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국민의 상당수는 이를 모르거나, 아니면 알면서도 자기도 그 특권층에 끼어볼까 하는 기대로 눈 꼭 감고 있다.

황인희 객원 칼럼니스트
황인희 객원 칼럼니스트

1.

1992년에 개봉된 영화 ‘인도차이나’를 최근에 다시 보게 되었다. 베트남 전쟁 종전 이후 한동안 철저한 공산화로 그 내부 사정을 알 수 없던 시절이 있었다. 베트남 하면 여전히 전쟁으로 폐허가 된 도시, 베트콩의 부비트랩 가득한 정글만을 떠올리고 있을 때 이 영화가 개봉되었다. 숨겨져 있던 금단의 지역의 문이 열리며 이전에 볼 수 없었던 베트남의 아름다운 풍경이 158분의 긴 시간 동안 펼쳐졌다. 또 나이가 들었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여배우 카트린느 드뇌브(극중 인물 : 엘리안느)의 우아한 외모는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거기에 입양으로 맺어진 모녀와 젊은 프랑스 군인의 삼각관계를 쫓아가느라 섬세한 대사의 내용까지 음미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 집에서 텔레비전을 통해 차분하게 영화를 감상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개봉 당시 무심코 넘겼던 놀라운 대사를 발견하게 되었다. 영화의 줄거리는 대략 이렇다. 아직 프랑스의 식민지이던 인도차이나에서 태어난 프랑스인 엘리안느는 카미유(린 당 팜 분)를 입양했다. 안남의 황녀인 카미유는 사고로 부모를 잃은 상태였다. 엘리안느는 카미유에게 프랑스 상류 사회의 교육을 시키고 곱게 곱게 키웠다. 그러나 우연한 사건에 말려들어 카미유는 프랑스 장교를 살해했다. 프랑스 경찰에 잡힌 카미유는 감옥에 갇히는데 그 감옥은 들어가기만 하면 공산주의자가 되어 나오는 곳이라 했다.

몇 년이 지나 인도차이나에서 프랑스의 세력이 약해지고 공산주의자들이 득세하며 감옥 문이 활짝 열렸다. 아니나 다를까 서구식 고등 교육을 받은 카미유는 감옥 안에서 ‘공산당의 공주’가 되어 나왔다. 카미유는, 함께 살자는 양어머니 엘리안느의 제의를 거절했다. 그런데 엘리안느가 카미유의 어린 아들을 언급하자 카미유가 절규했다.

“어머니, 그 아이를 프랑스로 데려가주세요. 인도차이나는 이미 죽었어요. 그 아이는 꼭 프랑스에서 키워주세요.”

20여 년의 세월이 흐른 후, 프랑스에 살던 엘리안느와 카미유의 장성한 아들이 다시 베트남에 찾아왔다. 베트남은 완전히 공산화가 되었고 카미유는 공산당의 주요 인물이 된 듯했다. 어머니와의 만남을 시도했던 아들이, 그 오랜 세월 자신을 찾지 않았던 어머니에게 자신을 드러내기를 포기하며 영화가 마무리된다.

나는 이 영화를 보고난 후 카미유의 절규가 가슴에 남아 잊히지 않는다. 이처럼 공산주의자들의 속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대사가 또 있을까? 바야흐로 혁명이 성공을 거두는 단계이고 곧 프랑스도 몰아낼 수 있는, 승리를 코앞에 둔 상황이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카미유라면 다음과 같이 양어머니에게 말했을 것 같다.

“어머니, 승리의 날이 곧 올 거예요. 내 아들은 반드시 영광스러운 해방 조국에서 자랑스러운 베트남의 아들로 키워야 해요. 아무리 어머니라도 프랑스 사람 손에서 자라게 할 수는 없어요. 절대 프랑스로 데려가시면 안 돼요.”

혁명가라면 이렇게 말하는 게 정상 아닐까? 기껏 목숨 걸고 혁명을 해서 얻어낸 공산주의, 사회주의 국가가 눈앞에 펼쳐지려 하는데 왜 자기의 아들은 자신이 추구한 ‘천국’에서 탈출시키려 하는 걸까? 그것도 자기 나라를 지배하고 있던 원수 같은 프랑스로 보내다니….

우리의 역사에 대입해보면 이해가 더 쉬울 것이다. 마치 이런 상황이다.

“어머니, 우린 곧 일본으로부터 해방이 될 거예요. 그런데 한국 사회는 썩었어요. 내 아이는 꼭 일본에 데려가서 키워주세요”라고 일본인 양어머니에게 부탁하는 격이다.

모스크바의 루비얀카 거리에 있는 옛 KGB 본부. 공산 소련 시절에는 ‘루비얀카’라는 말 자체가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모스크바의 루비얀카 거리에 있는 옛 KGB 본부. 공산 소련 시절에는 ‘루비얀카’라는 말 자체가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이런 이율배반적 행태는, 지금 우리나라를 사회주의 ‧ 공산주의로 끌고가는 이들에게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들은, 자신은 반미를, 반일을 외쳐 국민을 선동하면서 자기 자식들은 미국으로, 일본으로 유학을 보낸다. 그리고 미제 청바지를 입고 일제 볼펜을 쓴다. 일본에 한국인 관광객 발길이 뚝 끊겼다면서 반일 운동에 앞장 섰던 이들이 쾌적한 일본 관광을 즐기며 SNS에 인증 사진까지 올린다. 이들을 찬양하고 비호하는 언론의 카메라맨들 중 일제 카메라를 쓰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다.

반미 운동을 한 전력 때문에 자신은 미국에 못 가지만, 굳이 자식을 돌보러 미국에 갈 필요도 없다. 송금만 하면 미국의 선진 교육 시스템이 알아서 잘 키워줄 테니 말이다. 아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 찾지 않은 영화 속 카미유도 선진 문명국인 프랑스에서 아들을 잘 키워줄 것을 알았기에 구태여 나서지 않았을 것이다.

자식 외국 유학 보내는 것을, 외국 여행 가는 것을 나무라는 게 아니다. 그들이 입으로 외치는 바와 실제 자신들의 삶에서 보여주는 바가 다름을 문제 삼는 것이다. 자유주의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라도 그들이 성취하려는 국가가 자기 자식들이 살만한 좋은 나라가 아님을 보여주는 증거이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자식을 외국으로 보낼 능력이 없는, 외국 여행 갈 능력이 없는 대부분의 우리 국민은 표리부동한 그 인간들이 만드는 ‘죽은’ 이 땅에 살아야 한다는 게 문제이다. 게다가 그들이, 그 자식들이 누리는 자유의 비용을, 자유를 빼앗긴 대다수의 ‘우리’가 지불해야 한다는 것이 더욱 큰 문제이다.

러시아 니즈니노브고라드의 레닌 동상. 연설하는 레닌 아래서 노동하고 전쟁하고 바닥을 기는 대중의 모습이 공산주의의 속성을 말해주는 듯하다.

2.

2016년 미국 보스턴 출신 작가 에이모 토울스가 쓴 <모스크바의 신사>라는 소설이 있다. 1922년부터 1954년까지 공산 치하의 소련이 작품의 배경이다. 720쪽의 두꺼운 번역본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대목을 하나 소개하고자 한다.

소설 속 주인공 알렉산드르 일리치 로스토프 백작은 구 세대의 인물로 숙청 대상이다. 그런데 천행으로 사형이나 시베리아 유형을 면하고 연금형을 선고받았다. 당시 그가 묵고 있던 메트로폴 호텔에서 평생 갇혀 살게 된 것이다. 메트로폴 호텔은 모스크바 중심지, 볼쇼이 극장 대각선에 있는 고급 호텔이다. 호텔에는 보야르스키 레스토랑이 있고 그 식당의 주방을 지나 긴 나선형의 계단을 내려가면 메트로폴 호텔의 와인 저장고가 있다.

'모스크바의 신사'의 배경이 된 모스크바 메트로폴 호텔. 보야르스키 레스토랑은 실재하지 않는다.
'모스크바의 신사'의 배경이 된 모스크바 메트로폴 호텔. 보야르스키 레스토랑은 실재하지 않는다.

1924년의 어느 날이었다. 로스토프 백작이 와인 저장고에 가보니 만 병 정도 되는 와인 병의 라벨이 모두 제거되어 있었다. 경악하는 백작에게 레스토랑 지배인 안드레이가 말했다.

“와인 목록이 존재하는 것은 혁명의 이상에 어긋난다고 주장하며 식품부 인민위원 테오도로프 동무에게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있었답니다. 그것은 귀족의 특권과 인텔리겐차(지식층)의 나약함과 투기꾼의 약탈적 가격 책정을 보여주는 표지 같은 것이라는 것이죠. … 그래서 앞으로 보야르스키는 모든 와인을 레드 와인, 화이트 와인으로만 구분하여 단일한 가격으로 판매할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며 안드레이는 한쪽 구석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커다란 물통 다섯 개와 와인 병에서 떼어낸 라벨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저 일을 끝내는 데 열 명의 인부가 10일 동안 일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3년 후 보야르스키의 와인들에는 다시 라벨이 붙었다. 공산당 간부인 중앙위원회 위원이 보르도 산 고급 와인을 주문했지만 라벨이 없어 원하는 와인을 얻지 못하자 내린 조치였다. 결국 조지 오웰이 <동물농장>에서 얘기한 “모든 동물은 다 평등하다. 그러나 어떤 동물은 다른 동물들보다 더 평등하다”라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

<모스크바의 신사>에 나오는 이 이야기는 공산주의자들의 속성을 명료하게 표현하고 있다. 사회주의 ‧ 공산주의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내세우는 것은 모든 인민이 평등하게 잘 사는 사회이다. 이런 그럴듯한 말을 하면서 가진 자의 것을 빼앗는 일의 정당성을 획득한다. 그런 후에는 어떻게 하는가? 자신들은 사회가 변화하는 혼란의 과정에서 편법과 불법을 자행하며 부와 권력을 독점하는 데 혈안이 된다. ‘가진 자의 것’을 빼앗아 ‘못 가진 자’에게 나눠줘 평등 사회가 실현될 것을 기대하는 사람이 아직도 있을까? 그런데 안타깝게도 인민의 평등을 논하는 몇몇의 특권층은 ‘가진 자들의 것’은 물론 ‘못 가진 자들의 것’까지 곧이어 빼앗을 것이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냐고? ‘가진 자의 것’을 빼앗을 수 있는 권리는 곧 ‘못 가진 자의 것’까지 짜낼 수 있는 권리와 같은 말이기 때문이다.

칼 마르크스의 석상. 모스크바의 메트로폴 호텔 건너편에 서 있다.
메트로폴 호텔 건너편에 서 있는 칼 마르크스의 석상. 마르크스는 누구든 자신이 속한 계급의 이익을 초월할 수 없다는 명언을 남겼다.

사회주의를 표방하며 국민들에게서 빼앗은 재산과 권력은 이를 주도하는 몇몇 인물의 금고와 뱃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일반 국민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최고급 삶과 ‘자유’를 실컷 누리게 된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신들은 자유주의의 단물을 빼먹어야 하므로 사회주의자들도 자유주의에 한 다리를 슬쩍 걸친다. 그러면서 자신들을 제외한 다른 국민의 자유를 억압하고 국민을 전체주의의 굴레 아래서 신음하게 한다. 이는 대부분의 사회주의 ‧ 공산주의 국가가 거쳐 온 역사이다.

허구에 기반한 영화나 소설의 내용이라고 무심코 넘어가면 안 된다. 예술은 삶을 반영하고 삶이 예술을 만든다. 작가들이 왜 하필 이런 내용을, 이런 대화를, 이런 에피소드를 작품에 넣었겠는가? 영화나 소설에 나오는 공산주의자들의 그런 속성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상식이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 국민의 상당수가 이를 모르거나, 아니면 알면서도 자기도 그 특권층에 끼어볼까 하는 기대로 눈 꼭 감고 있을 뿐이다. 

황인희 객원 칼럼니스트 (다상량인문학당 대표 · 역사칼럼니스트) / 사진 윤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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