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거일 칼럼] 전체주의자들의 도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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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초승인 2019.09.23 15:54:54
  • 최종수정 2019.09.24 11:05
  • 댓글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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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정권, 전체주의적 특질 가장 짙게 띤 집단...자유주의자들과 뚜렷이 변별돼
전체주의, 객관적 도덕의 존재 부정...전체주의자들의 삶은 가장 근본적 수준에서 부도덕하고 타락
복거일 객원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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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문회를 거치는 과정에서 드러난 조국 법무부장관의 행태에 대해 ‘이해하기 어렵다’는 반응들이 많았습니다. 그가 평생 위선적으로 살아왔다는 사실도 놀랍지만, 그런 위선들이 연속적으로 탄로날 때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천연덕스럽게 거짓이 분명한 변명들을 내놓는 태도가 더 놀랍다는 얘기였습니다.

하긴 그런 태도는 조국 장관에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내로남불’이 현 정권을 상징하는 구호가 되었다는 사정이 가리키듯, 현 정권 전체가 그렇습니다.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그들의 행태를 이해하려면, 이념적 접근이 필요합니다. 따지고 보면, 그들은 우리 사회에서 전체주의적 특질들을 가장 짙게 띤 집단으로 자유주의자들과 뚜렷이 변별됩니다.

대한민국의 구성 원리인 자유주의는 개인들을 존중하고 개인들의 자유를 늘리려 애씁니다. 반면에, 전체주의는 사회에 궁극적 가치를 두어서, 개인들은 필연적으로 사회에 예속됩니다.

전체주의 사회에선 개인들이 최고 지도자에게 모든 판단과 권한을 위임합니다. 그래서 최고 지도자의 결정이 사회의 결정이 됩니다. 그리고 사회는 지도자의 결정을 그대로 따르기 위해 모든 역량을 투입합니다. 이른바 민주집중제(Democratic Centralism)’입니다.

전체주의 사회의 지도자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궁극적으로 자신의 이익을 챙깁니다. 지도자는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결정들을 수시로 바꾸므로, 그런 결정들은 사회의 수준에선 일관성을 지닐 수 없습니다.

자연히, 전체주의 사회에선 ‘절차적 안정성’이 없습니다. 법도 관행도, 지도자의 결정에 방해가 되면, 곧바로 폐기됩니다. 그래서 어제의 영웅이 오늘의 반역자가 되고, 오늘의 충성스러운 행위가 내일의 전복적 행위가 됩니다.

사정이 그러하므로, 전체주의자들의 도덕은 자유주의자들의 도덕과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전체주의 사회에선 지도자가 결정한 사회적 목표를 이루는 데 도움이 되는 행위들만이 도덕적이고 도움이 되지 않는 행위들은 모두 부도덕합니다.

달리 말하면, 전체주의 사회에선 객관적 도덕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전체주의의 도덕은 마키아벨리의 도덕과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는 때로 도덕적으로는 잘못된 선택도 해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즉 그에겐 객관적 도덕이 존재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니, 전체주의자들은 법과 절차에 근본적으로 적대적입니다. 그들은 ‘악법은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말합니다. 물론 어떤 법이 악법인가 판정하는 일은 자신들만이 할 수 있다고 여깁니다.

여기서 전체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이 어떻게 다른지 잘 드러납니다. 자유주의자들은 악법도 지켜야 하며, 악법의 판정과 개정은 합의된 절차에 따라서 객관적으로 이루어져 한다고 믿습니다

전체주의가 객관적 도덕의 존재를 부정하므로, 전체주의자들의 삶은 가장 근본적 수준에서 부도덕합니다. 실제로, 전체주의자들은 모두 타락합니다. 자신이 진정한 사회적 목표를 위해 일하니, 자신의 행위들은 모두 정당화된다고 여기게 됩니다. 전체주의자들에게 ‘내로남불’은 논리적 귀결입니다. 

 지옥과 같은 북한 체제를 지지하고 북한 지도자를 숭상하면서도 북한에선 살지 않으려 하는 사람들과 미국을 늘 비판하면서도 자식들은 미국 대학들에서 공부시키고 카투사(KATUSA)에서 복무하도록 하는 사람들은 전형적입니다.

조국 장관의 딸이 부모의 부정한 도움을 받아 대학원까지 쉽게 진학했다는 것이 밝혀지는 것을 지켜보면서, ‘부모가 자식을 불행하게 만들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곤 했습니다. 어릴 적부터 부모로부터 잘못된 가르침을 받는 것은 얼마나 끔찍한 불행일까요? 

자기 실력으로 들어갈 수 없는 학교에 들어가면, 동료들을 따라가기 힘들 터이니, 공부에 재미를 못 붙였겠죠. 그러면 다시 부모의 부정한 도움을 받아 진학하게 되었겠죠. 결국 정직한 공부를 통해서 세상을 알아가는 지적 희열도, 자기 실력으로 좋은 학교에 진학했다는 성취감도, 그런 성취감이 주는 낙관적 태도도 느끼지 못했을 것입니다. 

설령 이번 일로 행적이 드러나지 않았더라도, 그녀가 잘살 수 있었을까요? 늘 자신의 정체가 드러날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살지 않았을까요? 실력이 부족한 터에, 의사 노릇은 어떠했을까요?

자식을 잘못 가르쳐서 세상을 살아가기 어렵게 만든 것 - 그것이 조국 장관의 궁극적 업보(業報)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공지능에 대한 철학적 고찰 (21)

인공지능의 사회적 영향

인공지능은 물건들을 만들어 쓰는 ‘물리적 기술’에 주로 쓰인다. 그러나 둘러보면, 우리는 인공지능이 사회를 조직하는 ‘사회적 기술’에도 많이 쓰인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실은 인공지능은 사회의 조직에서도 이미 혁명적 변화들을 불러왔다.

복잡하고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을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재현해서 살피는 시뮬레이션(simulation)은 보다 현실적이고 정교한 제도와 정책을 가능하게 한다. 인공 사회(artificial society)를 이용한 실험들은 사회 질서들이 창발되는 모습을 보여주어, 사회에 대한 통찰을 가능하게 한다. 휴대 전화와 같은 전자 기기들을 통해 수집된 자료들은 사람들의 행태에 관한 정보들을 실시간으로 제공해서 예측의 정확성을 크게 높인다. 덕분에 갖가지 시장 설계(market design)가 가능해져서 사회를 풍요롭게 만든다. 결혼 시장에서 나온 ‘짝 찾아주기(match-making)’ 기술은 모든 재화들의 수요와 공급을 촘촘히 연결한다.

인공지능이 부른 이런 변화들은 현대 사회의 성격을 근본적 수준에서 바꾸었다.
 
1) 정보비용이 실질적으로 사라졌다.
2) 통신과 교통이 편리하고 값싸졌다.
3) 정보가 실시간으로 온 세계에 퍼지면서, 온 세계가 문화적으로나 경제적으로 하나의 범지구적 시장(global market)으로 통합되었다.
4) 자연히, 지역성(locality)의 무게가 줄어들었다.
5) 결과적으로, 문화의 진화가 점점 가속되고 인류 문명의 모습은 점점 빠르게 바뀐다.

이런 사회적 변화들은 모든 사회들에 점점 큰 영향을 미친다. 특히 큰 영향을 받는 것은 기업들이다. ‘제4차 산업혁명’이란 말이 가리키듯, 기업의 환경은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1) 짝 찾아주기 기술의 발전으로 새로운 영업 형태가 가능해졌다. 예컨대, 수요와 공급이 아주 작은 품목들이 거래되는 ‘긴 꼬리(long tail)’ 시장이 나타났다. 여행객들과 잠자리를 제공하는 가정들을 맺어주는 사업이나 택시 운전자들과 승객들을 맺어주는 사업은 이미 크게 성공했다.

 2) 창업 비용과 위험이 크게 낮아졌다. 특히 창업 기업들을 육성하는 제도가 점점 효과적으로 작동한다. 덕분에 모험 기업들이 많이 나타난다.

 3) 범지구적 시장의 출현으로 성공적 기업들은 아주 빠르게 성장한다. 모든 시장들에서 승자가 이익을 거의 독식하는 현상(winner-take-almost-all)이 점점 뚜렷해진다. 이런 현상은 시장의 진화를 촉진시킨다.

4) 시장의 구조를 뒤흔드는 ‘파괴적 기술’이 점점 많아진다. 이제 소비자들의 욕구를, 흔히 소비자 자신들도 모르는 욕구를, 효율적으로 충족시킬 길을 먼저 생각해낸 사람들이 성공적 기업을 일으킬 가능성은 점점 커진다.

5) 자연히, 앞선 기업들의 선점 효과가 점점 짧아진다.

기업의 환경에서 나온 근본적 변화들은 당연히 모든 사람들의 환경을 바꾸어놓았다. 이런 변화들은 본질적으로 사회가 유동적으로 되면서 나온 현상들이면서 사회의 유동성을 늘리는 데 기여한다. 앞으로 인공지능의 가파른 발전은 사회의 유동성을 점점 늘릴 것이다. 사회의 유동성이 늘어난다는 것은 개인들의 활동이 활발해진다는 얘기다. 유동성의 원 뜻이 바로 그것이다. 유체는 고체보다 분자들의 활동이 활발하다.

이런 현상은 이미 여러 해 전에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프랑스 저술가 자크 아탈리(Jacque Attali)가 주목한 현대 사회의 “유목민화(nomadization)”는 대표적이다. 갑자기 유동성이 늘어난 사회에서 활발하게 움직이는 개인들을 유목민에 비긴 것은 멋진 비유고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었다.

자연히, 개인들은 선택의 폭이 늘어난다. 신분과 관습의 제약이 점점 느슨해지고 정보 비용이 실질적으로 사라지고 빠르고 싼 교통 수단이 나오고 짝 찾아주기 기술의 발전하면서, 보통 사람들도 사회적 및 지리적 제약에서 벗어나 거의 모든 일들에서 자신의 필요와 취향에 맞춰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직업과 직장과 의식주를 포함한 일상적 삶에서 개인들에게 열린 선택들의 가능한 조합은 천문학적 수준에 이른다. 인공지능을 이용한 ‘사회적 기술’은 인류의 삶을 점점 근본적 수준에서 바꾸어나갈 것이다.

이런 전망은 좋은 소식이다. 그래도 근본적이고 빠른 변화들은 그것들을 겪는 사람들에겐 두렵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실은 모든 생명체들에게, 힘들다. 점점 빨리 바뀌는 환경에 지속적으로 적응하려니, 얼마나 힘들겠는가? 

이제 우리는 ‘영속적 과도기’에 살고 있다. 이런 상황은 새로운 대응을 요구한다. 지금 상황이 곧 바꾸리라는 것이 확실하면, ‘과도한 적응(over specializatiom)’의 위험성에 늘 대비해야 한다. 생각만 헤더 피곤해지는 상황이다. 걱정스럽게도,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아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복거일 객원 칼럼니스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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