다.

“당신이 그렇게 말하는 것을 보고 우리가 옳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습니다. 당신이 한 말은 당신이 법 위에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가 원한 것은 우리의 운명이 법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지 당신의 기분에 따라 달라지는 미래가 아니었습니다.”

결국 121명의 데카브리스트가 재판을 받았고 그 가운데 다섯 명은 교수형을 당했다. 나머지는 카토르가형이라는 시베리아에서의 중노동형에 처해졌다. 차르가 그들에게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두고두고 당하게 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데카브리스트는 쇠사슬에 묶여 시베리아로 끌려갔다. 이들은 형기를 마친 후에도 페테르부르크나 모스크바로 돌아올 수 없었다. 어떤 사람들은 이르쿠츠크나 치타보다 훨씬 동쪽에 있는 네르친스크까지, 혹은 북극 가까운 곳까지 추방되어 광산 등에서 중노동을 했다. 1856년 알렉산드르 2세는 시베리아 유형에서 살아남은 사람 모두에게 완전 사면령을 내렸다.

여기까지는 서양사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웬 만큼 다 아는 내용이다. 그런데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데카브리스트의 난 자체나 그 가치에 대한 것이 아니다. 시베리아로 유형을 간 데카브리스트와 그의 아내들이 시베리아를 비롯한 러시아 동부에 끼친 문화적‧사회적 영향을 말하고자 함이다. 그 이야기는 지금부터 시작된다.

데카브리스트였던 볼콘스키 공작의 후손이 살던 저택(이르쿠츠크). 볼콘스키 공작은 톨스토이의 친척으로, 소설 《전쟁과 평화》의 인물 ‘안드레이 볼콘스키’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

데카브리스트 남편들이 시베리아로 끌려간 후 페테르부르크에 남은 아내들을 위해 차르는 특별법을 제장하게 하였다. 데카브리스트의 아내들에 한해 남편이 살아 있어도 재혼할 수 있도록 허락하는 법이었다. 그러나 아내들은 이를 거부하고 남편과 함께 하기 위해 시베리아로 향했다. 시베리아로 가는 아내들은 귀족의 특권, 귀족의 칭호, 재산 등을 모두 포기해야 했다. 또 차르는 시베리아로 가는 아내들에게 페테르부르크로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을 뿐 아니라 자녀를 데려갈 수 없으며 시베리아에서 태어난 아기는 영원히 농노의 신분으로 살아야 할 것이라는 조건까지 내걸었다. 그러나 데카브리스트 중 한 명인 세르게이 볼콘스키의 아내 마리아 볼콘스키는 “나의 아기는 행복하지만, 힘들게 살고 있는 남편은 나를 필요로 한다”라며 아이를 다른 가족에게 맡긴 채 시베리아로 발길을 돌렸다.

데카브리스트의 아내 마리아 볼콘스키의 동상(이르쿠츠크).

아내들은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며 남편들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그곳에서도 남편과 함께 살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일주일에 두 차례 교도관 앞에서 남편을 만날 수 있을 뿐이었다. 남편을 만날 수 없던 나머지 시간 아내들은 정치범은 물론 일반 죄수들을 위해, 또 지역 사회를 위해 일했다. 글 모르는 죄수들의 편지를 대필해주었고 학교와 공연장을 만들었으며 병원에서 일하면서 의료 수준을 향상시키기도 했다.

시베리아에서의 삶은 혹독하고 가혹했다. 20~30년이 지나 사면령이 내려졌지만 그때까지 살아남은 데카브리스트는 서른 명도 채 안 되었다. 그 중 몇 명은 형기를 마쳤지만 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오지 않았다. 이들은 이르쿠츠크에 정착하여 지역 사회 발전에 여러 모로 기여하였다. 이들은 농사법을 연구하여 지역 주민들에게 새로운 농사 기술을 보급하고 서쪽에서 가져온 작물을 심어 보급하였다. 또 학교를 열어 시베리아를 미개의 상태에서 벗어나게 도운 것도 이들 데카브리스트였다. 의사가 거의 없던 시베리아에서 데카브리스트 의사들은 지역민들의 건강에 큰 도움을 주었다. 치타에서는 데카브리스트에 의해 지역신문이 창간되었고 도서관이 만들어졌다. 그곳에 가면 페테르부르크의 데카브리스트 친지들로부터 보내온 선진화한 읽을거리를 만날 수 있었다. 오늘날 이르쿠츠크를 ‘시베리아의 파리’로 만든 것도 그들 데카브리스트와 아내들의 힘이었다. 이 지역의 원주민 부리야트 족은 주로 몽골족의 후손으로, 그들은 서쪽에서 온 러시아 사람들을 싫어했다. 그런데 지역 사회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데카브리스트를 존경하고 존중하게 되었다. 이로써 러시아 사람들에 대한 부리야트 족의 인식이 달라졌고 이는 러시아가 극동까지 영토를 넓히는 데 큰 도움이 되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한 해의 마지막 달인 12월에 ‘12월의 사람들’인 데카브리스트를 새삼 떠올려보는 것은 러시아 정치와 역사에서 데카브리스트의 난이 어떤 위상으로 존재하는가에 대해서는 섣불리 논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다만 기득권을 포기한 데카브리스트와 그 아내들이 보여준 헌신과 희생이 시베리아의 문화와 사회 발전에 얼마나 커다란 영향을 끼쳤는가에 대해서만 강조하고 싶을 뿐이다.

가진 자들의 사회적 책임을 말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어려운 말을 굳이 들먹일 필요도 없다. 지금 우리 사회는 그 어느 때보다도 ‘가진 자’의 희생과 헌신을 필요로 한다. 여기서 가진 자란 ‘경제적 부(富)를 가진 자’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학문을 가진 자, 권력을 가진 자, 더 나아가 야망을 가진 자까지를 다 포함한다. 그들이 그만큼 ‘가질’ 수 있을 때까지는 알게 모르게 사회의 도움을 받아왔다. 언젠가는 그 도움에 대한 보답을 해야 하는데 그 적절한 때가, 사회가 요구하는 시기가 바로 지금인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가, 우리 사회가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한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데카브리스트의 반란이 시작된 상원광장. 표트르 대제의 동상이 서 있다(상트페테르부르크)

씨앗은, 겉으로 보이지 않는 땅 속에서 썩어야만 싹을 틔울 수 있고 열매를 맺을 수 있다. ‘가진 자’가,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씨앗처럼 스스로를 썩게 하여 싹을 틔우는 데 도움이 되겠다는, 그런 정신을 가지지 않는다면, 그래서 희생과 헌신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수많은 대한민국 국민이 원하고, 대한민국을 살리는 그 목표에 절대 다다를 수 없다. 올 한 해가 저물기 전에, 더 이상의 시간이 흐르기 전에 ‘가진 자’로서 내가 할 수 있는 ‘희생과 헌신’이 무엇인지에 대해 각자 치열하게 연구해볼 일이다. 대한민국을 구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놓치기 전에 말이다.

황인희 객원 칼럼니스트 (다상량인문학당 대표 · 역사칼럼니스트) / 사진 윤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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