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거일 칼럼] 혹리(酷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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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초승인 2019.10.17 10:29:00
  • 최종수정 2019.11.13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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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독하고 까다로운 관리'인 혹리, 법 달리 적용하지 않은 원칙주의자...법 엄격 공정 시행돼야 너그러운 사회 나와
우리 역사서 혹리라 불릴만한 인물은 이규완 있지만 규칙 잘 지켜 열심히 하는 '순리'에 가까워
혹리 명성 얻으면 정권의 버림받아도 앞날 밝아...조국 수사하는 검찰 향후 주목돼
복거일 객원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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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史記)’에서 가장 재미있는 부분은 열전(列傳)입니다. 사기는 중국 고대 왕조들의 편년사(編年史)인 본기(本紀), 연표, 부문별 문화사인 서(書), 열국사(列國史)인 세가(世家) 및 개인들과 집단들의 전기인 열전으로 이루어진 통사입니다. 기전체(紀傳體)라 불리는 이런 역사 서술 방식은 한문 문명권에서 기본적 방식으로 자리잡았습니다.

70권이나 되는 열전들 가운데서 많은 사람들이 흥미를 느끼는 것은 ‘혹리열전(酷吏列傳)’입니다. 혹리는 ‘혹독하고 까다로운 관리’입니다. 법을 집행할 때 사정을 살피거나 대상에 따라 법을 달리 적용하지 않는 원칙주의자입니다.

사기를 지은 사마천(司馬遷) 자신은 혹리들을 폄하했습니다. 유가(儒家)의 ‘어짐(仁)’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아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리고 법가(法家)를 따른 진(秦)이 멸망한 것은 가혹한 법을 통치의 수단으로 삼았기 때문이라는 주장을 폈습니다.

그러나 혹리열전을 읽다 보면, 사마천도 마음 속으로는 혹리들을 높이 평가했다는 느낌이 들곤 합니다. 한(漢)의 공식 이념이 유학(儒學)이었으므로, 논란을 피하기 위해 혹리들을 폄하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어짐’으로 나라를 다스린다는 얘기는 그럴 듯하지만, 현실에 그대로 적용될 수는 없습니다. 먼저 법이 엄격하고 공정하게 시행된 뒤에야, 비로소 너그러운 사회가 나올 수 있습니다. ‘죄수의 양난(prisoner’s dilemma)’을 이용한 실험에서도 그렇습니다. 먼저 철저하게 응징하는 ‘TIT-FOR-TAT’이 나온 뒤에야 보다 너그러운 프로그램들이 나옵니다.

혹리들은 손에 피를 묻혀야 했습니다. 당시 형벌이 워낙 잔혹해서 법대로 일을 처리하면, 죄인들을 처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혹리들은 물론 정의감이 강한 사람들이었죠. 그들은 법을 집행하면서 이익을 취하기 않았죠. 그래서 혹리라 불린 사람들은 죽을 때 재산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어느 사회에나 갖가지 기득권들이 존재하므로, 혹리가 나오기는 힘듭니다. 어떤 사람이 혹리가 되어 어떤 기득권을 허물 기미가 보이면, 그 기득권을 누리는 세력이 그를 제거합니다. 그래서 모두 혹리들에게 마음이 끌리는 것입니다.

우리 역사에선 혹리를 찾아보기 힘듭니다. 근본적으로, 우리 나라에선 인구의 10분의 1 가량 되는 양반 계급이 나머지 백성들을 착취해 왔습니다. 통일 신라 이루 우리 나라의 지배 계층은 바뀐 적이 없습니다. 게다가 구성원들의 3분의 1 가량되는 사람들은 ‘노비’라 불린 노예 계급에 속했습니다.

자연히, 모든 이념들과 제도들이 지배 계급의 기득권을 지키고 노예 계급을 억누르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습니다.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을 ‘인격이 없는 재산’으로 삼은 사회는 본질적으로 사악하고 모질므로, 혹리가 나올 여지가 없었습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가 시행되도록 하라”는 그 정의가 계급이라는 울타리에 막히게 됩니다.

노예제에 바탕을 둔 사회는 풍요롭고 너그러울 수 없습니다. 어떤 종류의 혁신도 체제를 흔들므로, 모든 일에서 단 하나의 표준을 강요합니다. 조선에선 유학(儒學)만이, 유학에서도 성리학(性理學)만이, 통용되었습니다. 나머지 이념들이나 종교들은 모조리 이단으로 취급되어 철저하게 억제되었습니다.

그렇게 가난하고 억압적인 사회에선 나누어가질 만한 부가 아주 적으므로, 지배 계급 안에서 권력 투쟁이 심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조선조의 처절한 당쟁은 노예제 사회의 필연적 현상이었습니다. 그렇게 서로 사생결단을 하는 터에, 혹리가 나올 수는 없었습니다. 우리 편은 죄가 무거워도 봐주고, 상대편은 죄가 없어도 모함으로 파멸시키는 것이 관행이 되었습니다. 

우리 역사에서 혹리라 불릴 만한 인물로는 이규완(李圭完)이 먼저 떠오릅니다. 개항기에 큰 역할을 한 분이지만, 개설서엔 나오지 않습니다. 혹리라 불릴 만한 인물이 개항기에 비로소 나왔다는 사실도 음미할 만합니다. 엄격한 신분제가 흔들린 시기에야, 비로소 혹리가 나올 여지가 생긴 것입니다.

이규완은 세종의 넷째 아들 임영대군(臨瀛大君)의 후손이었는데, 집안이 몰락해서, 그의 부친은 뚝섬의 나무장수였습니다. 박영효(朴泳孝)의 식객이 되어 은혜를 입은 뒤, 그는 평생 박영효를 섬겼죠.

1883년에 서재필이 청년들을 이끌고 일본에 가서 신식 군사 지식을 배울 때, 이규완도 합류해서 토야마(戶山) 육군 하사관학교에서 배웠습니다. 1884년의 갑신정변(甲申政變)에 다른 유학생들과 함께 가담해서 서재필의 지휘 아래 간악하다고 지목된 대신들을 처형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탐관오리로 악명이 높던 한규직(韓圭稷)을 몽둥이로 때려 죽인 일로 그는 정적들의 경계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갑신정변이 실패하자, 이규완은 박영효를 따라 일본으로 망명했습니다. 갑신정변을 일으킨 사람들의 가족들은 처참한 운명을 맞았습니다. 남자들은 모조리 처형되고 여자들은 모두 관비들이 되었습니다. 

청일전쟁 뒤 일본이 조선을 장악하고 박영효가 실권을 잡자, 이규완은 경찰의 실권을 쥐었습니다.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손자로 왕위를 노리던 이준용이 살인 교사 혐의를 받자, 이규완은 흥선대원군의 사저인 운현궁을 덮쳤습니다. 그는 흥선대원군의 물러가라는 호령에도 물러서지 않고 “소생은 어명을 시행하고 있사옵니다”라고 대꾸했습니다. 그리고 이준용을 포박해서 끌고 나왔습니다.

을미사변(乙未事變) 직전 실각한 박영효를 따라 다시 일본으로 망명한 뒤엔, 그는 끊임없이 조선에서 파견되는 자객들로부터 박영효를 보호하는 임무를 잘 수행했습니다. 그리고 박영효의 지시에 따라, 일본과 조선을 오가면서 고종을 폐위하고 명망이 높던 의화군(義和君)을 추대하려는 음모를 꾸몄습니다.

이규완은 혹리보다는 순리(循吏)에 가까웠습니다. 순리는 ‘규칙을 잘 자키며 열심히 근무하는 관리’를 뜻합니다. 그는 인품이 높고 행실이 올바르고 모든 일에서 솔선수범해서, 그가 강원도관찰사로 일할 때, 도민들이 그를 칭송했습니다. 지금도 그의 인품을 알려주는 일화들이 많이 남았습니다. 어지럽고 위태한 나라가 그를 혹리로 만든 셈입니다.

그는 타고나 무인이었습니다. 일본 유학에서 익힌 검술로 우정국 낙성식에서 민영익(閔泳翊)의 귀를 자른 일은 검객으로서의 명성을 높였습니다. 청일전쟁 뒤에는 경무부관으로 발탁되어, 궁궐의 경비를 맡았습니다.

궁궐을 지키던 그를 보면, 송병준(宋秉畯)은 이완용(李完用)에게 농담을 건네곤 했습니다, “불알 잘 간수하시오. 저 검은 옷 입은 순사가 누군지 아시오?” 원래 무인이었던 송병준은 이규완의 됨됨이를 알아본 것이었습니다. 

자신들이 고용한 ‘칼잡이’가 혹리의 면모를 보이자, 현 정권은 펄펄 뛰면서 나라를 뒤집어 놓았습니다. 그 꼴을 보다가, ‘지금 청와대엔 송병준 만한 지인지감(知人之鑑)을 갖춘 인물도 없나?’ 하는 탄식이 나왔습니다.

혹리는 혁명가는 아닙니다. 아무기 강직해도 관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관직에서 물러나면, 스스로 큰일을 이룰 능력은 없습니다. 사기 열전에 나온 혹리들은 모두 황제의 신임을 얻어서 활동했습니다. 그들은 황제의 뜻에 어긋나는 일들은 결코 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임면권을 쥔 대통령의 뜻을 거스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고대와 다른 점이 하나 있습니다. 황제의 신임을 잃으면, 혹리는 관직만이 아니라 드물지 않게 목숨도 잃었습니다. 지금은 대통령의 눈밖에 나더라도, 목숨까지 내놓아야 하는 세상은 아닙니다.

오히려, 혹리의 명성을 얻으면, 정권으로부터 버림 받아도, 앞날이 밝습니다. ‘권력의 압력을 견디면서 정의가 시행되도록 했다’는 세평보다 더 든든한 정치적 자산은 없습니다.

그런 차이가 앞으로 ‘조국 전 법무장관 일족의 의혹’을 수사하는 검찰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흥미롭습니다. 조국 전 장관의 인맥과 경력이 그러하므로, 그의 일족에 대한 수사는 거대한 ‘권력형 비리’로 확대될 가능성이 큽니다.

인공지능에 대한 철학적 고찰 (22)

지난번 글(21회)에서 정보 비용이 실질적으로 사라졌다는 사실이 ‘사회적 기술’에 미친 영향을 살폈다. 그 사실엔 이념적 측면도 있다. 정보가 워낙 중요하므로, 그것의 처리에서 나온 발전은 사회의 구조와 작동 방식에 근본적 영향을 미친다. 자연히, 사회의 구성과 운영에 관한 주장들의 복합체인 이념은 새로 다듬어질 수밖에 없다.

다시 찾아본 ‘사회주의 계산 논쟁’

1919년 오스트리아 공산주의자 노이라트(Otto Neurath)는 ‘전쟁경제를 통해서 현물경제로’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1919년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공산주의자들이 장악한 러시아의 경제 체제가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때였다.

당시 유럽에선 사회주의가 높은 인기를 누렸다. 특히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선 사회주의자들이 지식인 사회의 주류를 이루었다. 그리고 전시에 나온 배급 위주의 전쟁 경제가 완전한 계획 경제(planned economy)로 이행하는 중간 단계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퍼지고 있었다.

노이라트의 주장에 대해 미제스(Ludwig von Mises)는 이내 반론을 폈다. 그는 사회주의 체제가 제대로 작동할 수 없다고 단언했다. 시장에선 수많은 개인들과 기업들이 끊임없이 방대한 정보를 처리해서 수요와 공급이 균형을 이룬다. 정부는 그런 정보 처리 능력이 없다. 그래서 사회주의 체제는 정부가 수집한 아주 적은 정보들로 거칠게 계산해서 만든 허술한 계획에 의지하게 된다.

“자유 시장이 없는 곳엔, 가격 기구가 없다; 가격 기구가 없으면, 경제적 계산이 없다”고 미제스는 명쾌하게 설파했다. 1917년 러시아에서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났지만, 당시엔 아직 사회주의의 청사진이 제시되지 못한 때였다. 미제스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사회주의 체제에 사망 진단을 내린 것이다.

20세기 사회과학의 가장 중요한 논쟁들 가운데 하나인 ‘사회주의 계산 논쟁(Socialist Calculation Debate)’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주로 빈, 베를린 및 프라하 같은 독일어권에서 이루어지던 논쟁은 오스트리아에서 나치가 득세한 뒤 주로 영어권에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자유주의 진영은 영국에 정착한 하이에크(Friedrich A. von Hayek)가 대표하게 되었다.

하이에크는 사회주의가 정보에 관한 그른 가정에 바탕을 두었음을 지적했다. 사회 운영에 필요한 정보는 거의 다 개인들이 지녔고 정부가 이내 이용할 수 있는 상태로 존재하지 않는다. 정부가 그런 정보를 모으는 데는 근본적 한계가 있는 데다가 큰 비용과 시간이 소요되므로, 정부는 늘 빈약하고 묵은 정보만으로 경제를 운영하게 된다.

하이에크는 시장이 지식을 생산해내는 기구라고 지적했다. 자유로운 시장에선 기업들이 소비자들의 선택을 받으려고 경쟁한다. 그래서 보다 나은 제품들을 보다 효율적으로 생산하려고 끊임없이 애쓴다. 그 과정을 통해서 시장은 가장 나은 제품들과 공정과 유통 경로를 찾아낸다. 그래서 하이에크는 경쟁을 ‘발견 절차(discovery procedure)’라 불렀다.

이런 발견 절차를 지녔으므로, 시장은 빠르게 진화하고 사회도 발전한다. 시장이 본질적으로 정보 처리 기구고 시장은 궁극적으로 지식을 생산해낸다. 진화가 본질적으로 ‘환경에 맞는 지식의 습득’이라는 깨달음이 생물학에서 널리 받아들여지기 전에 하이에크는 진화의 본질을 깨달은 것이다. 

논쟁이 진행되자, 사회주의자들도 정보 처리의 중요성과 시장의 효율적 정보처리 능력을 깨닫게 되었다. 마침내 그들은 정부가 시장과 비슷한 기구를 만들어 정보를 처리하는 ‘시장 사회주의(market socialism)’를 제시했다.

하이에크의 반응은 간명했다 – 시장 사회주의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의사 경쟁(pseudo-competition)”이어서, 시장이 이미 존재하는데 ‘짝퉁 시장’을 일부러 만드는 것이다. 그것으로 ‘사회주의 계산 논쟁’은 실질적으로 끝났다. 그리고 1990년대에 공산주의 체제의 붕괴로 미제스의 예언이 증명되었다.

미제스와 하이에크의 논지는 1) 사회에 존재하는 정보는 거의 다 개인들이 지녓고, 2) 그런 정보를 한데 모으는 일은 힘들고 큰 비용이 들므로, 3) 정부가 지닌 정보는 부분적이고 부정확하며, 4) 정부는 수집한 정보들을 정확하게 처리할 능력도 없다. 이런 논지에 대해 지금까지 사회주의자들을 반론다운 반론을 펴지 못했다.

이제 인공지능이 발전하면서, 상황이 바뀌기 시작했다. 개인들의 행태에 관한 정보를 집적한 ‘거대 자료(Big Data)’를 처리해서, 당사자들도 모르는 행태적 정보들이 생산된다. 그런 정보들을 ‘채굴한’ 기업들은 개인들의 행태를 미리 예측하고 대응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은 주로 대기업들이 이런 능력을 갖추었지만,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 정부는 이런 정보들을 어렵지 않게 취합할 수 있을 것이다. 당연히, 정부는 사회와 경제의 움직임을 점점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을 터이고 점점 정교하게 대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사정은 미제스가 제기한 전체주의와 명령경제에 대한 반론을 약화시킬 가능성이 있다. 되살아난 사회주의 사조가 점점 기세를 떨치는 지금, 꼭 한 세기 전에 시작된 ‘사회주의 계산 논쟁’을 다시 찾아보는 것은 그래서 뜻이 깊다. 이제 자유주의자들은 인공지능의 발전이 불러온 새로운 환경과 거기 담긴 함의들에 대해 깊이 생각해야 한다.

복거일 객원 칼럼니스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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