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공재 객원 칼럼니스트
최공재 객원 칼럼니스트

처음엔 별것 아닐 것 같던 토순이의 패러디 뮤지컬이 갈수록 논란이다. 이게 왜 논란거리가 되어야 하는지 참 답답한 노릇이다.

반대론자들은 이 음악이 프랑스 노동혁명가였다고 하면서 그런 노래를 왜 우파가 불러야 되냐고 한다. 그러면서 그런 음악을 좋아하는 이들을 밑도 끝도 없이 ‘탄찬파’라 매도한다.

솔직히 필자는 그게 더 걱정이다. 별것도 아닌 걸로 분열만을 조장하는…..

오히려 그 음악을 좋아했던 수십만의 대중들과 태극기집회 현장 모든 곳에서 울려 퍼지길 요구했던 태극기집회 일반시민들의 마음을 난도질한 것은 아닐까 마음이 아프다.

그럼에도 이 부분을 건들지 않으려는 것은 행여나 이 글이 또 다른 오해로 번질까봐서다. 지금 우파는 예수가 재림해도 욕먹는 시대를 만들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지금 그것을 이해하는 것은 순전히 문화적 시각에서 제시하는 것임을 미리 말씀드리고자 한다.

패러디(parody)와 오마쥬(hommage)

영화에는 패러디와 오마쥬가 있다. 패러디는 말 그대로 있던 것을 비틀어 풍자와 해학처럼 재미를 제공하거나 비꼬는 용도로 사용하고, 오마쥬는 있던 것에 대한 경배와 존경의 개념을 담는다.

패러디의 대표적인 영화로는 ‘총알탄 사나이’ 시리즈가 대표적이고 한때 헐리웃을 풍미했던 영화장르이기도 했으며, 못말리는 람보 시리즈의 ‘멜 브룩스’나 총알탄 사나이 시리즈의 ‘주커 형제’등 상당한 스타감독들을 양산하기도 했다.

특히나, 총알탄 사나이 시리즈는 당시 민감한 외교정치적 문제를 풀면서 매우 코믹하게 고르바초프를 비하하는 등의 개그콘서트적 재미를 제공했다.

오마쥬 영화라면 쿠엔틴 타란티노의 영화들을 들 수 있다. 모든 영화들이 헐리웃을 넘어 일본과 동서양을 아우르는 영화 그 자체에 대한 오마쥬 덩어리들로 영화를 구성하는 가진 것이 타란티노의 영화스타일이다.

그렇기에 쿠엔틴 타란티노 영화는 영화를 많이 본 사람일수록 더욱 더 많은 양의 재미를 느낄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토순이의 ‘레미제라블’ 노래는 무엇일까?

토순이는 분명 패러디라고 했고, 그 이후 각종 뮤지컬을 통해 문재앙 시리즈를 만들며 좀 더 완벽한 패러디의 형태로 우파운동의 재미를 배가시켰다.

그렇다면 그 안에는 그 노래의 원론적인 것에 대한 존경은 담은 오마쥬가 아닌, 비판과 해학을 담은 패러디임을 이미 말한 것이다. 문화적으로 논쟁이 되어야 할 이유가 하나도 없는 것이다.

좋은 것들은 다시 가져오고, 나쁜 것들은 오히려 돌려주자!

그.래.도…. 원작이 그런 것을 뭐하러 쓰느냐 하는 분들에게 질문을 하나 던져보고자 한다.

그렇다면 ‘부역자’라는 말은 왜 쓰시는가?

그 말은 좌파들이 대한민국의 보수들을 권력과 자본의 개로 만들기 위해 만들어 낸 아주 악질적인 단어였다. 같은 논리라면 그 말조차 써서도 안 된다.

그런데도 지금 좌파를 공격하는 단어로 쓰는 이유는?

필자가 인생에서 가장 성공했다고 자부하는 것이기에 건방지게 단언하자면 필자가 만든 ‘부역자들’이란 영화를 통해 그 ‘부역질’이란 보수에게 씌워진 굴레를 탄핵의 주범들과 좌파들의 부역자들에게 다시 돌려줘 버렸기 때문이다.

문화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세 가지 전장 중 하나인 ‘용어전쟁’에서 최소한 한번은 그렇게 이겼다고 자부하기에 필자는 그 입장에서 토순이의 노래를 옹호할 수밖에 없다.

과거에 그 노래가 어떤 것이던 말던 그들이 분노를 담아 불렀던 그 분노의 대상을 저놈들한테 그대로 돌려주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좌파권력에 기생하는 것들에게 부역자라는 굴레를 씌웠던 것처럼, 노동자를 탄압하는 대상을 현 정부로 삼고 분노한 대중의 마음을 담아 집어 던지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문화전쟁의 가장 중요한 전장인 ‘이미지전쟁’에서 안좋은 이미지들을 저들에게 다시 씌우면 되는 것이다.

실제로 그런 모든 것은 좌우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넘어 일반대중들의 감성적 문제일 뿐이지, 정치적인 논쟁은 부가적이라고 보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다시 한 번 ‘그.래.도’ 용납 못하겠다고 하시는 분들에게 다시 하나 질문을 던져보자. 그럼 왜 촛불은 안 드시는 겁니까?

이 질문에 대다수의 분들은 웬 생뚱맞은 소리인가 할 것이다. 저 위의 것이 문제라면 우파는 우파들이 가진 좋은 것을 사용하면 된다. 그게 ‘촛불’이라고 하면 믿으시겠는가?

필자가 알고 있는 한, 촛불의 시작은 바로 효순이 미선이 사고 때 그 어린 학생들을 추모하기 위해 미군이 먼저 들었다고 알고 있다.

만약 그때 우파가 촛불을 먼저 들었다면, 그때가 아니더라도 향후 좌파들이 촛불을 들었을 때 최소한 지금 토순이를 까는 것처럼 촛불을 든 그들을 비아냥거렸다면 어땠을까? 아니, 이제라도 촛불은 우파의 것이라며 촛불을 들 수는 있을까?

장담하건데 아마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왜? 이번 논란에 대해 하나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 아니니 말이다.

토순이 패러디에 대해서는 유럽사까지 들먹이며 공격을 하면서, 왜 자신들의 빼앗긴 이미지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을까?

늘 그랬다. 우파의 것을 좌파가 뺏어간 것에 항의하는 사람을 필자는 보지 못했다. 그렇게 우파는 우파만의 좋은 이미지와 용어들을 빼앗겼다. 그리고, 슬프게도 다시 찾아올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그렇게 좋은 것들을 뺏기고, 나쁜 것들은 다 안고 가면서 비판도 하지 않는다. 지키지도 못하고 빼앗지도 못할 거라면 그럼 만들어 내기라도 해야되는데 그럴 생각도 없다.

있는 것 뺏겨, 나쁜 거 받으면서 찍소리 못해, 뭐 하나도 하는 것은 없어, 여러분들은 이런 결론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하시는가?

아주 죄송하지만 필자의 입장에서 좌우를 떠나 호구도 이런 호구가 없을 정도다. 뭐라도 하나는 해야될 것 아닌가?

있는 거라도 지키든, 뺏긴 거라도 찾아오든, 새로 만들기라도 하든. 그것도 안되면 최후의 수단으로 ‘남의 것(좌파)’이라도 좋은 걸 뺏어와서 내 걸로 만들든.

그것도 정 힘들면 우파에게 던져진 나쁜 것들이라도 저놈들에게 다시 돌려주기라도 하자.

필자의 영화 제목 ‘부역자’들이 그러했듯, 토순이의 음악도 그런 최후의 수단이라고 생각한다.

토순이의 패러디음악은 모든 태극기집회에서 울렸고, 지나가던 일반시민들도 이젠 듣기도 지긋지긋한 군가나 정치병자들의 연설 대신 새로운 음악에 발걸음을 멈췄고, 태극기집회 참여자들은 아스팔트에서의 분노를 그렇게 패러디로 승화시키고 있었다.

그게 그렇게 보기 싫다면 최소한 한 가지라도 하자.

저놈들이 가져간 좋은 것들은 다시 가져오고, 나쁜 것들은 다시 돌려주자. 필자와 토순이 등 문화인들은 후자의 일을 했다. 전자의 운동을 할 수 있는 여건들은 아직 준비조차 안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게 정 보기 싫다면 그것에 반대하는 이들이 전자의 것들을 다시 찾아오길 바란다.

내부총질할 시간에 할 일은 바로 그것이어야 한다.

촛불정권을 무너뜨릴 수 있는 자유의 촛불이 다음 그들의 손에서 퍼져 나가길 기대해 본다.

물론, 기대도 안하고 그 촛불의 이미지에 군가는 어울리지도 않는 치명적 오류가 발생하겠지만!

청년들을 내버려두고, 자신들의 할 일을 하자!

이 글에 불만을 표하시는 분들이 많을 걸로 알고, 이 글로 인해 펜앤드마이크에 누가 되지 않을까도 걱정이 될 정도로 지금 극단적 감정상태에 이 문제가 놓여 있다.

차분한 이성적 판단을 가지고 계신 분들에게 이 문제는 그저 한숨만 나올 얘기일 것이고, 문화전쟁을 치르고 있는 필자의 입장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기에 펜앤드마이크에 죄송함을 가지면서도 글을 마무리하려 한다.

지금 대한민국 우파의 기성세대는 건국과 6.25전쟁, 산업화를 거치면서 대한민국을 이끌어 오신 분들이시다.

충분히 존중을 하지만 그 안에서 놓치고 있던 ‘문화’에 대한 진지는 그래서 좌파들의 숙주가 되어 대한민국의 의식을 갉아먹고, 지금 자라는 아이들의 머릿속을 장악해 버렸다. 그러다보니 이런 문화전쟁을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에 대한 전략전술이 전무하다.

하지만, 지금의 청년들과 어린 세대들은 어르신들이 만들어 놓은 그 풍요로움 안에서 문화를 일상생활에서 접하며 그것으로 인해 세상과 소통하면서 자란 세대다.

무엇보다 책과 신문에서 정보를 취하던 느린 지식의 기성층들과는 다르게 신세대들은 온라인이라는 공간에서 급속하게 빠른 속도로 한 세대가 평생을 거쳐 받아들일 정보들을 빠른 시간안에 받아들이고 있다.

세상물정을 모른다는 판단은 분명 잘못되었다. 기성세대가 홍콩의 자유화시위를 보며 한국상황도 이 모양인데 하며 관심을 거둘 때, 그들은 홍콩의 젊은이들과 함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싸우고 있었다.

온라인 공간에서 연결된 글로벌 네트워크를 통해 그들은 이미 국경과 인종을 넘어선 네트워크가 자연스럽게 형성되었고, 그런 커뮤니케이션의 용도로 문화를 사용하고 있다.

홍콩자유화시위를 지지하는 이 CI는 부역자들의 조감독 출신으로 지금은 ‘이승만tv’의 PD로 있는 후배가 만들었고, 또다른 청년에 의해 홍콩에 전달됐으며, 홍콩시민들이 사용하고 있다.

세상을 바라보는 깊이감은 부족할지라도 그게 청년들이다. 실수하고 실패하고 깨지고 상처받고 그러면서도 다시 활기차게 일어설 수 있는 존재들.

그러니 그들에게 모든 자리를 내어주고 어른들은 물러나라고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아직 그들은 분명 더 실패하고 더 실수해야 할 것이다.

정말 그들이 도움이 필요할 때 그때 진정한 어른들의 모습으로 조언을 해주고 도움을 주면 그들에게 어른들은 분명 공경의 대상이 될테지만, 내년 총선을 바라보고 내부총질해서 경쟁자들을 없애 버리는 기존 보수진영의 정치판 모양새에서 굳이 이들마저 희생자로 만들 필요는 없다고 부탁드리고 싶다.

그러니 그들을 비판하지 마시고 그냥 지켜보기라도 해달라는 것이다. 그들은 분명 해낼 것이고, 이미 이 문화전쟁은 그 청년들만이 해낼 수 있는 영역이다.

무엇보다 그들은 그들이 왜,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 알고 있다. 경험이 없을 뿐…….!

필자가 문화운동을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건 스승님이라 모실만 한 선배 세대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문화운동의 1세대(?)라 말할 수 있는 필자가 그들에게 선배의 모습이기에는 지금 한없이 초라한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그 청년들은 자신들의 역할을 정확히 알고 잘 하고 있고, 필자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을 응원하고 박수를 보내고 마음의 상처를 받고 있는 지금!!!! 이렇게 그들을 응원하는 글 하나 올릴 역량뿐이다.

그래도 버텨내라고 그 청년들에게 말하고 싶다. 미래는 너희들의 것이고, 그렇게 세상을 다 가진 미래의 멋진 선배가 되라고 응원을 보낸다. 지금의 아픔은 더욱 단단한 철의 심장이 되어 미래를 움직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마음 약해지지 말고 자유를 뺏기느니 차라리 (좌파)문화권력의 ‘약탈자’로라도 살아남으라 말하고 싶다.

그리고, 기성세대에 부탁을 드리고 싶다.

빼앗긴 것은 다시 가져와야 하고, 안 좋은 것들은 집어 던져야 하고, 지금과는 다른 새로운 것들 것 만들어 올드했던 보수우파의 모습을 바꾸는 작업을 해야 한다. 저들은 해낼 것이고, 충분히 우파적인 마인드를 탑재하고 있다.

그러니 제발 저들의 선배가 되고, 스승이 되고, 어른이 되어 달라! 뭐 하나 잘난 것 없지만 그나마 몇 없는 문화전쟁의 선배로서 진심으로 부탁을 드린다.

추신: 전 토순이와 아무런 연관도 없으며 만난 적도 없는 사이임을 밝힙니다.

최공재 객원 칼럼니스트(영화감독 / (주)작당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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