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면·자조·협동”의 새마을정신과 한국경제의 재도약

 


1. 근면·자조·협동의 새마을 정신

-청교도정신이자, 한국적 자본주의 정신의 상징

1970년대 초 전국의 농가는 3만 5,000여 마을에 250만 가구가 산재해 있었다. 농촌의 약 80%는 초가지붕이었다. 1964년 통계에 의하면 농촌 마을 중 전기가 들어간 집은 12%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등잔불, 호롱불로 밤을 밝혔다. “우리도 한 번 전등불 아래서 살아봤으면”하는 것이 숙원이었다. 냉장고는 물론 라디오조차 들을 수 없는 ‘문명의 사각(死角)지대’였으니 ‘근대’라는 것과는 담을 쌓고 사는 원시적인 씨족 공동체나 다름없었다.

길이 비좁아서 마을 안까지 자동차가 드나들 수 있는 곳은 30%에 불과했다. 도로가 없어 자동차 진입이 불가능하니 먼 거리를 지게나 등짐, 머리에 물건을 이고 날랐다.

지금 이런 말을 하면 믿는 사람이 없겠지만 5·16 군사 쿠데타가 벌어졌던 1961년만 해도 우리 사회에는 보릿고개, 초근목피(草根木皮), 절량(絶糧)농가, 춘궁기라는 말이 실제로 존재했다.

박정희와 함께 혁명을 했던 이석제 전 감사원장은 박정희의 근대화 철학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국가건설”, 즉 국민들을 배불리 먹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박정희는 부하들에게 늘 이렇게 말했다.

“국민에게 세 끼 밥도 제대로 못 먹이는 지도자는 참다운 지도자가 아니오. 여러분들은 어떤 정책이나 법률을 입안할 때 반드시 국민에게 밥을 먹일 수 있는 방법론과 연관을 시켜서 발상을 해야 합니다.”

“배고픈 국민들에게 밥을 먹이자” 정신

국민들을 배불리 밥 먹이고 잘 살게 하려면 잠자는 국민들, 의욕을 상실한 국민들, 절망과 체념에 지친 국민들을 일으켜 세워 물불 안 가리고 뛰도록 해야 했다. 지난 수백 년 세월을 양반 지주, 탐관오리들에게 수탈당하며 가난을 숙명처럼 떠받들며 살아온, 국민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민들을 일으켜 세우려면 국가의 행정력만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들 스스로의 내면에 잠자고 있는 “우리도 노력하면 잘 살 수 있다”는 본능에 불을 붙여야 한다.

이런 차원에서 탄생한 정신운동이 새마을운동이었고, 그 구호가 근면·자조·협동이었다. 박진환은 근면·자조·협동의 새마을정신은 청교도정신과 상통하는 것이며, 한국적인 자본주의 정신이라고 지적한다. 따라서 새마을정신의 생활화는 한국에 알맞은 자본주의 정신을 가꾸는 작업이었다는 것이다.

1970년 4월 22일 박정희는 부산에서 개최된 한해(旱害)대책 지방행정 기관장회의에서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마을 주민들의 자발적인 의욕이 우러나지 않는 마을은 5천년이 가도 일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마을 주민들이 해보겠다는 의욕을 갖고 나서면 정부에서 조금만 도와줘도 2~3년이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일선의 행정 책임자들이 그러한 분위기를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즉 그 마을의 지도급에 속하는 사람들을 모아서 지도하고 권장해서 그 사람들이 눈을 뜨고 자기들 스스로가 모여앉아서 계획을 짜내고 연구를 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마을 사람들이 해야 할 일과 정부로부터 도움을 받을 일을 구분해서 일해 나가도록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 것은 역시 우리 공무원들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마을까지 자동차가 들어갈 길이 없어 십리 밖에서 지게로 짐을 날라야 하는 이런 고장이 발전하겠느냐는 것입니다. 금년에는 주민들의 힘으로 길을 닦고 다리를 놓아야겠습니다. 주민들의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은 군(郡)이나 도(道)에다 지원을 요청하고, 나머지는 주민들의 힘으로 해 보자는 것입니다. 이 운동을 새마을 가꾸기 운동이라고 해도 좋고, 알뜰한 마을 만들기 운동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이날 이 연설이 새마을운동의 기본 정신이 되었다. “주민들의 힘으로 할 수 없는 부분은 정부가 도와주고, 나머지는 주민들의 힘으로 농촌을 일으켜보자”는 운동. 이것이 박정희 대통령의 새마을정신의 핵심 패러다임이 되었다.

 

2. 새마을운동의 과정

새마을운동의 출발은 1970년 10월이다. 이때부터 다음 해 6월까지 전국 3만 4,665개 부락에 시멘트 300~355부대씩을 무료로 지원했다. 시멘트를 시골 마을에 그냥 나눠준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각 가정마다 개인적으로 나눠 쓰지 말고 반드시 마을 공동사업(마을 진입로 확장이나 작은 교량 건설, 농가지붕 개량, 우물시설 개선, 공동목욕탕 건립 등)에 써야 한다는 것이었다.

정부로부터 시멘트를 제공 받은 부락 중에는 지원 조건과는 관계없이 농가마다 개별적으로 나눠 쓴 곳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유능한 지도자, 화합과 단결이 잘 되는 마을은 정부에서 지원한 시멘트로 마을 공동사업에 필요한 공사를 진행했다. 정부에서 지원한 시멘트가 모자란 곳은 각 가정이 조금씩 더 보태서 공동사업을 수행한 마을도 있었다.

다음 해에 전년도의 사업 실적을 평가한 결과, 절반가량인 1만 6,600여 마을은 지급된 시멘트를 이용하여 마을에 필요한 공동사업을 수행했다. 나머지 마을에서는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박 대통령은 성과가 뚜렷한 마을에 한해 다음 해에 시멘트 500부대와 철근 1톤씩을 지원했고, 성과가 없는 마을은 지원을 끊었다.

이 소식을 들은 여당인 공화당은 대경실색했다. 지원 대상에서 제외된 부락은 다음 선거에서 여당을 지지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여당 수뇌부에서는 “모든 마을에 골고루 지원해달라”고 강력하게 정부에 요청했다. 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은 이런 요청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박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열린 당정(黨政)협의회에서 “스스로 노력하고 협동하는 마을은 적극적으로 돕는다. 하지만 노력하지 않거나 협동하지 않는 마을은 돕지 않겠다. 이 길만이 수 천 년 내려온 의타심을 뿌리 뽑고 자조하는 정신을 자각시키는 길이다. 이와 같은 방침으로 설령 선거 때 표를 못 얻어 져서 정권을 내놓는 한이 있어도 이 신상필벌의 원칙만은 바꾸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1973년 정부는 전국의 모든 마을의 실태를 조사하고 전국을 마을을 세 등급으로 나누어 마을마다 등급을 부여했다. 등급의 기준은 마을에 건전한 리더십이 존재하는지, 그에 의한 공유재산과 공동사업은 잘 운영되고 있는지, 주민의 소득수준은 얼마인지, 도로나 환경이 얼마나 정비되어 있는지 등이었다.

전국의 마을을 3단계로 등급화

정부가 정한 마을의 등급은 다음과 같았다.

◇자립마을 : 리더십이 건전한 가운데 공동사업을 영위하고 있는 마을(2,300개)

◇자조마을 : 리더십과 공동사업이 불충분한 마을(1만 4,000개)

◇기초마을(underdeveloped village) : 리더십과 공동사업이 없는 저개발의 후진 마을(1만 8,400개)

정부의 지원은 자립마을을 중심으로 차별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자 지원에서 배제된 마을들이 분기하여 새마을운동에 참가하기 시작했다. 각 마을은 정부의 지원을 더 많이 받기 위해 선의의 경쟁을 하게 되었고, 더 좋은 성과를 내기 위해 협동 단결하는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조성됐다. 잠잠했던 농촌 마을들이 너도나도 자발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했다.

자조마을이나 기초마을들은 자립마을로 승격하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했다. 자립마을로의 승격은 시간이 흐르면 저절로 지정되는 것이 아니었다. 자립마을로 지정되려면 다음과 같은 요건이 충족되어야 했다.

①마을에 간선도로 건설

②지붕과 담장의 80% 이상 개량

③경지 수리율 85% 이상

④마을 주변의 개천 정비

⑤마을회관, 창고, 작업장 등 공동시설을 둘 이상 구비

⑥마을기금 100만 원 이상 조성

⑦농외소득의 공동사업을 벌여 농가소득이 호당 140만 원 이상

이러한 여러 기준을 모두 충족하여 자립마을 지정 통지서가 대통령 하사금과 함께 내려오면 마을 사람들은 감격에 겨워 울기도 하고 풍악을 울리면서 잔치를 벌였다.

정부는 농촌 지역의 소득 증대와 생활환경 개선을 위해 막대한 투자를 했다. 투자도 어느 마을이나 고르게 한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선택적, 차별적, 경쟁적 방식을 도입했다. 잘하는 마을엔 더 많이, 못하는 마을엔 아예 지원을 끊었다. 그 결과 1970년에 80%에 달했던 초가지붕은 1975년에는 거의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새마을운동을 통해 마을 안까지 자동차가 들어갈 수 있도록 진입로가 닦였고, 농가 마당까지 경운기가 출입할 수 있도록 마을길이 확장됐다. 진입로 건설과 마을길 확장에 필요한 토지는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기증하여 사업을 진행했다.

280만 호의 농가에 전기를 공급하여 농민들이 텔레비전을 시청하고 각종 가전제품을 사용하게 하여 농촌에서도 현대 문명의 혜택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이른바 ‘전기 없는 마을 없애기 운동’을 벌일 때도 전봇대에서 가까운 마을부터 가설하는 것이 순서지만, 아무리 먼 산골이어도 새마을 사업성과가 좋으면 거기부터 전기를 넣어주도록 지시했다. 전봇대에서 가깝다고 앉아서 전기 들어올 날만 기다리는 나태한 마을은 철저하게 외면당했다.

모자라는 재원은 장기저리의 외자를 도입하여 일을 추진할 결과 1977년에는 농어민들의 98%가 전등불 아래서 생활할 수 있게 되었다. 불과 10여 년 사이에 외딴 섬 마을을 제외하고는 모든 농촌 마을에 전기가 공급된 것이다.

1979년 박정희 정부의 마지막 해에 전국 3만 4,800여 마을 가운데 97%가 자립마을로 승격되었다.

 

3. 새마을운동의 철학-근면·자조·협동

박정희 대통령은 새마을운동을 전국 방방곡곡에 전파하기 위해 1972년 4월 21일, ‘새마을 노래’를 직접 작사·작곡했다. 새마을 노래를 세상에 내놓은 지 5일 후인 1972년 4월 26일에는 새마을운동의 근본 철학인 “근면·자조·협동”이 탄생한다.

이날 광주에서 새마을 소득경진대회가 열렸는데, 박 대통령은 이날 낭독한 연설문을 손수 작성했다. 이 연설문을 메모 정리하는 과정에서 새마을운동의 철학이 탄생하게 된다. ‘새마을운동’이라는 제목이 붙은 이 연설문 메모는 새마을운동의 역사적 자료이므로 내용을 소개한다.

1.

①지금 전국 방방곡곡에서 새마을운동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다. 나도 그 동안 여러 부락을 찾아가보고 보고를 통하여 듣고, 우리 농민들이 우리도 한 번 잘살아 보겠다고 몸부림치는 그 모습을 보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

②도지사 이하 시장, 군수, 기타 모든 일선 공무원들이 토요일도 일요일도 없이 잠바 바람에 밤낮을 가리지 않고 뛰어다니면서 이들을 지도하고 격려하면서도 지칠 줄 모르고 보람을 느끼는 것도 우리 농민들의 그 부지런한 모습에 감동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③확실히 이 운동은 우리 농촌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새 바람이요, 서광이요 희망이라고 본다. 우리 역사상 과거에도 이런 일은 찾아볼 수 없던 일이다. 확실히 우리 민족도 잠재적으로 무한한 저력을 가진 민족이다.

④왜 이러한 저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저력을 발휘하지 못했느냐. 역시 여기에는 어떠한 계기가 마련되어야 하고 자극이 있어야 된다고 본다. 지난 10년 동안 제1·2차 5개년계획을 통해서 우리 국민들이 땀 흘려 이룩한 건설의 성과가 우리 농민들로 하여금 큰 자극을 주었고, 오랜 침체 속에서 잠을 깨고 눈을 뜰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새마을운동은 잘 살기 운동

2. 우리도 하면 된다 하는 자신이 생겼다.

①한 민족이 침체에서 벗어나서 일대 비약을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이 자신이다. 자신이 있으면 의욕이 생긴다. 의욕과 자신이 없는 민족은 아무리 좋은 기회가 있더라도 이것을 이용할 줄 모른다(기회포착 부족). 반대로 의욕과 자신이 왕성한 민족은 역경에 처해서도 이에 굴하지 않고 오히려 이를 전화위복으로 삼을 줄 아는 슬기를 발휘할 줄 안다.

②우리도 그 동안 수없이 많은 고난과 시련을 겪어 왔다. 외적으로부터 침략도 받아봤고, 공산당의 수없이 많은 도전도 받아봤고, 한해(旱害)다 수해(水害)다 하고 수많은 천재(天災)도 받아봤고,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가난이란 서름(설움)을 뼈에 사무칠 정도로 겪어봤다.

③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역경에 굴하지 않았다. 침략자에 대해서는 대결해서 싸워서 이길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하고, 천재는 하늘을 쳐다보고 원망할 것이 아니라 인력으로 이것을 극복하는 방법을 모색해야 하고, 가난은 부지런히 일하면 잘 살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④과거에는 이러한 역경을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일이라고만 생각하고 할 생각도 않았는데, 이제는 우리 힘으로 해낼 수 있다는 자신을 가지게 되었다.

우리가 분발하고 근면하고 협동하고 단결하면 능히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을 얻게 되었다. 이것이 새마을운동이 분연히 일어나게 한 동기가 되고 원동력이 되었다.

3. 새마을운동이란 뭐냐(의의, 개념)

①속담에 논어를 읽고도 논어의 뜻을 모른다는 말이 있다.

②시멘트와 철근 가지고 농로 닦고 다리 놓는 것이다.

③쉽게 말하자면 잘살기 운동이다.

④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거냐?

-빈곤탈피

-소득이 증대되어 농촌이 부유해지고 보다 더 여유 있고, 품위 있고, 문화적인 생활.

-이웃끼리 서로 사랑하고 상부상조하고,

-알뜰하고 아름답고 살기 좋은 내 마을.

-당장 오늘의 우리가 잘살겠다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일을 위해서, 우리의 사랑하는 후손들을 위해서 잘 사는 내 고장을 만들겠다는 데 보다 더 큰 뜻이 있다.(새마을운동에 대한 철학적 의의 발견하자)”

4. 어떻게 해야 잘 살 수 있느냐?

①방법은 다 알고 있다. 문제는 실천이다.

②부지런해야 잘 산다.

③자조정신이 강해야

④온 마을 사람들이 협동정신이 강해야

혼자 부지런해도 안 된다. 온 집안 식구 전부가 부지런해야 한다.

한잡만 부지런해도 안 된다. 온 동리 사람이 전부 부지런해야 한다. 온 동리 사람이 전부 부지런하면 협동도 잘 된다.

5. 협동의 원리

①협동의 필요성

-능률이 오른다. 1+1=2+α. 예: 농로작업, 지붕개량

-단결심이 강해진다

-자신이 생긴다. 협동하면 어마어마한 힘이 생기므로 자신이 생김

-능률-단결심-자신: 안 되는 일이 없다

6. 근면, 자조, 협동정신, 이것이 새마을 정신이다.

이 정신이 있어야만 새마을운동은 성공한다→즉 잘 살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새마을운동이란 정신계발운동이요, 정신혁명운동이다. 동시에 이 운동은 말만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과 실천이 반드시 수반해야 한다. 행동철학이다. 이렇게 되면 우리 농촌은 반드시 잘 사는 농촌이 될 수 있다.

(하략)>

새마을운동의 기본정신을 근면·자조·협동으로 정리한 박정희 대통령 친필 메모.
새마을운동의 기본정신을 근면·자조·협동으로 정리한 박정희 대통령 친필 메모.

이러한 박정희 대통령의 새마을 철학과 비전, 자신이 꿈꾸었던 대한민국의 모습을 상징화하여 ‘살기 좋은’, ‘우리 힘으로’, ‘초가집 없애기’, ‘마을길 넓히기’, ‘서로 도와서’, ‘소득증대’, ‘부자마을’, ‘싸우면서 일하고’, ‘새 조국 만들기’라는 키워드가 정리되었다. 이러한 키워드를 따라 부르기 쉽도록 정리하여 단순하면서도 씩씩한 행진곡 풍의 노래에 담아 전국에 보급한 것이 ‘새마을 노래’다.

 

4. 새마을운동이 성공한 이유

(1)철저한 정의의 신상필벌 원칙

새마을운동은 잘 살기 운동이다. 북한 지도자가 수 십 년 동안 “기와집에서 이밥(쌀밥)에 고깃국을 먹게 해주겠다”는 말을 염불처럼 외웠지만 아직도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있는 것과 비교하면 그 의미가 자명해진다.

박정희는 농민들을 잘 살도록 하기 위해 1970년대 중반부터 새마을운동을 농어민 소득증대사업으로 전환됐다. 박 대통령은 쌀이나 보리 등 식량작물 위주의 영농만으로는 농가 소득이 증가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식량작물 외에 수익성이 높은 경제작물이나 특용작물, 공업용 원료를 생산하는 방향으로 영농방법을 근본적으로 전환해야만 농가소득 증대 및 농촌 근대화를 이룩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를 위해 전국적으로 약 100개소에 품목별 주산단지를 조성하는 농어민 소득증대 특별사업을 추진했다. 경제작물이나 특용작물, 공업원료를 생산하더라도 그것을 원료로 팔면 큰 소득을 얻지 못하기 때문에 이것을 가공처리하고 공업제품화하여 국내 시장에 팔거나 해외에 수출해서 농업과 공업이 함께 발전할 수 있도록 농수산물 가공처리공장을 건설하도록 유도했다. 이것이 박정희가 추진한 농공(農工)병진정책이다. 박 대통령은 농수축산물의 가공산업을 이끌기 위해 정부 산하에 농어촌개발공사를 발족시켰다.

그리하여 서울시 주변 농촌에서는 고등원예, 고등소채를 재배했고, 다른 농촌지역에서는 잠업(蠶業), 양송이나 과일, 엽연초 재배, 아스파라거스 등을 키우는 온상재배와 양봉, 목축 사업이 추진되었고, 새마을공장을 건설해 농한기에도 농외소득을 올리도록 했다. 그 결과 농가소득이 증대되어 1974년에는 농촌의 소득이 도시근로자 평균 소득을 초과했다. 다수확 품종인 통일벼의 대량 보급을 통해 식량의 자급자족이 가능해지면서 수 천 년 이어오던 보릿고개, 초근목피란 말 자체가 사전에서 사라졌다.

1973년 4월 22일 전남 광주에서 열린 새마을 지도자 대회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새마을운동과 관련하여 자신의 경영철학과 역사관이 담긴 유명한 연설을 했다. 다음은 당시 연설의 요약이다.

“새마을 운동이란 무엇이냐? 나는 작년 이 자리에서 간단히 말해 ‘잘살기 운동’이라고 정의했다. 여기서 잘 산다는 건 나 혼자 잘 먹고 잘사는 게 아니고 서로 도와서 나와 함께 이웃도 우리 고장도 우리나라도 잘사는 것을 뜻한다. 아니 그것을 뛰어넘어서 우리 후손들에게 부강한 나라,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들어 물려주는 것, 이것이 참되게 잘사는 것이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벌이고 있는 새마을 운동의 궁극적인 목표다.

지난날 우리나라는 일제 강점시대와 6·25 전쟁을 거치면서 너무 못살아서 외국에 갔다가 누가 어느 나라에서 왔느냐고 물으면 ‘나는 한국 사람이오’ 하고 떳떳하게 말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앞으로는 누가 물으면 ‘나는 대한민국 사람이오’ 라고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그런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 그런 자랑스러운 나라를 만들어 후손들에게 물려주자. 이것이 우리가 노리고 있는 새마을 운동의 궁극적인 목표인 것이다.”

“새마을운동은 인간개조와 사회개조를 위한 개혁”

박정희는 말로만, 구호로만 “잘 살자”고 외치는 스타일의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구체적인 실천 방법을 자세히 내놓고 자신이 선두에 서서 국민들을 이끌었고, 공무원 조직을 동원하여 뒤에서 밀며 실의에 빠진 국민들을 분기시켰다. 잘 사는 나라를 만드는 방법은 간단했다. 남을 탓하지 말고, 내가 먼저 나서서 스스로 노력하고, 부지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첫째는 근면이다. 옛말에 일근선지장(一勤善之長)이요, 일태악지장(一怠惡之長)이란 말이 있다. 부지런한 것은 착한 것의 으뜸이요 게으른 것은 나쁜 것의 으뜸이란 뜻인데 새마을 정신의 정곡을 찌르는 말이 될 것이다. 그 다음에는 자조 정신이 강해야 한다. 서로 협동을 잘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근면·자조·협동이 새마을 운동의 행동강령이 되는 것이다. 이는 조국근대화를 위한 일대 약진운동이요, 동시에 범국민적인 정신혁명운동인 것이다. 또한 이 운동은 반드시 주민의 소득증대와 직결돼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소득증대가 이루어지지 않고는 열의가 식어버리고 점차 흥미를 잃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마을운동을 단순하게 잘 살기 운동이 전부라고 볼 수는 없다. 국민들을 배불리 밥 먹이려면 의욕을 상실하고 절망과 체념에 지친 국민들을 일으켜 세워야 했기 때문이다. 지난 수백 년 세월을 양반들에게 수탈당하며 가난을 숙명처럼 떠받들며 살아온, 국민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민들을 분발시키기 위해 시작한 것이 새마을운동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영훈 교수는 새마을운동이 인간개조와 사회개조를 위한 개혁이었다고 지적한다. 박정희 대통령은 5·16 군사혁명 직후 발표한 혁명공약 제3장에서 “나라의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퇴폐한 국민 도의와 민족정기를 바로 잡는다”고 했는데, 그것의 실천이 곧 새마을운동이었다는 주장이다.

새마을사업은 전국의 농민들이 마을 단위로 자기들 스스로의 힘으로 사업을 전개하는 것이 기본이었다. 정부의 역할은 농민들이 자기 마을을 근대화하는 데 적극 참여하는 분위기를 조성해 주는 일이었다. 즉 잘 하는 마을에는 파격적인 지원을, 못하는 마을에는 지원을 끊는 정의의 신상필벌(信賞必罰) 원칙을 엄격히 적용했다. 이러한 신상필벌이 성공의 요인이었다는 점은 좌승희가 가장 먼저 제기한 것이다.

이런 원칙이 엄격하게 집행되자 새마을 사업에 소극적이었던 마을들이 “우리도 낙오해서는 안 되겠다. 남보다 더 잘 사는 마을을 만들자”면서 분발하기 시작했다. 박정희는 마을 간에 경쟁 심리를 부추겨 성취도를 높이도록 새마을 운동을 정의하고 설계했다.

박정희의 새마을운동이 획기적이었다는 평을 듣는 이유에 대해 경제학자 좌승희는 “모든 사람을 다 돕는 보편적 방식을 거부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좌승희는 모든 사람을 돕는다는 사고방식보다는 “뭔가 해 보겠다”는 강렬한 의지를 가진 사람들을 선별해서 돕는, 선택적이고 차별적이며 경쟁적인 방식으로 일을 추진한 것이 결정적인 성공 요인이었다고 말한다. 아울러 새마을 지도자는 절대 정당 가입을 금지시켜 정치성을 철저히 배제했다는 점도 성공의 이유로 꼽아야 할 것 같다.

박정희는 “누구를 막론하고 새마을운동을 정치적으로 이용해서는 안 된다. 새마을운동이야말로 농민들에게 근면 자조 협동의 정신을 일깨워 농민이 잘 살고, 마음을 잘 살게 하며, 나라가 잘 되게 하는 순수한 국민운동으로 승화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만약 새마을운동에 정치색이나 권력자의 친인척 문제 등이 끼어들었다면 결코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란 사실은 전두환 정부의 사례를 통해 적나라하게 체험한 바 있다.

(2)통합적 개발(integrated development) 개념 도입

새마을운동의 추진방식을 보면 박정희 특유의 패키지 프로그램(package program), 혹은 통합적 개발(integrated development) 개념이 일사불란하게 작동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본다.

야산을 개간하고 양잠 주산지를 조선하는 일은 농림부 단독의 힘만으로는 잘 추진될 수 없는 일이었다. 야산을 개간하고 도로를 개설하는 데는 건설부 소관 장비와 기술 인력이 필요했고, 양잠농장들이 누에를 치는 데는 전기가 들어가야만 좋은 누에고치가 생산될 수 있었다. 오지에 있는 양잠농가들이 전등불을 켤 수 있으려면 상공부 산하의 한국전력회사가 전기시설을 해주어야만 했다.

박 대통령은 가장 먼저 일선의 군 지방행정기관들이 지역 내의 소득증대 특별사업을 효과적으로 추진하도록 하기 위해 중앙정부의 관련 부서, 즉 농림·내무·상공·재무·경제기획원의 장차관들로 특별위원회를 구성하고 그 위원장을 국무총리가 맡도록 했다. 그는 농촌 출신이었기 때문에 농촌 개발을 위해서는 중앙정부의 관련부처들이 서로 협조를 잘 해야만 실효를 거둘 수 있다는 사실을 꿰뚫어본 것이다.

그리고 농촌 근대화를 앞당기기 위해 각 부처가 맡은 분야에서 십시일반으로 예산을 배정하도록 의무화 했다. 내무부는 시멘트와 철골을 전국의 마을에 배급하는 책임을 맡았다. 이것들이 마을 주변의 생활환경을 개선하는 데 쓰여지도록 행정지도를 담당했다. 새마을사업이 추진된 1971년부터 1978년까지 8년 동안 새마을사업을 위해 정부가 전국의 마을에 지원해 준 시멘트는 마을당 2,100포대, 철골은 2.6톤이었다.

1970년대의 한국경제는 시멘트와 철골을 국내에서 생산하고 있었다. 때문에 이 자재들을 마을 단위까지 아낌없이 지원할 수 있었다. 만약 시멘트와 철골이 국내에서 생산되지 못해 해외에서 수입해야 하는 상황이었다면, 외화 부족으로 충분한 양을 마을 단위에 지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상공부는 농촌에 전기 가설을 담당했다. 상공부는 한국전력으로 하여금 농촌의 전기보급률을 높이는 일에 적극 참여하도록 했다. 19977년에 전국의 거의 모든 농가가 근대화의 혜택을 받게 되어 밤에도 낮처럼 공부하고 일할 수 있게 되었고, 가전제품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체신부는 마을 단위에 전화 1대씩을 가설하는 일을 맡아, 100호 정도의 농가들이 1대의 전화를 공동으로 이용함으로써 농촌 주민들의 긴급한 전화 수요를 충족시켰다. 보건사회부는 읍면 단위로 간이보건소를 설치하여 의사와 간호사 1명씩을 배치하여, 지역 농민들에게 1차 진료와 질병 관련 상담, 가족계획에 관한 정보를 제공했다.

농림부는 다수확 신품종이었던 통일벼의 보급과 함께 고미가(高米價) 정책으로 농민들의 증산 의욕을 높였다. 게다가 1968년부터 시작된 품목별 주산단지 조성사업의 성과가 1970년대 들어오면서 나타나기 시작하여 쌀농사 이외의 새로운 소득 작목에서 현금소득이 늘어났다. 그 결과 1970년대의 농가소득은 도시 근로자들의 가계소득보다 높아졌다.

정부 전 부처가 혼연일체가 되어 참여

이처럼 농민들이 마을 단위에서 자신들의 힘으로 근대화 사업을 일으키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분위기 조성을 위해 정부 내의 각 부처들이 십시일반으로 소관 부서 예산의 일부를 농촌부문에 배정하도록 시스템화 한 것이 박정희의 리더십이었다.

박정희는 평소부터 농촌 근대화는 어느 한 분야만 근대화되더라도 다른 요인들이 전근대적일 경우 실효를 거두지 못한다는 농촌의 실정을 파악하고 있었다. 때문에 이와 같은 범정부적 참여를 위한 시스템을 구축한 후 농촌 근대화를 위한 패키지 프로그램, 혹은 통합적 농촌개발 프로그램을 도입한 것이다.

이처럼 정부 내의 여러 부처가 새마을사업에 참여했지만, 정부 내의 기존 기구와 인원들을 이 사업을 위해 전용했을 뿐 새마을사업을 위해 새로운 기구나 인원이 늘어나지 않았다. 또 1970년대에 전국적으로 실시된 새마을교육도 기존의 공무원교육원 시설과, 그곳에 근무하던 교수요원들이 새마을교육을 위한 교과과정을 추가했다. 때문에 새마을교육을 위한 별도의 비용지출은 많지 않았다.

(3)지도자가 새마을 운동에 목숨 걸어

박정희는 새마을운동에 관한 긍지와 자부심으로 가득 차 있던 사람이다. 그는 1973년 11월 22일 새마을운동 지도자대회에 참석하여 “후세에 너의 조상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나의 조상은 1970년대의 새마을운동에 앞장섰던 농민이라고 일러주자”고 연설했다.

새마을 운동이 전국에서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날 때 박정희는 “내가 대통령이 안 됐으면 새마을 지도자가 되었을 것”이라는 말을 하고 다녔다. 박정희는 새마을 운동을 성공시키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다.

청와대에서 새마을 운동 실무 담당자였던 박진환 특보의 증언에 의하면 대통령 지시에 의해 국무위원들이 절반으로 나뉘어 단체로 새마을연수원에 입소하여 교육을 받았다. 1974년 7월 20일 장·차관, 대학총장, 언론계의 중진 등 53명이 입교하여 남녀 새마을지도자들과 함께 구보를 하고 노래도 부르고, 새마을 성공사례를 들으면서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1진이 교육을 마치고 현업 복귀하고 2진의 입소는 8월 17일로 예정되어 있었다. 장·차관들의 입소 교육을 앞두고 있던 1974년 8월 15일, 육영수 여사가 문세광의 흉탄에 사망했다. 다음날 새벽 2시 경 박정희 대통령은 육 여사의 시신이 안치된 청와대 접견실로 내려와 오래도록 통곡을 했다. 그때 김종필 국무총리가 들어오자 울음을 멈추고 이렇게 말했다.

“김 총리, 내일 나머지 장관들은 예정대로 새마을 교육 받으러 입소하는 거지?”

김종필 총리가 “아니올시다. 국장(國葬) 때문에 장관들의 새마을교육은 일단 연기해야 겠습니다” 라고 답하자 대통령은 “국장이라고 해서 모든 장관들이 있어야 할 필요가 있나? 먼저 다녀온 장관들만 있어도 되지 않겠는가” 하고 입소를 지시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영부인이 암살범의 흉탄에 목숨을 잃어 온 나라가 비탄에 잠겨 있는 마당에 국무위원들 새마을 교육을 챙기다니…. 박진환 특보는 이 말을 듣고 “박정희 대통령이 새마을 운동에 목숨을 걸었구나” 하는 생각에 전율을 느꼈다고 한다.

 

5. 새마을운동의 구체적 성과

(1)쌀의 자급자족 성공

새마을사업의 직접 비용은 전국의 마을 단위로 정부가 지원해준 시멘트와 철골, 그리고 우수마을에 대해 정부 포상금이 지급된 것이 전부였다. 전국의 마을에 지원한 시멘트와 철골을 1974년 시가로 환산하면 마을당 연간 250만 원에 불과했다.

이 정도의 투입(in put)으로 마을 주민들이 건설한 콘크리트 교량의 총수는 전국에서 6만 5,000개, 마을당 총 2,000미터의 마을길이 넓혀졌으며, 토지 소유주들은 새마을사업을 위한 부지를 위해 마을당 약 1,500평의 소중한 땅을 희사했다. 그리고 마을 주민들은 10년 동안 무보수로 새마을사업을 위해 노동력을 제공했다.

이 수치는 전국에 있는 3만 3,000여 개 마을들에서 실시된 전국 평균치다. 1972년부터 1979년까지 많은 사람들이 새마을교육을 받았다. 이 기간 중 합숙 교육을 받은 사람은 67만 7,900명, 비합숙 교육 인원은 6,953만 2,000명이었다.

1967년에는 농가 소득이 도시가구의 60%에 불과했으나 꾸준한 소득증대사업 성과가 나타나면서 1974년에는 도시 노동자의 소득을 넘어서기 시작했다. 액수로 보면 1970년 농가 소득은 25만 6,000원이었으나 1975년 87만 3,000원, 1978년 160만 원으로 8년 사이 6배 이상 증가했다. 이러한 농가소득 증대는 통일벼 등 다수확 신품종 개발로 인해 쌀 수확량이 획기적으로 늘어난 것이 큰 요인이었다.

1977년 우리나라의 쌀 수확량은 4,710만 6,000섬으로 사상 처음으로 4,000만 섬을 돌파해 보릿고개 문제를 완전 해결했다. 이후 해마다 수백만 섬의 쌀이 남아돌아 ‘혼분식 장려 캠페인’을 중단하고 ‘쌀 소비 촉진운동’을 벌여야 하는 상황이 됐다.

주부들은 농촌에서 성행하던 도박과 음주의 폐단을 물리치는 데 앞장섰고, 끼니때마다 절미통에 쌀 한 숟가락씩을 저축하여 부녀회 기금을 마련하고, 마을금고를 통한 저축운동을 시작했다. 무당이나 점쟁이들에 대한 수요가 크게 줄어 농촌에 거주하던 무당이나 점쟁이들이 대도시로 이주해야만 했다.

정부가 제시한 15가지의 새마을사업들 가운데 가장 어려웠던 것은 마을 안길을 넓히는 일이었다. 동력경운기가 농가의 마당까지 드나들려면 마을 안길 양쪽의 담과 건물 일부를 헐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의사결정은 마을 주민들이 마을회관에 모여 다수결로 결정했다. 박정희 정부에서 경제특보로 일했던 박진환은 이 과정에서 그 동안 농어민들이 경함하지 못했던 민주적 의사결정을 하면서 민주주의를 체득했다고 지적한다.

(2)국민에게 우유와 고기를 배불리 먹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농가소득 증대를 위해, 그리고 전 국민 건강 증진을 위해 낙농을 적극 장려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시절부터 낙농업 육성에 관심이 많았다. 이유는 “아이들에게 우유를 원 없이 먹이기 위해서”였다. 경향신문 보도에 의하면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1962년 9월 경남 마산을 방문하여 양찬우 경남지사에게 “도시에 낙농 클럽을 많이 설치하여 체질이 허약한 학생들에게 우유를 공급하라”고 지시하는 장면이 발견된다.

박 대통령의 낙농사업 육성은 대통령 취임 후 서독과 호주·뉴질랜드를 순방하면서부터 본격화되기 시작한다. 1964년 박 대통령이 서독을 방문하여 함보른 탄광에서 광부와 간호사를 격려하며 눈물을 흘린 사실을 너무나 유명한 일화다. 그런데 서독에서 푸른 숲에 감탄하고 낙농산업에 큰 전기를 마련한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박 대통령은 서독의 낙농업에 큰 감명을 받고 독일 지도자들에게 “우리 국민들에게도 원 없이 우유를 먹이고 싶다”는 소박한 희망을 밝혔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서독은 우리나라에 낙동 전문가 5명을 파견하고 낙농 관련 각종 장비와 200여 두의 홀스타인 품종 젖소도 제공했다. 국내에서 본격적인 낙농업의 출발은 1969년 한독(韓獨) 정부 간의 낙농협력으로 출범한 ‘한독시범농장(현 안성팜랜드)’로 본격화 되기 시작했다.

한독시범농장의 목장 부지는 농협이 매입했고 장비와 기술지원 및 차관 지원은 서독이 담당했다. 200여 두의 홀스타인 젖소는 캐나다에서 들여왔다. 독일 벤츠에서 만든 최고급 독일제 낙농업 관련 기계가 우리나라에 도입된 것도 이 무렵이다.

박 대통령은 1968년 9월 15일부터 9월 25일까지 호주와 뉴질랜드를 순방했다. 박정희는 뉴질랜드 방문 기간 중 목축업과 낙농업 현황에 대해 큰 관심을 보였다. 낙농업이 발달한 뉴질랜드 중부지역의 치즈공장을 방문한 박정희는 공장장에게 “이만한 규모의 공장을 세우려면 비용이 어느 정도나 들며, 공장을 정상가동 시키는 데 몇 마리의 젖소가 있어야 하는가, 근무자는 몇 명이나 필요한가”를 꼬치꼬치 캐묻고 직접 메모를 했다.

언론보도에 의하면 홀리오크 뉴질랜드 수상은 오클랜드 시장 주최의 만찬회에서 “박 대통령을 안내하는 동안 그가 너무 자세하고 많은 질문을 하여 답변하느라 혼이 났다”고 밝혔다.

당시 박정희와 축산 실무자들은 호주와 뉴질랜드를 방문하여 목초 재배, 사료 저장방법 등 기술을 배웠다. 이때 박 대통령은 뉴질랜드 정부에 젖소 지원을 요청했고, 뉴질랜드 정부가 이를 받아들여 경기도 평택에 한·뉴 시범목장(현 매일유업 시범목장)을 설립하게 된다.

‘수입젖소 환영’ 현수막 내걸어

이 농장에서 뉴질랜드로부터 도입한 젖소 101마리가 사육되었는데, 농어촌개발공사가 외국 차관과 기술을 제공받아 시범목장을 건설하고, 사람도 타기 힘든 비행기에 젖소들을 태워 수입을 했다. 젖소가 한국에 도착할 때 ‘수입젖소 환영’이라는 현수막을 내걸고 환영식을 거행할 만큼 우리나라의 낙농업 육성은 간절했다. 박정희는 황무지에 풀씨를 뿌려 목초를 기르고 소들을 먹이는 곳을 찾아가 당부했다.

“열심히 키워서 우리 국민에게 우유와 고기를 많이 먹입시다. 축산도 식량입니다.”

당시 국내의 축산 전문가들은 한국의 토양에서는 축산업이나 목축업이 어렵다는 비관론에 젖어 있었다.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박정희는 이렇게 외쳤다.

“한국 땅에는 목초가 자라지 않는다, 한국에서는 축산이 안 된다는 결론부터 먼저 내놓으면 한국의 축산은 영원히 발전하지 못합니다. 우리나라 땅처럼 저렇게 버려두면, 거기는 1년 뿐 아니라 10년을 두어도 단 1전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만큼 우리는 국토를 이용할 줄 모른다 이겁니다. 다른 재주는 비상한 국민이라 생각하는데, 풀을 가꾸거나 나무를 가꾸는 재주는 세계에서 제일 뒤떨어져 있습니다.

한국 사람의 관념이란 풀이란 것은 그저 그대로 내버려 두면 잘 자라는 거다, 안 자라는 것은 비가 오지 않기 때문에 사의 잘못이 아니라 하늘의 잘못이다, 이런 사고방식을 가졌기 때문에 우리나라 목초가 발전이 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정부는 시범목장에서 공급되는 원유로 우유를 생산하기 위해 정부 투자기관인 한국낙농가공을 설립했다. 후에 이 회사의 지분을 사업가 김복영에게 매각하여 매일유업(주)이 탄생했다. 박 대통령은 또 일본 와세다대학 출신인 홍두영에게 낙농사업을 권장하여 남양유업이 출범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축산·낙농업을 부흥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성과도 많이 나왔으나 제주도에서는 결과가 신통치 않았다. 반면에 맥그린치 신부가 제주도에서 운영하는 이시돌 목장은 승승장구했다. 대체 그 이유가 무엇일까? 어떤 차이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그 해답을 찾기 위해 박 대통령은 1972년 6월 5일 청와대에서 개최된 월간경제동향회의에 맥그린치 신부를 초청하여 목장 운영현황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들었다. 박 대통령은 그때까지만 해도 축산이란 그저 소와 말, 양들을 야산에 풀어 놓고 그것을 가둬 기를 수 있는 축사나 관리사만 있으면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이시돌 목장 성공사례를 배우다

그런데 파란 눈의 외국인 신부는 “그런 방식으로는 절대 성공할 수 없다”면서 “벌판을 갈아엎은 다음 거기에 목초를 심어 우마를 방목하는 목초지 방식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상세하게 설명했다. 맥그린치 신부의 보고를 들은 박 대통령은 큰 깨달음을 얻었다. 맥그린치 신부로 인해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던 목장관(觀)을 완전히 바꾼 것이다.

박 대통령은 1973년 2월 16일 연두순시를 위해 제주도를 방문한 자리에서 이승택 지사에게 다음과 같이 신개념의 축산진흥을 지시했다.

“야산에 소나 말을 풀어놓아 기르는 재래식 사육방식인 방목을 점차 줄여나가고 목초재배에 힘써야 한다. 또 가축을 괴롭히는 진드기가 있어서 안 된다는 소리만 하고 들과 산에 불이나 지르고 있으면 되겠는가. 대학의 농대와 농고 학생들에게도 새로운 축산방법을 교육시키고, 축산농가에게도 목초 재배기술을 보급시켜라.”

맥그린치 신부가 운영하는 이시돌 목장 방식으로 초지조성과 목장경영을 전환하도록 지시한 것이다. 다음날인 2월 17일 박 대통령은 성공의 현장인 이시돌 목장을 직접 방문했다. 늦겨울 비가 내리는 가운데 박 대통령은 4시간 동안 목장 곳곳을 살피며 맥그린치 신부로부터 현대식 축산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들었다. 그날 저녁식사에 맥그린치 신부를 초청한 박 대통령은 이시돌 목장의 숙원사업이었던 한림항까지의 도로 포장, 전기와 전화 가설을 해결해 주었다.

박 대통령의 특별지시에 의해 2월 16일 제주도는 목야지 면적 5만 헥타르 기준, 1헥타르 당 2두로 계산하여 축우 10만두 확보에 나섰다. 이를 위해 200헥타르 규모의 축산개발사업소를 설치하여 축산 개발의 기술적 업무와 인공 수정 업무를 담당하도록 했다.

또 진드기 퇴치를 위한 약욕장과 간이 구제장을 다수 설치하고 제주도 전체가 동시에 적극적으로 구제에 나서 큰 성과를 올렸다. 박 대통령은 제주도에서 본격적으로 축산진흥을 성공시키려면 농가에서 부업 수준의 소규모 축산으로는 의미가 없다고 판단하고 축산에 뜻이 있는 농가들이 집단으로 초지를 조성하고 협업해서 일정 규모 이상의 축산을 하거나, 축산을 기업화하여 대규모 축산을 유도했다.

이를 위해 박 대통령은 5·16 도로 연변, 해발 200미터 중산간 지대에 대학의 축산과와 농고 축산과를 졸업한 우수한 청년들을 선발하여 이들이 협업농장을 마련하는 것을 적극 지원했다. 협업축산과 기업목장을 위해 세제상의 감면도 해주었다.

정부의 축산진흥정책이 본격화되자 조중훈 한진그룹 회장이 제주 동부지역에 위치하고 있던 대규모 말 목장이었던 녹산장(鹿山場) 터를 사들여 제동목장을 건설했다. 제동목장은 도내 중산간 유휴지 개간을 통해 생산성이 높은 초지를 조성, 초지 위주의 육우 생산 체계를 확립했다.

이어 대단위 목장인 대원목장, 남영목장, 건영목장에 대한 본격적인 투자가 시작되어 축산 제주의 틀이 갖춰졌다. 이로써 박정희가 선언했던 ‘축산입국’은 현실화되었고, 그 결과 전 국민은 원 없이 우유를 마실 수 있게 되었고 고기를 먹을 수 있게 되었다.

(3)한국적 민주주의의 실천도장 역할을 하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3년 11월 22일, 전국새마을지도자대회에서 새마을운동을 “참다운 민주주의를 뿌리박기 위한 실천도장”이라고 선언했다. 이유는 이렇다.

새마을운동은 한두 사람이 모여서 되는 것이 아니다. 온 부락 사람들이 전부 참여해야 한다. 우선 부락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여 그 부락에서 가장 산망 높고 창의적이며 헌신적인 부락 지도자를 전체 의사에 따라 뽑아야 한다. 그리고 그 부락의 발전을 위해 모든 사람의 의견을 들어 종합하고, 모든 사람의 동의를 얻어서 해야 한다. 결코 한두 사람의 의견을 가지고 추진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의 의견을 듣고 모든 사람의 동의를 얻은 후에는 그 부락 전체의 이익이 될 수 있는 사업을 선택하고, 남녀노서 존부가 참여하여 서로 협동하고 땀 흘려 이 일을 추진해야 한다.

여기서 얻어진 성과, 소득은 부락민들에게 골고루 공평하게 돌아가야 하고, 또 부락민들의 동의를 얻어 일부 소득을 부락 공동기금으로 저축해야 한다. 그 저축한 것이 어느 정도 축적되면 또 다시 부락 사람들의 전체 의견을 모아서 부락 공동이익사업을 결의하여 이를 추진해 나가야 한다. 이것이 새마을운동이다.

이런 과정이야말로 가장 훌륭한 민주주의적 방법이며, 참다운 민주주의라는 것이 박정희 대통령의 지론이었다.

박정희는 한국의 민주주의는 새마을운동과 같이 점차적인 훈련과 실천을 통해 하나하나 뿌리를 박아 나갈 때 비로소 정착할 수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민주주의도 그 실천 과정에 있어서는 근면·자조·협동의 정신이 있어야 하며, 이것이 결여된 민주주의는 참다운 민주주의가 아니라고 그는 주장했다.

마지막으로 박정희의 민주주의관을 소개한다.

“우리가 민주주의를 앉아서 놀고, 먹고, 선거 한번 치르고 나면 전부 정부에 의지하면 된다는 의존심만 양성하고, 여·야, 아랫동네·웃동네, 이 마을·저 마을이 전부 분열하여 서로 싸우고 욕하고 하는 것으로 착각해서는 안되겠습니다. 나는 이런 민주주의가 오래가면 그 사회는 멸망한다고 생각합니다.”

(4)참다운 애국심을 기르는 실천도장

박정희 대통령은 새마을운동을 “참다운 애국심을 기르기 위한 실천도장”이라고 강조했다. 살기 좋은 내 고장을 만들기 위한 애향심은 곧 애국심과 직결된다는 주장이었다.

우리가 살기 좋은 내 고장을 만들기 위해 땀 흘려 일하는 데 보람을 느낄 줄 알고, 그 보람을 느끼는 사람은 나라를 위해 애국하는 데 참다운 삶의 보람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진정한 애국자다.

나라가 잘 살아야 나도 잘 살 수 있으며, 나라가 잘 살자면 나 자신부터 근면하고 자립하고 협동할 줄 알아야 한다. 애국이라는 것은 이론이나 관념만 가지고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사회에는 왕왕 입만 가지고 애국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는데, 애국도 그 실천과정에서는 반드시 근면·자조·협동이 따라야 하며, 그것이 없는 애국은 참다운 애국이 아니다. 근면·자조·협동을 통해 땀과 노력이 쌓이고 쌓여서 영글어진 그 열매가 참다운 애국이라고 박정희는 선언했다.

지금 우리 사회는 민주주의가 너무나 만개한 나머지 자유민주주의를 폐기하고 인민민주주의, 혹은 사회민주주의, 심지어 전체주의적 주체사상 유토피아로 나가야 한다고 악을 쓰는 집단이 집권하여 국정을 이끌고 있다. 또 입만 열면 애국 운운하면서, 실제로는 자기 나라를 음으로 양으로 해치는 인간들이 도처에 널려 나라의 기둥뿌리를 파괴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지하에 계신 박정희 대통령이 이 사실을 아신다면 뭐라고 이 국민들을 꾸짖을까….

 

6. 새마을운동의 교훈-리더십과 팔로워십의 조화

무엇보다 새마을운동의 값진 성과는 그 동안 ‘수탈의 대상’으로만 존재하던 농민들의 잠재력을 폭발시켜 국가발전에 동참시켰다는 점이다. 피터 드러커는 국가나 조직이 순기능을 발휘하려면 개개인이 잠재력과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구성원 모두에게 합당한 지위와 역할이 주어져야 한다고 지적한다.

조선시대는 3%의 소수 양반이 97%의 백성을 수탈하는 철저한 반상(班常)의 계급사회였다. 이러한 계급사회에서는 개개인이 가진 잠재력과 창의력이 제대로 발휘될 기회가 거의 없다. 지배계층은 백성들의 잠재력이 무엇인지 알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백성들이 잠재력을 발휘할까 두려워 교육도 시키지 않아 무학(無學), 문맹의 체제를 유지한 것이다.

박정희는 새마을운동을 통해 가난의 나락에 빠져 신음하던 농민들의 혼을 깨웠다. 그들에게 “우리도 할 수 있다”면서 조국 근대화의 대열에 동참하도록 유도했다. 그것은 조선조 500년, 일제 식민지 36년 동안 짓눌리고 억눌려 살아왔던 97%에 달하는 이 땅의 국민을 일으켜 세워 지도부와 국민이 한 덩어리가 되어 뜨겁게 일하도록 만든 한민족 역사상 최초의 계기를 제공했다.

로버트 켈리는 한 조직의 성공에서 리더십이 차지하는 역할은 20%이며, 나머지 80%는 팔로워십에 의한 결과라고 지적한다. 아무리 뛰어난 리더라도 팔로워들의 지지와 열정이 뒷받침되지 않을 경우 조직을 성공적으로 이끌어갈 수 없다는 뜻이다. 새마을운동은 우리 한민족 역사상 드물게 지도자가 앞장서서 이끌고, 국민들이 열과 성을 다해 그것을 밀어주며 혼연일체가 되어 ‘잘 살아보자’는 열망을 실현한 리더십과 팔로워십(followership)의 완벽한 조화였다.

1998년 7월 조선일보와 한국갤럽이 정부수립 50주년 기념으로 실시한 국민여론조사에서 대한민국 50년 역사상 우리 국민이 성취한 역사상 가장 큰 업적으로 새마을운동이 선정되었다. 뿐만 아니라 유엔의 세계빈곤퇴치 특별위원회는 새마을운동을 후진국 발전의 롤 모델로 삼고 있다. 새마을운동은 또 생활의 모든 면에서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 온,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사회발전운동으로 평가받고 있는 것이다.

이제 새마을운동은 한국의 울타리를 벗어나 전 세계 빈곤에서 탈출하고자 하는 74개국에 수출되었다. 새마을운동을 발상국가에서 배우기 위해 수많은 해외 인사들이 한국을 찾고 있다. 지금도 캄보디아, 라오스 등 아시아 국가와 탄자니아, 콩고 등 아프리카 국가 사람들이 새마을운동을 배우기 위해 우리나라를 찾고 있다. 세계은행에서는 새마을운동을 ‘공동체 주도 발전(Community Driven Development·CDD)로 칭하며 이론적으로 체계화하고 있다.

새마을운동 제창 41년인 2011년에 국회는 ‘새마을운동조직 육성법’ 개정을 통해 ‘새마을의 날(4월 22일)’을 국가 기념일로 제정했다. 현재 새마을운동은 저개발국가의 발전모델로 선정돼 2010년까지 아시아, 아프리카 등 103개 나라 5만여 명이 교육을 받았다.

2003년 한국으로 유학을 온 아프리카 콩고의 은쿠무 박사는 한국의 발전상을 보고는 고민에 빠졌다. 국가발전모델을 배우기 위해 유럽에도 가 보았지만 가난한 자기 조국에 적합한 모델은 찾을 수 없었다. 콩고는 공업용 다이아몬드 생산 세계 1위의 나라다. 그런데 자원도 풍부하고 국토도 넓은 이 나라가 한국처럼 발전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자원도 빈약하고 국토도 좁은 데다가 수많은 국민이 몰려 사는 한국은 무슨 방법을 썼기에 이렇게 잘 사는 것일까.

“새마을운동을 배우고 싶다”

그는 한국의 곳곳을 답사하고 농촌을 둘러보는 과정에서 새마을 운동을 알게 되었고, 대한민국의 성공은 새마을 운동 덕분이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114 안내를 통해 새마을연수원 전화번호를 알아내 무작정 전화를 걸어 “나는 콩고에서 온 사람이다. 새마을 운동을 배우고 싶다. 새마을 운동을 배워 내 조국 콩고를 가난에서 구하고 싶다”고 도움을 청했다.

이 전화가 계기가 되어 은쿠무 박사는 새마을 연수원에서 체계적인 새마을 지도자 교육을 받았다. 2004년 여름방학 때 자신의 조국으로 돌아가 시범마을 5곳을 정해 한국에서 배운 대로 새마을 운동을 시작했다. 이곳은 유엔, 유니세프, 세계식량기구(FAO) 등 국제가구들이 빈곤탈출을 위해 다양한 원조를 해주었지만 실패했던 곳이다.

은쿠무 박사는 줄기차게 새마을 운동을 지도한 끝에 2~3년 만에 결실을 보기 시작했다. 콩고의 2009년 1인당 GDP는 171달러인 데 비해, 은쿠무 박사의 지도하에 새마을 운동을 시작한 키부야 마을 등 18개 마을의 GDP는 600달러로, 콩고 평균보다 무려 3.5배나 높았다.

『중국의 부상(浮上)』(The Rise of China)이란 책을 쓴 미국 랜드 연구소의 윌리엄 오버홀트는 중국을 산업혁명의 길로 이끈 덩샤오핑(鄧小平)이 박정희 모델을 모방했다면서 박정희의 개발전략을 높이 평가했다.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이래 중국이 놀라운 속도로 경제발전하게 된 것은 수출주도의 경제발전 전략을 추구하면서도 대외개방에 신중을 기하고, 국가 주도의 강력한 산업정책을 추진하며, 새마을운동을 따라 하는 등 한국의 경험과 접근방식을 그대로 적용해왔기 때문이다. 수천 년 동안 중국을 추종해왔던 우리나라가 중국에 영향을 주는, 우리 역사상 가장 큰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7. 새마을운동 정신을 뒤집고 있는 문재인 정부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0월 29일, 수원실내체육관에서 에서 열린 2019 전국새마을지도자 대회에 취임 이래 처음 참석해 기념 축사를 했다. 재임 중 이 행사에 참석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대한민국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사관(史觀)에 절어 있는 문재인 대통령이 박정희 대통령의 대표적인 업적으로 꼽히는 새마을운동을 칭송하고, 새마을운동을 현장에서 이끌어가는 지도자들이 모이는 행사에 참석해 그들을 격려하는 것이 여간 부담스럽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문 대통령은 축사를 하는 내내 ‘박정희’란 말은 단 한 마디 언급도 없었다. 아니, 새마을운동을 거론하는 데 있어 박정희를 빼다니. 게다가 새마을운동의 정체성, 즉 기본 정신은 근면·자조·협동이다. 그런데 대통령의 입에서 새마을운동의 핵심 정신은 입도 뻥긋 하지 않고 “나눔과 봉사의 운동”, “함께 잘 사는 나라”를 강조했다. 행사장 전면에는 느닷없이 “생명, 평화, 공경”이란 슬로건과 함께 “미래를 위한 생명살림, 함께 잘 사는 지구촌”이란 구호가 걸려 있었다.

문재인 정부는 새마을운동 지도자들 앞에서 근면·자조·협동의 새마을정신을 “생명, 평화, 공경”“생명, 평화, 공경”은 단어 자체가 애매모호하고 뭘 하자는 것인지 구체적 목표가 막연한데, 이런 것이 어떻게 새마을정신이 될 수 있는가. 정부 차원의 새마을정신에 대한 테러 행위에도 불구하고 새마을 지도자 어느 누구도 항의 하나 없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날 행사를 통해 새마을운동을 껍데기와 모양새만 남겨놓고 통째로 소프트웨어와 근본정신을 말살하겠다고 선언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새마을운동에서 박정희를 빼면 운동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문재인 대통령이 새마을운동을 연설하면서 단 한 번도 “박정희”를 언급하지 않은 이유는, “박정희 없어도 새마을운동은 가능했다”는 점을 부각시키려는 상징조작 같은데, 그것은 무지와 착각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새마을 운동에 목숨을 건 사람이다. 새마을 운동이 전국에서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날 때 박정희는 “내가 대통령이 안 됐으면 새마을 지도자가 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새마을 운동을 성공시키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인물이 박정희다. 이런 인물을 빼고 새마을운동을 논하는 것은 일종의 사기다.

둘째, 누가 뭐래도 새마을운동의 근본정신은 “생명, 평화, 공경”이 아니라 근면·자조·협동이다. 근면·자조·협동의 새마을정신은 청교도정신과 상통하는 것이며, 한국적인 자본주의 정신이다. 따라서 새마을정신의 생활화는 한국에 알맞은 자본주의 정신을 가꾸는 작업이었다. 이처럼 소중한 근본정신을 정체성도 불분명한 “생명, 평화, 공경”으로 절대 대체될 수 없는 법이다.

셋째, “함께 잘 사는 나라”, “함께 잘 사는 지구촌”이란 개념은 새마을운동의 근본정신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망언이자 헛소리다.

문재인 정부의 국정지표 세 번째는 ‘내 삶을 책임지는 국가’다. 내 삶은 내가 책임지는 것이지 왜 국가가 책임지나? 내가 언제 국가더러 내 삶을 책임져 달라고 위탁했나? 내 삶을 책임져주는 비용은 누가 대나?

이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는 법이다. 국가가 내 삶을 책임져주면, 국가는 그 대가로 나의 천부적 권리와 자유를 하나씩 빼앗아간다. 그 마지막 귀결은 공산 전체주의다. 이제 이런 사실을 아는 사람은 다 안다.

새마을운동은 한민족 역사상 드물게 지도자가 앞장서서 이끌고, 국민들이 열과 성을 다해 그것을 밀어주며 혼연일체가 되어 ‘잘 살아보자’는 열망을 실현한 리더십과 팔로워십(followership)의 완벽한 조화였다. 그러한 리더십의 최고 정점에 박정희가 자리하고 있었다. 어느 누가 뭐래도 이런 역사적 사실은 지워지지 않고 우리 국민 모두의 마음에 살아 있다는 사실을 문재인 대통령은 아무리 바빠도 반드시, 꼭 기억해 주시기 바란다.

한국경제의 재도약은 근면·자주·협동의 새마을정신을 국민 모두가 실천할 때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다. 정의나 공정, 다함께 잘 살기 같이 입으로만 거룩한 방법론이 아니라, 열심히 땀흘려 노력한 사람에게 더 많은 혜택이 돌아가는 신상필벌의 원칙이 철저하게 적용될 때 우리는 또 다시 도약에 성공할 수 있다. 아직 우리는 배가 고프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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