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는 시뮬라크르의 시대

수많은 광고에 차용돼 이제는 클리셰(cliché)처럼 돼 버린, ‘단정한 중절모 신사’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René Magritte, 1898~1967). 문학, 철학, 예술을 넘나들며 인문학의 대중화에 지속적인 관심을 보여 온 박정자 교수는 현대의 예술뿐 아니라 광고를 통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마그리트의 세계로부터 출발하여, ‘시뮬라크르’를 화두(話頭) 삼아 ‘현실과 가상의 구분이 모호해진’ 현대의 삶을 조명한다.

시뮬라크르(프 simulacre, 영 simulacrum, 복수 simulacra)는 프랑스 철학자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가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1981)에서 본격 도입했고, 1991년 “걸프전은 시뮬라크르 전쟁”이라는 발언으로 유명세를 탔다. 영화 <매트릭스>의 도입 장면에서, 네오(키아누 리브스 분)가 컴퓨터 디스켓을 숨겨 놓은 책이 바로 이 책이었다.

박정자 교수는 책에서, 시뮬라크르의 기원을 멀리 플라톤의 ‘이데아’와 ‘동굴의 비유’까지 거슬러 올라가 살피며 내려온다(5장). 마그리트에 관한 장(章)들은 그가 철학자 푸코와 주고받은 편지가 소개되는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미셸 푸코, 1968)의 ‘유사(프 ressemblance, 영 resemblance)’와 ‘상사(similitude)’를 소환한다(4장). ‘원본 대 시뮬라크르/상사’의 관계는 <차이와 반복>(1968)의 들뢰즈(Giles Deleuze, 1925~1995)(6장)를 거쳐 보드리야르(7장)로 계승된다. 따지고 보면 ‘시뮬라크르’라는 이름을 보드리야르가 유포한 것일 뿐, 시뮬라크르라는 ‘현상’은 고대 그리스 이래 철학의 중요 관심사 중 하나였고, 21세기의 우리는 특별히 그 시뮬라크르가 편재(遍在)하는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이다.

광고와 영상에서 쇼핑몰, 비트코인까지

책은 맨 처음 ‘마그리트 시뮬라크르 광고’로부터 시작해서, 현대생활 곳곳이 침투해 있는 시뮬라크르의 이모저모를 끄집어내 새로이 주목하게 해 준다. 영화 <매트릭스> <블레이드 러너> <마이너리티 리포트> <인셉션> <미스터 노바디>, 드라마/소설 <더 맨 인 더 하이 캐슬>, 대도시의 쇼핑몰들…. 광화문/총독부의 상징성과 철거/복원, 갈라진 ‘문화광(門化光)’ 현판을 둘러싼 아우성들은 플라톤의 동굴 속 죄수들의 허깨비놀음에 다름 아니다. 책은 형식상 전작(前作) <마그리트와 시뮬라크르>의 증보판이지만, 실질은 증보판 그 이상이다. 화폐마저도 가상이 돼 버린 비트코인을 손수 ‘경험할 뻔한’ 일화(8장)로부터는, “비트코인이 아니라 화폐 자체가 원래부터 가격의 시뮬라크르였다”는 통찰로 읽는 이들을 이끈다.

시뮬라크르 이미지를 사용하는 데도 돈을 지불해야 하는 시대다. 마그리트를 다룬 푸코의 책,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을 다룬 들뢰즈의 책들을 읽으며, 그림 없는 공허한 말의 유희에 난감한 적은 없는가? 풍부한 도판으로 ‘읽기’와 ‘보기’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는 것은 박정자 교수의 저작 라인업의 특유하고도 일관된 강점이다. <시뮬라크르의 시대>에는 마그리트의 회화작품 40개를 비롯해, 라파엘로와 홀바인으로부터 마네 세잔 칸딘스키 클레 워홀 아다미까지 모두 13명 작가의 작품 도판 56개, 그 밖의 풍부한 삽화와 도표가 이해와 재미를 선사한다.

저자인 박정자 교수는 이화여고와 서울대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했고, 같은 대학에서 석ㆍ박사를 했다. 현재 상명대 명예교수이며, 이화여대 대학원에서 강의했다. 소비의 문제, 계급 상승의 문제, 권력의 문제, 일상성의 문제 등을 인문학적으로 해석한 일련의 책들을 썼다.

성기웅 기자 skw424@pennmike.com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저작권자 © 펜앤드마이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