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 70년 부정하면서 교과서 집필기준엔 제헌헌법 강조
대한민국이 ‘평등 사회’ 지향했다고 왜곡 위한 속셈
헌법 기초한 유진오 “자유 존엄 존중하면서 폐단 방지” 증언
교과서에서 국가 정체성과 출발점이 송두리째 뒤바뀔 판

홍찬식 객원칼럼니스트 (언론인, 전 동아일보 수석논설위원)
홍찬식 객원칼럼니스트

 ‘자유’ ‘6 25 남침’ ‘북한 세습’ 등을 삭제해 사회적 파문을 일으킨 새 역사교과서 집필기준에서 주목해볼 것이 또 하나 있다. 꼭 70년 전인 1948년 7월17일 공포된 제헌헌법에 대한 집필기준이다. 지난달 공개된 ‘고등학교 한국사’ 집필기준 시안에는 ‘대한민국의 발전’이라는 항목이 있고 첫머리에 ‘제헌헌법이 지향한 민주공화국이라는 틀과 내용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헌법과 연관 지어 설명한다’고 나와 있다. ‘중학교 역사’ 초안에도 같은 내용이 들어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올해 1월 2일 서울 현충원을 찾아가 방명록에 ‘국민이 주인인 나라, 건국 백년을 준비하겠습니다’라고 적었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건국의 기점으로 삼고 그 100주년인 내년을 기념하겠다는 뜻이다. 국가라는 실체로서 이뤄졌던 1948년의 대한민국 건국을 부정하는 역사관이다. 이런 인식이라면 1948년 대한민국 수립 때 만든 제헌헌법에 대해서도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게 정상이다.

실제로 과거 좌편향 논란을 불렀던 역사교과서들은 제헌헌법을 거의 다루지 않았다. 그 중 대표적인 교과서였던 금성출판사의 ‘고등학교 한국 근현대사’(2002년 간행)는 제헌헌법에 대해 ‘국회에서 3권 분립과 대통령중심제 등을 요지로 하는 헌법을 만들었다’는 정도로 간단히 기술했을 뿐이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가 출범 4일 만에 박근혜 정부의 국정 역사교과서를 폐지한 다음, 서둘러 만든 새로운 집필기준에 제헌헌법이 당당히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여러모로 모순적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실마리는 박근혜 정부의 국정교과서에서 찾을 수 있다. 전국 5566개 중고교 가운데 단 한 학교만 채택했다가 폐기 처분된 비운의 이 교과서는 ‘제헌헌법이 마련한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법치주의 원칙들은 대한민국이 자유를 수호하고 민주주의와 산업화를 달성하는데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고 서술했다. 누구나 체험적, 상식적으로 공감하는 내용이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의 집필기준은 완전히 다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새로운 집필기준을 간단히 풀이하자면 제헌헌법과 과거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똑같이 민주공화국을 지향했다면서 이들이 구상했던 민주공화국의 틀과 내용을 교과서에 담으라는 요구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게 있다. 좌파 학자들이 말하는 ‘민주공화국’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국가 개념과는 다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제헌헌법은 ‘균등 사회’ ‘균등 경제’를 목표로 삼았기 때문에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는 오히려 그 대척점에 있다는 것이다. 박근혜 정부의 국정교과서에 나오는 제헌헌법의 의의를 뒤집고 일반 국민의 제헌헌법에 대한 인식을 교과서를 통해 바꿔 놓겠다는 의도다.

이번 집필기준 시안대로라면 1948년 수립된 대한민국은 원래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아니었다는 전제로 역사교과서가 만들어지게 생겼다. 놀랍고 기막힌 일이다. 새 집필기준을 만든 사람들은 이 점에서 제헌헌법이 쓸모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정말로 이들이 주장하는 대로 제헌헌법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보다는 평등사회 구현에 강조점을 둔 헌법이었을까. 제헌헌법에는 중요기업의 국영화, 노동자의 이익균점권 등 경제적 평등을 추구하는 조항이 들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제헌헌법은 자유민주주의의 3대 핵심 요소인 법치주의, 사유재산권, 시장경제 제도를 채택하고 있으며, 무엇보다 당시 국회의 다수당이 자유민주주의를 내세웠던 이승만 대통령과 한민당 세력이었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없다.

제헌헌법을 기초(起草)한 사람은 법학자 유진오 씨이다. 이미 타계한 그는 제헌헌법을 만들 당시를 기록한 ‘헌법기초회고록’(1980년 일조각 간행)을 남겼다. 그는 이 책에서 제헌헌법의 기본정신에 대해 ‘나는 인간의 자유와 존엄은 끝까지 존중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평등을 위해서는 그들(자유와 존엄)을 희생해도 좋다는 공산주의에는 반대였으나, 인간의 자유와 존엄을 존중하면서 거기서 오는 폐단을 어떻게 제거 또는 방지하느냐에 관심을 쏟았다’고 회고했다. 따라서 제헌헌법은 18세기 서구의 자유주의를 수용하면서도 사회적 약자 보호 등 복지국가 이념을 보완한 자유민주주의 헌법으로 요약할 수 있다.

제헌헌법에 중요 기업(운수 통신 금융 보험 등)을 국영 또는 공영으로 한다는 조항(제87조)과 노동자의 이익균점권 조항(제18조)은 당시 시대상황이 반영된 것이지, ‘균등 사회’ 실현과는 거리가 있다. 유진오 씨에 따르면 해방 당시 중요 기업들은 거의 전부 일제의 소유였다가 미군정에 몰수된 것이어서 오히려 이런 기업을 개인에게 불하할 경우 중대 문제가 될 것으로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노동자 이익균점권의 경우 광복 후에 남겨진 일본인 소유의 재산이 어느 누구의 것이 아니라 민족의 공유물이기 때문에 이를 넘겨받아 운영할 경우 근로자도 이익을 공유할 필요가 있다는 발상에서 도입됐다. 그나마도 이 조항은 당시 세계 최빈국(最貧國)이었던 한국의 열악한 경제사정으로 실현이 불가능했다.

이들이 사료 왜곡과 억지 해석을 하며 역사 뒤집기를 시도하는 이유는 자유민주주의라는 국가 정체성을 흔들기 위한 것이다. 최근 더불어민주당이 개헌 당론으로 헌법 전문(前文)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서 ‘자유’를 삭제했다가 ‘실수’라고 얼버무린 적이 있다. ‘실수’라기 보다는 ‘자유’를 삭제한 당론이 그대로 확정될 경우 국민 대다수의 반발을 예상했기 때문일 것이다.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 120명 중 70여명이 ‘자유 삭제’ 당론에 반대했다는 소식도 나온다. 지지율 70%의 좌파 집권당에서도 섣불리 자유를 없애지는 못했다.

하지만 길 건너 역사학계에선 전부터 같은 일이 공공연히 현실로 바뀌고 있다. 교과서에서 자유민주주의 논쟁은 2011년 이명박 정권 때 이미 벌어졌던 일이다. 역사관이 같은 문재인 정권을 맞게 된 좌파 학계는 든든한 배경 아래 더 적극적으로 나설 것이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는 누가 뭐래도 대한민국의 오늘을 있게 한 기반이다. 이 원칙을 바꾸는 것은 번영의 토대를 스스로 허무는 어리석은 짓이다. 역사교과서의 새 집필기준 시안에서 나타난 여러 문제 가운데 제헌헌법 문제는 심각성이 가장 크다. 이대로 확정되면 어떤 미래 세대를 키우게 될지 알 수 없다.

올해는 1948년 대한민국 건국과 제헌헌법 제정 70년을 맞는 해이다. 오히려 그 의미를 더하고 기념해야 할 시점이다. ‘자유’를 둘러싼 전쟁에서 지면 이 나라는 정말 끝장이다.

홍찬식 객원 칼럼니스트 (언론인, 전 동아일보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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