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일종족주의』 일본어판 14일 발매와 더불어 '아마존 재팬' 도서부문 판매 1위 올라
21일 일본신문협회, 『반일종족주의』 대표저자 이영훈 교장 초청하여 도쿄의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
이영훈 교장, "한국에선 식민지 시대를 바로 알자는 연구 하면 반민족 행위로 지탄받아"
"한일은 동아시아 자유민주주의의 보루. 자유민주주의가 한반도의 북쪽으로 나아가 대륙으로까지 확산을 기원"

[편집자 주] 이 글은 21일 일본 도쿄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일본신문협회 주관 『반일종족주의』 일본어판 출판기념 기자회견에서 이영훈 이승만학당 교장이 발표한 기조 연설문이다. 이날 이영훈 교장은 한국인들의 정신세계를 장악하고 있는 반일종족주의 현상에 대한 분석과 『반일종족주의』를 발간하게 된 이유, 그리고 여러 가지 어려움이 예상됨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일본어 번역본을 내게 된 동기를 30분간 연설했다. 14일 일본 문예춘추가 발간한 일본어판 『반일종족주의』는 발간 즉시  '아마존 재팬' 도서부문 판매 1순위에 오르는 등 돌풍과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반일 종족주의'의 대표저자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이승만학당 교장).
'반일 종족주의'의 대표저자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이승만학당 교장).

저와 동료 연구자 5인이 지난 7월에 출간한 『반일종족주의』는 한국 현대문명에 침잠해 있는 원시 내지 야만을 비판한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은 그의 역사에 원인이 있는 큰 병을 앓고 있습니다. 개인, 자유, 경쟁, 개방과 같은 선진적인 문명 요소를 억압하고 구축하려는 집단적, 폐쇄적, 재분배적 공동체 의식이 병의 근본 원인입니다. 한마디로 문명과 야만의 대결입니다.

저는 세계의 어느 나라도 이 같은 대결 구도로부터 자유로운 나라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세계의 어느 나라도 그의 근대화 역사에서 이 같은 대결 구도에 기인하는 위기를 경험하지 않은 나라는 없습니다.

일본만 해도 1868년 메이지유신을 수행한 이래 1930년대에 이르러 국가체제의 큰 위기를 맞이한 적이 있습니다. 1948년에 성립한 대한민국 역시 건국 70년에 큰 위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위기의 증후는 매우 심각합니다. 자칫하면 이 나라의 자유민주주의 체제는 해체될지 모릅니다.

『반일종족주의』는 그러한 위기감에서 쓰였습니다. 한국인들에게 위기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큰소리로 외쳤습니다. 다름 아니라 우리 속에 침잠해 있는 야만의 종족주의가 병통의 근원이라고 고발하였습니다.

대한민국의 건국이념은 자유·개방·영구평화

세계 선진사회의 구성원은 자유인으로서 그 활동 범위가 세계에 열려 있는 세계인입니다. 어느 사회가 선진화하는 것은 그에 속한 인간들이 자유로운 세계인으로 진화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세계가 크게 열린 시장으로 통합된 가운데 영구한 평화를 추구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대한민국의 건국은 이 같은 자유, 개방, 영구평화의 선진이념에 기초하였습니다. 이후 지금까지 이 나라가 2차 세계대전 이후 성립한 수많은 신생국 가운데서 드물게도 큰 성취를 이룩한 것은 이 같은 세계가 공유하는 선진이념에 충실하였기 때문입니다.

한국인의 국민국가 건설은 개인의 자유를 부정하는 내외 공산주의 세력과의 투쟁 과정이었습니다. 세계경제로부터 고립된 가운데 민족 단위의 자립경제를 건설하자는 인민주의 노선을 배척하는 과정이었습니다.

일본 문예춘추가 발간한 일본어판 '반일종족주의' 표지. 14일 책 발매와 동시에 '아마존 재팬' 도서부문 판매 1순위에 오르는 등 돌풍과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일본 문예춘추가 발간한 일본어판 '반일종족주의' 표지. 14일 책 발매와 동시에 '아마존 재팬' 도서부문 판매 1순위에 오르는 등 돌풍과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1965년 한국과 일본의 국교 정상화가 이루어진 것도 이 같은 이념에 기초해서였습니다. 국교 정상화를 이루어낸 박정희 대통령은 우리 국민에게 역사의 구원(舊怨)에 얽매이지 말고 아시아의 모범적인 반공국가로서 자신감과 주체의식을 가지고 일본과 대등한 위치에서 새로운 미래를 열어가자고 호소하였습니다.

이후 일본과의 긴밀한 협력관계는 한국경제의 고도성장을 가능케 하였습니다. 1990년 노태우 대통령은 일본 의회에서 다음과 같이 연설하였습니다.

“오늘의 우리는 나라를 지키지 못한 스스로를 자성할 뿐, 지난 일을 되새겨 누구를 탓하거나 원망하지 않습니다. 다음 세기에 동경을 출발한 일본의 젊은이들이 현해탄의 해저터널을 가로질러 서울의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 북경과 모스크바로, 파리와 런던으로 대륙을 잇고 세계를 하나로 만드는 우정 어린 동반여행을 하는 시대를 우리가 만들어갑시다.”

한국인이 이 같은 역사의식과 국제협력 노선에 보다 충실했더라면 지금쯤 보다 자유롭고 풍요로운 선진사회를 이룩하였을 겁니다.

그렇지만 이후 전개된 역사는 그와 다른 방향이었습니다. 역사는 많은 비용을 지불한 후에야 약간의 진보를 허락하는 모양입니다. 1993년에 성립한 김영삼 정권 이래 민주화와 자율화의 이름으로 이 사회에 깊이 침잠해 온 야만의 종족주의가 고개를 들기 시작하였습니다. 개인, 자유, 경쟁, 개방을 대신하여 민족, 공정, 규제, 자주의 이념이 이 나라의 정치를 주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일본과의 관계는 협력에서 대립으로 전환하였습니다. 북한과의 통일정책에서는 자유 이념을 대신하여 ‘우리민족끼리’라는 민족주의가 우위를 점하게 되었습니다. 남한의 자유민주주의 체제와 북한의 전체주의 체제가 연방의 형태로 결합한 다음 통일국가로 전진할 수 있다는 환상이 국민적 기대로 성립하였습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본질을 왜곡한 사람들

1992년에 제기되어 지금까지 27년간 한일 양국의 신뢰와 협력을 저해한 가장 심각한 장애는 이른바 일본군 위안부 문제입니다. 조선총독부와 일본군의 관헌이 일본군의 성적 위안을 위해 순결한 조선의 처녀를 연행, 납치, 감금하였다는 주장만큼 한국인의 종족주의적 반일감정을 자극한 것은 없습니다.

몇 차례에 걸친 일본 정부의 사과와 배상에도 불구하고, 몇 차례에 걸친 양국 정부 간의 타협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가 한국에서 진정되지 않고 오히려 증폭되어 온 것은 그것이 당대 한국인의 정신적 동향, 곧 반일종족주의의 강화라는 추세에 부응하였기 때문입니다.

저는 『반일종족주의』에서 지난 27년간 이 문제에 종사해 온 한국과 일본의 연구자와 운동단체를 비판하였습니다. 그들의 위안부 강제연행설과 성노예설을 부정하였습니다. 그들은 원(元) 위안부들의 불확실한 증언에 기초하여 위안부의 존재형태와 그 전체상을 과도하게 일반화하는 오류를 범하였습니다. 그들은 조선왕조 이래 오늘날까지 장기 존속한 성매매의 역사에서, 곧 남성, 가부장, 국가에 의한 약소 여성의 성에 대한 지배와 착취의 긴 역사에서, 일본군 위안부제가 성립한 1937∼1945년의 8년간만을 거두절미하는 오류를 범하였습니다.

일본군 위안부제는 근대 일본에서 성립하고 식민지 조선으로 이식된 공창제(公娼制)의 일부분이었습니다. 위안부제는 공창제의 군사적 편성에 다름이 아니었습니다. 여인들이 군위안소로 모집된 방식이나 경로는 여인들이 도시의 유곽(遊廓)으로 간 그것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취업, 폐업, 노동 형태, 보수의 면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한국에서 위안부제는 1945년 이후 도시의 사창(私娼), 한국군 특수위안부대, 미국군 위안부의 형태로 더욱 번창하였습니다. 1950, 60년대 한국 정부에 의해 그 신분이 위안부로 규정되고 성병 검진의 대상이 된 여인의 수는 1930, 40년대의 창기(娼妓)와 위안부에 비해 무려 10배 이상이었습니다.

그들의 노동 강도, 소득 수준, 건강 상태, 포주와의 관계는 1930, 40년대에 비해 훨씬 열악하였습니다. 기존의 연구는 이렇게 한국 현대사회에까지 깊숙이 침투한 위안부제의 역사에 대해 눈을 감았습니다. 이 점은 기존의 연구자와 운동단체가 범한 가장 심각한 오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본을 근거없이 비난 매도하고 모든 악의 근원으로 만드는 근저에는 반일 종족주의가 자리잡고 있음을 설파한 '반일 종족주의' 책 표지. 국내에서도 베스트 셀러에 오르는 등 화제가 되었다.
일본을 근거없이 비난 매도하고 모든 악의 근원으로 만드는 근저에는 반일 종족주의가 자리잡고 있음을 설파한 '반일 종족주의' 책 표지. 국내에서도 베스트 셀러에 오르는 등 화제가 되었다.

지난 27년간 한국에서 위안부 문제가 악화해 온 데에는 관련 연구자와 운동단체의 책임이 매우 무겁습니다. 그들은 마치 역사의 재판관인 양 행세하였습니다. 그들이 원 위안부들을 앞세워 행진할 때 그들을 저지할 어떠한 권위나 권력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이 문제에 관한 일본 정부와의 협약을 파기하라고 소리칠 때 한국 정부는 묵종하였습니다.

역사학의 정치화가 낳은 참극

그들은 정부 위에 군림하였습니다. 위안부 문제에 관한 한 지난 27년간 한국 정부는 없는 것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국민의 강력한 반일종족주의가 그들을 절대 지지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강제연행설과 성노예설을 무기로 하여 일본의 국가적 책임을 추궁해 왔습니다. 그 집요함은 일본과의 관계를 파탄으로 몰아도 무방하다고 할 만큼 맹목적이었습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강제연행설과 성노예설은 일본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어느 일본인은 조선의 여인을 강제연행한 자신의 범죄를 고백하는 참회록을 썼습니다. 어느 역사학자는 성노예설을 제기하여 한국의 연구자와 운동단체를 고무하였습니다.

그것은 역사학의 본분을 넘은 고도로 정치화한 학설이었습니다. 그들은 한국의 사회사, 여성사, 현대사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상태였습니다. 한국 사회와 정치에 대한 그들의 개입은 부당했으며, 많은 부작용을 파생하였습니다.

목하 양국의 관계를 어렵게 만들고 있는 징용공(徵用工) 문제도 한국인의 종족주의적 지평에서 제기된 것입니다. 믿기 힘들지 모르겠습니다만, 2005년 노무현 정권이 피징용자에 보상을 행할 당시까지 한국에서는 그에 관해 신뢰할만할 한편의 논문이나 한권의 연구서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정부는 1939년 이래 일본으로 건너간 모든 한국인을 징용의 피해자로 간주하였습니다. 그 가운데는 1944년 8월 이후 진정한 의미의 징용만이 아니라, 이전부터 있은 일본 회사의 모집과 총독부의 알선도 포함되었습니다.

모집과 알선은 당시의 정치정세에 구애되어 다소간의 강박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으나, 어디까지나 일본 회사와의 계약관계였습니다. 이에 더하여 정부는 연쇄이민의 형태로 일본으로 자유도항한 사람들까지 징용의 피해자로 간주하는 웃지못할 촌극을 벌였습니다.

이후 몇몇 한국인이 더 많은 보상을 추구하여 국경을 넘어 일본에서까지 소송을 제기하였습니다. 그들 모두는 징용이 아니라 모집과 알선의 경로로 일본으로 건너간 사람들이었습니다. 자국의 국제적 위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은 그들의 참월(僭越)함은 그들의 책임만이 아닙니다.

한국의 반일종족주의는 그들의 국제적 소송을 지지하였습니다. 그들은 일본에서 외롭지 않았습니다. 위안부 문제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른바 ‘양심적’인 일본인이 그들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양국의 신뢰·협력관계를 저해하는 데에 크게 기여하였을 뿐입니다.

‘식민지근대화론’이 반민족 행위로 지탄받는 한국

역사의 진보는 느린 속도로밖에 이루어지지 않은 듯합니다. 한국은 인구가 5,000만 이상이면서 1인당 소득 수준이 3만 달러 이상인 세계의 10개도 안 되는 선진그룹에 속하고 있습니다. 국가경제의 규모는 세계 15위입니다. 그럼에도 이 나라의 정신문화에는 19세기까지의 조선왕조가 짙은 그림자로 남아 있습니다. 조선왕조는 명·청 중화제국의 제후국이었습니다. 제후국의 비극은 자신의 책임으로 국가체제를 영위하지 않은 데 기본 원인이 있습니다.

조선왕조는 완벽하게 폐쇄된 국가였습니다. 바다는 개방의 통로가 아니라 쇄국의 장벽이었습니다. 중국은 세계의 중심으로, 일본은 바닷속의 오랑캐로 간주되었습니다. 인간들의 삶과 죽음의 원리는 자연종교 샤머니즘에 규정되었습니다. 양반 신분의 정치교양인 유교도 샤머니즘과의 융합을 통해 정착하였습니다. 개인, 자유, 이기심, 상업을 정당화하는 정치철학의 진보는 없거나 미약하였습니다.

그 결과 18∼19세기 조선의 경제는 깊은 정체를 면하지 못하였습니다. 인구의 다수는 여전히 원시와 문명의 경계선에서 방황하였습니다. 지난 20세기에 걸쳐 한국인의 물질생활에는 실로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인간들의 사회관계, 정신문화, 나아가 국제 감각에서는 본질적 변혁은 없었습니다. 저는 오늘날 한국의 반일종족주의를 이상과 같은 역사적 시좌(視座)에서 이해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에서 일본은 이해의 대상이 아닙니다. 오로지 구원(仇怨)의 대상일 뿐입니다. 조선왕조가 무엇 때문에 패망했는지는 탐구의 과제가 아닙니다. 일본이 한국을 지배한 35년간은 치욕의 역사일 뿐입니다. 그 기간에 한국인의 사회·경제생활에 어떠한 변화가 있었는지는 금기의 영역입니다. 그에 대한 객관적 평가는 ‘식민지근대화론’이라 하여 반민족 행위로 규탄됩니다.

그 결과 오늘의 한국인은 그들의 근대문명이 어디서, 어떻게 생겨났는지 알지 못합니다. 오늘의 한국인은 그 역사적 계보에서 조선왕조의 신민 그대로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의 한국인은 오늘의 일본을 구제국의 연장으로 감각합니다. 현 아베 신조(安倍晉三) 총리와 그의 지지세력을 극우 파시스트로 매도함이 보통 한국인의 일상 언어입니다.

『반일종족주의』의 일본어 번역과 출간에는 많은 번민이 따랐습니다. 이미 지적한 대로 『반일종족주의』는 한국인의 자기비판서입니다. 자국의 허물을 굳이 외국어로, 더구나 일본어로까지 공표할 필요가 있느냐는 비판을 예상하기는 조금도 어렵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그에 동의한 것은 그것이 한일 자유시민의 국제적 연대를 강화함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판단에서였습니다.

활짝 열린 국제사회에서 그 파장이 국제적이지 않은 사건은 하나도 없습니다. 한국인이 앓고 있는 역사의 병도 그러합니다. 병은 널리 알리는 편이 좋습니다.

한일 국제연대의 강화를 위하여

실은 우리의 이 같은 고민은 『반일종족주의』 한국어판의 출간부터였습니다. 우리의 외침에 많은 한국인이 호응하였습니다. 건국 70년에 적지 않은 한국인이 자유 이념에 바탕을 둔 세계인으로 성숙하였습니다. 전국의 주요 서점가에서 『반일종족주의』는 종합 베스트셀러 1위의 지위를 한동안 누렸습니다. 이는 그야말로 망외(望外)의 사건이었습니다.

느린 속도지만 역사는 착실하게 진보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그러한 기대를 『반일종족주의』 일본어판 출간에도 걸어봅니다. 한국인에게는 자신의 문제를 국제적 관점에서 성찰하는 호기가 될 것입니다. 일본인에게는 한국 문제를 나아가 한반도 문제를 친한(親韓)이니 혐한(嫌韓)이니 하는 감정의 수준을 넘어서 진지하게 전향적으로 재검토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한국과 일본은 동아시아 자유민주주의의 보루입니다. 이 자유민주주의가 한반도의 북쪽으로 나아가 대륙으로까지 확산해 가기를 기원합니다. 이 같은 역사적 과제에서 한일 양국의 자유시민은 서로 신뢰하고 협력할 필요가 있습니다. 『반일종족주의』가 그러한 국제적 연대를 강화하는 데 약간의 도움이라도 된다면 그것 이상의 큰 기쁨은 없을 것입니다.

끝으로 『반일종족주의』 일본어판 출간을 맡아주신 문예춘추에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아울러 한국에 대한 애정과 우려로 이 책을 구입하신 일본의 독자 여러분에게도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이영훈 이승만학당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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