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숨막히던 여름, 땀범벅 하루를 마친 우리는 해가 기울 무렵이면 교정 구석에 모여 자주 술판을 벌였다. 하루치 전투를 마감한 자신과 전우들의 노고와 피곤을 달래는 일상적 뒷풀이였다. 땅거미가 내려 서로의 얼굴이 흐릿해질 무렵, 지금은 기억 나지 않는 한 친구가 갑자기 흐느끼기 시작했다. 옆에 있던 친구가 어깨를 잡고 위로를 건넸지만 흐느낌은 잦아들지 않았다. 이 땅의 고통 받는 민중이 너무나 가엽다고 그는 절규했고 이윽고 꺼억꺼억 통곡했다. 우리는 무심한 척 고개를 땅에 처박았고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그날 깜깜한 밤, 눈을 내리깔고 교문까지 터벅터벅 걸어 나오는 동안 나는 하나의 생각에 짓눌려 있었다. 그건 내가 그 친구가 도달한 순수함에 결코 이르지 못하리라는 슬픈 생각, 일종의 미학적 자학이었다. 나는 그의 순결한 애정과 그의 순결한 분노가 부러웠다. 그렇게 분노의 열병을 앓으며 또 정치투쟁으로 일관하며 우리는 청춘의 초입을 통과했다.

마징가제트가 센지 태권브이가 센지 다투던, 강한 것에 이끌리던 아이들은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무엇이 가장 정의로운가에 몰두했다. 그건 무엇이 가장 멋진가라는 질문이기도 했다. 가장 정의로운 것이 가장 멋져 보였기 때문이다. 달라지지 않는 건 또래의 승인과 인정만으로 충분했다는 점이다. 현실과 대면할 일도, 무언가를 책임질 일도 없던 청년들은 친구들이 멋있다고, 정의롭다고 인정해주면 그걸로 족했다. 확신의 목소리가 클수록 멋있어 보인다는 점도 소년기와 마찬가지였다. 심각한 또래들의 놀이에서 소외되지 않으려면 자신의 분노를, 자신의 정체성을 타인의 시선 앞에서 입증해야만 했다. 정의롭지 않으면 또 분노하지 않으면 왕따가 되는 시절이었다.

그 시절에 대한 대표적 허구 중 하나가 운동권이 책을 많이 읽는다는 선입관일 것이다. 단언컨대 사실이 아니다. 지식을 통해 사상을 정립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행동의 정당성을 외치거나 동지를 포섭하는 과정에서 주변에 떠다니는 피상적 논리에 설득 당했을 뿐, 대부분은 앵무새에 지나지 않았다. 진실은 너무 명확했으므로 책을 읽을 필요도, 복잡한 사고를 할 필요도 없었다. 논리와 지식은 얄팍해도 무방했다. 오히려 공부를 하지 않아야 모든 것이 명료했다.

일단 운동권에 들어오면 아무도 지식과 독립적 판단능력을 문제삼지 않았다. 김정일의 권력승계가 세습이 아니며, 그 분의 탁월한 능력 덕분이라고 침을 튀기며 강변하던 예쁘장한 여학우도 내가 공부하지 않는 걸 문제 삼지 않았다. “난 네가 열심히 살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그녀는 단지 내 운동의 열정을 문제 삼았을 뿐이다. 우리는 모두 운동 자체에 곯아있었고 노선투쟁에 골몰했을지언정 근본을 돌아보는 지력은 키우지 못했다. 그런 건 그 누구의 관심사도 아니었다.

우리는 스스로를 혁명가로 여겼지만 개별적 자각을 통해 획득되는 공화시민의 자질은 결여하고 있었다. 끼리끼리 패거리 지어 서로를 전근대적 집단주의로 얽어 맸고 민주적 절차와 다원주의를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도로 치부했다. 운동 지도부의 독재를 묵인, 방조하기도 했다.

그 시절 무엇이 우리를 그토록 치열한 정치투쟁으로 내몰았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여러 이유들이 떠오른다. 정치과잉과 도덕정치라는 뿌리 깊은 부정적 문화유산, 명분과 선명성만 따지는 성리학적 이상주의, 입시에 눌렸던 일탈욕구, 농경사회 잔재를 비롯한 전근대적 유제(遺制)에 대한 혐오, 지금보다 희소했던 대학생 신분이 주는 왜곡된 사(士)의식, 실용주의 부재, 억압적이던 정치현실 그리고 새 시대를 여는 선택 받은 세대라는 자부심도 한몫 했다. 그러나 좀더 깊은 근원에는 억압적 부성(父性)에 대한 반항이 있었다. 숨막히게 권위적이고 때로 갑질도 서슴지 않아 끔찍이 싫던, 그러나 내게 밥과 잠자리를 마련해주려 노고함을 알기에 차마 대놓고 미워할 수 없던 아버지에 대한 양가감정이 우리 마음 밑바닥에 있었다.

내 마음을 헤아려주지 않던 담벼락 같은 아버지, 농촌문화에서 자라나 촌스럽고 가부장적이고 못나 보이는 아버지, 그 말도 통하지 않는 아버지를 우리는 창피해했고 그가 나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지우고 싶었다. 그 거부감과 증오가 투사된 피사체가 당대의 권력자 전두환이었고 광주에서 벌어진 일은 분노해도 된다는 또 분노해야 한다는 떳떳한 명분과 권리마저 주었다. 당시 우리가 쏟아냈던 분노와 돌팔매는 사실 아버지를 죽이는 살부(殺父)의식이었다. 우리가 건국의 아버지와 근대화의 아버지를 부정한 건 그러므로 너무나 당연한 귀결이었다.

아버지가 사라지자 남은 건 무조건 내 편을 들어주는 모성에 대한 허구적 신화뿐이었다. 강인한 표정으로 자신을 불살랐던 오이디푸스의 후예들은 사실 나약했다. 우리는 떼를 지어 위로를 건네는 모성을 찾아 그 보호막 밑으로 숨어들었고, 그곳에서 서로의 상처를 핥아댔다. 영악했던 우리는 어떠한 위로도 증세를 경감하는 진통제에 지나지 않으며 위로에의 의존이 도움은커녕 모두를 망칠 뿐이라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개의치 않았다. 진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서로가 서로에게 따듯하다는 허구, 우리가 따듯한 사람이라는 자기확증뿐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자신을 속였고 세상마저 속였다. 우리는 청년시절 견고하게 형성된 감상적 정체성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했고 결국 위로와 선동에 기생했다. 우리는 남 탓하고 사회 탓하는 어린아이로, 성장을 맹렬히 거부하는 지체아로 남았다. 그렇게 성장하지 못한 채 늙어버린 아이의 모습으로 오늘에 이르렀다.

민주화라는 명분을 둘렀지만 실제 우리를 움직였던 건 통제되지 않은 해체와 죽음의 본능인 타나토스(thanatos)였다. 무의식에 존재하는 그 파괴적 충동은 모든 금기를 거부했다. 거리에서 피 맛을 본 우리에게 금기나 정지선 따위는 없었다. 우리는 흥분했고 파괴의 에너지를 이어갈 근거를 눈이 벌겋토록 찾아 헤맸다. 마르크스, 앵겔스, 볼세비키, 모택동, 마르쿠제, 그람시, 그러다 위수김동(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 친지김동(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동지)까지. 그럴 듯 해 보이기만 하면 무엇이든 좋았다. 오히려 불온할수록, 반역의 쾌감이 클수록 매력적이었다. 대다수에게 중요했던 건 외양일 뿐, 결코 본질이 아니었다. 우리가 사회주의 세력의 전략적 속임수에 속았다거나 선동되었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우리는 내부 증오대상에만 몰두했으므로 윗동네에서 벌어지는 비극에 분노할 여력이 없었고 별 관심도 없었다. 그러다 적의 적은 친구일 수 있다는 정신분열적 허위의식에, 그 기만적이고 허구적인 친근함에 함몰되어 버렸다. 참혹한 진실은 우리가 무엇인지도 알지 못한 채, 아니 알려고도 하지 않은 채 제 발로 불꽃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는 것이다. 우리는 상상 속 괴물이 도사리고 있는 심연을 바라보다, 그 괴물을 지나치게 미워하다 스스로 괴물이 되어 버렸다.

어쩌면 우리가 밟았던 궤적은, 낭테르대학 여학생 기숙사 개방요구가 빌미가 되어 어이없이 폭발했던 프랑스 68혁명이나 60년대 미국 히피운동처럼 사회가 탈권위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벌어지는 조금은 불가피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멈춰야 할 곳에서 멈추지 못했다. 민주화라는 외피를 계속 뒤집어쓴 채 우리는 그 너머로 치달렸다. 어렴풋이나마 너무 나간 걸 알았지만 돌이킬 수 없었다. 오히려 우리는 피상적 승리자가 되어 버렸고 이에 고무 받은 우리의 집단 자아는 끝없이 팽창해버렸다. 지금도 우리는 옳은 일을 했다는 또 언제나 옳다는 자기확증을 가슴 깊이 소중히 간직하며 살아가고 있다.

고백컨데, 우리 세대는 성취한 것이 없다. 선배들이 만든 산업화와 성장의 과실을 독차지했지만, 벤처거품을 타고 게임회사 몇 개를 만들었을 뿐 다음 세대를 위한 씨앗을 심지 못했다. 선배들의 노고가 만든 관성에 기생하면서도 그들의 노고를 인정하기는커녕 헬조선 운운하며 자신의 책임에 눈감아 버리는 유체이탈화법마저 쓰고 있다. 민주화라는 성취를 독점, 과장하면서 왜 분노하지 않냐고 후배들에게 무책임한 꼰대질마저 하고 있다. 우리가 남긴 유산은 근시안과 분열뿐인지도 모른다.

또한 우리는 근대와 공화정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우리의 밥이 어디에서 나오는지도 알 지 못했다. 그 결과 가장 퇴행적 좌파가 되어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력이 낮고 세상 흐름에 무지하므로 자신이 좌익이라는 자각마저 못하고 스스로를 진보라고 착각하고 있다. 좌파도 되지 못하는 퇴행세력이 되어버린 것이다. 우리는 슬픈 세대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변명은 청년기에 새겨진 ‘강렬한 각인’이 우리의 정체성을 확정해 버렸고 또 현재의 퇴행도 만들었다는 것뿐이다.

사실 각인자극에 대한 인간의 감수성은 놀랍도록 치명적이다. 청년기에 각인된 정체성은 무섭도록 변하지 않는다. 만일 한국과 중국이 전쟁을 벌인다면 중국군 선봉에 서는 건 자신의 뿌리가 한국임을 아는 조선족일 것임을 굳게 믿어 의심치 않는다. 중국말보다 한국말과 한국문화에 더 익숙한 조선족, 다른 중국인으로부터 멸시와 차별을 받은 조선족은 바로 그 점 때문에, 자신도 중국인이라는 청년기에 형성된 의심받는 정체성을 증명하기 위해 가장 용맹하게 또 가장 잔인하게 우리와 싸울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역사의 격랑에서 자신의 아버지를 잃어버렸을 뿐,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하지는 않았다. 우리는 그들보다 못한 존재다.

그 해 여름, 착취당하는 민중의 고통에 절규하던 친구가 어떻게 사는지 알지 못한다. 다만 ‘착취도 당하지 못하는 비참함은 착취당하는 비참함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비참하다’는 조안 로빈슨(Joan Robinson)의 경고를 계기로 내가 무지의 대오에서 가까스로 탈출했듯, 그도 폭풍 같았던 집단 미망에서 벗어났기를 바랄 뿐이다. 물론 각인에서 벗어나는 행운이 그리 쉽게 주어지지 않음도 잘 알고 있다.

그 해 여름 이후 우리 세대는 너무 크게 웃자랐다. 우리는 현존하는 정치 괴물집단이 되어 너무나 오랫동안 대한민국을 퇴행으로 이끌어 왔다. 우리는 시대를 끊어가려는 과오를 저질렀고 지금도 그 과오를 반복하고 있다. 생명과 역사의 연속성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우리 세대를 또 끊어가는 역사를 경계하는 건 그러므로 너무나 당연하다. 우리는 잃어버린 세대(lost genetation)다. 그리고 잊혀져야만 하는 세대다.

나는 나의 세대에서 이탈해 대한민국에게 요청한다. 나는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나와 동시대를 겪은 386 세대, 이제는 586이라 불리는 우리 세대에게 사회적, 정치적 사망선고를 내려줄 것을 요청한다. 고백컨데 나는 그들의 어리석음을 혐오하고 증오한다. 내가 매일 꾸는 행복한 꿈은 그들과 함께 순장되는 것이다.

이동기 시민기자(공인회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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