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시대 탐험기] ‘한강의 기적’을 ‘대동강의 기적’으로 만들 수 있을까?
[박정희 시대 탐험기] ‘한강의 기적’을 ‘대동강의 기적’으로 만들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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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유 모델 승용차 개발’의 원조인 정주영·김재관·오원철·김정렴·박정희는 원조 적폐로 찍혀 뭇매를 맞고 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의 자화상이자 현주소다. 이런 민심 구조 하에서 ‘한강의 기적’을 ‘대동강의 기적’으로 만드는 것이 가능이나 한 일일까? 한 나라를 일으키는 데는 수십 년 세월이 걸리지만, 말아먹는 것은 순식간에 끝난다.

한국은 ‘한강의 기적’을 성취한 나라다. ‘한강의 기적’은 좌승희 박사(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 이사장)의 표현에 의하면 마차를 만들던 나라가 기차·자동차·비행기를 만드는 나라로 혁명적 발전을 이루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한강의 기적’을 이루어낸 박정희 정부의 정책들은 전두환 정부 시절부터 철저히 부정되기 시작했다. 오히려 “박정희 정책의 반대로 하는 것이 선진국으로 가는 길”이라고 외치면서 박정희 정책 지우기에 올인했다. 그 결과 한국은 성장 정체(저성장), 양극화로 인한 분배 악화라는 이중의 함정에 빠져 세계경제 발전의 대열에서 탈락하고 있다.

여기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고 박정희 시대 정책을 다시 도입해야 제2의 ‘한강의 기적’이 가능하며, 세계 최빈국 ‘악의 축’ 국가인 북한이 경제도약을 이루기 위한 최적의 정책대안은 박정희 모델이라고 주장하는 책이 발간되었다. 좌승희·이태규 공저의 『한강의 기적을 세계로 대동강으로』(기파랑 刊)다.

그렇다면 ‘한강의 기적’의 근간, ‘박정희 모델’을 통칭하는 박정희의 정책의 핵심은 무엇인가? 흔히 저개발 국가가 선진 공업국으로의 도약은 거의 기적에 가깝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열강의 식민지에서 해방되어 독립한 대부분의 저개발 국가들은 지금도 여전히 저개발 상태에 방치되어 있는 것이 이를 반증한다.

영국의 산업혁명은 장기성장의 백미이고, 한국의 ‘한강의 기적’은 압축성장의 백미로 꼽힌다. 경제성장을 통한 산업화, 그것도 20~30년의 단기간에 걸친 압축성장으로 산업화에 성공하여 선진국에 진입한 것이 ‘한강의 기적’의 핵심이다. '한강의 기적' 그 원인을 파헤친 저작 "한강의 기적을 세계로 대동강으로"(좌승희 이태규 공저) 책.
영국의 산업혁명은 장기성장의 백미이고, 한국의 ‘한강의 기적’은 압축성장의 백미로 꼽힌다. 경제성장을 통한 산업화, 그것도 20~30년의 단기간에 걸친 압축성장으로 산업화에 성공하여 선진국에 진입한 것이 ‘한강의 기적’의 핵심이다. '한강의 기적' 그 원인을 파헤친 저작 "한강의 기적을 세계로 대동강으로"(좌승희 이태규 공저) 책.

시장·정부·기업의 완벽한 삼위일체

그렇다면 한국이 거의 유일하게 저개발국에서 선진 공업국으로 도약에 성공한 셈인데, 그 결정적인 비밀 요인을 좌승희·이태규는 ①시장, ②정부(지도자), ③기업으로 꼽는다. 이점은 필자가 지금까지 [박정희 시대 탐험기]라는 지면을 통해 ‘한강의 기적’의 핵심은 “지도자(정부)와 기업가들의 발전연합”이라고 주장해 온 것과 완벽하게 일치한다.

정부와 시장, 기업이 ‘경제적 차별화’의 원리를 통해 기업 주도의 산업화를 달성하는 것, 그것이 바로 ‘한강의 기적’의 핵심이자 박정희 정책의 기둥이라는 것을 좌승희·이태규는 『한강의 기적을 세계로 대동강으로』를 통해 절절하게 밝히고 있다.

남미와 아프리카, 동남아의 저개발 국가들이 산업화에 성공하지 못한 이유는 세계시장에서 경쟁력 있는 대표 기업이 부재하다는 점이다. 라울 프리비쉬(Raul Prebisch)를 비롯한 수많은 세계의 경제 석학들이 수입대체 산업화 전략을 외쳤지만, 결과적으론 실패했다. 산업화 전략 수행 과정에서 경쟁력 있는 기업을 키워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하나가 더 추가되어야 한다. 바로 철저한 인센티브 제도다. 이무에게나 인센티브를 주는 것이 아니라 열심히 땀흘려 노력한 기업·사람에게 더 많은 혜택을 제공한다. 박정희 정부 시절 한국은 만성적인 자금 부족 상태에 처해 있었다. 축적된 민족자본이 거의 전무하다 보니 해외 차관, 정부의 정책 금융을 통한 저리의 자금이 기업들에게는 생명수였다.

이러한 생명수를 대통령과 친분관계, 혹은 친인척 관계자들에게 나눠주는 것이 아니다. 매년 수출의 날 수출실적이 1등부터 100등까지 발표된다. 우수한 수출실적을 보인 기업에 파격적으로 저리의 정책 금융을 정부가 제공한다. 수출실적이 곧 정책 금융을 받는 순서가 되다 보니 어느 기업이 수출에 최선을 다하지 않겠는가.

해외로 수출되고 있는 한국의 자동차. 자동차산업 정책은 정부가 수립했지만, 자동차 공장을 짓고 제품을 개발하고, 해외에 내다 파는 것은 기업의 몫이었다. 오늘날 한국의 산업화 성공은 이처럼 정부와 기업의 발전연합에 의한 결과물이다(사진 연합뉴스).
해외로 수출되고 있는 한국의 자동차. 자동차산업 정책은 정부가 수립했지만, 자동차 공장을 짓고 제품을 개발하고, 해외에 내다 파는 것은 기업의 몫이었다. 오늘날 한국의 산업화 성공은 이처럼 정부와 기업의 발전연합에 의한 결과물이다(사진 연합뉴스).

열심히 해외에 수출을 하려면 해외에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는 우수 제품을 만들어야 하고, 해외 소비자 취향에 맞는 디자인·감성·품질·기술·가격 수준에 맞춰야 한다. 그러다 보면 절로 해외에서 경쟁력 있는 제품을 만드는 기업들이 육성되는 것이다.

한국의 성공사례 중 하나로 꼽히는 자동차산업 육성 과정을 살펴보면 시장·정부·기업의 삼위일체가 얼마나 멋지게 성공했는지 알 수 있다. 자동차 생산을 위해서는 철강, 비철금속, 기계, 고무, 유리, 전기제품, 도장 등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 때문에 자동차는 연관 산업 발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선도 산업이 된다.

또 자동차 산업이 발달하면 운수, 정유, 정비, 주유소, 주차장, 터미널, 금융, 보험, 서비스센터 등 파생산업이 발달하여 국가 GDP 신장에도 크게 기여한다. 이론상으론 그럴 듯 했지만, 당시 한국이 고유모델 승용차 자체 개발 프로젝트 시동을 건 때는 한국에 기계공업이 존재하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어느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방법론 도입

선진국 자동차 메이커로부터 모델을 들여다 국내에서 조립 생산하고, 국내에서는 단순 부품들만을 생산 공급하는 구조였다. 한국 기업들의 고유 모델 승용차가 하나도 없었으니 외국 자동차 회사의 단순 하청 조립 수준이었다.

우리가 고유모델 차량을 개발하여 수출산업으로 육성하는 전략을 성공시킨 주인공은 김정렴 대통령 비서실장, 오원철 대통령 경제2수석, 이낙선 상공부장관, 김재관 상공부 중공업차관보였다.

초대 중공업차관보로 임명된 김재관 박사는 이승만 대통령 시절 철강 부문 국비유학생으로 선발되어 독일 뮌헨공대에서 유학을 한 바 있다. 김재관은 철강·조선·기계 및 자동차공업 육성 업무를 담당했는데, 박정희 대통령은 그에게 4개 분야 중 가장 뒤처진 자동차공업을 획기적으로 육성하라는 특별 임무를 부여했다.

1973년 6월, 김재관은 그 동안 정부가 추진해 온 자동차산업 관련 정책을 전면 폐기했다. 그리고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시도하지 않았던 ‘고유모델 승용차의 하향식 양산화 정책’을 기본 골격으로 하여 ‘장기 자동차공업 진흥계획’을 수립했다.

한국은 전 세계적으로 보편화 된 육성 방식이었던 바텀 업(bottom up) 방식이 아니라, 어느 나라도 시도하지 않은 ‘고유모델 승용차의 하향식(top down) 양산화 정책’을 추진한 것이다. 즉, 자동차공업에서 가장 어렵고 핵심적인 고유모델 차를 개발, 양산하여 전 세계 시장에서 선발 메이커들과 경쟁한다는 도전적인 구상이었다. 독자적인 고유모델 차의 개발은 선진국 메이커의 예속 상태에서 벗어나 자주적인 성장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었다.

계획의 핵심은 1975년까지 국산화 비율을 80%로 하고, 우리 실정에 맞는 소형차 개발에 주력할 것이며, 국제 경쟁력을 갖출 때까지 경쟁 제품의 수입을 금지한다는 것이었다.

1973년 7월 12일 상공부는 국내 자동차 4사(GM코리아·기아·현대·아세아자동차)에 “정부는 한국 자동차공업 장기진흥계획을 수립했으니 각 사는 고유모델 승용차 공장 건설계획을 작성하여 8월 5일까지 제출하라”는 공문을 발송했다.

당시 우리나라의 총 자동차 등록 대수가 17만 대, 국내 자동차 회사의 연간 총 조립 생산 실적이 3만 대가 안 될 때였다. 외국 모델을 들여다 조립 판매하는 데 급급하던 국내 자동차 업계는 고유 모델 승용차를 독자 개발하기 위한 설계도와 5만 대 이상 생산을 위한 5,000만 달러의 시설투자를 담보하는 투자계획서를 제출하고, 그대로 시행하겠다는 약속을 하라는 공문이 날아들자 “자동차공업의 기본도 모르는 사람들이 한국 실정도 모르면서 너무 앞서는 요구를 하고 있다”고 아우성 쳤다.

정책은 정부가 수립, 시행은 기업이 담당

정부는 고유모델 승용차 생산 메이커로 GM코리아·기아·현대 등 3사를 지정했다. 그 직후인 1973년 10월에 중동전쟁이 발발하여 제1차 석유위기가 밀어닥쳤다. 세계 자동차산업은 불황에 빠져들면서 생산 감축, 공장 폐쇄가 잇따랐다. 경기가 크게 위축되자 한국의 자주적인 자동차공업 정책에 미온적인 태도로 일관했던 GM코리아가 고유모델 개발 생산계획을 포기했다. 대신 그들은 GM 계열사인 오펠의 모델과 부품을 들여다 조립 판매하기로 결정했다. 뒤를 이어 기아도 고유모델 생산을 포기하고 일본에서 부품을 들여다 브리사를 조립 생산키로 했다.

마지막 주자인 현대자동차는 조립생산 실적이 연간 7,000대도 안 되는 소규모인 데다가, 2년 여 추진했던 포드와의 합작계획도 1973년에 무산되면서 고립무원의 처지였다. 정주영은 정부의 고유모델 차 개발 정책에 적극 호응하여 단 3주 만에 연간 5만 대 생산을 목표로 하는 포니 자동차 생산계획서를 제출했다.

당시 현대의 국산 부품 사용 비율은 30%였는데, 대부분이 타이어와 배터리 등 단순 부품이었고 주요 부품은 모두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다. 이런 형편에 연간 5만 대 생산은 충격적인 수치였고, 투자비용도 1억 달러가 요구되었다. 모기업인 현대건설의 연간 공사 수주액이 50억 원, 현대자동차의 자본금이 17억 원에 불과한 상황에서 1억 달러 투자는 그룹의 존망이 걸린 문제였다.

회사 관계자들은 국산 모델 개발은 타당성이 없고 시장성도 거의 없다면서 반대했다. 그러나 정주영은 생각이 달랐다. 정주영은 승용차, 버스, 트럭 등 모든 차종을 생산하는 종합자동차공장 건설계획서를 상공부에 제출했다. 그리고 청와대를 찾아가 오원철 당시 대통령 경제2수석에게 “1억 불을 들여 일류 자동차 공장을 짓겠다. 국민차도 만들겠다. 두고 보라”고 말했다.

차체 설계는 이탈리아 회사, 디자인은 주지아로, 엔진은 일본 미쓰비시가 맡아서 개발한 한국 고유모델 승용차 포니. 한국은 이란 방식으로 걸음마를 시작하여 세계적인 자동차 대국으로 성장했다.
차체 설계는 이탈리아 회사, 디자인은 주지아로, 엔진은 일본 미쓰비시가 맡아서 개발한 한국 고유모델 승용차 포니. 한국은 이란 방식으로 걸음마를 시작하여 세계적인 자동차 대국으로 성장했다.

현대는 정주영의 진두지휘 하에 국산 자동차 개발과 공장 건설에 박차를 가했다. 정주영의 자동차산업 기본방침은 첫째, 고유모델 승용차를 개발하여 수출 주력 상품화한다. 둘째, 외국 기업과의 자본 제휴는 하지 않는다. 셋째, 종합자동차공장을 건설하되 새로운 승용차는 완전 국산화한다. 넷째, 규모를 국제경쟁력이 가능한 규모로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영국의 유명한 자동차 엔지니어 조지 턴불을 현대자동차 부사장으로 영입하여 고유 모델 승용차 생산을 맡겼다.

1973년 9월 정주영은 이탈리아의 설계 전문 용역회사인 이탈 디자인 사와 설계계약을 체결하고 한국의 미래형 자동차 모델 디자인을 의뢰했다. 스타일링은 자동차 디자인의 거장 조르제토 주지아로, 차체 설계는 알도 만토바니가 담당했다. 그리고 엔진기술 및 엔진공장 건설은 미쓰비시에 맡겼다.

조르제토 주지아로는 폴크스바겐의 ‘골프’와 ‘시로코’ ‘파사트’, 이탈리아의 ‘알파 로메오’, 일본 ‘이스즈 117’ 승용차를 비롯하여 세계적인 히트작을 디자인한 자동차 디자이너 분야의 세계적인 거장이다. 이탈리아 사람들이나 자동차 설계 관계자들은 주지아로를 ‘제2의 미켈란젤로’라고 부른다. 그는 국내 최초로 해외에 수출된 현대자동차 ‘포니’ 디자인을 맡았다.

포니 승용차의 기적

설계와 엔진 등 핵심부품을 외국에서 사다 장착하는 한이 있더라도 고유 모델 승용차를 만든다는 정책에 의거, 이탈리아 디자인에 미쓰비시 엔진을 탑재한 형태로 탄생한 대한민국 최초의 고유모델 승용차가 포니였다. 고유모델 승용차의 개발 및 생산은 세계 16번째, 아시아에서는 일본에 이어 두 번째였다.

1976년 2월 첫 선을 보인 연료절약형 승용차 포니는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고, 생산 개시 직후부터 해외에 수출되어 큰 호응을 얻었다. 이어 현대차는 엔진의 독자개발에 도전했다. 기술진들은 미쓰비시와 포드 자동차를 분해하여 부품들을 모방 설계하는 역엔지니어링 과정을 거쳐 관련 기술을 습득했다.

1983년 정주영은 ‘알파 프로젝트’라고 명명된 새 엔진 개발에 돌입했다. 기초적인 기술만을 도입하고 기본 설계에서 최종 제품 개발에 이르는 전 과정을 독자적으로 추진한 결과 1990년 11월, 자동차의 심장에 해당하는 엔진을 자체적으로 설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포니가 전 세계에 수출되어 성공을 거두자 고유 모델 승용차 개발을 포기했던 기아와 GM코리아(후에 대우자동차)도 독자모델 개발에 뛰어들면서 우리나라 자동차산업은 급속한 성장세를 타기 시작했다. 한국은 1990년 최초로 세계 10위의 자동차 생산국에 진입한 이래 1991년 9위, 1992년 7위, 1995년 5위, 1997년에는 프랑스를 제치고 일본, 미국, 독일에 이어 세계 4위를 달성해 자동차산업을 시작한 지 불과 20년 만에 국가 주력산업으로 확고한 뿌리를 내렸다.

수출에서도 괄목할 만한 성장을 보였다. 1999년 반도체(188억 달러)에 이어 자동차가 111억 달러 수출로 단일 품목 수출 2위를 차지했고, 전 세계 190개국에 자동차를 수출하는 국가 기간산업으로 성장했다.

기적과도 같은 한국의 성장은 세계 경제발전사에서 일종의 돌연변이에 해당한다. 그것은 곧 시장과 정부(지도자)와 기업의 발전연합의 결과물이다. 위에서 소개한 대로 자동차산업 전개 과정에서 ‘고유모델 승용차 개발’이란 정책을 정부(지도자)가 세우고, 기업이 이를 수행한 결과 시장을 창출함으로써 세계적인 자동차 기업이 탄생하는 완벽한 삼위일체의 면모를 보였다(사진 연합뉴스).
기적과도 같은 한국의 성장은 세계 경제발전사에서 일종의 돌연변이에 해당한다. 그것은 곧 시장과 정부(지도자)와 기업의 발전연합의 결과물이다. 위에서 소개한 대로 자동차산업 전개 과정에서 ‘고유모델 승용차 개발’이란 정책을 정부(지도자)가 세우고, 기업이 이를 수행한 결과 시장을 창출함으로써 세계적인 자동차 기업이 탄생하는 완벽한 삼위일체의 면모를 보였다(사진 연합뉴스).

기적과도 같은 한국의 성장은 세계 경제발전사에서 일종의 돌연변이에 해당한다. 그것은 곧 시장과 정부(지도자)와 기업의 발전연합의 결과물이다. 위에서 소개한 대로 자동차산업 전개 과정에서 ‘고유모델 승용차 개발’이란 정책을 정부(지도자)가 세우고, 기업이 이를 수행한 결과 시장을 창출함으로써 세계적인 자동차 기업이 탄생하는 완벽한 삼위일체의 면모를 보였다.

이승만과 박정희가 국제원조기구와 선진국 전문가들의 충고대로 철강공장과 고속도로를 건설하지 않고 농업 위주의 발전전략, 수입대체산업을 채택했다면 자원이나 자금, 기술이 부족했던 한국은 아시아의 빈곤국 대열에서도 후미에 위치하고 있을 것이다. 한국이 농업화를 통한 근대화를 추진해야 한다고 점잖게 충고했던 서구의 발전전략 전문가들은 한국이 중화학공업을 성공시켜 선진국 대열에 오르자 “한국은 서구 전문가들이 하라는 대로 하지 않아서 성공했다”고 말을 바꾸었다.

최중경은 한국의 경제발전 과정은 불가사의이자 수수께끼라고 말한다. 한국은 서구 지식인들이 주장하고 국제기구가 설파한 경제발전 공식을 그대로 따르지 않고 우리 실정에 맞는 전략을 직접 만들어 사용했다는 것이다(최중경, 『청개구리 성공신화』 매일경제신문사, 2012, 5~6쪽).

정부는 무너지고, 기업은 욕만 얻어먹고…

한국은 수입대체전략 대신 수출드라이브 전략을, 일시적 전면개방과 규제철폐를 추구하는 신자유주의 대신 점진적인 개방과 규제의 단계적 완화를 선택했다. 서구 전문가들이 타당성이 없다고 한 경부고속도로 건설, 포항제철 설립, 중화학공업을 밀어붙였다. 또 서구식 민주주의의 조기 도입보다는 개발독재를 통한 자원동원과 배분의 효율 극대화를 먼저 추구했다.

문재인 정부 들어 한국의 산업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정부(지도자)는 아예 없는 것이 나을 정도로 타락했고, 기업은 권력이 하도 짓밟아서 기진맥진 상태다. 수출산업이 처참하게 붕괴되는 모습을 보면서 박정희의 방법론과 정책이 얼마나 위대한 전략이었는지를 새삼 깨닫는다.

사족으로 한 마디 덧붙이자면 포니 승용차를 디자인한 주지아로는 한국 수출에 기여한 공로로

포니 승용차를 디자인한 세계적인 자동차 디자이너 조르제토 주지아로. 한국 정부는 수출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하여  2011년 10월 12일 열린 ‘제48회 무역의 날’ 기념식 때 주지아로에게 철탑산업훈장을 수상했다.
포니 승용차를 디자인한 세계적인 자동차 디자이너 조르제토 주지아로. 한국 정부는 수출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하여 2011년 10월 12일 열린 ‘제48회 무역의 날’ 기념식 때 주지아로에게 철탑산업훈장을 수상했다.

‘고유 모델 승용차 개발’의 원조인 정주영·김재관·오원철·김정렴·박정희는 원조 적폐로 찍혀 뭇매를 맞고 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의 자화상이자 현주소다. 이런 민심 구조 하에서 ‘한강의 기적’을 ‘대동강의 기적’으로 만드는 것이 가능이나 한 일일까?

한 나라를 일으키는 데는 수십 년 세월이 걸리지만, 말아먹는 것은 순식간에 끝난다.

김용삼  대기자 dragon0033@pennmik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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