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가 제대로 정립되면 멋대로 해석돼 정치적 목적으로 악용되는 것을 웬만큼 막을 수 있을 것
정말 그런 효과를 거둘 수 있다면 역사 정립이 우리나라를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 정말 시급한 문제 아닌가

황인희 객원 칼럼니스트
황인희 객원 칼럼니스트

1990년 대한민국은 러시아와 국교를 맺었다. 우리 민족 역사상 두 번째 수교이다. 첫 수교는 1884년에 맺어졌다. 그런데 첫 수교 후 재 수교까지 125년 동안 우리나라와 러시아의 관계에 대한 기록은 창고에 갇혀 있었다. 러일전쟁에 일본이 승리한 후 닥쳐온 식민 지배와 철의 장막을 둘러친 냉전 시대를 거쳐 오면서 생긴 공백의 시간 때문이었다. 소련이 해체되고 두 나라가 다시 수교하면서 1990년 이후 드디어 러시아의 문서보관소들이 열렸고 조선 후기와 대한제국에 관한 기록들이 속속 드러났다.

그 중 가장 중요한 문서는 조선 주재 러시아 외교관들이 본국에 보낸 보고서들과 고종과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가 주고받은 편지들, 초대 공사 카를 이바노비치 베베르의 수기 등이었다. 베베르는 1884년 조러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할 때 서명했으며, 그 이듬해 러시아 공사로 부임하였다. 재임 기간은 1885년부터 1897년까지 무려 12년에 이르렀다. 그 기간 동안 청일전쟁, 갑오개혁, 을미사변, 아관파천 등이 있었으며 대한제국 건국 등 우리 근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사건들이 펼쳐졌다.

고종은 1896년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을 맞아 민영환을 특사로 보내며 첫 공식 친서를 보냈다. 그러나 그 내용에는 축하보다는 눈물의 호소가 더 무겁게 담겨 있었다.

러시아 모스크바 크렘린 안에 있는 우스펜스키 사원. 1896년 5월 21일 이곳에서 거행된 니콜라이 2세 황제 대관식에 민영환 등이 축하 사절로 참석했다.

… 불행하게도 짐의 나라 동쪽 이웃나라는 일본이다. … 최근 일본이 서양의 제도를 흉내 내고 배워 동양의 맹주가 되려 한다. 짐은 폐하가 짐의 나라의 실정을 동정하고 정의를 토대로 세계 열강 제국이 짐의 나라에 대한 일본의 불법적인 행위를 꾸짖고 나라의 독립을 침해하지 못하게 모든 조약 규정 위반을 즉시 중지하도록 권고하여주시길 바라고 바란다. 끝으로 짐은 눈물로 폐하께 호소하며 만수무강을 기원한다.

이 ‘눈물의 편지’ 덕분이었는지 러시아는 고종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1897년 고종이 ‘제국’을 건설하고 황제가 되는 것에도 처음에는 반대했지만 막상 황제에 즉위하자 러시아는 이를 가장 먼저 승인하였다. 러시아가 대한제국을 승인하자 일본, 미국, 프랑스, 영국이 그 뒤를 이어 승인의 의사를 보내왔다. 러시아 측의 문건을 통해 당시 어려운 상황에서도 왜 고종이 제국을 선포하고 황제가 되려 했는지에 대한 의문도 조금은 해소된다.

나는 세계 어느 나라도 고종을 황제로 승인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 고종에게 칭제건원하지 않도록 백방으로 권고하였다. 그러나 고종은 열강이 황제 존호 사용을 승인해줄 것으로 기대하지 않지만 대원군과 대비의 음모 때문에 황제 즉위식을 갖는 것이 부득이하며 영국에 체류하고 있는 대원군의 손자(이준용)를 왕으로 옹립하여 자신을 퇴위시키려는 가능성을 차단하고 싶다고 했다. 특히 황제에 즉위하면 백성들의 눈에 자신이 대원군이나 대비보다 윗자리에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 니콜라이 2세 황제가 자신을 황제로 승인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곧바로 거부하지 말고 현재의 칭호인 ‘대군주’ 폐하로 불러주기 바란다고 했다. - 1897년 10월 28일 쉬페이예르 대리공사가 러시아 외무부에 보낸 비밀 전문

1905년 러일전쟁 후 일본이 고종을 일본으로 강제로 데려가려 한다는 정보를 보고받은 니콜라이 2세는 “일본의 그런 행위는 어떻게든 예방되어야 한다”라고 보고서 윗부분에 직접 지시의 글을 썼다. 이렇게 고종의 안전을 지켜주기 위해 노력했던 니콜라이 2세는 1905년 11월 “패전 이후 혁명 세력의 확장으로 더 이상 대한제국을 도와줄 수 없다”라는 서신을 보내왔다. 혁명으로 니콜라이 2세의 입지도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러시아 예카테린부르크의 피의 사원 앞에 있는 니콜라이 2세 일가의 동상. 이들은 1918년 이곳에서 공산 혁명 세력에 의해 몰살되었다.
러시아 예카테린부르크의 피의 사원 앞에 있는 니콜라이 2세 일가의 동상. 이들은 1918년 이곳에서 공산 혁명 세력에 의해 몰살되었다.

1903년 이후 러시아 문건에는 ‘고종의 러시아 망명’에 대한 언급이 보이기 시작한다. 탈출과 망명의 타진은 그 구체적 방법까지 제시할 정도로 적극적이었다.

대한제국 황제가 일신상에 위험이 있을 경우 불가피하게 러시아 공사관에 피신처를 구하거나 러시아로 탈출하는 문제에 대해 러시아 측의 협조 가능성을 은밀하게 타진해왔다. 고종은 대궐을 빠져나오기 쉽고 피신을 예상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해 대비의 시신을 이장할 때 사당에서 공사관 담장의 샛문을 통해 오겠다는 것이다. - 1904년 1월 21일 파블로프가 외무부에 보낸 보고서

고종은 1908년 이후에 집중적으로 러시아 망명을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이미 국내 사정이 대한제국을 도와줄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 러시아는 고종의 망명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전 고종 황제가 배편으로나 육로로 러시아 망명을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고종이 러시아 영토에 출현하면 다시 극동에 심각한 위협이 초래되어 대한제국 문제를 둘러싼 한‧러 관계는 긴장이 조성될 것이다. 그러므로 고종 황제의 망명 계획을 거부하는 것이 좋다. - 1908년 11월 20일 도쿄 주재 말레비치 대사가 외무부에 보낸 비밀 전문

전 고종 황제가 러시아나 청국으로 피신할 마음을 갖고 있다. 이는 황제 자신이나 백성을 위해 바람직하지 않다는 권고를 했다. - 1909년 1월 8일 소모프 총영사가 외무부에 보낸 비밀 전문

망명을 말리는 소모프에게 고종은 “차라리 해외에 나가서 죽어도 좋다”라는 말을 했다고도 한다. 니콜라이 2세로부터 도와줄 수 없다는 서신을 받았지만 고종은 1908년에도 러시아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기대를 버리지 않았다. 1908년 1월 31일 주러 공사로 부임해 있던 이범진에게 “짐은 궁중에서 일본의 포로로 잡혀 있지만 북쪽 러시아를 바라보며 짐과 백성을 자유롭게 해주리라는 희망을 걸고 있다. 사랑하는 조카(이범진),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겠지만 그곳에 남아 니콜라이 2세 황제에게 도움을 청하라. 짐이 운명한 뒤에도 그곳에 남아 있으라. 일본이 수입과 지출을 통제하고 있으니 송금할 수가 없다”라는 편지를 보냈다. 1910년 5월 러시아 외무차관이 서울의 소모프 총영사에게 “이범진은 러시아를 떠나지 말라는 고종 황제의 어명을 지키느라 귀국을 거부하고 있다”라고 전했다. 우리나라로부터 송금이 끊긴 후 러시아로부터 월 100루블의 지원을 받아 근근이 연명하던 이범진은 1911년 1월 16일 페테르부르크에서 자결했다. 그는 “우리 조국은 이미 죽었습니다. 전하께서는 모든 권리를 빼앗겼습니다. 신은 적에게 복수할 수도, 적을 응징할 수도 없는 무력한 처지에 처했습니다. 자살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라는 유서를 남겼다.

러시아 측 문건은 이렇게 처절하고 애달픈 기록을 담고 있지만 우리 측 기록인 ‘고종황제실록’의 분위기는 러시아에 대해 사뭇 냉정하다.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 1900년 북청 사변 후 러시아는 만주 일대에 군사를 체류시킨 채 기한이 되도록 철수하지 않아 일본 · 영국 양국 동맹과 미국이 항의하였지만 러시아는 응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1903년 4월에 이르러 군사를 출동시켜 멋대로 대한제국의 용암포를 차지하였다. 일본은 한반도의 존망이 자신들의 안위와 관계된다고 여겨 몇 달을 절충하였으나 해결이 나지 않았다. 러시아가 도리어 군사 장비를 늘리자, 1904년 2월 9일 일본 함대가 러시아 함을 공격하여 인천에서 두 척을 격파하자 러시아 함은 퇴각하다가 인천항에서 자폭 침몰하였다. 10일 일본이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 5월 4일 러시아 주재 공사 및 직원들이 멀리 페테르부르그에 있는데, 러일전쟁 때문에 길이 막혀서 공사의 일이 어렵게 되었다. 봉급과 경비 보내는 것마저 어려우니 임시로 소환했다가 일본과 러시아가 평화를 맺은 다음에 토의하여 다시 파견하도록 하였다.

- 5월 18일 러시아 수도에 있는 공사관을 철폐하고 공사 이범진을 소환하라고 명하였다. 이날 외부대신이 칙명으로 만든 문서를 전국에 반포하였다. 대한 정부는 일본이 러시아에 대하여 전쟁을 선포한 것이 오직 대한국의 독립을 유지하여 동양 전체의 평화를 확고히 하는 데 있다는 것을 헤아려 이미 의정서를 체결하고 협력함으로써 일본이 교전하는 목적을 달성하는 데 편리하게 하였다. 또 러시아 주재 공사관을 철회하여 대한국과 러시아 간의 외교 관계가 단절되었다. 앞으로 대한국의 방향을 명백하게 하고 러시아가 조약 등의 조건을 핑계로 침략적 행위를 다시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문서를 만들었다.

서울 정동의 러시아 공사관 유적. 아관파천의 현장이다.
덕수궁 안에 있는 정관헌. 러시아 공사관에서 지낼 때 처음 커피를 맛본 고종은 이곳에서 커피를 마시며 외교 사절을 접대하곤 했다.

필자가 러시아 측 문건 인용에 참고한 도서 <제정 러시아 외교 문서로 읽는 대한제국 비사>(노주석 저)는 모스크바대학교 한국센터 객원교수였던 박종효 교수가 1997년부터 2년 동안 찾고 번역하고 해제 작업을 한 문서에 기초한 책이다. 그런데 이 책에 실린 대담에서 박종효 교수는 “… 러시아 측 자료가 다 진실일 수는 없을 것이다.…”라고 밝혔다. 러일전쟁의 패배로 대한제국에서 손을 떼고 있던 러시아가 외교 문서에 진실을 담지 않을 이유는 별로 없어 보인다. 하지만 남의 나라 기록이니 왜곡에 대한 경계는 늦출 수 없는 것이다.

전적으로 믿을 수 없기는 우리의 기록인 고종황제실록도 마찬가지이다. “고종황제실록은 일반적으로 <조선왕조실록>에는 포함시키지 않는다. 순종황제실록과 함께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주관하여 편찬하였기 때문이다”라고 국사편찬위원회가 작성한 ‘편찬 경위’에 설명되어 있다. 일본의 왜곡이 우려되어 아예 우리의 정사(正史)에 포함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고종 즉위 이후의 근대사는 무엇에 근거하여 공부하여야 할 것인가? 무엇이 전적으로 믿을만한 사료인가? 그렇다고 황헌의 <매천야록> 등 개인의 기록을 믿어야 할 것인가?

이렇게 ‘전적으로 믿을’ 사료가 없기 때문에 우리의 근대사가 표류하고 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고종황제실록에는 흥선대원군이 섭정했다는 기사는 실려 있지 않다. 신정왕후 조대비의 수렴청정에 대한 기록만이 확실하게 나와 있을 뿐이다. 그런데 우리는 대원군이 섭정했음을 철석같이 믿고 있다. 무엇에 근거하여 그런 역사 교육이 이뤄진 것일까? 인물에 대한 평가도 제멋대로이다. 개인이 가진 평가 기준이 다름으로 생기는 오차의 정도가 아니다. 역사 속 중요 인물의 평가가 극과 극을 치닫는 것은 물론 그 결과가 정치적 목적으로까지 악용되고 국가적인 분란을 야기하기도 한다.

지금이라도 우리 근대사를 바로 세워야 한다. 우선 황제실록부터 다시 써야 한다. 일성록, 승정원일기 등 주변 사료를 뒤지면 무엇이 왜곡되었고 무엇이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반영한 것인지 어느 정도는 추려낼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 다른 나라들의 기록까지를 반영해 ‘고종황제수정실록’ ‘순종황제수정실록’을 써야 한다. 광해군 때 북인이 중심이 되어 편찬된 ‘선조실록’이 일부 공정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인조반정 이후 이를 수정·보완하여 ‘선조수정실록’을 편찬한 전례도 있지 않은가.

역사가 제대로 정립되면 멋대로 해석되어 정치적 목적으로 이리저리 악용되는 것을 웬만큼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정말 그런 효과를 거둘 수 있다면 역사 정립이 우리나라를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 정말 시급한 문제 아닌가? 조속한 시도와 효과 실현을 간절하게 기대한다. 

*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 인용문에 고종 생전에는 쓰지 않던 ‘고종’이라는 묘호를 사용했음을 밝혀둔다.

황인희 객원 칼럼니스트 (다상량인문학당 대표 · 역사칼럼니스트) / 사진 윤상구

국사편찬위원회의 '조선왕조실록' 사이트 중 ‘흥선대원군 섭정’에 대한 검색 결과
국사편찬위원회의 '조선왕조실록' 사이트 중 ‘흥선대원군 섭정’에 대한 검색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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