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시대는 ‘미완의 혁명’이었다. 왜 미완이었을까? 그의 마지막 과업이었던 핵무기 개발의 완성을 보지 못한 채 서거했기 때문이다. 혁명가 박정희의 필생의 노력은 핵을 보유하여 어느 누구로부터도 무시당하지 않는 강국, 대한민국의 건설이었다. 김재규의 미친 짓 덕분에, 원자폭탄 개발이라는 마지막 고비를 넘지 못한 것이다.

10월 21일자 조선일보에 “영웅 박정희 대통령을 추모합니다”란 광고가 실렸습니다. 10월 26일 서울시청 대한문 앞 광장에 모여 “박정희 혁명정신 이어받아 대한민국 해체세력 몰아내자!”는 광고였습니다. 광고를 보고 가슴이 뭉클한 적은 근래 처음인 것 같습니다.

올 봄, 제가 펴낸 책 제목을 『박정희혁명』으로 붙였습니다. 그 분이 서거하신 지 40년 만에 비록 광고이긴 하지만, 이 나라 유수의 일간신문에 ‘박정희 혁명정신’이란 용어가 등장했습니다. 참으로 야박한 국민이란 욕을 얻어먹어도 할 말이 없게 되었지요.

박정희의 혁명정신은 한 마디로 반공정신이요 방첩정신입니다. 반공으로 대한민국을 구하고, 방첩으로 안보기반을 튼튼히 하자는 것이 5.16의 핵심이었고, 박정희 대통령의 가치관이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가 큰 혼란을 겪으면서 “문재인 하야” “탄핵 무효” “종북척결”을 외치는 이유는 국민 모두가 박정희 혁명정신을 까맣게 망각한 탓입니다.

거국적인 반대, 반대 또 반대...대체 무엇을 위한 반대였나?

박정희 대통령은 재임 중 국민들에게 지지리도 인기 없는 정책을 연이어 추진했습니다. 1964년 전 국민이 거국적으로 반대하는 한일 국교 정상화를 필두로 하여 경부·호남·영동고속도로 건설, 포항제철을 비롯한 중화학공업 건설, 원자력발전소 건설 등등….그 분이 하시는 일마다 이 나라의 소위 배웠다 하는 사람들이 반대, 또 반대, 결사반대를 외쳤습니다. 

지금이야 "나라를 구한 위대한 결단"이었다고 추앙받던 한일 국교 정상화도 당시에는 전 국민의 총체적이고 거국적인 반대였습니다. 그 격렬했던 반대 시위는 민선 대통령에 당선되어 갓 출범한 박정희 정부를 헤까닥 뒤엎을 기세였습니다. 박두진·조지훈 시인을 아십니까? 국민시인이란 명예로운 호칭이 붙을 정도로 사회에 영향을 끼쳤던 문필가였습니다. 한국의 지성으로 알려진 박두진 시인이 한일협정을 반대하기 위해 이런 시를 쓴 사실 알고 계십니까?

‘(중략) 우리는 알고 있다/ 누가 또 이 나라와 백성을 팔아넘기려 하는지를/ 우리는 이미 똑똑히 보아 알고 있다/ 어떻게 또 우리가 지금 팔려 넘어가려 하는지를/ 조국 또 민족의 이름으로/ 자주, 자유, 독립국가의 시민/ 그 당당해야 할 민권의 이름으로 요구한다!/ 우리는 다만 한 가지/ 한일 굴욕 매국협정 일체를 즉각 파기하라!/ 그 더러운 당국 협정의 비준을 즉각 파기하라’

그야말로 정치인들은 물론이요, 학계·문화계·종교계·언론계를 비롯하여, 심지어 김홍일, 김재춘, 박병권, 박원빈, 백선진, 송요찬, 손원일, 이호, 장덕창, 조흥만, 최경록 등 예비역 장성 11명까지 나서서 ‘한일협정 반대’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굶주리는 국민들 밥 좀 먹이자고 나서서 칼을 빼 들었건만, 소위 배웠다는 지식인·지성인·언론인 먹물들이 앞장서서 박정희의 모든 정책에 결사반대하고 나섰습니다. 대체 그 사람들, 무엇을 위한 반대였을까요?

일본 전국시대의 혼란을 종식시킨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백성의 호주머니를 두둑하게 만들어라. 그것이 통치의 최고 덕목이다.”

박정희는 5·16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후 이렇게 외쳤습니다.

“보릿고개를 없애고 수출로 나라를 세우자!”

10월 21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광고. 이 광고에 박정희 대통령을 '영웅'으로, 박정희 혁명정신을 이어받자는 내용이 실려 있다.(사진 조선일보 지면 캡처)
10월 21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광고. 이 광고에 박정희 대통령을 '영웅'으로, 박정희 혁명정신을 이어받자는 내용이 실려 있다.(사진 조선일보 지면 캡처)

배부르고 등 따신 수구꼴통 성리학 양반 지주계층의 후손으로 구성된 정치계와 지식인, 학생 먹물들이 ‘민주주의는 신(神)’이라고 떠받들 때 박정희의 신은 ‘세 끼 밥’이었습니다. 박정희에게 있어 배고픈 국민들에게 세 끼 밥을 먹인다는 것은 그 무엇보다 중요한 가치를 지니는 신성한 행위였습니다. 

5·16 군사 쿠데타가 벌어진 1961년 언론보도를 소개합니다. 그 해 봄, 곡창지대인 전남에서만 16만 4,000호의 94만 6,000명이 대책 없이 밥을 굶었습니다. 인권? 민주? 평화? 자주? 다 아름답고 고상한 용어지요. 하지만 진정한 인권과 민주, 평화, 자주는 국민들 세 끼 밥의 문제가 해결된 다음의 과제라는 것을 이 나라 먹물들이 이해할 수는 없었던 것이 비극이었죠. 전형적인 성리학 원리주의자들의 후예다운 발상에 의하면 당장 굶어죽어도 존명사대를 해야 하고, 소중화의 가치와 의리를 수호하기 위해 척양척왜, 위정척사를 하다가 전 국민이 혀 깨물고 자살했어야 마땅했을 것입니다.

1967년 제6대 대통령 취임사에서 박정희는 “빈곤과 부정, 부패와 공산주의는 우리의 3대 공적(公敵)”이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러한 빈곤, 가난에서 국민들을 해방시키자는 것이 박정희 혁명의 두 번째 핵심 뼈대입니다.

그는 입으로만 빈곤, 가난으로부터의 해방을 외친 것이 아닙니다. “내키지 않지만, 원수의 돈을 끌어다 라도 굶주리는 식구들을 먹여 살리자”면서 만주군관학교 선배 정일권을 주일 대사로 보냈습니다. 그리고 일본으로부터 경협 자금 들여다 개발을 하고 건설을 했습니다. 박두진·조지훈 같은 먹물들이 목숨 걸고 한일 회담을 반대 선동할 때 말입니다.

“자주국방 이루면 알아서 물러날 것”

아무리 먹고 사는 것이 중요해도 나라가 망하면 국민들은 망국노가 됩니다. 따라서 국가안보는 목숨보다 더 중요한 가치입니다. 박정희는 늘 “미친개에게는 몽둥이가 약” "내 나라는 내가 지킨다"라는 강렬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경부고속도로 준공식장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 고속도로 건설에 김영삼, 김대중을 비롯한 거의 모든 사람들이 반대했다.
경부고속도로 준공식장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 고속도로 건설에 김영삼, 김대중을 비롯한 거의 모든 사람들이 반대했다.

박정희 재임 시절 김일성은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하기 위해 여러 차례 도발을 시도했습니다. 1968년 1월 21일, 김신조 일당의 청와대 습격사건, 1970년 6월 22일 현충문 폭파사건,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식장에서의 저격사건이 그 증거입니다. 왜 김일성이 박정희를 그토록 암살하지 못해 안단을 했을까요? 박정희만 없으면 '남조선 해방'은 식은 죽 먹기였기 때문입니다.

박정희는 김일성이 대남 도발을 하면 처절하게, 철저하게, 잔인하게 복수를 했습니다. 이런 일들이 쌓이면서 김일성은 박정희 암살을 시도하게 된 것입니다.

1975년 4월 30일 사이공 함락으로 베트남이 공산통일 되자 박정희는 측근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월남이 공산당에게 먹혔는데, 북한은 베트콩보다 더 무서운 존재다. 나라가 위기에 직면해 있는 상황에서는 국가 지도자는 다른 문제로 비판을 받더라도 나라부터 구해놓고 봐야 한다. 경제발전과 자주국방만 이룩해 놓으면 다른 사람들이 말려도 내가 알아서 물러날 텐데 왜 사람들이 기다려 주지 않는지 모르겠다.”(심융택, 굴기-핵개발 프로젝트(10)』, 동서문화사, 2015, 245쪽)

주한미군 철수, 자기 나라는 스스로의 힘으로 지켜야 한다는 닉슨 독트린, 총알 한 발 만들지 못하는 한국의 공업 실상…. 박정희는 이 난제를 돌파하여 자주국방을 실현하기 위해 중화학공업을 선언했고, 극비리에 원자폭탄 개발에 나섰습니다.

첫 번째 핵개발 프로젝트는 프랑스와의 원자력협정을 맺어 추진되었습니다. 프랑스 기술진의 지원을 받아 원자폭탄을 설계하고, 재처리 시설 기술 도입을 추진했습니다. 캐나다로부터 원폭의 원료인 플루토늄 확보를 위한 시험용 원자로(NRX) 도입이 극비리에 추진되었습니다. 하지만 1974년 인도의 핵실험 후폭풍이 세계를 강타했습니다. 미국은 프랑스·캐나다 정부에 압력을 넣어 박정희 핵개발에 족쇄를 채웠습니다.

박정희는 1976년 1월, 핵개발 포기를 선언합니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났다면 그는 전정한 영웅이라 불리기 곤란했을 겁니다. 미국의 압력으로 재처리 시설 도입과 연구용 원자로 도입이 좌절된 지 1년 정도 지난 1976년 11월. 박정희는 원폭 개발 재개 명령을 내립니다.

지난번의 실패를 분석한 후 전략전술을 바꾸었습니다. 외국 기술에 의존하다보니 한계가 분명했습니다. 이번에는 재처리 기술과, 핵무기 원료인 플로토늄을 얻기 위한 연구용 원자로를 국내 기술로 독자 개발하기로 결정합니다. 

재처리 설계 끝난 시점에 김영삼, “박정희 정권 타도” 선언

이때부터 극비리에 본격적인 핵개발이 재개되었습니다. 1979년 농축과 재처리 부분을 제외한 원자력 산업의 기술적 자립을 이루었고, 같은 해 10월, 재처리 설비의 설계가 끝났습니다. 바로 이 무렵, 1979년 9월 10일 김영삼 신민당 총재가 “박정희 정권 타도”를 외치는 기자회견을 열었습니다. 김영삼의 행보는 오비이락인가요, 아니면 누군가의 사주를 받은 것일까요.

김영삼은 박정희 정부 타도를 위해 군부 쿠데타를 선동했고,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카터 행정부에 박정희 정권 타도를 요청했다. 당시 여당인 공화당은 이 인터뷰를 문제 삼아 김영삼에 대한 의원직 제명을 강행했다.(사진은 김영삼 의원직 제명을 보도한 경향신문 캡처)
김영삼은 박정희 정부 타도를 위해 군부 쿠데타를 선동했고,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카터 행정부에 박정희 정권 타도를 요청했다. 당시 여당인 공화당은 이 인터뷰를 문제 삼아 김영삼에 대한 의원직 제명을 강행했다.(사진은 김영삼 의원직 제명을 보도한 경향신문 캡처)

김영삼은 “군은 특정 정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군은 본래의 임무에 충실해야 한다, 국민들이 총궐기하여 항쟁하지 못한다면 우리 모두가 역사의 죄인이 된다”고 선언합니다. 박정희 정권을 무너뜨리라고 군부에다 대고 쿠데타를 선동한 것이지요.

한 번 발동이 걸린 김영삼의 행보는 거칠 것이 없었습니다. 6일 후인 9월 16일, 김영삼은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카터 미 행정부에 소수독재의 박정희 대통령 정부에 대한 지지 종식을 요구한다. 미국은 근본적으로 독재체제이며 국민들로부터 점점 소외되고 있는 정부와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국민 다수 중에 명백한 선택을 할 시기가 왔다”고 외쳤습니다. 미국 정부에게 박정희 정부 타도해 달라고 요청한 것이죠.

그로부터 40일 후인 1979년 10월 26일. 글라이스틴 주한 미국대사는 김영삼을 초청하여 오찬을 함께 했습니다. 그날 저녁,  서울시 종로구 궁정동 50번지, 중앙정보부 안가(安家). 박정희는 참선하듯 눈을 감고 정좌한 자세로 고향 후배이자 육사 동기 김재규의 총탄을 가슴에 맞았습니다.

10.26 당시 궁정동 만찬에서 박 대통령을 시해하는 장면을 재현하고 있는 김재규.
10.26 당시 궁정동 만찬에서 박 대통령을 시해하는 장면을 재현하고 있는 김재규.

김재규는 자신의 행동을 “민주화를 위한 의거”라고 강변했습니다. 김재규의 변호를 맡은 변호사들은 이런 주장을 확대 재생산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김재규 이 자는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고 망언을 했는데, 대체 그가 쏜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유신의 심장이 아니라, 완성단계의 핵무기를 파괴하여 북한의 핵 인질이 되도록 만든 희대의 미치광이 아닙니까?

1980년 5월 24일 오전 7시 30분. 김재규는 서대문 구치소에서 형 집행을 통고 받았습니다. 방에서 나와 형장을 10여 m 앞두고는 몸을 가누지 못하고 정신을 잃어 교도관들에게 들려 가다시피 형장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내란 목적 살인 및 내란수괴 미수혐의 죄명 낭독이 끝나고 “마지막으로 할 말이 없느냐”는 집행관의 질문에 “없다”며 입을 다뭅니다. 김재규는 곧바로 교수대 받침대 위에 앉혀졌습니다. 흰 보자기가 얼굴에 씌워지고 발목이 밧줄로 묶입니다. 목에는 밧줄이 걸렸습니다. 수갑 찬 손으로 그는 어머니에게 받은 묵주를 꽉 움켜쥐었습니다. 그렇게 그는 교수형으로 삶을 마감했습니다.

1979년 9월, 구상 시인은 정치적 저항이 격화되는 등 뭔가 이상한 느낌을 받고는 친구 박정희가 걱정되어 청와대를 찾았습니다. 그날 구상은 비장한 목소리로 친구에게 “이제 임자가 물러날 때가 된 것 같소” 하고 은퇴를 권합니다.

박정희는 침묵을 지켰습니다. 현관까지 배웅하던 박정희의 모습이 쓸쓸해 보였습니다. 돌아서는 친구에게 박정희는 이런 말을 합니다.

“내가 이 나라 이 민족을 위해 무얼 하려는지 사람들이 몰라도 좋아요. 내가 죽은 뒤에는 무엇을 하다 갔는지 알겠지.”

그것이 30년 친구와의 마지막 이별이었습니다.

미완의 혁명

저는 『박정희혁명』 책에서 박정희 시대를 ‘미완의 혁명’이라고 평했습니다. 왜 미완이었을까요? 그의 마지막 과업이었던 핵무기 개발의 완성을 보지 못한 채 서거했기 때문입니다. 혁명가 박정희의 필생의 노력은 대한민국이 핵무기를 보유하여 어느 누구로부터도 무시당하지 않는 나라의 건설이었습니다. 김재규의 미치광이 짓 덕분에, 원자폭탄 개발이라는 마지막 과제를 완성하지 못한 채 쓰러진 것입니다. 

그로부터 정확히 70년 전인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 의사에게 저격당해 죽었습니다. 불알친구 이토의 부음을 접한 ‘일본 육군의 교황’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는 “이토는 정말 운이 좋은 사내다. 나는 일개 무사로서 그의 마지막이 얼마나 부러운지 모른다. 이 운 좋은 사내는 죽음마저 하늘이 돕는구나”라고 외치며 눈물을 떨굽니다.

박정희는 혁명가이자 풍운아답게 드라마틱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그것이 그 분의 명예를 지키는 길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개똥만도 못한, 여차하면 아무나 물고 뜯는 강시 좀비 정치꾼들의 혼탁한 정치풍토에서 저질 정치인과 기레기 언론들이 박정희가 임기 만료되어 퇴장했다면, 따뜻한 박수로 환영했을까요? 검찰청사의 포토라인에 서는 대신, 부하의 총탄에 맞아 무덤으로 갔기에 무인(武人) 박정희의 생애는 더욱 드라마틱한 장엄미를 남길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10월 26일. 우리는 또 다른 역사를 만들기 위해 '이승만 광장'으로 명명된 광화문 광장으로 나갑니다. 광화문에서 하나가 된 시민들은 이제는 적나라하게 이해하실 것입니다. 박정희의 혁명정신 제1번이었던 멸공·방첩을 제대로만 지켰어도 전 국민이 주사파 대통령 내쫓기 위해 청와대 앞에서, 광화문 광장에서 노숙 투쟁을 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란 사실을 말입니다. 이번 거사가 제대로 성공하면 시청 앞 광장에 '박정희 광장' 이름이 붙여지고 그 분을 기리는 동상 하나 멋지게 세울 수 있지 않을까요....

김용삼 대기자 dragon0033@pennmik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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