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영 기자
이세영 기자

 연극을 볼 때면, 불이 켜지기 전 무대 위가 설레었다. 극이 끝날 때면 멋진 무대를 준비해준 이들에 대해 감사하곤 했다. 그러나 한동안 연극을 못 보다가 2018년 설날 즈음 들린 연극계 이야기는 다소 잔혹하다. 무대 뒤에 가려졌던 불편한 폭로들이 가슴에 아로새겨지는 듯하다.

문화예술계, 언론 등에서 소위 ‘원로(元老)’로 칭송받던 인물들을 겨냥한 성추행ㆍ성폭행 폭로들이 이어지고 있다. 고은 시인과 이윤택 연희단거리패 전 예술감독이 우선적으로 언급되며 사람들은 어디까지 논란이 확산될지 눈치를 보는 가운데, 문화예술계 분위기가 폐허처럼 가라앉은 듯하다.

이번 폭로에서 가장 눈길이 간 부분은 소위 ‘도덕’과 ‘정의’, ‘민족’이란 단어를 중요가치로 삼고 걸어왔다는 이가 이면에서 보여준 민낯과 그가 형성했던 압도적인 문화계 카르텔의 실상이 언뜻 드러나는 모습이었다.

소싯적 과거의 일로 치부하기에는, 성추행 논란이 있었던 시점에도 해당 당사자들이 ‘저항’과 ‘정의’, ‘민족’을 부르짖으며 왕성한 활동을 하던 시기와 일치할 테며, 그 어느 날인가도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정의’를 자처했을 사실들이 무척 아이러니하다.

이런 모습을 보면, 겉에서 마주한 좋은 모습과 가려진 이면이 결코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을 다시 한 번 알게 된다.

앞서 고은 시인과 이윤택씨는 지난해 탄핵 정국 당시 블랙리스트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는 한편 촛불에 대해서 아낌없이 찬사한 바 있다. 고은 시인은 촛불집회를 지지하는 시인들과 시집 ‘천만 촛불바다’(실천문학사·2017)를 출간했으며, 이윤택씨 또한 이른바 블랙리스트 예술인들과 함께 광화문 광장에서 예술공연을 펼쳤다.

블랙리스트 피해자를 자처하며 촛불집회에 동참하고, 권력의 부조리함을 비판하는 그들의 모습은 뭇 사람들에게 동정과 분노, 따뜻한 유대감을 형성하며 ‘참 좋은 사람’으로 인식하도록 했을 것이다. 그러나 베일에 가려졌던 모습이 슬쩍 드러나며 정말 선(善)과 정의인 줄 알고 촛불을 들었던 이들의 동정과 분노가 무색해진다.

이윤택씨의 경우, 지난 19일 ‘공개 사과’ 기자회견을 통해 상습적인 성추행 사실을 인정했다. ‘안마’라는 가치중립적인 단어를 빌려 민망하게도 강제로 성기를 만지게 했다는 사실도 인정했다. 안마를 거부하면 해당 단원을 공개적으로 악평하고 캐스팅에서 배제시켜나갔으며, 극단 내부에서는 속칭 ‘초이스’가 이루어졌다는 소리마저 나온다. 이를 보면 그는 얼마나 실재(實在)와 상이한 단어를 빌려가면서 타인을 속이고 자신의 가면을 굳건하게 다졌는가 싶다.

그러면서 이 씨는 “성관계는 있었지만 폭력적이고 물리적인 성폭행은 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이 차이가 명백한 논란인 만큼 남녀 문제로 치부하기에는 어불성설로 비춰진다. 감히 명백한 ‘예술 권력과 위계’에 기대어 보인 악한 권력남용이자 폭력으로 읽힌다.

이 씨의 ‘성폭행에 강제성이 없었다’는 발언에 전 극단원은 자신의 실명을 공개한 채, 성폭행을 통해 임신ㆍ낙태 등이 이루어졌다고 추가로 폭로하며 파장이 거세다.

한편, 성추행 사건이 점점 표면에 드러나자 한국극작가협회와 한국연극연출가협회, 서울연극협회는 이윤택씨를 제명시키며 선을 그었다. 또한 이윤택씨가 설립한 극단 ‘연희단거리패’도 19일 해체선언을 했다. 연희단거리패 대표 김소희 대표는 “그것이 성폭력이라는 인식을 하지 못했다"고 털어놓았다. 문화부 담당 기자들도 공분하듯 글을 쏟아내고 있다.

그러나 의구심이 든다. 과연 한 명도 몰랐을까. 또 과거 타인의 결점에 대해서 끝까지 잡고 물어지며 분노하던 이들이 지금 상황에도 모두 함께 들불처럼 일어서고 있는 지도 궁금하다.

약자와 피해자를 자처하던 이들이 정작 이면에서는 가해자 역할을 했다는 폭로들과 과거 그들이 비판했던 이들이 교차되며 씁쓸한 웃음이 지어진다.

누군가의 말처럼 이번 사건으로 연극계 전체가 매도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 그러나 ‘정의’와 ‘사회적 책임’을 주장하며 상대의 잘못에는 가차없는 칼날을 휘둘렀던 천연덕스러운 위선에 대해서는 되새겨야 봐야할 듯하다.

현재 추가 폭로들이 이어지고 있다. 아직 커튼 뒤에서는 여전히 숨어있는 성추행 진실에 대한 제2막을 준비하는 모습이다. 입맛이 쓴, 끝나지 않은 이 극이 과연 어디로 나아갈지 주목된다.

이세영 기자 lsy215@pennmik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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