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지현 검사에 의해 검찰내 성희롱 사건이 폭로되면서 우리나라에도 "me too" 운동이 일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최영미 시인이 고은의 추악한 실상을 폭로하면서 문학계까지 번지고 있다. 아마 영화판 등 문화예술계, 교육계(대학)까지 봇물처럼 터져 나올 것 같다 이런 운동이 벌어지면서 우리 사회에는 희한한 현상들이 목격되고 있다.

여성의 인권, 특히 성 관련 문제는 진보나 보수, 좌나 우의 이념문제가 아니라 보편적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대하는 여성단체나 진보연 하는 시민단체, 그리고 페미니즘을 설파하는 인간들이 대상이나 장본인에 따라 달리 반응하고 있는 것이다.

탄핵정국에서 박근혜 대통령을 누드로 조롱한 ‘더러운 잠’이 국회에 전시되었을 때도 침묵하던 이들이 이번 고은 사태에도 아직 그 어떤 성명서도 내놓지 않고 있다. (문화, 정치, 사회, 경제적)권력을 가진 자가 이를 이용해 성희롱, 성추행, 성폭행까지 하는 일은 좌우를 막론하고 철저하게 응징해야 한다. 최영미가 폭로한 고은의 추악상은 이제까지의 어떤 권력의 성추행보다도 악랄하고 비열하고 잔인한 것이다.

나는 예술인의 도덕성에 대해서는 관대한 편이고, 괴벽과 일탈이 창작의 원천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고은의 행태는 이런 범주를 벗어난 범죄라고 생각한다. 구스타프 크림트의 ‘키스’나 ‘유디트’가 그의 여성 편력이나 탐미가 없었다면 탄생할 수 있었을까 생각하지만, 고은이 문화권력을 이용해 문단에서 약자인 여성을 성추행한 것은 창작활동과 아무런 관련 없는 단지 범죄일 뿐이라 생각한다.

저런 추악한 자의 손에 의해 ‘만인보’가 쓰여지고 독자들이 감동 받고 세계적 작품으로 포장되어 급기야 노벨상(노털상)의 후보가 되었다니 이런 배신도 없을 것이다. 더욱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은 이런 고은을 감싸고 폭로한 최영미를 비난하는 그룹이 있다는 사실이다. 고은과 함께 민족작가회의 등 주로 좌파 성향 그룹이나 문단의 기득권 세력들이 최영미를 비난하고 있다. 평론가 김병익이나 시인 이승철의 고은 옹호론을 보자니 말과 글이 누구의 혀와 손으로 나오느냐에 따라 천양지차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아래는 이 둘이 이 사태를 보는 입장을 전한 기사다.

http://www.mediawatch.kr/news/article.html?no=252982
http://news.joins.com/article/22357457
http://www.newstown.co.kr/news/articleView.html?idxno=314492

여러분들도 한번 보시라. 이런 자들이 민족을 운운하고 자유나 진보를 논하며 우리 문학계를 지배해 왔다니 참.......

진보연하는 시민단체, 페미니즘을 소리 높여 주창하는 사람들이 이번 사태에 침묵하는 것이나 김병익과 이승철이 고은을 감싸고 최영미를 비난하는 기저에는 동일한 기제가 작동한다고 생각한다.

바로 기득권 유지와 이를 위한 성역 보호, 그리고 자신들만의 리그를 위한 카르텔. 고은은 좌파(진보)나 문학계에서 상징적 존재이고, 이들은 이런 고은의 유명세와 영향력으로 자신의 자리를 만들거나 보존해 왔고, 또 이익을 취해 왔기 때문에 고은의 위상이 흔들리면 자신의 위치와 이익도 불안해진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우리 사회의 가장 적폐이자 기득권이며 권력이라고 생각하는 검찰에서 시작된 ‘me too'가 그 동안 대중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문화, 예술, 교육, 심지어 사회단체들에서 벌어지는 권력에 의한 추악한 일들이 폭로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 물꼬를 최영미 시인이 튼 것이고. 또 하나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이고 다행이라면 다행인 것은 고은의 추악상을 20여년 전에 이미 작품으로 폭로해 문학계에 경종을 울렸던 이문열이 그 동안에 좌파에 의해 점령된 문학계에 의해 매도되었다가 이번에 재조명 받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문열은 1994년, 고은의 추악상을 소재로 한 ‘사로잡힌 악령’이라는 소설을 발간했지만, 고은을 비유했다는 이유로 맹폭 당하고, 심지어 자신의 책이 진보연 하는 작자들에 의해 불살라지는 분서의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 ‘사로잡힌 악령’의 내용은 위에 링크한 미디어워치 기사에 나와 있다. 이문열이 ‘사로잡힌 악령’에서 묘사한 내용이 고은이 저지른 악행과 유사하다면 진짜 기가 차서 말이 나오지 않는다. 나는 매년 고은이 노털상 후보로 거론될 때마다 썩소를 많이 짓곤 했다.

고은의 추악상은 이번에 최영미 시인이 폭로하기 전에도 대강은 알고 있었던 터라 이런 자가 한국을 대표하는 시인이라는 것에도 반감이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고은의 작품이 과연 노벨상 후보는 커녕 한국을 대표할 수 있나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물론 나는 고은의 시를 몇 편 보지 않았고 그의 ‘만인보’도 끝까지 보지 못했지만, 솔직히 그의 시를 대하면 유치함이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최영미가 “틀면 수도꼭지처럼 나오는 똥물“이라고 일갈했던 것처럼.

사실 고은이 외부 세계에 유명세를 탄 것은 그의 작품이 훌륭했다기 보다 번역자를 잘 만난 탓이라 생각한다. 우리 말로 쓰여진 것을 영어나 다른 언어로 표현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시의 경우는 특히 그렇다. 단어나 문장에 숨어 있는 맥락, 뉘앙스, 감성을 다른 언어로 전달하는 것도 쉽지 않고 거기에다 운율도 신경쓰야 하기 때문이다.

외국의 유명한 시라며 우리에게 소개되는 시들을 보면 이게 무슨 시냐고 생각 드는 경우도 이 때문이다 한강의 ‘채식주의자’도 비슷한 케이스로 본다. 번역이 맨부커상을 수상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만약 한국어와 한국 문화에 친숙한 영국인이 한글로 된 ‘채식주의자’를 읽고 번역본을 본 것처럼 느끼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괜히 ‘한강’을 들먹여서 ‘한강’에겐 미안하다)

나는 우리나라에서 노벨상 후보로 서정주와 이문열을 든다. 서정주는 친일 행적에 대해 논란이 있긴 하지만, 서정주의 ‘동천’이나 ‘자화상’과 고은의 ‘만인보’가 비교가 될까? (재미있게도 고은은 서정주에게 사사 받았다.) 나는 서정주의 시 ‘자화상’을 읽고 그가 왜 친일적이었는지 조금은 이해하기도 한다.

서정주는 ‘자화상’에서 자신은 종의 자식임을 밝히고 있다.(실제는 아버지가 마름이었다는 설도 있다) 자신을 키운 것은 팔할이 바람이었고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고 자신의 신분의 한계를 이야기한다. 신분의 억압을 벗어나고 싶다는 서정주의 강렬한 욕구도 읽힌다. 이 자화상을 쓴 시기가 20대 초반이었으니 그가 당시에 자신의 신분과 사회적 환경에 대해 어떤 심정이었는지 필자의 20대를 생각하면 짐작이 간다.

半노예제 사회였던 조선(전제군주국이었던 대한제국도 마찬가지)보다 신분제를 타파한 근대 국가를 선호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동학농민군의 잔여세력들이 일제에 적극 협력하는 일진회의 중추가 되었듯이 말이다. 물론 서정주가 1940년대 ’헌시‘, ’송정 송가‘ 등을 쓰며 학도병 참여를 독려하고 가미가제 특공대를 칭송한 것이나 1980년대 전두환을 칭송하는 시를 쓴 것은 어떤 이유로도 변명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나는 서정주의 친일에 대한 비판은 그것대로 하되, 그의 문학적 업적은 별도로 평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전북 고창에는 미당 서정주 문학관이 있다. 이 문학관에는 서정주의 육필 원고도 전시되어 있지만, 서정주의 친일 행각도 함께 알리고 있다고 한다.

서정주의 문학적 업적만을 강조해 그의 친일 행위를 희석하거나 면죄부를 주어서도 안 되겠지만, 친일 행위만이 한 인간의 인생이나 업적을 평가하는 유일한 잣대인 것처럼 재단하는 것도 지양해야 한다고 본다. 나의 이런 시각이 혹자는 김병익과 유사한 것이 아니냐고 따질지 모른다. 그러나 김병익과 나의 시각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김병익은 고은의 문화권력을 이용한 성추행을 문학예술인의 괴벽으로 치부하고 그 치부를 까발리는 것은 고은의 문학 업적을 훼손하는 것이니 폭로가 잘못된 것처럼 말하며 최영미를 비난하고 있다. 서정주의 친일은 자신의 출생 신분이나 당시의 시대상에 영향 받은 것이고 수동적인 측면이 있지만 고은의 성추행은 권력을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데 사용한 것으로 서정주의 친일과 차원이 다르다. 나는 서정주의 친일을 폭로하거나 비판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하거나 비난하지 않는다.

다만, 그의 문학적 성취는 성취대로 평가하자는 것이다. 나는 최영미를 운동권을 비판하는 ‘서른 잔치는 끝났다“는 시를 쓴 운동권 출신 시인정도로 알고 있었지만, 2년 전에 그녀가 쓴 <시대의 우울>이라는 책을 중고서점에서 사서 읽고는 그녀에게 친근감을 느끼고 있었다.

운동권 출신에 비슷한 연배라는 것, 그리고 운동권으로부터 현재 비판받고 왕따 당하는 것에 대한 동병상련이 그렇게 느끼게 했으리라. 최영미의 <시대의 우울>은 유럽의 박물관과 미술관을 둘러보면서 본 미술 작품들을 소개하고 자기 생각을 덧붙이는 여행기이면서 미술 작품 해설서 성격이 강한 작품이다.

그런데 이 책의 제목이 내용과는 전혀 매칭이 되지 않는 <시대의 우울>이라고 명명되어 고개를 갸웃거리게 했다. 그런데 책 중반부에 책명을 <시대의 우울>를 한 의도를 읽을 만한 부분이 나온다.

최영미는 좀 뜬금없게도 책 중반부에 그림이 아니라 보들레르의 <빠리의 우울>이라는 글을 소개한다. “나의 신이여, 내가 형편없는 인간이 아니며 내가 경멸하는 자들보다 못하지 않다는 것을 나 자신에게 증명해 줄 아름다운 시 몇 편을 쓰도록 은총을 내려주소서.”

최영미는 이 보들레르의 <빠리의 우울>을 패러디 해서 책 제목을 <시대의 우울>로 정하고 당시에 자신이 말하고 싶고, 누군가에게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를 보들레르의 이 글로 대신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최영미는 <시대의 우울>을 내면서 좌파(운동권)의 추악상을 폭로할 것을 예고하고 고은의 추악상을 폭로하는 <괴물>을 이때부터 구상했던 것으로 보인다. 최영미는 자신이 형편없는 인간이 아니며, 자신이 경멸하는 자들보다 못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고은을 고발하는 <괴물>을 쓴 것이 아닐까? 보들레르가 몇 편의 시를 쓸 수 있도록 은총을 갈구한 것처럼 최영미도 <괴물>에 끝나지 않고 계속 아름다운 폭로를 시로써 이어가 주길 바란다.

 서울대 트루스포럼 / 길벗 2018.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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