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삼의 세상만사] 박정희 시대였다면, 조국 같은 장관 인선 가능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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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초승인 2019.09.11 09:30:17
  • 최종수정 2019.09.12 0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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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인재 발굴의 모든 책임은 대통령에게 있다. 그 정권이 사느냐 죽느냐도 대통령의 인사가 좌우한다. 나라를 살리고 죽이는 일도 마찬가지다. 문재인 대통령의 조국 장관 임명이 과연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지는 물어보나 마나다. 법치(法治) 붕괴, 국가 파멸, 외교 파탄....그것 외에 무엇을 더 기대할 수 있겠는가?

문재인 대통령의 법무부 장관 임명으로 온 나라가 두 쪽으로 갈렸다. 법무부장관은 법치 수호의 상징적 인물이다. 그런 자리에 자유우파 진영으로부터 ‘가족 사기단 두목’이라는 모욕적인 비판·비난을 받고, 수사 대상에 올라 있는 사람을 임명했다. 게다가 법무장관에 임명된 사람의 이력이 황당하기 그지없다.

“우리는 전 자본가 계급을 향해 정면으로 계급 전쟁을 선포한다. 부르주아 지배 체제를 사회주의 혁명의 불길로 살라버리고자 마침내 남한 사회주의 노동자 동맹을 조직해 11월 12일 역사적인 출범의 큰 걸음을 내딛는다.”

1989년 11월 12일, 서울 시내 곳곳에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 결성을 알리는 유인물 내용이다. 1993년 울산대 법대 전임강사였던 조국 법무장관은 사노맹 산하의 기관지 ‘사회주의과학원(사과원)’ 강령연구실장으로서, 이 기관지 제작에 참여했다. 그로 인해 국보법 위반 혐의로 기소돼 1995년 대법원에서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의 확정판결을 받았다.

조국 장관은 후보자 시절 국회 청문회에서 사노맹 사건으로 처벌받은 사실에 대해 “자랑스러워하지도 않고,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고 밝혔다. 한술 더 떠 그는 “헌법의 틀 아래에서 사회주의 정책이 필요하다는 입장은 변함이 없다”고 답했다.

그는 “사람이 먼저”, “내 삶을 책임지는 국가”를 선포한 문재인 정부의 핵심 인사다. 그런 인사이니 자본과 계급과의 계급 전쟁, 부르주아 지배 체제를 사회주의 혁명으로 타도하는 행위에 참여했던 행위를 굳이 숨길 이유가 있겠는가. 그런 행위로 처벌 받은 이력 자체가 ‘훈장’인 세상이 왔는데 말이다.

전향을 했느냐는 야당 의원의 질문에 그는 답변을 거부했다. 하지만, “뜨거운 심장이 있었기 때문에 국민의 아픔과 같이하고자 했다”, “향후 비가 오면 빗길을 걷고, 눈이 오면 눈길을 걷겠다. 그러면서 나의 소명을 다하도록 하겠다”고 발언했다.

젊은 시절 사회주의자가 아니면 바보다. 그러나 나이 들어서도 여전히 사회주의자이면 큰 바보라는 잠언이 있다. 혈기방장 했던 젊은 시절의 불장난이었다고 사노맹 관련 사실을 축소 해석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런 너그러움을 베풀기 전에 반드시 따져 봐야 할 일이 있다. 아직도 그가 젊은 시절의 불온한 사상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면…. 그러한 반국가적·반체제적 이념 성향을 가진 채 법무부장관 직을 수행한다면…. 과연 이 나라의 법치는 안녕할 것인가?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적과 대치하고 있고, 아직도 우리가 전쟁이 완전히 끝나지 않는 정전체제 하에서 살고 있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이 부분을 반드시 짚어야 정상이다.

공산주의 붕괴한 순간, 한국에선 체제 변혁 시작돼

1980년대 후반, 한국의 사회주의자·공산주의자들은 사회구성체 논쟁을 뜨겁게 벌였다. 그들은 1980년대 한국 사회를 다음과 같은 구도로 그려냈다(조희연, 「80년대 사회운동과 사회구성체논쟁」, 박현채·조희연 엮음, 『한국사회구성체논쟁』1, 도서출판 죽산, 1989, 27~28쪽 참조).

첫째, 한국 사회는 미 제국주의 지배 하의 식민지다. 둘째, 남한에서 자본주의가 발달했다고 하나, 민족분열이 고정화되고 자립적 민족경제의 기본이 파괴되었다면 반봉건 상태를 벗어날 수 없다. 셋째, 이러한 남한 사회의 변혁을 위해서는 ‘민족 전체적’ 시각이 요구된다. 넷째, 이 점은 남한 사회의 변혁운동이 한국전쟁을 전후한 혁명 운동의 전통 위에 있음을 의미한다. 다섯째. 북한 사회주의 건설 과정의 철학적 기초가 된 주체사상을 남한 변혁을 위한 사상적 기초로 삼아야 한다. 여섯째, 이러한 역사적 전제에서 남한에서의 변혁 운동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제1단계로서 노동계급의 헤게모니가 관철되는 ‘인민민주주의혁명’이다.

이러한 황당무계한 논리구조의 연장선에서 그들은 해방 당시의 혁명 정국을 계승하여 1980년대 남한을 사회주의 통일국가로 혁명해야 하며, 이미 혁명을 성취한 북한으로부터 적절한 도움을 받는 것을 주저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문재인 대통령, 조국 법무장관도 그런 주장에 동조했음을 숨기지 않는다.  

이런 황당한 논쟁을 벌이던 와중에 구(舊)소련과 동구권이 해체되는 등 사회주의·공산주의가 와르르 붕괴되었다. 이제 지구상에서 공산주의는 끝났다고 모두들 박수쳤다. 심지어 '의식화의 은사'로 추앙받았던 리영희 교수마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사회주의를 과신 혹은 맹신했음을 실토하고 반성했다.

아이러니하게도 한국 사회의 체제 변혁은 공산주의가 붕괴되는 순간, 개시되었다. 그들에겐 민주화, 군정종식, 문민정권이란 만병통치 선동무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민주화, 인권, 탈냉전, 반전평화, 양성평등, 참교육, 권위주의 해체, 남북공조, 효순이 미선이, 천안함 괴담, 광우병 난동, 세월호를 앞세워 한국 사회 곳곳의 진지를 점령했다. 급기야 촛불시위를 통해 권력을 차지하는 데 성공했다. 그 와중에 종족적 민족주의에 깊이 뿌리박은 ‘친일파 단죄’ '항일 무장투쟁'이라는 한국인들의 원초적 본능을 만능의 무기로 동원했다.

김영삼 정부 시절부터 청와대나, 정부 요직을 ‘민주화’라는 훈장을 단 국가보안법 위반자(거의 대부분 이적활동 수행자), 집시법 위반자(대부분 반정부 활동자), 노동운동가(대부분 노동해방 운동), 전교조 출신(대부분 대한민국 부정 교육 진행)들이 우후죽순 격으로 차지하기 시작했다.

박정희 시절 국가요직 인사의 조건

박정희 정부 하에선 이러한 인물들의 등장을 어떤 식으로 막아냈을까? 반공을 국시(國是)로 내세원 정권이었던 만큼, 박정희 정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사상이나 이념이 의심되거나, 국가관에 하자가 있거나, 애국심이 부족한 인물을 국가 요직에의 등용을 막았다. 반공에 해가 되는 인사들의 등장 및 준동을 막기 위해 중앙정보부, 보안사, 경찰 및 검찰 공안부서 등등 국가기관이 총동원되다시피 했다. 심지어 연좌제라는 방법까지 동원하여 의심 가는 인물들을 철저히 걸러내는 데 성공했다.

언론사는 정부 기관은 아니었지만, 여론 형성 차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회적 기관이다. 때문에 언론사 입사 과정에서도 3중, 4중의 치밀한 신원조회가 실시되었다. 덕분에 선의의 피해자도 더러 발생했다. 김대중 정부 시절 부총리를 지냈던 모 인사는 일가친척 중에 6·25 당시 부역자가 있었다고 한다. 그는 잘 나가던 경제관료였지만, 연좌제로 인해 박정희·전두환·노태우 정부 시절, 단 한 번도 청와대 근무를 하지 못했다고 기자에게 하소연했던 기억이 난다.

독일의 경우 헌법수호청에서 반국가 활동을 했던 자는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공직에 임용되지 못하도록 하는 엄격한 법을 시행 중이다. 좌익들이 인권말살, 인권탄압이라고 극도로 혐오하고 폄훼하여 결국 폐기처분한 연좌제가 다름 아닌, 독일 헌법수호청이 시행 중인 법과 제도를 한국에서 대신했다는 사실을 알고나 계시는지….

박정희 대통령은 재임 시절 ‘용인술의 대가’라는 평을 들었다. 박정희는 국무위원인 장관 인사를 어떤 과정과 절차를 거쳐 추진했을까? 전체주의적 집단 광기의 시대에 그런 것을 따지는 행위가 의미 없는 일인 줄은 알지만, 그래도 취미생활 차원에서 분석해본다.

박정희의 리더십은 군 시스템으로부터 강렬한 영향을 받았다. 그는 일제하에서 만주 신경(新京)군관학교, 일본 육군사관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해방 후 육군사관학교의 전신인 조선경비사관학교를 졸업하는 등 3개국 사관학교 교육을 이수한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다.

그는 또 미국 오클라호마 주의 포트 실에 위치한 육군포병학교 고등군사반에서 유학한 경험이 있다. 또 미군 제도를 도입한 군 교육 시스템에 의해 계급별, 직급별, 직능별로 필요한 실무교육을 수시로 받았다.

박정희는 국가사무에 관한 일은 크고 작은 일을 막론하고, 어떤 일이건 기획 및 계획→집행→평가분석이라는 공식에 의해 체계적·과학적·능률적으로 수행했다. 어떤 일이 큰 성과가 났다면 성공 원인은 무엇인지, 낭패를 봤다면 어떤 과정에서 무엇이 잘못되어 일을 그르쳤는지를 과학적인 프로세스에 의해 분석한다. 그 결과를 다른 국가적 프로젝트 수행 과정에 반영했다. 덕분에 업무 성과를 지속적으로 진일보시키는 시스템적 사고에 익숙해져 있었다.

이것이 바로 미국의 기업경영에서 활용되었고, 미 국방부에서 채택하여 발전시킨 심사·분석·통제 기법이다. 박정희는 이러한 심사·분석·통제 기법에 통달한 인물이었다. 때문에 장관 인선도 이러한 원칙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다.

대통령비서실이 추천, 총리와 상의하여 장관 인선

국가 행정기관의 인사를 할 때면 대통령은비서실이 후보로 추천한 명단을 가지고 총리와 상의한 후 총리의 재청을 받아 임명했다. 이 과정에서 총리의 건의에 따라 일부가 수정되거나, 명단에 포함되지 않았던 사람이 기용되는 경우도 있었다.

차관 인사는 각 부 장관 의향에 따라 장관이 인선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장관이 특정 후보를 의중에 두고 있지 않을 경우에 한해 대통령이 장관과 상의하여 차관을 임명했다. 각 부처의 차관보 이하 국장 인사는 장관에게 전적으로 일임하여 장관에게 전폭적인 힘을 실어주었다.

지금은 소소한 서기관 승진부터 부이사관 이상, 차관까지의 인사권을 청와대가 쥐고 있지만, 박정희 시절에는 어림없는 일이었다. 덕분에 각 부처는 장관의 영(令)이 서고, 장관의 인정을 받을 경우 관료들은 파격적인 승진이 가능했다. 공무원들은 승진 때만 되면 지연(地緣), 학연(學緣), 혈연(血緣)을 찾아 청와대나 정치권을 기웃거리지 않고 장관의 눈에 들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뛰었다.

박정희는 재임 중 대통령비서실장에 이후락(5년 11개월), 김정렴(9년 3개월), 김계원(1년 10개월) 등 세 명을 장기간 기용하여 국정의 연속성을 추구했다. 김정렴 비서실장의 경우 대통령제의 본산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에서도 사례를 찾아보기 힘든 최장수 비서실장 기록을 세웠다.

박정희가 국가적 인재를 중시하는 모습은 정일권의 사례를 통해 그 일면을 엿볼 수 있다. 박정희의 만주군관학교 선배인 정일권은 일본 육사(55기)를 거쳐 6·25 때는 육군참모총장 겸 국군 총사령관을 역임했다. 이승만 정부 시절 주터키·프랑스·미국 대사로 재직했다. 박정희는 대통령에 취임하자 정일권을 외무부장관(1963~64·1966~67·국무총리 겸직), 국무총리(1964~1970), 공화당 의장서리(1972), 국회의장(1973) 등 요직에 계속 중용했다.

또 국제정치, 문화, 교육, 경제, 사회 등 각 분야에서 실력 있고 덕망 높은 인사를 대통령 특별보좌관으로 임명하여 정책 결정 과정에서 보좌를 받았다. 철학자 박종홍(교육), 함병춘(국제정치), 장위돈(국내정치), 박진환(농업경제), 김명윤(세제·稅制), 장동환(여론조사 및 사회심리 분석), 유재흥·김용식·임방현(안보) 등이 특보로서 대통령을 도왔다.

특보들은 늘 자유롭게 대통령에게 진언을 할 수 있었는데, 박정희는 특보들과 막걸리를 곁들인 저녁식사 자리를 자주 가지면서 기탄없는 대화를 나누고 의견을 청취했다. 또 청와대에 박정희와 지연, 학연, 혈연으로 얽힌 인물이나 대통령의 가신(家臣)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인력은 단 한 명도 기용하지 않았다.

유일한 예외가 있었다면 박정희가 사단장 시절 헌병부장을 지낸 김시진을 민정수석비서관으로 임명한 것, 그리고 군 재직 시절 당번병이었던 박환영, 운전병 이타관을 부속실의 부관과 전용차 운전기사로 채용했을 뿐이다.

국회의원 공천도 철저한 공조직 평가 바탕으로 시행

총선 때만 되면 천하의 날고 기는 인재들이 국회의원 공천을 받기 위해 치열한 로비전을 벌인다. 하지만 박정희 대통령 재임 시절에는 엄격한 절차와 기준에 의해 후보자들을 공천했다. 우선 지역구 공천자의 경우 당(공화당)과 내무부(현 행정안전부),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에서 올린 세 가지 자료를 바탕으로 심사하여 결정했다.

당은 도 지부장들의 의견을 중심으로 당 지도부가 정리한 추천명단을 제출했다. 내무부 명단은 시·도와 시·군·구의 지방행정조직이 취합한 내용이다. 중앙정보부도 지방 책임자들이 보고한 유력후보를 모아서 명단을 작성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세 부처에서 올라온 자료에서 공통되게 1순위로 천거한 인물은 예외 없이 공천했다. 세 가지 보고서의 순위가 일치하지 않는 지역구는 10~20군데 정도였다. 이들 지역에 대해서는 다시 한 번 확인 작업을 거쳤다.

박 대통령은 1973년 9대 선거 때는 류혁인 정무비서관을 현장에 파견하여 강원·경북·경남 등지를 돌며 도지사를 직접 만나 몇몇 후보에 대한 지역 여론 등 현지 의견을 조사했다. 이러한 보충조사가 끝나면 박 대통령은 공화당 당의장·사무총장과 비서실장, 정무수석을 배석시킨 가운데 최종적으로 공천을 결정했다. 이 과정에서 당의 의견을 최대한 존중했다.

비례대표 격인 유정회 의원은 유신헌법 하에서 운영되던 제도였다. 유신 시절 국회의원의 3분의 1은 대통령이 추천하는 인물로 선정되어 유신정우회라 불렸는데, 대통령 추천 몫은 9대 국회 73명, 10대 국회 77명이었다.

인재 발굴 책임은 전적으로 대통령의 몫

유정회 후보는 분야별로 추천창구를 정했다. 퇴역 장성 등 군 계통과 전직 장관 등은 대통령이 직접 적임자를 선발했다. 그밖에 현역 장성은 국방장관, 판검사는 법무장관과 검찰총장, 경찰은 내무부장관, 교육계는 문교부장관, 학계는 정무수석, 언론계는 공보수석, 여성계는 정무·공보수석 등에게 추천을 의뢰했다.

이처럼 공식적인 통로 외에 사조직을 활용하여 공천자를 추천 받는 등의 일탈행위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박정희는 철저하게 공조직을 활용하여 인사와 공천을 했다. 공조직의 판단력을 신뢰했기에 국가의 영이 제대로 서게 된 것이다.

용인에 가장 신경을 많이 쓴 대통령이었기에, 청와대의 대통령비서실은 다른 어떤 일보다 인재 발굴에 지대한 공을 들였다. 담당부서에서는 학계·언론계 등 5개 분야별로 인명록을 만들어 약 3,000명의 신상이나 활동상황, 이력 등을 카드로 정리하여 대통령이 수시로 볼 수 있는 자리에 늘 준비해 두었다. 이를 ‘존안자료’라고 했다.

대통령은 국가적으로 중요한 일이 생길 때마다 비서실이 준비한 존안자료를 가져다 해당 프로젝트를 수행할 최적임자를 골라 그에게 일을 맡겼다.

선거 공천 과정에서도 공천 후보자를 공조직을 통해 단계별로 엄중하게 결정했다. 때문에 당 대표가 공천이 자기 마음대로 안 되었다고 멱살을 잡고 싸우거나, 당의 직인을 가지고 야반도주하는 촌극 같은 행위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결국 국가 인재 발굴의 모든 책임은 대통령에게 있다. 그 정권이 사느냐 죽느냐도 대통령의 인사가 좌우한다. 나라를 살리고 죽이는 일도 마찬가지다. 문재인 대통령의 조국 장관 임명이 과연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지는 물어보나 마나다. 법치의 붕괴, 나라의 파멸 그것 외에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대통령의 인사 스타일을 비교해 보니 결론이 자명해진다. 대한민국 국가경영의 질은 속칭 민주화 시절이, 그들이 ‘독재정권’이라고 물고 뜯는 그 이전의 권위주의 정권 시절보다 대단히 후진적이란 사실이다. 그 수준이 날이 갈수록 퇴보하고 있음을 조국 장관 임명으로 한 눈에 이해할 수 있지 않은가. 이제 국민들이 최면에서 깨어날 때가 되었다. 민주화는 만병통치약이 아니었다는 사실 말이다.

김용삼 대기자 dragon003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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