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탈린과 히틀러의 언론 정책을 비교해 보면 소련의 경우 사전, 사후 검열을 통한 언론에 대한 직접적인 통제에 의존한 반면 나치 독일에서는 주요 언론기관들의 편집권에 대한 감독을 통한 간접적인 통제를 사용하였다는 중대한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여기에 더하여 소련에서는 문제가 된 저술활동으로 인하여 언론인들의 신변이 국가기관에 의하여 위협받는 경우가 많았으나 독일에서는 해당 저술이 금서 목록에 오르는 경우는 있어도 그로 인하여 직접적인 신체적인 위협을 받는 경우는 없었다.

스탈린의 소비에트 연방에서는 어느 누구도 정부기관의 검열을 피해 갈 수 없었다. 1922년에 설립된 정부기관 글라블리트 (Glavlit)의 주요 기능은 국가 기밀이 유출되지 않도록 정보의 유통을 사전 사후 검열하고 감독하는 것이었다. 책이나 신문, 잡지 등 출판물에 한하지 않고 라디오, TV를 통한 정보 유통까지 모두 관리하였다. 이에 더하여 글라블리트는 금서목록 (Perechen)을 작성하였는데 처음에는 국가기밀 보호의 차원에서 작성되었으나 대중들이 읽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되는 출판물에까지 확대되었다. 사전 검열이 존재하는 소련에서는 공산당이 언론기관의 역할을 직접 담당하였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히틀러 치하 나치 독일의 언론 정책은 선전부 장관을 맡았던 히틀러의 최측근 괴벨스에 의하여 총체적으로 관리되었다. 그는 사소한 일을 중대 사안으로 과장하고 과거의 모든 일을 어제 일어난 일처럼 묘사하며 동일한 내용을 새로운 방식의 간결한 메세지로 포장하여 무한반복하는 방법으로 대중들의 사고력을 마비시키려 하였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독일 국민들이 이러한 간단한 언론 조작과 선동을 알아차리지 못 하였던 것은 기존의 언론인들에게 자유롭게 기사를 적게 하는 동시에 괴벨스가 직접 언론사 편집장들을 압박하여 나치스에 유리한 기사들은 전면에, 불리한 기사들은 후면에 배치하도록 하였기 때문이다. 독일의 대중들은 라디오에서 들었던 내용을 신문에서 다시 확인하며 서서히 괴벨스의 선동에 세뇌되어 정부정책을 무비판적으로 지지하게 되었다.

소비에트 연방은 종교를 계급의 관점에서 해석하여 교회를 옛 지배 계급의 도구로 인식하였다. 공산당과 교회는 서로 상대방을 적대시하여 1917년 러시아 정교회의 평의회는 볼셰비키 공산주의를 '적 그리스도'라고 칭하였고 1918년 공산주의 정권은 러시아 정교회를 국가에서 분리하고 신성모독, 무신론자 협회 창설, 교회재산 압류로 대응하였고 그 결과 교회의 정치적 저항은 중단되었다. 그러나 소비에트 연방에서 민간인들의 종교 활동은 스탈린 시대 내내 지속되어 1937년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57% 주민들이 스스로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대답하였다. 스탈린은 무신론 교육과 종교 탄압을 지지하였으나 자신의 우상화 작업에 종교적 이미지를 이용하는 데 망설이지 않았으며 1941년 독일과의 전쟁이 발발한 이후에는 미국, 영국, 프랑스 등 동맹국과의 관계 개선을 위하여 러시아 정교회를 부활시키게 된다.

나치 독일은 국가와 종교의 대립, 과학적 합리성과 종교적 신념의 대립, 예수 그리스도가 유대인이라는 점에서 카톨릭 및 개신교와 갈등 관계에 있었으나 정교 분리의 원칙에 합의하면서 성공적으로 종교계에 대한 우위를 확립하였다. 실제로 독일 내 기독교인들의 나치 독일에 대한 지지는 상대적으로 미약하였는데 이들의 히틀러에 대한 지지 유보는 상당부분 나치스의 정강정책이 그들의 전통적 믿음과 충돌한다는 사실에 기인하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이를 우려한 히틀러는 1933년 바티칸의 교황 11세와 교황청이 독일정치에 개입하지 않는다면 독일 정부도 자국 내의 카톨릭 교회에 대하여 간섭하지 않을 것임을 약속하는 종교협약을 체결하였고 개신교에 대하여는 독일 복음주의 교회의 제국 주교로 나치스 당원인 루트비히 뮐로 (Ludwig Muller)를 임명하였다. 하지만 기독교를 믿는 유대인들을 함부로 독일 사회에서 배척할 수는 없다는 기독교인들의 항의는 계속되었다. 다만, 독일 내의 카톨릭과 개신교의 신도들은 히틀러의 나치스가 무신론자들로 이루어진 공산주의에 대하여 가장 강력히 반대하는 정당이라는 점 때문에 정치적인 반대활동은 자제하였다.

스탈린의 집권기간에 소비에트 연방의 예술은 "민중이 이해하지 못 하는 예술은 필요 없다"는 구호로 요약되는 사회적 리얼리즘에 충실했다. 소설가 막심 고리키 (Maxim Gor'kii)의 주도 하에 모든 예술은 사회주의 현실을 아름답게 표현하는 동시에 사회주의 건설의 위대한 업적을 주제로 해야 했다. 이에 따라 예술 작품들은 예술 자체로서는 그 의미가 없으며 소련 사회 변혁의 도구이어야 했다. 특히 문학 분야에 정부 당국의 검열과 작가에 대한 국가적 차원의 억압이 집중되었다.

반면 히틀러의 집권기간 동안 나치 독일의 예술은 민족주의 리얼리즘의 구호 하에 예술은 독일 민족의 모든 창조적 요소를 결합하여 민족의 행복을 추구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았다. 1920년대 바이마르 시대의 전위예술은 그 가치가 부정되었고 모든 미술작품들은 비엔나 예술 아카데미 진학을 꿈꾸었던 히틀러 자신의 예술적 취향에 따라 그리스 로마 시대의 미술과 건축을 모범으로 삼아야 했다. 히틀러가 직접 관심을 보였던 미술 이외의 분야에서는 상당히 자유로운 예술활동이 보장되었으나 나치 독일 체제 하에서 히틀러 집권 이전에 존재하던 독일 예술의 다양성은 서서히 사라지게 된다.

경제정책의 측면에서 스탈린과 히틀러 모두 기본적으로 시장경제와 자본주의에 반대하였으나 생산성 증대를 위하여 경쟁적 요소를 도입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스탈린은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정치제도와 사회 질서는 생산양식과 그에 따른 사회적 관계에 의하여 파생된다는 유물론적 역사관에 따라 사회주의 건설을 위하여 현대적인 공업 경제와 농업 경제의 건설, 착취의 폐지, 자본주의의 반격에 대비라는 과제를 수행하여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경제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자본주의적 요소를 도입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는데 레닌의 신경제계획 (NEP)에 찬성하였으며 생산현장에서 초과 생산량을 달성한 근로자들에게 물질적 보상을 부여하는 스타하노프 (Stakhanov) 운동을 도입하였다.

히틀러는 경제는 언제나 민족과 국가의 요구에 종속되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으며 전쟁을 수행하는 주요한 수단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민간이 주도하던 독일 경제는 국가 주도의 통제 경제로 서서히 변화해 가면서 매년 민간의 소비는 감소하고 국가 기반 산업에 대한 투자는 급속하게 증가했다. 히틀러의 나치 독일은 사적 소유가 독일 국민 전체의 이익에 부합하는 생산적 자본이라면 창조적 경쟁과 기술 혁신의 자극제로 보아 기업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였다. 히틀러와 스탈린 양자 모두 1930년대의 대공황 극복을 위하여 폐쇄적 자립경제를 추구하였는데 국내의 민간 소비를 억제하고 군비 확장을 위한 중공업을 육성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스탈린의 소비에트 연방과 히틀러의 나치 독일 하에서 가장 놀라운 점은 일반 국민들의 저항이 미약했다는 점인데 두 독재자 모두 반대파들을 성공적으로 고립시켰으며 일반 대중들은 기회주의적으로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여 자신의 이익을 도모했기 때문이다. 소련 노동자들은 스타하노프 운동 하에서 목표 초과 달성자가 되기 위하여 노력하면서 노동자에서 관리직으로 승진하는 것에 만족하는 것으로 체제에 순응하였으며 자신들의 조국이 근대적 농업국가에서 현대적 공업국가로 변화해 가는 모습에서 자신들의 후손들은 보다 나은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으로 믿으며 현실의 고통을 인내하려 노력하였다.

독일 노동자들은 직장 내의 능력주의 도입과 사회복지 프로그램 확충에 만족하면서 나치 독일 체제에 대하여 큰 불만이 없었다. 실제로 일반 시민들의 인식에 따르면 히틀러는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이전까지는 경제불황을 극복하고 군대를 재건하였으며 영국, 프랑스와 정면으로 대립하면서 오스트리아와 체코를 독일의 영토로 만든 유능한 지도자였으며 게슈타포 등은 국가의 반역행위자들을 처벌하기 위한 하나의 정부기관일 뿐이었다. 여기에 더하여 양국의 국민들은 스탈린과 히틀러에게 직접 편지를 보낼 수 있었는데 이는 지도자들과의 일체감을 강화하여 심리적 저항을 줄이는 한편 두 독재자가 정치적 경쟁자들의 숙청에 이용될 정보를 손쉽게 얻는 수단이기도 했다.

두 독재체제 모두 도저히 회유할 수 없는 정치적 반대자들을 집단수용소로 보내어 강제노동을 시켰는데 이러한 수용소 시스템은 소비에트 연방의 경우 차르 시대의 유형지와 같이 미개척지역의 개발에 수용자들을 활용하면서 그들의 사상을 개조시키려고 한 반면 나치 독일에서는 반체제 인사들의 효과적 감시와 유대인 등 소위 열등민족의 절멸을 주요한 목적으로 하였고 부수적으로 강제노동을 통하여 정치범들의 의식을 개조하는 것과 유대인 등을 죽음으로 몰아가기 전에 경제적으로 활용하는 것을 동시에 추구하였다.

소련의 강제수용소는 러시아 내전 당시에 보안기관 체카 (Cheka)에서 볼셰비키에 대항하였던 사회주의자들을 수감하였던 것에서 시작하여 국가정치국 게페우 (GPU), 후대의 전연방 국가정치국 오게페우 (OGPU)에 의하여 관리되는 수용소 관리본부인 굴라크 (GULAG)로 발전되었는데 주로 불모지와 미개척 지역에 설치되어 수감자들에게 강제노동을 하도록 하면서 정신 개조와 국토 개척이라는 두 가지 정책적 목표를 동시에 추구하였다.

반면 독일의 수용소 제도는 기본적으로 마르크스주의자 등 정치적 반대자들을 수용하는 시설에서 시작하여 유대인과 전쟁포로들을 수용하는 시설로 확대되었다. 초반에는 룀의 돌격대가 국가 기관과 별도로 수용소를 관리하였으나 점차 법무부의 지역 책임자에게 관리 책임을 넘겨 주었고 1935년에는 힘러의 친위대 산하의 경비대가 관리하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다하우 수용소로 대표되는 독일 내의 강제노동 수용소와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 수용소와 같은 폴란드 및 소련의 점령지역에 위치한 학살 수용소의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되어 관리되었다.

마지막으로 스탈린과 히틀러의 개인적 성격이 두 체제에 대한 후대의 평가에 영향을 주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스탈린의 기회주의적 성격이 소련의 독재 체제를 국가 위기 시마다 현실적 실용적으로 운영하게 한 반면 히틀러의 고지식한 원칙주의자로서의 모습이 나치 독일의 국가 운영을 비현실적 관념적으로 만든 측면 - 예컨대 국가적 차원의 유대인 학살 - 이 있다. 이에 따라 후대의 사람들에게 공산주의는 본래의 의도는 좋았으나 인간의 본성을 변화시키지 못 하여 실패한 이념이라는 역사 속의 신화로 남게 되었으나 파시즘은 그 시작부터 잘못된 사고방식이며 그 자체로 악이라는 인식이 전세계적으로 확산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유태선 시민기자 (개인사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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