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에서 대한민국을 건국한 이승만 대통령, 한일 수교를 통해 산업화를 이루어낸 박정희 대통령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오늘날 한국의 모습은 샤마니즘적 주체사상에 기초한 전체주의 국가 북한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대한민국을 북한처럼 폐쇄·고립·독재·변태의 세습 왕조로 후진시키는 첫 단계가 반일 감정 조장하기다.

광풍과도 같은 반일(反日)감정이 또 다시 우리 사회를 강타하고 있다. 이번 반일감정의 근원은 문재인 정부다.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직후 박근혜 정부가 일본과 체결한 위안부 합의를 걷어찼다. 2015년 12월 28일 양국 외교장관 회담을 통해 “최종적, 불가역적 해결”이라는 문구가 포함되어 있었던 위안부 합의는 휴지조각이 되었다.

문재인 정부의 반일감정 조장 제2탄은 징용 배상 판결이었다. 이로써 1965년 박정희 정부 시절 체결했던 한일협정의 근본 취지가 도전받게 되었다. 일본 정부는 무역 보복으로 대응하면서 한일 간에는 일촉즉발의 위기감이 감돌고 있다.

한국인들의 반일감정 뿌리를 추적해 올라가면 단재 E. H. 카의 사관(史觀), 신채호의 사관이 발견된다. E. H. 카는 “과거와 현재와의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 현재의 시각에 따라 역사를 재구성하고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랑케의 실증주의적 사관을 비판하고 나선 E. H. 카의 이론은 자기 입맛에 맞는 역사를 써도 된다는 식으로 해석되어 우리 근현대사에 대한 적나라한 왜곡·날조가 자행되기 시작했다.

신채호 사관과 반일감정

신채호는 역사를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으로 정의했다. 그에게 있어 아(我)는 조선민족, 비아(非我)는 조선민족 이외의 민족이 된다. 신채호가 김원봉의 부탁을 받아 쓴 ‘의열단 선언’(조선혁명선언)은 신채호의 극단적인 투쟁사관의 백미다.

신채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과 그의 추종자들이 주창한 외교독립론, 실력양성론, 준비론, 자치론을 격렬하게 성토하면서 “일제와 협력하려는 적(敵)”으로 규정했다. 외교를 통한 독립운동 방략은 칼 한 번, 총 한 방 쏘지 않고 편지질이나 하고, 조선의 독립을 외국의 처분에 맡기고 기다려야 한다는 주장은 매국노 짓이라며 질타했다.

신채호는 ‘의열단 선언’에서 “강도 일본과 타협하려는 자, 강도 정치하에서 기생하려는 주의 가진 자는 다 우리의 적임을 선언”했다. 따라서 이들도 의열단의 암살 대상이 되었다.

신채호와 의열단원들이 원했던 노선은 “외교, 준비 등의 미몽을 버리고 민중직접혁명의 수단을 취함을 선언하노라”였다. 즉 폭력적 암살·파괴·폭동을 줄기차게 일으켜야 한다는 것이다. 신채호는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 무기이며, 부단한 암살·파괴·폭동으로 강도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 생활에 불합리한 일체 제도를 개조하여 이상적인 조선을 건설해야 한다면서 민중직접혁명론을 주장했다.

심지어 그는 일제와의 투쟁에 너무 바빠서 가정을 돌볼 여력이 없게 되자 자기 부인에게 “나는 가정을 돌볼 여력이 없으니 도저히 자식을 키울 형편이 안 되면 고아원에 맡기라”는 편지를 보낼 정도였다.

이승만이 주장한 외교독립론은 신채호 등등의 무장투쟁론과는 근본적으로 세계관이이 달랐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유럽 전체가 파괴와 살육의 소용돌이에 빠져들면서 유럽 열강들이 아시아 문제에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이 되자 일본은 천재일우의 기회를 맞게 된다.

일본은 동맹국인 영국이 독일과 교전상태에 돌입하자 1914년 9월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고 적도 북쪽의 태평양에 흩어져 있던 독일령 섬들을 점령했다. 이어 칭다오(靑島)를 중심으로 산둥(山東)반도의 독일 조차지를 점령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군은 독일 조차지보다 훨씬 북쪽의 중국 영토에 상륙하여 조차지 인접지대의 독일 상사들이 투자했던 모든 철도, 광산, 공장시설들까지 빼앗았다.

이승만 외교독립론과 신채호 투쟁사관 격돌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일본의 판도는 북쪽으로는 바이칼 호 동쪽의 시베리아 지역에서부터 북만주 일대, 중국에서는 산동과 화중(華中)지역 양쯔강(揚子江) 일대, 남쪽으로는 태평양의 남양군도까지 광활한 지역을 장악했다. 그전까지 전 세계를 호령하던 서양 열강들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전승국이나 패전국을 가릴 것 없이 결정적인 타격을 입어 재개 불능 상태에 빠졌다. 러시아에서는 공산 혁명이 일어나 갈등과 대립이 격화되었다. 따라서 동아시아 전역으로 뻗어나가는 일본을 억제하거나 견제할 세력이 없었다.

일본을 견제할 수 있는 유일한 나라는 러일전쟁 당시까지 일본을 지지하고 성원했던 미국이었다. 일본이 시베리아와 중국으로 팽창하면 할수록 중국의 주권을 옹호하고 시장 개방을 주장하는 미국과의 갈등과 마찰이라는 새로운 변수와 부딪치게 되었다.

열강으로 급부상한 일본은 산업력이나 군사력에서 다른 서양 열강들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았다. 제1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 일본은 해군력 확장에 전력을 기울여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미국과 비슷한 수준에 올라 1922년 워싱턴에서 군축회의를 열어 해군력 확장을 제한해야 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이처럼 강력한 일본을 상대로 김원봉의 의열단, 박용만이나 노백린 등이 구상한 수백 명 규모의 빈약한 병력으로 세계 강국 일본을 상대로 무장투쟁을 벌일 경우 얼마나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둘 수 있었을까? 숭고한 이상은 현실이 뒷받침될 때 비로소 빛나는 법인데, 우리의 무장 독립운동은 이상은 원대했으나 현실이 따라주지 않았다.

이승만의 외교독립론은 이러한 현실론에서 출발한다. 일본은 배타적 식민지를 추구하는 나라(대동아공영권)이고, 미국은 모든 나라가 식민지에서 해방되어 자유롭게 개방·통상을 추구하는 나라다. 따라서 언젠가는 일본이 미국을 공격하여 태평양에서 전쟁이 일어날 것이고, 이때 미국이 일본에게 승리하여 모든 식민지를 해방시킬 것이다.

한국은 미국과 일본의 전쟁에서 미국이 승리할 때 해방될 것이니, 지금부터 미국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여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 이런 생각에서 이승만이 윌슨 대통령에게 국제연맹이 완전독립을 전제로 한국을 일본에서 분리하여 위임통치해 줄 것을 청원하는 문서를 제출하자 신채호는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은 없는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라고 강력 성토했다.

신채호는 이승만이 주장한 위임통치론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이해조차 할 수 없었고, 세계사의 흐름을 알 수 있는 지성의 소유자도 아니었다. 이승만은 자신의 신념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일본내막기(Japan Inside Out)』라는 저서를 발표했다. 그 후 세계의 역사는 이승만의 예언대로 진행되었다. 1941년 12월, 일본이 진주한 미 해군기지를 기습 공격하여 태평양전쟁이 발발했고, 미국의 원자폭탄 공격으로 일본이 패망했다. 미국은 일본으로부터 한국을 때어나 3년간 통치한 다음 독립시켰다.

오늘날 한국인들을 사로잡고 있는 반일감정은 신채호처럼 현실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이상론적, 유토피아적 항일투쟁론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이러한 반일감정을 교묘히 부추긴 세력은 북한 김일성 집단이다. 그들은 가짜 항일 무장투쟁의 신화를 조작하여 자신들은 일제와 무력으로 싸운 정의의 집단, 남한은 친일파 매국노들이 외세를 등에 업고 분단정권을 세운 불의의 집단으로 창작해 냈다.

북벌론·소중화(小中華) 사상과 반일감정

역사적 사실과는 전혀 관계없는 허구를 바탕으로 무장투쟁 집단을 선(善), 외교독립 집단을 악(惡)으로 규정하고, 그 조작된 등식에 역사를 끼워 맞추는 식의 왜곡 날조를 감행했다. 북한의 주장을 있는 그대로 이어받은 국내의 좌익·좌파·전체주의 추종세력들은 자신들의 투쟁의 뿌리를 임진왜란·정유재란 당시 왜군에 맞서기 위해 봉기했던 의병, 동학 농민운동, 3·1운동에 이어 일제 하 만주와 중국에서 항일 무장투쟁, 해방 후 미군정이라는 외세에 대항한 좌익들의 단선단정 반대 투쟁, 이승만 독재에 저항한 4·19, 군사독재에 저항한 광주 5·18, 그리고 군사독재의 연장인 박근혜 정부를 쫓아낸 촛불혁명으로 이어져 왔다고 주장한다.

거짓말을 사실로 믿는 것은 그들의 자유다. 하지만 이러한 황당무계한 사관을 중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에까지 집어넣어 가르치고 있는 것이 문제다.

반일감정이 더욱 기승을 부리는 이유는 이처럼 그 뿌리가 넓고 깊기 때문이다. 신채호와 E. H. 카의 사관을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면 효종 시대의 북벌론과 소중화(小中華) 사상이 나타난다.

한국인들은 삼국시대부터 중국에 사대하고 이웃 나라와 교린하는 과정에서 자신들의 중화문명의 후예요, 다른 주변국들은 야만이라는 근거 없는 종족적 우월의식을 배양해 왔다. 조선 초기 여진족은 조선 조정에 조공을 바치고 볼모를 살던 야만족이요, 일본은 우리가 유교와 불교, 문화를 전해준 쪽바리 야만인이라는 의식이 광범위하게 확산되어 머리에 유전인자처럼 박혔다.

1637년 야만인이 세운 청나라에게 삼전도에서 조선 국왕이 치욕스러운 항복을 한 이후 조선은 문명의 시계가 멈춰섰다. 이때부터 만주족이 세운 청은 적대적 타자가 되었고, 조선은 한족이 세운 명나라를 지고지선의 존재로 자리매김한다.

1644년 명나라가 야만족에게 멸망하여 청나라가 출범하자 조선은 군사 1만도 안 되는 가난한 나라가 군사력 300만 명, 세계 최강의 경제력을 자랑하는 청나라를 무력으로 정벌하겠다는 황당무계한 북벌론을 주장한다. 효종과, 노론을 대표하는 성리학자 송시열이 북벌론의 주인공이었다.

북벌론은 실제로 북벌을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북벌을 외치면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잃지 않기 위한 국내용 프로파간다였다.

이러한 북벌론이 부질없는 환상이란 사실을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환성에서 깨어난 조선 지도부는 자신들을 명나라를 계승한 문명국, 즉 소중화의 나라로 자리매김했고, 자신들을 굴복시킨 청나라를 야만국·오랑캐로 적대했다.

조선의 국가 지도부는 겉으로는 청에게 복속했지만 단 한 번도 청을 인정하지 않았다. 조선의 국왕과 세자, 문무백관은 망해서 지구상에서 사라진 명나라 황제에게 200년이 넘도록 제사를 올리면서 청나라에 대한 복수심으로 이를 갈았다.

1895년 일본이 청일전쟁을 일으켜 청을 깨부수고 동아시아의 강자로 등장하자, 청나라에 대한 적대감정은 일본에 대한 적대감으로 치환된다. 조선 조정은 명나라의 역할을 대신할 새로운 상국(上國)으로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내치려 했다. 이 과정에서 러시아를 한반도에 끌어들인 민비가 참혹하게 시해 당하고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주하는 아관파천이 일어난다.

항일 무장투쟁은 새로운 형태의 북벌론

‘적대적 타자’가 일본이 된 이상, 그들을 물리치기 위한 새로운 형태의 ‘북벌론’이 필요했다. 그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하든, 가능하지 않든 그런 것은 전혀 문제 되지 않는다. 오로지 그러한 ‘주장’이 필요할 뿐이었다. 그 결과 일제하에서 만주와 중국에서의 항일 무장투쟁이 등장한다.

1940년대 항일 무장세력으로 꼽히는 광복군은 500여 명, 가장 수가 많았을 때가 682명, 김원봉이 중국 국민당 정부군 산하로 조직한 조선의용대는 300여 명이었다. 광복군은 경비 일체를 지원받는 조건으로 지휘권이 중국 국민당 군대에 소속되었고, 장교들은 거의 대부분을 중국군이 차지했다. 조선의용대도 모든 활동비와 월급, 무기를 중국 국민당 군대로부터 지원받았다.

만주에서 김일성이란 존재가 어떤 항일 무장투쟁을 했는지, 이를 입증할 어떠한 사료도, 근거도 없다. 다만, “우리는 이러저러한 무장투쟁을 했다”는 북한 측의 주장만 존재할 뿐이다.

이들처럼 무장투쟁을 내세운 세력들은 명나라의 후예인 장제스(蔣介石)·마오쩌둥(毛澤東)에게 의탁하여 지원을 받는 것에 대해서는 어떠한 의심도, 자주적 판단도 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통수권이나 지휘권을 넘겨주는 것에 대해서도 어떠한 반발심이나 의구심조차 가지지 않았다. 그들은 소중화의 세계관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한 세계관에 젖어 있었던 것이다.

오랑캐의 나라 청이 멸망하고, ‘중화의 나라’가 복원되었으니 그들에게 의탁하여 새로운 ‘적대적 타자’로 등장한 일본을 상대로 ‘정신적 북벌’을 감행한 것이 바로 신채호와 김원봉, 김일성이 주도했던 항일 무장투쟁의 숨길 수 없는 민낯이다.

이러한 항일 무장투쟁은 오늘날에는 위안부 소녀상 세우기, 강제징용 노동자상 설립, 일본 여행 가지 않기, 엉터리 항일투쟁 영화 제작 등 새로운 형태의 문화전쟁으로 치환되고 있다. 이제 1965년 체결된 한일 수교협정 재검토까지 제기되고 있으니 한일 외교 파탄은 예정되어 있는 셈이다.

우리 역사에서 대한민국을 건국한 이승만 대통령, 한일 수교를 통해 산업화를 이루어낸 박정희 대통령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오늘날 한국의 모습은 샤마니즘적 주체사상에 기초한 전체주의 국가 북한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대한민국을 북한처럼 폐쇄·고립·독재·변태의 세습 왕조로 후진시키는 첫 단계가 반일 감정 조장하기다.

자, 그렇다면 한일 외교관계가 파탄 나면 누가 이득이고 누가 손해인가. 이 정도 대차대조표도 따질 줄 모른다면 그들이야말로 무뇌아, 저능아 아니겠는가.

김용삼 대기자 dragon0033@pennmik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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