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문명에서 해양문명으로-이승만, 문명사적 대전환을 이루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의 탄생을 세계에 알리는 기념식에서 연설하는 이승만 대통령.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의 탄생을 세계에 알리는 기념식에서 연설하는 이승만 대통령.
[필자 주] 이 글에서 사용하고 있는 해양문명과 대륙문명은 학문적 정의에 의한 용어라기보다는 하나의 상징성으로 사용한 용어임을 미리 밝혀둡니다. 즉 대륙문명은 한민족이 오랜 기간 젖어 있던 유교적 세계관과 중국 편향의 사대주의, 폐쇄적이며 쇄국, 세습왕조적 세계관에 대한 상징으로, 해양문명은 근대적 세계관과 기독교 문명, 그리고 개방과 교류와 통상, 그리고 민주적 세계관의 상징으로 차용한 것입니다.

대한민국은 반도국가다. 반도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태를 묻고 살아야 했던 한민족은 늘 바다를 끼고 살면서도 한 눈으로는 대륙을 바라보아야 하는 중간지대적 속성을 숙명처럼 떠안고 살아왔다. 로마가 발흥한 이탈리아가 그랬고, 유럽에 수많은 도시국가를 창조한 그리스가 그랬다.

이탈리아 중부의 도시국가로 출범한 로마는 유럽의 도시와 도시를 연결하는 로마가도를 건설했고, 해적을 퇴치하고 해상로의 안전을 확보하여 지중해를 자국(自國)의 내해로 만들었다. 육로와 해로를 통해 수많은 민족과 국가들이 상호 교류할 수 있는 길을 연 결과 로마는 인류 역사상 가장 찬란한 문명을 창조하는 데 성공했다.

한민족은 오랜 기간 대륙과 해양을 연결하는 반도국가적 속성을 훌륭하게 소화하며 진취적이고 역동적인 문화를 일구어 왔다. 신라와 백제, 고구려는 일본, 중국은 물론 멀리 이슬람 문명권과 교류한 사실이 역사적 기록과 유물을 통해 남아 있다.

통일신라의 장보고는 한민족 해양화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다. 장보고는 군사력과 항해술을 바탕으로 동북아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당과 신라, 일본을 잇는 국제무역에 나섰다. 또 저장성(浙江省) 월주요(越州窯)의 도공들을 초빙하여 청자 제조 비법을 배워 강진과 해남 일대에서 국산 청자를 제작하여 일본과 당에 수출했다. 이것이 후에 세계 명품이 된 고려청자의 출발이다.

장보고는 중국에 진출한 이슬람 상인들과 접촉하여 아랍에서 중국으로 이어진 해상 실크로드를 한반도와 일본까지 연결함으로써 동서양 문물 교류에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된다. 그는 해외 거주 신라인들을 기반으로 글로벌 네트워크를 구축하여 적극적인 대외진출과 세계경영을 실현했다. 한민족의 활동공간을 바다로 확대시킨 글로벌 CEO 장보고는 우리 역사보다는 중국과 일본에서 더 큰 비중과 명성을 차지하고 있다.

한민족의 해양화 전통

고려의 창업자 왕건은 신흥 해상무역 세력의 대표였다. 덕분에 고려는 초기부터 해상무역이 번성하여 개성과 인접한 예성강 하구의 벽란도가 국제무역항으로 각광을 받았다. 개성상인의 뿌리는 이때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해상 국제무역 붐을 타고 벽란도에 아라비아와 유럽 상인들이 대거 진출했고, 그들을 통해 고려의 영문 이름인 ‘코리아(KOREA)’가 중동과 유럽까지 퍼졌다. 고려인들이 세계 최초로 개발한 금속활자와 고려 인삼이 아라비아 상인들에 의해 유럽으로 보급되었고, 장보고에 의해 도입된 청자 제조 기술은 고려시대에 독창적인 기법이 가미되어 중국에서 천하의 명품 대접을 받게 된다.

개성과 예성강 하류의 벽란도 일대에는 최소 4만 명에서 7만 명에 달하는 외국인들이 모여 살았는데, 대부분이 무슬림 상인들이었다. 이들은 개성에 ‘예궁’이라는 모스크를 지어 기도를 하고 코란을 낭송했다.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도 소개된 고려 가요 ‘쌍화점’에 무슬림 상인이 등장한다.

쌍화란 투르크계 만두의 일종인데 쌍화점의 내용은 “쌍화점(만두 가게)에 쌍화(만두)를 사러 갔더니 무슬림 주인아비가 고려 여인의 손목을 잡으면서 은밀하게 유혹하는” 내용이다. ‘쌍화점’은 중동이나 중앙아시아의 상인들이 이역만리 고려에까지 와서 만두 가게를 열고 살아갈 정도로 우리 민족의 개방성과 대외 지향성을 보여주는 내용증명이다.

조선 초기에도 무슬림 기술자들이 한반도에 진출하여 보석 채취와 광산업에 종사했다. 세종 임금의 즉위식 때 이슬람교 지도자가 참석하여 코란을 낭송한 기록이 『세종실록』에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우리 사회에 이슬람 문화가 광범위하게 전파되어 있었다.

서양이 종교적 근본주의로 인해 중세 암흑기를 헤매고 있을 때 무슬림들은 그리스, 로마의 천문학과 과학기술 문명을 흡수하여 이슬람이 과학기술을 선도했다. 원나라 시절에 구축된 세계 교역망 덕분에 손쉬워진 동서 교류로 이슬람의 과학기술이 중국에 유입되었고, 무슬림 학자들이 대거 중국에 초빙되어 천문대, 의약원 등을 설립했다.

이러한 이슬람 과학기술의 조류가 한반도까지 흘러와 100~200여 년 숙성과정을 거친 후 조선 초기에 꽃을 피우게 된다. 조선에서 서양보다 200년 이상 앞선 측우기, 천문시계인 혼천의 등이 발명된 것은 당시 국왕이었던 세종의 뛰어난 리더십과 함께 고려 시대부터 흘러온 이슬람의 과학, 수학, 천문학이 토착화되었기에 가능했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음력의 뿌리는 이슬람 회회력(回回曆)이다. 일부 학자들은 한글 창제도 세종의 독창적 작품이라기보다는 원나라 음운학이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말한다. 원나라는 제국 공용어를 만들기 위해 중국은 물론 중앙아시아 지역의 음운학자를 동원하여 표음문자인 파스파 문자를 제정했다.

원나라가 붕괴한 후 등장한 명나라는 파스파 문자 제정에 협조한 음운학자들을 요동으로 귀양을 보냈다. 한글 창제 과정에서 집현전 학자들이 요동으로 찾아가 파스파 문자에 담겼던 음운학의 핵심을 전수받아 한글 창제에 활용했다. 그 결과 중국과 중앙아시아 음운학의 과학적 엑기스가 한글에 접목되어 한글이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인 문자라는 평을 듣게 된다.

대륙문명으로 회귀하며 쇠퇴

이러한 반도국가적 속성, 그 중에서도 해양화 전통과 정서는 유교와 성리학이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조선조의 출범으로 쇠퇴하기 시작한다. 특히 성리학이 교조화 되는 조선 중기 이후가 되면 해양화와는 담을 쌓고 철저하게 대륙문명으로 회귀하게 된다.

명나라는 3대 황제 영락제(永樂帝) 때 정화(鄭和)의 대함대를 일곱 차례나 아라비아, 아프리카까지 파견하는 등 해양대국의 위용을 보였지만, 영락제 사후(死後) 함대를 해체하고 해상교역을 차단하는 해금(海禁)정책으로 쇄국의 길을 걸었다. 『강대국의 흥망』의 저자 폴 케네디 교수는 “중국의 해금정책이 중국 문명을 중심으로 하는 동양이 쇠락한 가장 큰 이유”라고 진단했다. 중국은 이때부터 제해권을 상실하여 19세기 서구 열강에 유린당하고 말았다.

조선은 개국 초부터 사대교린(事大交隣) 정책에 의해 국제무역을 상당 부분 통제했다. 또 외침(外侵)에 대비한다는 명분으로 공도(空島)정책, 해금(海禁)정책을 펼쳐 바다를 향한 도전과 패기의 기상을 잃었고, 개방과 교류라는 해양문명의 핵심 유전자마저 쇠퇴하게 된다.

그나마 조선 500년 동안 해양문명의 유전인자가 빛을 발한 것은 이순신 제독이다. 이순신 제독의 거북선을 이용한 돌격전법과 원거리 화포를 활용한 함대 운용 전술은 동시대를 풍미했던 육박전투 방식의 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선진화되고 독창적인 전략이었다.

쇄국으로 매진한 조선의 양반 지배층은 돈을 천한 것으로 여기고 청빈(淸貧)을 고귀한 가치로 칭송했다. 황금 천시는 상공업 천시로 이어져 상공업은 사회의 밑바닥 천민 계층이 담당하는 더러운 직업으로 전락하게 된다. 기술이 뛰어난 장인(匠人)들은 사회적 예우는커녕 더 많은 수탈과 착취의 대상이 되었기에 훌륭한 기술이 후대에 전수되지 못하고 대가 끊기곤 했다.

농업 이외의 산업이라고는 극소수 보부상들의 물물교환 정도였으니 20세기 중반까지 조선은 전국 범위에서 통용되는 변변한 화폐조차 없었고, 보릿고개, 초근목피에 이골이 나고, 쌀밥에 고깃국을 실컷 먹어보는 게 소원일 정도로 국가와 국민 모두 빈곤 상태에 놓였다.

19세기 말 청나라 궁정의 연간 예산이 은화 1억 냥, 일본도 중국과 비슷한 1억 냥 정도였다. 같은 시기 조선은 중국, 일본의 300분의 1에 불과한 30만 냥에 불과했다. 거듭된 해금(海禁)과 쇄국정책, 대륙 일변도의 존명사대(尊明事大) 정신으로 인해 조선은 근대화라는 세계사의 본류에서 밀려나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된다.

조선 도공들, 일본 근대화의 불 지펴

조선 중기인 인조 4년(1626)과 효종 4년(1653)에 네덜란드 사람들이 우리 역사에 등장한다. 인조 때 표류해 온 벨테브레와 헤이스베르츠, 페르베스트 등 세 명의 네덜란드 사람은 훈련도감에 소속되어 대포 제작과 포술을 지도했다. 효종 때는 하멜 일행 36명이 제주도로 표류해 왔다. 하멜은 조선에서 13년 간 억류생활을 하다가 동료 6명과 함께 나가사키로 탈출하여 본국으로 돌아가 『하멜 표류기』를 출간했다.

조선 역사에서 이들의 등장은 일본-유럽 간의 도자기 교역망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이들이 타고 있던 선박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 국제 무역선이었다. 네덜란드 무역선은 유럽과 나가사키를 왕래하며 매년 일본 도자기를 수백만 점 씩 구입 해다가 비싼 값을 받고 유럽에 판매했다. 지금도 유럽의 왕실과 궁전에는 당시 유럽에 수입된 일본의 아리타(有田) 야끼와 사쓰마(薩摩) 야끼가 다수 소장되어 있다.

일본은 200여 년 간 엄청난 양의 도자기를 유럽에 수출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일본 도자기를 싣기 위해 나가사키에 오는 네덜란드 무역선은 총포와 서적을 비롯한 유럽의 선진문물을 가득 실어다 일본에 전해주었다. 이러한 동서양 도자기 무역을 통해 일본은 동양에서 가장 먼저 개화로 나갈 준비를 하게 된다. 말하자면 도자기가 일본의 근대화를 촉발시킨 셈이다.

그런데 눈여겨봐야 할 점은 유럽 귀족사회를 열광시킨 일본 도자기는 임진왜란 시절 조선에서 끌려간 조선 도공(陶工)과 그 후예들의 작품이었다. 이삼평이 빚어낸 아리타(有田) 야끼, 심당길(심수관의 선조)과 그 후손들이 일으킨 사쓰마(薩摩) 야끼는 심오한 미적 감각과 찬연한 색채감으로 유럽의 왕족과 귀족들을 열광시켜 일본을 대표하는 수출 상품으로 등극하게 된다.

조선 도공들은 본국에서는 사농공상(士農工商) 신분구조의 최하층민으로서 모진 박해와 각종 노역에 시달리면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았지만, 일본에 포로로 끌려가 인생 역전을 경험하게 된다. 그들은 일본 사회에서 장인(匠人)으로서 극진한 예우를 받으며 자신들의 재주를 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기록에 의하면 조선에서 끌려간 포로 10만 명 중 단지 9000명만 고향으로 돌아갔을 뿐이다. 조선 도공들은 포로 교환 때 고국으로 귀환하지 않고 대부분 일본에 정착하여 세계사에 길이 남을 도자기 문화를 꽃피웠다. 뛰어난 기술을 보유한 조선 도공들 덕분에 일본은 국부(國富) 창출은 물론 근대화의 결정적인 전기를 맞게 된다.

같은 시기, 조선의 도공들은 사농공상의 신분구조에 찌들려 양반들의 애완용 도자기를 빚는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조선은 뛰어난 도공들을 다수 보유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착화 된 신분구조 덕분에 국가 발전에 어떤 도움도 주지 못하고 그들의 천재적 재능을 사장(死藏)시킨 것이다.

이승만, 대륙문명과 탯줄을 가르다

문화사적 측면에서 볼 때 땅(대륙)은 농사(정주, 정착)를 장려하지만 바다(해양)는 장사(무역, 개방, 이동)를 권장한다. 대륙이 광물자원, 중앙집권, 자급자족, 집단주의, 전체주의, 군국주의, 국가주의를 상징한다면 바다는 변화, 다양성, 개방, 교류, 인권, 자유, 코스모폴리탄의 원천이다.

한국은 지난 70년 동안 세계사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시간에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룩했다. 문맹률은 78%에서 0%로 낮아졌고, 평균수명은 45세에서 82세로 연장됐다.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에서 자연자원 덕에 성장한 것이 아니고, 다른 나라를 침략하여 식민지를 착취하여 산업화를 이룬 결과도 아니다.

한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한 신생국가 중 산업화, 민주화에 성공한 나라 중의 하나로 꼽히는 이유는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바탕으로 한 시장경제를 채택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이 채택한 자유민주주와 시장경제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구한말 이승만이란 존재와 만나게 된다.

이승만이 자유, 민주, 개방, 통상, 인권의 세례를 받은 것은 20세 때인 1895년 4월, 배재학당에서 아펜젤러를 비롯한 서양 선교사들과 만나면서부터다. 당시 이승만은 10여 차례 과거시험에 낙방하고 결혼하여 아들까지 둔 청년 선비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승만은 성리학적 질서 하에서 입신양명을 꿈꾸던 수구꼴통 청년 선비였다.

배재학당에 첫 등교를 하던 날 이승만은 큰 갓을 쓰고 굽 높은 나막신을 신고 도포자락 휘날리며 학당장(교장) 헨리 아펜젤러를 만났다. 당시 배재학당에는 아펜젤러뿐만 아니라 달젤 벙커, 프랭클린 올링거, 한국 문화 전문가이자 독립운동의 은인 호머 헐버트, 윌리엄 노블, 조지 존스, 윌리엄 스크랜턴, 그리고 엘라 아펜젤러 부인, 베르타 올링거 부인, 매티 노블 부인 등이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이승만은 서양 선교사들과 교우하며 영어를 배웠고, 기독교적 가치관과 한국을 연결하는 일에 앞장선다. 특히 이승만은 서양 선교사들을 통해 기독교와 민주주의, 근대 문화, 자유주의, 계몽주의 사상의 세례를 받았다. 미국에서 고급 교육을 받고 돌아온 서재필과 윤치호를 통해 미국이라는 나라의 가치에 눈을 뜨게 된다.

이승만은 미국을 시장경제가 발전한 나라, 기독교 정신이 살아 있는 나라, 기회균등의 나라로 보았고, 한국을 미국과 닮은 모습으로 개혁하겠다는 목표를 설정한다. 그것은 조선이란 나라의 정신세계를 지배해 왔던 대륙문명과 탯줄을 가르고, 미국으로 상징되는 해양문명으로의 역사적 대전환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독립정신』에 담긴 의미 : 개방, 통상, 민주주의, 기독교

그가 한성감옥에 수감되어 힘들고 고통스런 수감생활을 하는 와중에 서양 선교사들이 넣어주는 책들을 닥치는 대로 읽으면서 자신의 정신세계를 전 지구적으로 확장해 나간다. 이승만은 감옥에서 몰래 집필한 『독립정신』을 통해 다음 세 가지를 강조했다.

첫째, 1890년 이후 질풍노도의 조선을 둘러싼 급변하는 국제정세를 분석해 내면서 애국심을 강조하고, 근대적 국가의식의 중요성을 설파했다.

둘째, 전제군주 시대에 대역죄에 해당할 수 있는 민주주의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민주헌법의 도입을 주장했다. 이유는 한 가지였다. 문명부강한 나라는 민주주의를 하고 있는 반면, 가난하고 뒤떨어진 나라는 전제군주국가였기 때문이다. 문명부강을 위해서는 민주주의를 도입해야 한다는 청년 이승만의 확고부동한 사상체계가 형성되었다.

셋째, 서양 문물을 하루 속히 받아들여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근대지식과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제조업을 발전시켜야 하며, 다른 나라들과 통상을 하여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조선의 혼을 지배해 왔던 사농공상(士農工商)의 가치관이 아니라 그 정 반대로 공상(工商) 우선주의적 사고였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상업과 무역(통상)을 권장하여 다른 나라로부터 재물과 금은보화를 벌어들이고, 공업과 농업을 진흥시켜 생활이 풍요로워지면서 사람의 가치도 매우 소중하게 여긴다.”

“무엇보다 먼저 국제법, 통상조약, 우리나라 사와 지리에 대해 공부해야 한다.… 또한 천문학, 지리학, 물리학, 철학, 화학, 신학, 법학, 의학, 농학, 상학, 경제학, 정치학 등 전문서적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이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대외적으로 나라를 개방하고, 외교를 잘해야 하며, 선진문물을 신속히 받아들이기 위해 외국어를 공부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승만은 『독립정신』에서 통상과 교류의 이점을 다음과 같이 설파한다.

“…자기 나라의 풍부한 물자를 그것이 귀한 나라에 가져가 더 비싼 값에 팔게 되었다. 이런 교류에 힘입어 다른 나라의 문화가 전파되었으며, 교육이 널리 보급되고 학문과 기술도 발전하게 되었다. 오늘날 세계에서 부강하고 문명한 나라들은 서로 통상하면서 교류하는 가운데 이렇게 발전된 수준에 이르게 된 것이다. 개명한 시대를 맞아 우리나라도 잘만 한다면 그들처럼 발전할 수 있고, 행복해질 수 있다.… 통상과 교류는 모든 나라에 이익이 되는 것이지 어느 나라에는 이롭고 어느 나라에는 해로운 것이 아니다. 세계 여러 나라가 이웃이 되고 우방이 되는 것이니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

“외국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해를 끼치거나 무엇을 빼앗으러 오는 것이 아니다. 통상하고 교류하여 서로 이롭게 하고자 하는 것이니, 그들을 막을 수도 없고 막을 이유도 없다.”

“개명한 나라들은 모든 나라와 모든 백성들 간에 서로 개방하고 교류하는 것이 공통된 이익이라 믿으며, 그것은 자기들의 좋은 점을 세계 모든 나라와 함께 누리고자 한다.”

이승만은 『독립정신』의 결론 부분인 「독립정신 실천 6대 강령」에서 개방과 통상을 거듭 강조하고 있는데, 이승만이 주장한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1. 우리는 세계에 대해 개방해야 한다.

1)우리는 세계와 반드시 교류해야 한다.

2)통상은 서로에게 이익이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3)오늘날 통상은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근본이다.

4)외국인들이 우리나라에 오는 것은 우리를 해치려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이롭게 하기 위한 것이다.

5)외국인들을 원수 같이 여기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2. 새로운 문물을 자신과 집안과 나라를 보전하는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

1)외국인들이 들어와 우리와 함께 살 때 우리 것을 보전하면서, 또한 우리에게 균등한 이익이 돌아오도록 해야 한다.

2)새로운 학문에 대해 공부해야 한다.

3)신학문을 열심히 배워 경제적 이익을 외국인들에게 뺏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

4)신학문을 열심히 공부하여 그 혜택을 누려야 한다.

3. 외교를 잘해야 한다.

1)외교가 나라를 유지하는 데 매우 종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2)다른 나라들과 친밀한 관계를 갖고자 한다면 모든 나라를 공평하게 대해야 한다.

3)다른 나라들과 친밀한 관계를 발전시키려면 그 나라들과 공통된 특성을 갖도록 노력해야 한다.

4)진실을 외교의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

5)우리나라에 온 외국인들의 잘못은 시시비비를 분명히 가려야 한다.

4. 나라의 주권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1)모두가 외국인들에게 치외법권을 허용한 것을 수치로 알고,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이것을 우리 생전에 회복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다.

2)모든 사람은 무슨 일을 하든지 부지런히 배우고 일해야 한다.

3)우리나라 사람이든 물건이든 다른 나라 사람들로부터 수치를 당하는 것을 보면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이를 막아내야 한다.

4)국가를 존중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5)어떤 일이 있더라도 외국 국적을 갖지 말아야 한다.

6)우리는 외채 빌리는 것을 삼가야 한다.

5. 도덕적 의무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

1)뜻이 같은 사람에게 감정을 표현할 줄 알아야 한다.

2)우리는 공적인 의무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

3)나라에 충성함에는 용기를 가지고 행동해야 한다.

6. 자유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

1)자유를 자기 목숨처럼 여기며 남에게 의지하지 말아야 한다.

2)다른 사람의 권리를 존중해야 한다.

이승만의 「독립정신 실천 6대 강령」에는 해양화 및 민주주의, 국가독립의 핵심 아젠다라고 말할 수 있는 개방, 통상, 신문물, 신학문 학습, 외교, 국가의 주권 및 국가 존중, 공적인 의무, 국가에 충성, 자유의 권리, 타인의 권리 존중 등이 집약되어 있다. 오늘날 대한민국 해양문명의 물줄기를 거슬러 올라가면 구한말에 저술된 이승만의 『독립정신』이야말로, 해양문명의 핵심 가치관이자 뿌리와 근원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된다.

특히 이승만은 『독립정신』의 총 50개 장 중 미국과 관련하여 「미국 국민들이 누리는 권리」, 「미국 독립의 역사」, 「미국 독립선언문」, 「미국의 남북전쟁」 등 4개 장을 할애하여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이승만이 미국을 주목한 것은 미국이 기독교 정신에 의해 탄생되었고, 미국의 독립과 건국에서 영향을 받아 발생한 프랑스혁명 정신이 현대 민주주의와 계몽주의가 되어 전 세계로 전파된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미국의 건국정신이 지구를 한 바퀴 돌아 아시아의 끝자락에 있는 한국에서 대미를 이루기를 바랐다.

이승만은 구한말의 선각자들 중 어느 누구보다 먼저 미국의 가치에 주목했다. 즉 미국의 역사는 모든 나라가 식민제도를 청산하고 자유롭고 우호적인 통상제도 범지구적으로 구축하기 위해 맹렬히 노력해 온 노력의 결집이었다는 점을 꿰뚫어 본 것이다.

이승만이 프린스턴대학에서 받은 박사학위 논문 제목이 『미국의 영향 하의 중립』(Neutrality As Influenced by the United States)이다. 이것은 통상법제사에 관한 것으로, 국제무역이론의 한 부분을 차지할 뿐만 아니라 오늘날 자유무역협정(FTA)이 등장하는 초기 법제사다.

이 논문은 이승만이 한성감옥 수감시절에 쓴 『독립정신』 가운데 통상 부분을 심화 발전시킨 내용이다. 이것은 이승만이 박사학위 공부를 체계적으로 시작하기 전부터 한국의 독립에 있어 통상의 중요성을 통찰하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이승만은 또 서구문명 뒤에 있는 자유주의의 기원이 기독교였음을 간파하고는 “세계 문명국 사람들이 기독교를 사회의 근본으로 삼고 있으며, 그 결과 일반 백성까지도 높은 도덕적 수준이 이르렀다. 지금 우리나라가 쓰러진 데서 일어나려 하며 썩은 곳에서 싹을 틔우고자 애쓰고 있는데, 기독교를 근본으로 삼지 않고는 온 세계와 접촉할지라도 참된 이익을 얻지 못할 것이고, 세계와 통상을 하여도 참 이익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승만은 “자기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하는 자가 되어 나라를 한마음으로 받들어 우리나라를 영국과 미국과 동등한 수준에 이를 수 있도록 하려면 기독교를 모든 일의 근원으로 삼아야 한다”고 『독립정신』의 끝부분에 새겨 놓았다.

김학은 교수는 『이승만과 마사리크』라는 탁월한 저서에서 이승만의 사상을 지배하는 키워드가 “통상이 평화를 가져온다”라고 지적했는데, 이러한 사상의 뿌리는 프린스턴대학의 스승인 우드로 윌슨의 14개 조항, 그리고 그 근저에 있는 칸트의 영구평화론과 맞닿아 있음을 증명해 냈다.

여기에 기독교가 접목되어 이승만의 사고방식은 ‘기독교+통상=평화’라는 등식으로 정리된다. 이승만의 독립을 위한 철학적 바탕에는 기독교 선교와 통상이 강력하게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이승만은 프린스턴대학에서 통상을 주제로 한 박사학위 공부와 함께 신학 공부에도 매진하게 된다.

미국의 힘을 이용한 문명사적 전환

이승만의 개화 및 독립사상은 대한민국의 대통령에 취임하여 대한민국의 진로를 정하는 과정에서 폭발하게 된다. 이승만의 사고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기독교, 통상, 미국이라는 키워드는 곧 해양화라는 문명사적 코드와 직결된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이승만이 하와이에 정착하면서 발간한 『태평양잡지』로 구현되어 나타난다. 즉 한국은 대륙의 중화 유교문명권에서 이탈하여 해양의 구미 기독교 문명권으로 진입해야 한다는 자신의 사상을 집약하여 잡지명으로 표출한 것이다.

이승만이 개방과 통상, 기독교, 평화라는 키워드와 함께 한국의 독립과정에서 미국을 활용하고자 했던 이유가 있다. 서양 열강들은 약소국가를 식민지로 만들어 배타적 권리를 행사하는 데 반해 미국은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모든 나라가 식민제도를 청산하고 자유롭고 우호적으로 통상하는 제도를 범지구적으로 구축하고자 했다.

자유국가의 자유해상통상을 저해하는 요인은 식민지, 그리고 전쟁이었다. 미국은 전 세계를 자유통상망으로 묶어 통상을 통한 평화체제를 구축하고자 했다. 미국이 과거에 독립을 승인한 국가들의 사례를 조사하여 미국의 외교 원리를 추적한 것이 이승만 박사학위 논문인 『미국의 영향 하의 중립』의 핵심 내용이다. 김학은 교수는 이승만 박사학위 논문의 핵심단어가 통상과 평화, 통상과 독립이라고 분석했다.

말하자면 국가와 국가가 전장에서 만나 승자의 이익이 패자의 손실이 되는 대신, 시장에서 만나 승자와 패자 없이 상호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자유통상의 시스템, 이것을 국가적으로 추진하고자 하는 나라가 미국이었다. 이런 외교 전략을 가진 나라가 미국이니,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쟁취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힘을 이용해야 한다. 즉, 지구상에서 식민지 제도에 반대하고 통상의 중요성에 가치를 두어 식민지 제도를 깨부수려는 강대국은 미국이 유일했다.

이러한 미국의 힘을 빌어 독립을 쟁취한 후 한국도 자유통상의 나라로 만든다는 거대한 문명사적 전환. 이것이 이승만의 정신이었고, 이승만이 추구하고자 했던 대한민국의 토대였다.

해방, 그리고 해양화 시대의 개막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됐지만, 한반도는 38선을 경계로 북쪽에는 대륙세력의 맹주 소련이, 남쪽에는 해양세력의 맹주 미국이 분할 점령했다. 남한은 3면이 바다로 막히고 북쪽은 38선(후에 휴전선)으로 봉쇄되면서 섬처럼 고립되는 운명을 맞게 된다.

남한은 살 길을 바다에서 찾을 수밖에 없었다. 해방 후 인천과 부산항을 통해 정크무역과 마카오(홍콩)무역이 시작되었다. 미국이 제공하는 구호 원조물자가 바닷길을 통해 들어와 항구에서 하역되었고, 6‧25 때는 부산을 통해 수 십 만의 유엔군 전투 병력과 막대한 군수물자가 물밀듯 들어오면서 우리의 해양화는 본격 개막되었다. 그것은 대륙 지향의 유교문화와 태를 가르고 해양문화로 향하는 문명사적 대전환의 시작이었다.

이승만의 문명사적 대전환의 첫 출발점은 김연수, 박흥식, 이병철, 김용완, 구인회, 설경동, 전택보, 최태섭, 이정림, 정주영, 정재호, 김성곤, 이양구, 신덕균, 김지태 같은 기업인과의 만남이었다. 이들 기업인은 거의 대부분이 정크무역, 마카오(홍콩)무역, 6·25 당시 부산에서 진행된 전시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해 갔다.

위기는 기회의 다른 말이다. 포탄은 철통같은 방위선을 뚫지 못해도 상인들의 이재(理財)는 그것을 뚫고 들어가 물자를 교역한다. 물자가 교역되는 곳에서 경제가 싹트고 산업이 개화한다. 전쟁은 기존의 체제와 질서를 허물고 새 질서를 창조하는 기회가 되었다. 졸지에 인민군의 불법 남침으로 산업의 터전을 잃은 기업가들은 부산으로 피난을 와 해외 무역을 통해 물자를 조달하면서 새로운 사업의 기초를 닦기 시작했다.

전쟁 상황이던 당시 우리의 주력 수출품은 고철과 탄피였다. 전장에서 수집된 고철과 탄피 등 파철은 일본이나 홍콩으로 수출되어 귀중한 달러 수입원 역할을 했다. 전시 무역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다. 훗날 재벌의 반열에 오른 기업가들은 대부분 부산에서 전시 무역을 통해 거부(巨富)를 축적한 사람들이다.

무역은 개방과 통상, 외국과의 교류, 외교, 민주주의를 촉진시켰고, 한국인들의 활동 공간을 세계로 넓히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병철이 전시 무역을 통해 번 돈으로 1953년 제일제당 공장을 건설하여 큰 성공을 거두자 많은 기업들이 상업자본의 산업자본화에 뛰어들며 공업화 붐이 일기 시작했다.

이승만의 해양문명으로의 극적인 전환은 6·25 전란 복구과정에서 제기됐던 「네이산 보고서」의 폐기로 현실화된다. 당시 「네이산 보고서」는 한국은 농업 우선의 전략을 통해 근대화를 추진해야 한다는 내용이 핵심이었다. 이 보고서에 대해 이승만은 적극 반대하면서 “한국은 농업이 아니라 높은 교육수준과 풍부한 노동력을 이용하여 공업화로 산업발전을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승만은 한국의 영세한 농업구조, 그리고 1년 1모작이 고작인데다가 연중 강수량이 7~8월에 집중되는 기후조건 하에서 농업 중심의 발전전략으로는 근대화가 불가능하다면서 “공업화로 가야 한다”고 선언했다.

「네이산 보고서」를 사문화(死文化)시킨 이승만은 1953년 4월 4일, 내각에 철강공장 건설에 대한 특별 지시를 내렸다. 관계부처는 철강 산업에 대한 기본 대책을 검토한 끝에 대통령령으로 인천의 대한중공업공사(現 현대제철 인천제철소)를 국영기업으로 출범시키고, 연산 5만 톤 규모의 평로(平爐·구식 용광로)를 건설하여 제강공장과 압연공장 건설에 돌입했다.

이승만은 산업문명의 핵심이 제철산업에 있으며, 철강이 ‘산업의 쌀’이라는 사실을 미국에서 오랜 망명생활 과정에서 깨달았다. 그러나 당시 우리 정부 예산의 절대다수를 좌우하고 있던 미 원조당국이 “전쟁 중인 한국의 상황에서 제철공장 건설은 시기상조다. 시급한 민생문제부터 해결하라”면서 우리 측 요구를 거절하자 이승만은 “우리 정부가 보유한 자체 보유불로 철강공장을 지으라”고 내각에 지시했다. 그리하여 당시로서는 거금인 140만 달러를 투자하여 5만 톤 규모의 제강공장, 380만 달러를 투자하여 압연공장 건설사업에 돌입했다.

철강공장 건설과정에서 한국의 엘리트 기술자를 선발하여 국비로 서독에 유학을 보냈다. 박정희 시절 중공업차관보를 역임하고 대한민국의 고유모델 승용차 개발 프로젝트를 성공시킨 김재관이 이승만 정부 때 국비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독일 아헨공대에서 제철산업 공부를 하고 왔다. 그의 증언에 의하면 이승만 대통령이 선발된 유학생들을 경무대로 불러 일일이 장학증서를 주면서 “열심히 공부하고 오너라. 우리가 참다운 독립국가가 되려면 제철공장이 있어야 돼. 여러분들이 그걸 해 내야 한다”며 어깨를 어루만져 주었다고 한다.

이때의 철강 유학생들이 현대식 제철산업을 배우고 돌아와 대한중공업 공장을 건설하고 운영하는 주역이 됐고, 박정희 정권 시절 포항제철(포스코) 건설에 대거 참여하여 ‘포항제철 신화’를 만드는 주인공이 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산업계 인사들은 “이승만이야말로 우리나라 중공업의 기초를 닦은 인물”이라고 평한다.

우리 정부가 6·25 직후에 외국 차관 한 푼 안 들이고 순수한 국내 자본으로 제강공장을 건설한 것은 2차 대전 종전 후 후진국에서 벌어진 최초의 중공업 프로젝트였다. 이승만은 미국의 강력한 반대를 물리치고 자체 보유불로 철강공장 건설이라는 결단을 내릴 정도로 공업화에 모든 것을 걸었다.

한국의 공업화는 해외로부터 원료와 기술, 기계, 노하우 등을 도입하여 제품을 제조한 다음 해외에 내다 파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원료와 기계, 부품들이 바닷길을 통해 들어오고, 국내에서 생산된 완제품이 바닷길을 통해 실려 나갔다. 그것은 해양화의 급팽창이었다.

바닷길을 열기 위해 배를 짓다보니 조선산업이 육성되었고, 배를 운전하고 관리하다보니 해운산업이 발달했다. 육지에선 먹을거리가 부족하여 해외 먼 바다까지 나가 물고기를 잡다보니 원양어업 강국이 되었고, 배들이 안전하게 출입하기 위해 항구를 건설하다보니 항만 강국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해양화의 가치관이 우리의 의식 속에 깊이 스며들기 시작한다.

해방 직후부터 시작된 해양화는 이승만이 꿈꾸어 왔던 개방과 통상, 기독교, 평화의 나라를 가능케 하는 동력원으로 작용했다. 해방과 더불어 500여 년 바다를 두려워하고 회피했던 우리 민족이 냉전으로 인해 섬처럼 조건 지워진 한계상황에서 바다에 도전함으로써 활동 공간이 전 세계로 확대되기 시작한다. 그것은 구한말 개항과 더불어 몰아닥친 서세동점(西勢東占)의 시기에 쇄국으로 대응하다 국가 멸망에 이른 과거사에 대한 반성인 동시에, 한국인의 야성(野性)을 세계로 내뻗는 기회였다.

우리의 해양화는 단기간 내에 압축적으로, 그리고 남들이 생각지 못한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1952년 1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은 ‘인접해양의 주권에 대한 대통령 선언’을 통해 평화선을 선포한다. 1952년 1월은 6‧25 전쟁이 중공군의 개입으로 중부전선에서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국가 존망이 위태롭던 시기였다.

이 엄중한 전시(戰時) 상황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바다에 대한 주권선을 선포하여 우리 해역의 광물자원과 수산자원을 보호하고, 독도를 우리 주권 영역에 포함시키는 결정적인 전기를 만들었다. 이승만은 해양자원과 영해(EEZ)가 국토 못지않게 귀중하다는 사실을 꿰뚫어 본 선각자였다.

이승만이 시동을 건 해양화 혁명, 박정희가 완성

세계지도를 보면 대한민국의 국토 면적은 지구상 육지 면적의 0.07%, 인구는 세계 전체 인구의 0.78%로 미미한 편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국내 총생산(GDP)은 세계 12위 규모다. 이러한 국부(國富)의 원천은 해외 무역이다.

부존자원이 빈약하고 인구는 많은 약점을 우리는 원자재와 기술을 해외에서 도입하여 우수한 노동력을 동원해 완제품을 만든 다음 해외에 수출하는 수출지향의 공업화 전략으로 극복했다. 그것은 곧 총체적인 해양화의 길이었기에 대한민국의 산업화는 해양화로 귀결된다. 이러한 해양화의 단초는 『독립정신』을 통해 해외와의 교역, 개방과 통상, 과학기술, 제조업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박사학위 논문을 통해 개방과 통상을 통해 평화를 정착시켜야 한다고 설파한 이승만이 열었다.

해양문명으로의 문명사적 대전환이 이루어지자 해양 분야에서 대한민국의 살 길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대륙문명과 탯줄을 가르고 이승만이 시동을 건 해양화 혁명은 박정희가 격렬하게 추진하여 그 완성을 향해 질주하게 된다. 박정희 시절, 우리는 조선소도 없는 상황에서 지폐에 인쇄된 거북선을 내세워 선박부터 먼저 수주했고, 조선소 건설과 함께 한쪽에서는 배를 건조하는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진행했다.

지상 최대의 공사라고 불리던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항만공사 과정에서는 초대형 해상 구조물을 국내에서 제작한 다음 바지선으로 중동까지 끌고 가서 설치했다. 길이 350m의 30만t 급 초대형 유조선을 세계에서 최단기간 내에 만들어 세계 최우수 선박에 선정되기도 했다.

우리는 바다를 통해 산업용 원료와 과학기술은 물론 서구의 문화와 문물, 종교와 합리적 가치관을 받아들였다. 이것을 생산으로 연결하기 위해 해안가인 포항(제철), 울산(조선, 자동차, 석유화학) 창원(기계, 전력), 거제(조선), 여수(석유화학), 당진(제철, 자동차) 등에 대규모 임해공업단지를 건설했다.

바다를 통해 수출품을 실어냈고, 바다에서 부(富)를 캐기 위해 조선산업과 해운산업을 조직적으로 육성했다. 그 결과 우리는 불과 60여 년 만에 세계 10위권의 해양력(Sea Power)을 보유한 나라로 발돋움하게 된다. 그것은 한 마디로 ‘해양화 혁명’이었다.

이때부터 대한민국의 상징어는 은둔의 나라, 고요한 아침의 나라가 아니라 수출과 무역, 임해공단과 VLCC(초대형 유조선), 반도체와 ICT, 간척과 해외건설, 남극 세종과학기지, 한류(韓流), 개방과 성장 같은 가치들이 차지하게 된다.

불과 60여 년 만에 대륙문명에서 해양문명으로 극적인 전환에 성공한 이유는 우리 민족의 DNA 속에 ‘해양’이라는 유전인자가 살아 있었다는 점, 대한민국의 체제를 개방과 통상에 두고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시장경제로 방향 설정을 한 이승만이라는 선각자를 만났다는 점에서 찾아야 한다.

대륙문명과 해양문명, 대결의 결과는?

해방 후 강제된 냉전과 분단은 한반도에서 대륙문명과 해양문명의 격렬한 충돌을 야기했다. 해방 3년 후 남과 북에 이념과 체제가 상극인 두 나라가 출범한 이후 대한민국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시장경제, 개방, 무역, 교류의 길로 나가 세계 역사상 가장 짧은 시기에 산업화, 민주화를 이룩했다. 반면에 북한은 조선시대나 다름없는 김 씨 세습왕조의 주민 감시체제 하에서 주체사상을 앞세워 쇄국의 길로 돌진했다. 그 결과 300만 명을 굶겨 죽이고, 적어도 한 세대가 영양실조로 인한 발육부진으로 인종의 열등화, 저열화라는 참극에 직면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1945년 열강들에 의해 강제된 국토 분단은 우리 민족에게는 비극이었지만, 휴전선 이남의 대한민국만이라도 해양문명으로의 전환을 통해 선진화의 길을 열었다는 점에서 축복이었다고 생각한다.

국제무역의 새로운 패러다임인 자유무역협정(FTA) 시대에도 해양의 중요성은 높아질 수밖에 없다. 이유는 해상 물류가 다른 어떤 운송수단보다 쉽고 비용이 훨씬 저렴하기 때문이다. 1톤의 철광석을 육상에서 100㎞ 운반하는 비용과 해상에서 1만 ㎞를 운반하는 비용이 비슷하다. 수송선단의 대형화, 고속화가 빠르게 진행되어 해상 물류 비용은 점점 더 낮아지는 추세다.

아담 스미스는 이미 200여 년 전에 해양무역이 대륙무역보다 비용이 더 싸기 때문에 긴 해안선과 항해 가능한 하천을 많이 보유한 해양국가가 국부 축적에 더 유리하다는 점을 통찰한 바 있다.

한국을 상징하는 한강의 기적, 네 마리의 용, 수출주도형 압축 성장, 세계화(국제화), 민주주의와 인권, 개인의 자유 같은 단어는 해양 문명에 뿌리를 대고 있다. 불과 반세기 전만 해도 지구상에서 가장 늦게 개방과 통상의 길로 들어선 ‘은둔의 나라’가 이승만의 국가 지도자로의 등장과 함께 개방, 통상의 길로 진로를 확고하게 잡았고, 박정희 시절 국가 체질이 해양 지향으로 혁신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 의식 속에는 유교문화를 바탕으로 한 대륙 지향적 사고의 잔영이 질기게 남아 있다. 특히 통일 문제와 관련해서는 더더욱 대륙 지향적 인식이 지배하는 분위기다. 잊을 만하면 들려오는 “철(鐵)의 실크로드”니 “동북아 균형자론”이니 하는 용어라든가, 개혁 개방에 저항하는 반(反)세계화, 반(反)해양화 구호는 대륙 지향적 향수를 표출하는 정치적 수사(修辭)다.

민주화 이후 집권한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정권을 비롯하여 현재의 박근혜 정권에 이르기까지 국가 수뇌부 차원에서 일고 있는 반일(反日) 혹은 반미(反美)감정과 친중(親中) 지향적 외교는 동북아의 전략적 균형 차원에서 불안감을 가중시키고 있다.

대한민국의 선각자들은 세계 최강이자 해양세력의 맹주인 미국과 동맹을 맺어 국가안보의 근본을 튼튼히 하고, 일본-미국으로 이어진 해양세력의 글로벌 네트워크를 통해 세계 10위권의 경제력과 산업력을 쌓았다. 우리 역사는 해양 문명에서의 이탈과 대륙 문명으로의 회귀는 결코 바람직한 결과를 가져오지 못했다는 교훈을 전해주고 있다.

일본의 국제정치학자 구라마에 도리미치(倉前盛通) 교수는 말레이반도, 이베리아반도, 베트남반도, 한반도 등 반도 국가들은 대부분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의 각축으로 인해 반도의 중간부에서 분단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한다. 구라마에 교수는 분단된 반도의 해양세력이 대륙세력의 압력에 맞서 생존하려면 해양세력의 지원을 얻든지, 아니면 스스로의 힘으로 대륙세력에 강렬한 반격을 가할 군비를 보유하든지 둘 중 하나밖에 길이 없다고 말했다.

국제정치에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우방도 없다. 단지 영원한 국가 이익이 존재할 뿐이다. 국가 이익의 최고 우선순위는 국가안보의 확립이다. 굳이 구라마에 교수의 이론을 상기하지 않더라도 대한민국의 지속발전과 안보의 확보를 위해 우리가 취해야 할 길은 대륙세력에 강렬한 반격을 가하는 군비 보유보다는 민족적 감정을 자제하고 미국과의 동맹 강화, 일본과의 관계 정상화가 시급하다. 그것은 곧 한미일 해양 삼각동맹의 강화를 뜻한다.

한국은 이승만 대통령의 전시외교를 통해 해양문명의 맹주 미국과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는 데 성공했다. 과거 동양에 가장 폐쇄적이었던 은둔국가에서 ‘팍스 아메리카나’를 구가하는 미국과 맹방이 됨으로써 서구문명에 완전히 개방되었다. 한국은 이 과정에서 해양 지향의 태평양국가로 탈바꿈했다.

그것은 이승만이 암울했던 한성감옥 시절 집필한 『독립정신』, 미국 유학 시절 박사학위 논문인 『미국의 영향 하의 중립』, 하와이 망명시절 자신이 발간하던 『태평양잡지』에서 구상했던 개방과 통상의 나라 대한민국의 출발이었다. 이승만이 시동을 건 대륙문명에서 해양문명으로의 문명사적 전환은 박정희 시절 그 꽃을 만개하여 오늘의 번영의 토대를 다지게 되었다. 우리는 이승만, 박정희에 의해 토대가 다져진 해양문명을 보다 확대 심화 발전시켜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

김용삼 대기자 dragon0033@pennmik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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