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년 10월 개관한 국립현대미술관 50주년 맞아 개최한 특별전 직접 가보니...
2016년 박근혜 퇴진 집회부터 구한말 의병 운동 이르기까지의 '광장'이 주제
국립현대미술관이 文정권의 史觀에 지나치게 코드 맞췄다는 비판 나와
전문가 "산업화·현대화 평가 절하하고 위정척사·민주화투쟁만 강조하려 드는 전시"
1980년대 민중미술이 가장 비중있게 다뤄져...윤범모 관장은 민중미술 운동가 출신
공공미술관으로서 미술계에 그간 해왔던 역할과 앞으로의 과제 제시하는 전시 됐어야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전시장 입구 벽면
'광장'전 1부가 진행 중인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입구 벽면

국립현대미술관(이하 현대미술관)이 개관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기획한 특별 전시를 두고 각계에서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문재인 정권이 공모 절차를 물러가면서까지 임명을 강행한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 체제가 운동권 출신들이 주축인 현 정권 입맛에 맞게 전시를 구성했다는 것이다. 윤 관장은 문화계에서 대표적인 민중미술운동 인사다. 현대미술관 측은 이번 전시 주제를 ‘광장’으로 정했다. 2016년 박근혜 퇴진 집회부터 구한말 의병 운동에 이르기까지의 역사 속에서 한국 미술을 회고하겠다는 게 전시 목적이다. 미술계에선 현대미술관의 이번 특별 전시 자체에 문제가 많다며 차가운 반응을 보이고 있다. 반외세와 민주화 투쟁의 서사만 강조한 반쪽짜리 전시라는 것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은 1969년 10월 20일 경복궁 내 조선총독부 미술관 자리에서 단 한 점의 소장품도 없이 초라하게 출발했다. 오늘날 현대미술관은 소장품 8천417점에 과천·서울·덕수궁·청주 4곳에 전시관을 둔 초대형 기관이 됐다. 현대미술관은 지난 17일부터 개막한 개관 50주년 특별 전시를 통해 근현대 한국 미술이 거둔 성과를 소개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광장’이라는 전시 주제와 이를 위한 작품 선정 및 배열에 있어 편파성 논란이 일고 있다.

현대미술관 측은 지난 1월 '2019년 전시 일정'을 발표할 당시 “올해는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역사적인 해일 뿐 아니라, 1969년 문을 연 국립현대미술관이 개관 50주년을 맞는 뜻 깊은 해이기도 하다”며 시대별 미술의 역할과 작가의 창작활동을 한국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전시 키워드 ‘광장’을 통해 살펴보겠다고 예고했다. 기획 단계에 있었던 전시가 지난 17일 시작되면서 우려했던 반응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左: 채용신, <오준선 초상>, 1924年作/ 右: 채용신, <용진정사지도>, 1924年作. 두 그림 모두 을사조약 이후 호남에서 활동했던 초상화가 채용신이 호남의 위정척사파 유학자였던 오준선(1851-1931)에게 그의 초상화와 광주 인근 용진산 소재 정사(亭舍) 그림을 그려준 것이다.) 

미술계 인사들은 전시 내용에 대해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 몰랐다는 반응을 보였다. 익명을 요구한 업계 관계자는 “이런 식이라면 1부 전시에서 제일 처음 내세운 소주제 ‘의(義)’는 19세기말 이후 한국 사회정치사를 설명할 코드일 순 있어도 당대 미술의 정체성을 보여주기에 적합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현대미술관 측이 20세기 초반까지의 한국 미술이 거둔 성과와 실패를 공히 보여주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다는 지적이다.

예를 들어 이번 전시에 출품된 초상화가 채용신(1850-1941)의 인물화들은 호남지역 위정척사파 의병장 및 유학자들을 그린 것이다. 현대미술관 측은 인물화가로서 유명했던 채용신이 왜 중요한지에 대해 일절 언급하지 않고, 그림 속 인물들의 사회정치적 투쟁 노선에만 집중했다. 또한 현대미술관 측은 사군자(梅蘭菊竹) 그림의 경우에도 의병 활동에서 무장독립투쟁으로 이어지는 인물들만의 그림을 다뤘다. 미술사학계에서 중요시하지 않은 박기정(1874-1949), 김일(1880?-1944?) 등의 작품들이 그들이 위정척사파로서 절개를 보였다는 이유로 비중있게 소개된 것이다. 전문가들은 “아무리 정해진 주제에 맞추기 위해서라고 하더라도 현대미술관이 당대 미술에서 가장 큰 성과를 남긴 김규진(1868-1933), 안중식(1861-1919) 등을 빠뜨린 것은 문제“라고 비판했다. 현대미술관이 전통 수묵화가 퇴락하며 서양화에 밀리게 됐던 배경, 그리고 이런 현실에서도 전통을 답습하지 않고 혁신을 시도했던 당시 전통 수묵화가 등을 강조했어야 했다는 주장이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전시장 내부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전시장 내부에 마련된 시민참여 공간. 전시를 보고 나온 시민들이 남긴 포스트잇에는 "독립운동은 못했어도 불매운동은 한다", "광장! 문화가 있는 광장! 지금의 광화문은? 그래서 슬퍼요" 등이 적혀 있다. 

결국 현대미술관이 한국 근현대 미술사의 여러 성취를 작품을 통해 보여주려는 고민없이 ‘광장’에서의 촛불집회로 집권한 현 정부 특유의 사관(史觀)에 지나치게 부응한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왔다. 미술평론가 임근준은 “‘의(義)’를 소주제로 앞세웠던 덕수궁관 전시를 보니 학예연구실 기획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그는 미술평론가 최열이 지난 3월 ‘3.1민족해방운동 100주년, 국립현대미술관과 미술계의 기억투쟁을 촉구함’이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주장한 거의 그대로가 구현됐다고 설명했다.

당시 최씨는 “때마침 3.1민족해방운동 100주년을 맞이해 한국근대미술사학을 전공한 학자 윤범모 관장이 취임했다”며 “먼저 ‘반제투쟁과 민족해방’에 헌신한 미술과 미술가를 발굴하고 수집하여 그들의 투쟁을 추모하는 기억투쟁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최씨는 “150년 동안 침략 제국과 군부독재에 저항한 미술과 미술가를 배척해 온 국립현대미술관과 미술계의 참담한 과거를 버리고 지금부터라도 저항미술을 찾아 존숭하는 일에 나서야 한다”라고 했다. 최씨는 조선대 미술학과와 중앙대 예술대학원 석사를 졸업했으며, 현재 김종영미술관 학예실장, 문화관광부 문화재청 전문위원으로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전경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전경

1950년까지의 한국 미술을 다룬 덕수궁관 전시는 ‘광장’ 제2부 전시가 열리는 과천관으로 이어진다. 과천관은 1950년부터 2019년까지의 미술 작품들을 역시 ‘광장’을 주제로 전시했다. 미술계 인사들은 덕수궁관 이상으로 과천관 전시에 부정적 반응을 보였다. 개관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서라면 한국 현대미술사를 통합하려는 시도가 최소한 엿보여야 하는데 1980년대 민중미술에만 강조점을 뒀다는 것이다.

'광장'전 2부가 진행 중인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중앙홀. 중앙에 걸린 대형 걸개 그림은 최병수, <한열이를 살려내라>, 1987年作.  
최병수, <한열이를 살려내라>, 1987年作 측면 모습과 화가 오윤의 작품들이 걸린 제2전시실 입구로 가는 길.

1986년 개관한 과천관은 국립현대미술관 제1의 전시장이다. 과천관은 이명박 정부 때의 배순훈 관장이 CEO형 리더십으로 종로구 기무사령부 부지를 현대미술관으로 탈바꿈시키는 외형적 성장을 이루기 전까지 본관 기능을 했다. 그만큼 상징적인 전시 공간의 중앙홀을 민중미술 작품에 내준 것이다.

미술평론가 임근준은 “민중미술 작품이 걸개그림이라 공간을 많이 차지한다고 해도 상징성이라는 게 있다. 현대미술관 과천관 중앙홀이 가장 상징적인 공간인데 여기를 민중미술로만 채웠다는 것은 문제다”라고 말했다. “이번에 현대미술관이 ‘광장’을 주제로 한 것도 광장 민주주의, 즉 촛불혁명에 맞춘 코드”라고 단언한 임씨는 개관 50주년을 맞은 현대미술관이 “정권의 코드에 순응하는 몹쓸 정치적 편향성을 보였다”고 비판했다. 그는 “한국사회 담론의 거의 모든 분야가 산업화/현대화와 민주화 서사로 나뉘어 있지 않느냐”며 “산업화/현대화 서사를 평가 절하하고 반외세 투쟁/민주화 운동의 서사만 강조하려 드는 슬픈 분열의 풍경”이라고 과천관 전시를 평가했다.

현대미술관 측은 중앙홀 전시 공간을 ‘시린 불꽃’이라 명명하면서 1987년 6월 민주화 운동과 관련된 미술 작품들을 배치했다. 현대미술관 측 설명에 따르자면, 불꽃처럼 타올랐던 민주화 운동의 광장을 복원하기 위해 당시 경찰이 쏜 최루탄을 맞고 사망한 연세대생 故이한열씨를 그린 최병수의 대형 걸개 작품들(최병수, <한열이를 살려내라>, 1987年作 등 2점)과 최근 새롭게 복원했다는 이한열씨의 운동화, 그리고 차량시위대 역할을 했던 택시로 기아자동차 차량(삼성교통박물관 소장)을 한데 배열했다. 현대미술관 측은 “민주진영이 힘겹게 성취한 대통령 직선제 선거에서 패배라는 ‘시린 결과’를 맞이했다”고 설명한다. 이 같이 현대미술관 측이 전시 공간을 ‘시린 불꽃’이라고 이름 붙인 의도를 알 수 있다.

이한열 열사의 운동화, 2015년 복원, 이한열기념관 소장
<이한열 열사의 운동화>, 2015년 복원, 이한열기념관 소장

임씨는 “한국 현대미술사에선 앙포르멜과 단색화, 즉 모더니즘 세력이 산업화/현대화 서사를 대표하고, 민중미술 세력이 민주화 서사를 대표한다”고 설명하며 이번 과천관 전시가 1980년대 민중미술 세력이 ‘한국 모더니즘은 가짜다’라면서 주도권을 점하려 했던 태도를 연상시킨다고 밝혔다. 민중미술은 세계 미술의 주된 흐름에 뛰어 들어 한국미술의 국제화를 목표로 하겠다는 미술가들을 문화적 편입이자 정신의 예속화라고 비난해왔다. 기술 도입과 외자 유치에 따른 한국의 경제성장이 경제의 예속화를 불러온 것과 마찬가지라는 관점이다.

현대미술관 측은 박정희 정권의 1970년대를 '회색 동굴'이자 '밀실'로 규정하며 당시 미술사조를 지나치게 축소해 다뤘다. 

연장선상에서 이번 현대미술관 전시도 앙포르멜과 단색화 계통을 부정적으로 다뤘다. ‘광장’을 긍정하기 위한 의도의 전시에서 해당 작가들(박서보, 하종현, 윤형근, 이우환)의 작업을 광장과 반대되는 부정적 의미의 ‘밀실’을 대표하는 사례로 든 것이다. 1970년대 박정희 정권 시절 작업한 단색화 작가들은 “암담한 현실의 바깥에서 미학적 가치를 재발견하고자 했다”는 현대미술관 측 설명과 함께 매우 적은 작품만을 한정된 공간에서 보일 수 있었다. 반면 최근 10년 동안 국내외 미술시장에서는 앙포르멜과 단색화 작품들이 최고가에 거래됐다. 김환기 작품의 경우에도 화면 전체가 색점(色點)만으로 메워진 올오버 페인팅의 후기 추상 작업들이다.

시각 문화(Visual Culture) 전반을 빼놓지 않고 아우르려고 하다 보니 전시 구성이 산만해진다는 지적이 나오기도 하지만, 전시 공간의 시작과 끝, 그리고 중간의 주요 동선마다 민중미술에 편입될 수 있을 작품들만이 배열돼 있어 과천관 전시를 총괄한 강수정 국립현대미술관 전시1과장의 의도를 이해하긴 어렵지 않다. 일각에선 전임 관장 시절 기획됐던 이번 50주년 기념 전시가 올해 초 새로 부임한 민중미술운동가 출신인 윤 관장 코드에 맞게 뒤엎어졌다는 말도 나온다.

미술계 관계자들은 국립현대미술관이 지난 50년간 공공미술관으로서 수행해온 역할을 돌아봄과 동시에 앞으로 남은 과제를 달성하려는 의지가 무엇보다 이번 전시에서 제시됐어야 했다고 입을 모은다. 이는 한국 근현대 미술의 정체성을 추상화 계열의 모더니즘과 구상화 계열의 사실주의 미술인 민중미술과 더 이상 대립시키지 않는 통합적 관점일 것이다. 이점에서 보더라도 이번 현대미술관 전시는 위정척사-민주화 운동을 격상시키기 위해 미술관이 총력을 기울여 화답한 사례로 남게 될 가능성이 크다.

김진기 기자 mybeatles@pennmik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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