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은 더불어민주당 추미애 대표, 오른쪽은 우원식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가 지난달 31일 국회 본회의 교섭단체대표연설에서 '미투 운동'을 상징하는 백장미를 들어보이는 모습.
왼쪽은 더불어민주당 추미애 대표, 오른쪽은 우원식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가 지난달 31일 국회 본회의 교섭단체대표연설에서 '미투 운동'을 상징하는 백장미를 들어보이는 모습.

사회 각계 여성들의 잇단 성추행·성폭행 피해경험 폭로를 확산시킨 '미투(me too, 나도 겪었다) 운동'이 여권(與圈)을 덮치자, 당대표와 원내대표가 나란히 '백장미 퍼포먼스'까지 벌이며 공감을 표하던 더불어민주당이 '집단 기억상실'에라도 걸린 듯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당초 민주당은 미투 운동 '띄우기'에 주력했다. 추미애 대표는 지난달 8일 친(親)정부 성향 JTBC 보도로 재론된 '2009년 장자연씨 자살사건'에 대해 9일 페이스북 글을 통해, 10일 당 최고위원회의 공개발언을 통해 부실수사 의혹을 제기했다. 장씨는 숨지기 전 문화·언론·경제계 유력인사들로부터 성상납 등을 강요받은 경험을 유서로 남겼으나, 거론된 인사들이 처벌 대상이 되지 않았다는 점을 부각했다. "연예계뿐만 아니라 그림자처럼 존재하고 있는 사회 구조적인 성폭력에 대해 미투 운동이 제대로 진행되길 바란다"며 "민주당은 일상의 성폭력, 성희롱과 맞서 싸우는 여러분의 편이 되겠다"고 그는 약속했다.

서지현·임은정 검사가 안태근 전 법무부 검찰국장, 최교일 자유한국당 의원 등에 대한 성희롱 폭로에 나서 화제가 된 이후 민주당은 미투 운동에 한층 앞장섰다. 우원식 원내대표는 같은달 31일 국회 본회의 교섭단체 대표연설 도중 미투 운동의 상징인 '백장미'를 들어보이는가 하면, 지난 2월8일에는 아예 당 정책조정회의의 주제를 '성평등'으로 삼고 성폭력 피해자에게 "응원합니다"라는 피켓을 들어 보인 적도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지난 2월8일 국회에서 '미투 운동'에 적극 공감한다는 취지로 '성평등 정책조정회의'를 열었다.(사진=더불어민주당)
더불어민주당은 지난 2월8일 국회에서 '미투 운동'에 적극 공감한다는 취지로 '성평등 정책조정회의'를 열었다.(사진=더불어민주당)

그러나 공교롭게도 같은날 최영미 시인이 성추행 혐의자이자 "괴물"로 표현한 'En선생' 폭로 주인공이 고은 시인이라는 게 밝혀졌고, 지난 14일부터 이윤택 연극연출가의 '권위'에 억눌려 성추행을 당했다는 여성 문화예술인들의 고백이 잇따르면서 민주당의 불편한 침묵은 시작됐다. 고은·이윤택씨 등은 민주당이 야당이었을 때부터 친노·친문(親노무현, 親문재인) 성향을 드러냈다. 이씨는 문재인 대통령과 경남고 동기동창 사이이며, 지난 2012년 제18대 대선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 찬조연설에 나섰다. 고씨는 안도현 시인의 언급대로 "문재인 (18대 대선)후보하고 소주 한 잔 얼큰하게 하신" 인사다. 이들은 실체가 불분명한 '9473명 문화계 블랙리스트' 피해자를 자처하며 반(反) 박근혜 정부 여론몰이에 앞장선 바 있다.

특히 민주당은 미투 운동 '직격탄'을 맞으면서 더욱 곤혹스러운 처지에 놓였다. '민변' 사무차장 출신 이재정 비례대표 의원은 지난달 말부터 서 검사에 동조한다며 미투 운동 지지를 표명했으나, 이달 12일 변호사 시절 성희롱을 당한 후배에게 "현명한 선택을 하라"고 은폐를 종용했다는 언론 보도가 나오자 존재감을 감췄다. 이후 이 의원으로부터 뚜렷한 해명이 나온 바 없다.

사진=조선일보 홈페이지 모바일 버전 캡처
사진=조선일보 홈페이지 모바일 버전 캡처

민주당은 또 부산시당 당직자의 여성당원 성추행 사건 은폐 의혹을 줄기차게 지적해 온 세계일보 보도에 대해 지난 19일 부산시당이 입장문을 내 "오보"라며 정정을 요구했으나 거짓 주장으로 드러났다. 부산시당은 '피해자가 사건 확대에 대한 부담으로 가해자에 대한 출당이나 제명을 원치 않았다'고 했지만, 세계일보는 다음날인 20일 후속보도에서 피해 여성당원의 입장을 직접 전하며 "허위사실"이라고 일축했다. 결국 22일에야 민주당은 김현 대변인 논평을 통해 중앙당 차원에서 진상조사팀을 만들어 진상규명에 나서겠다고 '백기'를 들었다.

이와 함께 강원도당위원장인 심기준 의원의 비서관이 지난 19일 평창 동계올림픽 현장에서 여성을 성추행해 경찰 조사를 받은 것으로 드러나면서 추가 파문이 일었다. 심 의원은 21일 사과문을 내 해당 비서관이 사직했다며 고개를 숙였지만, '꼬리 자르기'로 무마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잇따르고 있다. 민주당 지도부는 일련의 성추문 사건에 관해 침묵을 유지하고 있어 이런 지적에 힘을 싣는다. 이날 우원식 원내대표가 국회에서 주재한 정책조정회의 회의록에 따르면 민주당 원내지도부는 성추행의 '성(性)' 자도 거론하지 않았다.

후폭풍은 정부와 청와대로까지 불어닥치고 있다. 지난해 9월21일 문 대통령이 첫 유엔 총회 참석차 미국 뉴욕을 순방했을 때 청와대에 파견된 해군 부사관이 여성인턴을 성추행했으나 넉 달도 더 지난 뒤인 이달 7일 언론 보도로 알려졌다. 문화예술계 성추문이 잇따른 뒤로는 학창시절 여중생을 성적 대상으로 이용했다는 저서로 오랜 기간 눈총을 받아 온 탁현민 청와대 의전비서실 선임행정관을 둘러싼 '여혐' 논란과 경질 요구도 재론되고 있다.

위쪽은 (왼쪽부터) 청와대 임종석 비서실장과 탁현민 의전비서실 선임행정관, 아래는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과 정현백 여성가족부 장관.(사진=연합뉴스)
위쪽은 (왼쪽부터) 청와대 임종석 비서실장과 탁현민 의전비서실 선임행정관, 아래는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과 정현백 여성가족부 장관.(사진=연합뉴스)

임종석 청와대 비서실장은 전날(21일) 국회 운영위원회에 출석해 관련 지적을 받자, '뉴욕 순방 중 성추행' 사건을 그동안 비밀에 부친 것은 물론 언론 보도 이후에야 "귀국 후 징계했다"고 밝힌 청와대 조치는 충분했다는 취지로 강변했다. 탁 행정관에 대해서는 단순 '저서 발간' 문제로 치부하는 듯 "이씨의 직접적 성폭력과는 구분이 돼야한다"는 주장을 펴 눈총을 받았다. 파문 이래 문화예술계 소관부처인 문화체육관광부 도종환 장관, 여성문제가 주무인 여성가족부 정현백 장관 등도 존재감을 숨긴 '미온적인 대처'로 비판과 의문을 사고 있다.

미투 운동의 추이에 따라 드러난 여당의 '이중잣대'를 두고 정치권에서는 바른미래당이 전날 권성주 대변인 논평에서 "더듬어민주당"이라고 비꼬았고 자유한국당은 연일 당 대변인·부대변인단 논평을 내 '추미애 지도부'에 "꿀먹은 벙어리가 됐다"고 십자포화를 퍼붓고 있다.

장제원 한국당 수석대변인은 이날 논평에서 "당 내에서 연이어 터진 충격적 성희롱, 성추행, 추가 성희롱(민주당 부산시당 여성당원 2차피해) 사건에 대해 일절 외면한 채 오히려 사건을 축소, 은폐하고 피해자 의사마저도 거짓말로 일삼아 추가 성추행을 부르고 있는 민주당은 성추행 방조 정당이자 성추행 은폐정당"이라고 맹공했다.

바른미래당 권 대변인은 이날 "여가(餘暇) 중인 여성가족부"라는 제목의 논평을 내고 "정치적 유불리를 따져 침묵하는 여당과 주무기관이 돼야 할 여가부의 안이함으로 피해자의 용기는 또 다른 피해 앞에 방치되고 있다"며 "문재인 정부는 끝없이 이어지는 정부·여당발(發) 성폭력 문제에 대해 '피해자 보호'를 내세우며 실질적 '정부 보호'를 위한 은폐를 이어왔다"고 질타했다.

한기호 기자 rlghdlfqjs@pennmik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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