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시대의 역사에 관해 제대로 공부가 안된 이가 『반일 종족주의』 책자를 제대로 읽지도 않고, 이영훈 교수의 사회학계 비판에 발끈해서 오로지 비난할 의도로 쓴 게 바로 송호근 교수의 중앙일보 칼럼이다.

이영훈 교수는 『반일 종족주의』에서 한국의 역사학과 더불어 사회학을 거짓말하는 학문의 대표 사례로 꼽았다. 그래서였을까. 이름난 사회학자 송호근 교수의 비판(중앙일보 2019.8.19. 칼럼)에는 독이 잔뜩 올랐다. 책이 무모하고 섬뜩했다고 일독 소감을 소개하더니, 책의 결론은 일본 공적론이고 일본 무죄=한국 유죄론이며, 그렇게 된 원인은 사료의 편파 선택과 일반화의 오류라고 꾸짖었다. 마침내는 이영훈 교수를 ‘한국 사학자 카이텐’이라고 불렀다.

카이텐(回天)이 뭔가. 태평양전쟁 때 일본이 연합국과의 어뢰 경쟁에서 밀리자 만든 유인 조종 어뢰다. 어뢰공격이 성공하면 그를 조종하던 병사는 당연히 죽는, 바다 속 가미카제다. ‘한국 사학자 카이텐’이란 이영훈 교수가 자기 목숨 던져 한국을 잠수 공격하는 일본의 인간어뢰, 맹동주의 행동대원이라는 말이다. 조국 씨처럼 ‘부역 매국’ 친일파라 비난하는 정도로는 성이 안찼나 보다. 단번에 이 교수에 대한 ‘역대급’ 비난으로 등극했다.

송호근 교수가 중앙일보에 쓴 '한국사학계의 카이텐'이란 칼럼(중앙일보 2019년 8월 19일자 캡쳐).
송호근 교수가 중앙일보에 쓴 '한국사학계의 카이텐'이란 칼럼(중앙일보 2019년 8월 19일자 캡쳐).

송 교수는 시작부터 이영훈 교수의 연구 인생을 날조한다. 이 교수의 평생 연구가 ‘식민지 하 경제발전’을 입증하는 것이었단다. 한국경제사 분야에서 내놓은 이 교수의 그 수많은 논문과 저서 중 일부라도 읽었다면 할 수 없는 말이다. 한국사회사 연구자라면서, 바로 옆 동네 한국경제사 분야의 연구를 안 읽었다면 그는 도대체 뭘 읽고 책을 썼을까?

그의 지적처럼 『반일 종족주의』 저자들은 사료를 편파적으로 선택했던가? 식민지배 기간 동안 조선인이 입은 피해는 감추고 밝은 면만 부각시켰나? 또 일반화의 오류를 저질렀는가?

저자들이 위안부 관련 자료 무시했나?

정대협(현 정의기억연대) 등 위안부 운동단체는 일본군이 조선 여성을 강제연행해서 위안소에 감금하고는 일본 군인의 성노예로 삼았다고 주장했고, 이 견해가 정설처럼 되었다. 송 교수는 같은 입장에서, “일본군이 요청하지 않았다면 ‘종군 위안부’가 가능했을까?…군 개입 입증자료가 미국기록문서고에서 수차례 발견되었다”면서, 마치 우리 저자들이 일본군의 위안부 관여에 관한 수많은 자료를 무시한 것처럼 썼다.

그가 우리의 책을 제대로 안 읽은 것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일본군이 일본군 위안소를 기획해서 설치하고 관리했다는 점은 우리 책에 소상히 밝혀져 있다. 이미 식민지 조선에 총독부가 관리 감독하는 공창제(公娼制)가 확립되어 있었고, 일본군이 군 위안소 제도를 만들었다는 게 이영훈 교수의 핵심 주장이다.

동시에 이 교수는 “일본군, 일본 관헌이 강제로 위안부로 끌어 간 일이 없다”고 썼다. 이렇게 말하면 정대협 측은 “조선 여성이 자발적으로 위안부로 갔다는 말이냐”고 반발한다. 그러면서 미군의 포로 심문 기록을 든다. 미군이 중국 쿤밍(昆明)에서 일본인·조선인 포로를 심문하니, “23명의 위안부 모두 강제와 사기에 의해 위안부가 되었다”는 진술이 나왔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 강제와 사기의 주체는 일본군이 아니다. 위안부 모집업자와, 그들에게 이 여성을 전차금을 받고 팔아넘긴 부모, 친척, 친지… 등이 이 강제와 사기의 주체다. 우리 책에서는, 극빈한 가정의 딸이 전차금을 받은 부모나 친척, 친지의 결정에 따라 숙명처럼 모집업자를 따라가거나, 가정에서마저 유리된 부녀자가 오갈 데 없어서 모집업자를 따라가서, 위안부가 되었음을 보였다.

이처럼 정대협 등이 주장한 바 일본 관헌의 위안부 강제연행을 부정하면, 일본의 책임을 면제하는 것이 되는가? 필자도 책에서, 위안부가 된 조선 여성 중 자의로, 자발적으로 위안부가 된 경우는 없다고 썼다. 인신매매나 취업사기로 조달한 위안부로 하여금 전선의 군인들에게 성적(性的) 위안을 제공토록 한 것 자체가 일본 정부의 과오다. 일본 정부의 과오에 합당한 책임을 묻자는 게 이 책의 취지다. 그런데 뭐가 일본을 면책했다는 말인가?

송 교수는 이 책이 노무동원과 관련해서도 거짓과 허위를 생산한다고 비난했다. 징용이 조선인에게 선망의 대상이었고 조선인 노무자가 차별 없이 고임금을 받았다는데, 왜 해방 후 돈 번 귀환자가 없었는지 물었다. 미쓰비시의 다카시마와 하시마 탄광의 4,000명 조선인 징용자 중 많은 이가 탈출하다 익사했다고 했다. 노무자에 대한 실제 지급액은 쥐꼬리였고, 송금은 언감생심 빚진 사람이 속출했다고 했다.

허수아비 무찌르기 놀음

그러나 이는 저자들이 하지도 않은 말을 한 것처럼 쓰고 그를 비판하는, 허수아비 무찌르기 놀음이다. 노무 동원 파트를 맡은 이우연 박사는 조선인이 징용을 선망했다고 쓰지 않았다. 그는 일제 말 고임금의 취업 기회를 찾는 조선 청년들이 일본행을 선망했다고 썼다.

징용은 1944년 9월부터 1945년 4월 정도까지 시행되었을 뿐이며, 그 수는 일본으로 공식 동원된 노무자 72만 명 중 10만 명 정도였다. 이 공식 동원 외에도 1939년부터 1945년까지 100만 명 이상이 일본으로 이주했다. 이 거대한 이주의 흐름이 강제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조선인 노무자는 급여 중 일부는 숙식비 등 생활비로 쓰고, 일부는 본국에 송금하며, 다른 일부는 강제 저축했다. 이 책에 직접 자세히 언급되지는 않았으나, 이우연 박사가 2016년 『경제사학』에 기고한 논문에 1940년 11월 일본 내 78개 탄광산의 조선인 광부들의 1개월 평균 임금, 저금, 송금, 식비 데이터가 나온다.

아래 그림처럼 약 72원의 월 급여중 3분의 1인 25원을 송금했고, 13원을 저금했으며, 식비로 15원을 쓰고 나머지 18원 정도가 남았다. 1944년 큐슈 탄광지대를 조사한 바에 의하면, 조선인 노무자 월평균 임금 150원 중 식대, 저금, 기타 공제액이 88원이고, 노무자에게 지급된 것이 62원이었는데, 그중 40원을 본가로 송금했다.

[그림] 1940년 11월 일본내 탄광의 조선인 갱부 급여 사용 내역

송 교수는 왜 해방 후 부산항엔 돈 번 귀환자가 가득하지 않았냐고 물었다. 이제 답한다. 이미 많은 돈을 송금했고, 일본의 패전 때문에 저축했던 돈을 제대로 찾지 못하고 귀국했기 때문이다. 공부 좀 하시라.

일본으로부터 조선으로의 우편환 송금이 1939년부터 급증했다. 1938년 3,138만원이던 것이 1939년 4,737만원, 1942년에는 8,237만원으로 증가했다. 그밖에 만주, 중국, 남양으로부터 조선으로의 국제우편환 송금도 1938년 1,583만원에서 1942년 1억 2,202만원으로 급증했다. 일본으로 만주, 중국, 심지어 남양으로 퍼져나간 조선인들이 돈을 벌어 조선의 본가로 송금한 것이다. 이런 사실을 제대로 따져보지도 않고 50년도 더 된 통념을 반복한 게 송 교수의 이 기고문이다.

이제라도 공부하여 좀 배우시길…

송 교수가 이 책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한 채 비난한 것은 그밖에도 여럿 있다. 그는 일본이 이 땅에 재산을 남기고 떠났기 때문에 한국이 일본에 청구할 게 없었다고 이 책이 주장한 것처럼 썼다. ‘애당초 청구할 게 별로 없었다’가 청구권 협정을 다룬 장(제10장)의 제목이다.

그런데 이는 일본인 재산을 넘겨받아서가 아니었다. 청구권 협정이 한일 간 재산, 채권 채무를 정리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한국이 일본에게서 받을 돈이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는 일본인 재산을 받은 것 때문에 청구권 금액이 작아진 것으로 오해하고는, 그 일본인 재산이란 이 땅에서 조선인을 착취 수탈한 결과라는, 판에 박은 수탈론을 되풀이했다. 그는 국제수지와 재정 면에서 지속적으로 일본에서 조선으로 자금이 흘러들어온 사실을 모르는 모양이다.

2019년 여름 한일관계는 파탄 위기에 처했다. 그게 송 교수의 주장처럼 일본의 선민적(選民的) 인종주의 때문인가? 선민적 인종주의에 빠진 일본이 갑자기 한국에 대해 경제보복을 행했다는 말인가?

2012년과 2018년 대법원의 징용배상 판결과, 2017년 문재인 정부의 위안부 합의 파기로 1965년 한일협정을 뿌리째 흔든 것이 현 한일 갈등의 원인임을 왜 직시하지 못하나. 40년 넘게 잘 작동해 온 1965년 체제가 2010년대에 들어와 흔들렸다. 한국이 이 협정을 넘어서는 조치를 취했기 때문이다. 그 근저에 한국인의 반일 종족주의가 있다는 게 우리의 주장이다.

식민지 시대의 역사에 관해 제대로 공부가 안된 이가 『반일 종족주의』 책자를 제대로 읽지도 않고, 이영훈 교수의 사회학계 비판에 발끈해서 오로지 비난할 의도로 쓴 게 바로 송호근 교수의 중앙일보 칼럼이다.

이영훈 교수를 일제의 인간어뢰, 카이텐(回天)으로 조롱했으니, 속이 시원하신가. 독 나무엔 독 열매가 열린다는 말은 바로 이런 경우를 가리킨다. 이영훈 교수가 공연히 사회학계를 거짓말 학문의 온상으로 비판한 게 아니다. 배움에 때가 어디 있는가. 이제라도 공부하시고, 좀 배우시라.

주익종 이승만학당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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