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 루터에게 지고 있는 빚
이승만박사에게 지고 있는 빚
청와대 앞, 거리교회에서 자유를 위해 저항하는 루터의 후예들에게 우리는 빚을 지고 있다
그들에게 존경과 감사와 축복을

황승연 객원 칼럼니스트

오늘 10월 31일은 종교개혁 기념일이다. 역사학자들은 지난 1천년동안 일어난 사건들 중 가장 의미 있는 역사적 사건으로 종교개혁을 꼽는다. 지금부터 502년 전, 1517년 10월 31일. 이 날은 마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당 대문에 교황청을 비판한 ‘95개조 논제‘라는 대자보를 내건 이후 종교개혁이라 불리는 일련의 사건들이 시작된 날이다. 이 사건으로 개신교가 탄생하게 되었다. 인간의 존엄과 사고와 생활이 종교개혁 이전과 이후가 크게 달라졌다. 인간 개개인에게 자유가 주어진 것이다. 이로써 역사와 문화의 물줄기가 크게 바뀌었다. 우리가 지금과 같은 자유를 누리게 된 것은 500년 전 독일의 한 사제이자 교수인 ’마틴 루터’가 목숨을 걸고 행한 이 사건에서 시작된 것이다. 루터의 95개조 논제의 핵심은, 교황이나 그 어떤 성직자도 하나님 앞에 우리와 같은 평등한 사람이고,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어서 인간 개개인은 가치 있는 존재이며 서로의 가치를 존중하며 살아야한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평등하고 따라서 아이들과 여자들도 존중받아야 한다는 생각과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개인의 가치와 개인 존중의 문화가 바로 루터가 시작한 종교개혁에서 비롯된 것이고 이러한 것들이 근대적 민주주의의 뿌리가 되었다. 루터가 독일의 평범한 개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만날 수 있도록 빼어난 능력을 발휘하여 독일어로 성경을 번역한 것도 개인의 가치를 높이기 위한 노력이었다. 개인 존중의 근대 민주주의는 종교개혁 이후 집단주의와 공동체문화에서 탈피함으로써 비로소 싹이 트기 시작하여 지금과 같이 발전하였다. 그러나 지금도 집단주의에 의해 끊임없이 도전받고 있다.

루터는 양심의 문제를 특히 강조하였다. 레오 10세가 교황에 즉위한 이후 본격적으로 팔기 시작한 면죄부는, 당시에 진행 중이던 로마 바티칸 대성당 건축자금을 모으기 위한 것이며 또 종교지도자들이 성직을 사기 위해 졌던 빚을 갚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은 알고 있었지만 두려워서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루터는 돈으로 성직을 사고팔며, 돈으로 종교적 구원을 거래하는 면죄부를 팔아 그 돈을 로마로 보내는 것에 양심을 내세워 반기를 들었다. 그의 양심에 면죄부는 용납될 수 없는 것이어서 로마교황청과 싸웠다. 양심을 위해 목숨을 걸었던 것이다. 루터가 1521년 보름스 제국의회에서 심문을 받을 때, ‘주장을 철회하면 살려주겠다‘는 제안을 받고 했던 얘기도 양심에 관한 것이었다. ’나의 양심은 하나님 말씀에 사로잡혀 있고 따라서 어떤 주장도 철회할 수 없다‘고 최후 진술하였다. 하나님에 대한 개인의 양심을 얘기한 것이다. 서양에서도 이 개인이라는 개념이 원래 있었던 것이 아니고 종교개혁을 통해 만들어지고 발전되어 온 것이다. 개인이 존중받는 오늘을 사는 우리는 루터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는 것을 되새기는 특별한 오늘이 되면 좋겠다.

우리나라에서도 개인이라는 개념은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생겨난 것이다. 기독교의 전파와 함께 개인의 가치를 깨닫게 되면서 수천 년간의 미몽에서 우리 민족이 서서히 깨어나게 되었는데 이에 앞장 선 선각자가 이승만박사이다. 이승만박사 역시 목숨 건 투쟁과 함께 우리나라를 기독교 정신을 기반으로 하는 국가로 만들려고 노력하였고, 우리나라가 개인이 존중받는 자유민주주의 틀을 갖추고 출발하도록 하는데 평생을 바쳤다. 즉 전제주의나 집단주의가 아닌 개인이 존중받는 민주주의의 기틀을 만들어 놓은 덕분에 우리는 수십 년 전과는 엄청나게 다른 기적과 같은 풍요를 누리는 민족이 되었다. 우리는 그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는 것을 왜 모를까?

우리나라의 물질적 풍요를 앞에 두고 헬조선을 말하는 사람들이 있고, 행복지수가 높다는 이유로 부탄을 모델로 삼는 사람들도 있다. 이동을 금지하고 정보를 차단하는 북한도 행복지수가 높다. 이를 믿는 사람들의 지능지수가 안타깝다. 우리나라에서 50대 이상의 사람들은 그들의 어린 시절에, 상하수도가 없었고, 수세식 화장실이 없었고, 화장실용 휴지가 없었던 시대를 살았던 세대의 사람들이다. 이들이 간혹 어제의 일들을 잊어버리고 부탄에서도 서울과 같이 걱정 없이 위생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 말문이 막힌다. 부탄에서의 상상속의 낭만적 산골생활이 현실에서는 일주일을 넘기기 힘들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한다면 지능지수를 의심해봐야 한다. 배고픔과 비위생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지금 누리는 풍요의 기적이 당연히 주어진 것으로 알 것이다. 그들에게 현재의 우리가 누리는 ‘사람답게 산다는 것’은 개인을 존중하고 개인의 가치를 높이는 것에서 출발한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그들은, 우리가 루터나 이승만에게 지고 있는 빚의 존재도 모를 것이다. 그리고 “조금 불편해도 다함께 평등한 아름다운 세상”을 주장하고 있다. 그런 세상은 조지 오웰의 ‘1984‘에서 그려놓은 세상이고, 지금은 사라진 소련이 계획했던 세상이고, 아직도 북한과 북한을 추종하는 사람들이 꿈꾸는 세상이다. 기꺼이 개인을 버리고 집단에 속해 살겠다는 노비근성의 발로이다. 다함께 평등하게 불편하게 사는 것은 전혀 아름답지 않다. 그런데 왜 이런 사람들이 생겨나나?

14세기부터 16세기 중반까지 ‘신의 저주’라 불렸던 흑사병이 유럽을 휩쓸었는데, 당시에는 사제들이 시신의 수습을 하다 보니 많은 숫자의 사제들이 희생되었다. 이 때문에 교회의 그 빈 자리에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들이 사제가 되어 자리를 차지하면서, 이들은 타락의 길로 들어섰고 그 후 교회에는 돈과 권력이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 후 주교도 대주교도 심지어는 교황까지도 돈으로 거래가 되었다. 종교개혁이 시작되던 당시의 교황인 레오 10세도 13살에 주교가 된 메디치 가문의 후손이었다. 오랜 동안 유럽사회의 최고의 엘리트 계급이었던 사제들이 흑사병으로 희생되면서 그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급조되어 들어간 사제들의 지적 결핍과 도덕적 타락은 교회 내 사유능력을 급속히 악화시키고 그 자리를 돈과 권력이 대신하게 되었다. 지금 우리나라도 유사한 상황이 진행되고 있다. 적폐청산이라는 말로 반대 정파에 대한 숙청을 단행하면서 정부, 학교, 언론기관, 사회단체 등 많은 영역에서 엘리트들이 사라지면서 새롭게 등장한 세력들의 지적 결핍과 도덕적 타락은 우리나라에 종교개혁과 같은 새로운 각성의 계기를 만들었다. 불과 2년 반만의 일이다.

오늘로 거의 한 달째 밤낮없이 계속되고 있는 청와대 앞 야외교회에서는 지금 이 시간에도 예배중이다. 지난 한 달간 비가 오나 겨울이 오나 지금도 그들은, 루터가 목숨을 걸고 교황청을 비판한 심정으로, 부패한 권력을 지적하고, 지도층의 위선을 폭로하고, 자유인들에 대한 억압에 저항하고 있다. 그들은 개인이 갖고 있는 자유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저항한다고 하였고, 결코 타협하지 않는다 하였다. 그들에게서 루터의 용기를 본다. 사람들은 루터의 후예들을 저항하는 사람들이란 뜻의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라 불렀다. 지금 이시간 청와대 앞 야외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은, 개인과 개인의 자유, 개인의 사적 소유를 부정하려는 현 정부의 전방위적인 시도에 저항하는 프로테스탄트들이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라는 가치를 받들고 지켜나가야 한다는 다짐, 이 정신이 바로 종교개혁의 정신이다. 우리는 지금 청와대 앞에서 한 달째 노숙을 하며 자유를 지켜야한다며 저항하고 있는 그들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한, 양심의 삶을 살기 위해, 존귀한 존재인 자신을 깨닫고, 개인을 깨닫고, 개인의 자유를 지키려는 행위가 기독교적 신앙생활이다. 이를 해치기 위해 행하는 적들의 행위는, ‘민족을 위한다며 국가를 무력화시키는 것’, ‘국가를 위한다고 자유를 포기하는 것’, ‘공동체를 위한다며 개인이 희생하는 것’, ‘정의를 위한다며 진실을 외면하는 것’, ‘평화를 위해서라며 무장을 해제하는 것’들이다. 결코 해서는 안 되고 또 해서 성공한 적이 없는 개인과 사회와 국가를 망하게 하는 어리석은 시도들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다. 이들과 싸우는 거리 교회의 성도들, 그들은 진정한 루터의 후예들이다. 진실과의 싸움에서 포기하지 않고,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그들에게 존경과 감사를 드리며 축복을 빈다.

황승연 객원 칼럼니스트(경희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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