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엄군 야만·잔학·범죄성 증거" 발표
조종사들 "사격 안했다" 반박진술
軍운용지침 자체로 사격실시·양민학살 주장 무리수
전투기 폭탄장착·해병 출동대기, 5·18 직접연관 불명

'1980년 5·18 광주 민주화운동 당시 광주 시민들에게 헬기 사격이 가해졌다'는 좌파 진영의 주장을 기정사실화하는 듯한 국방부 5·18특별조사위원회의 발표가 7일 나왔다. 

문재인 정부 초대 검찰총장 후보 중 한 명이었던 이건리 변호사를 위원장으로 광주시와 대한변협 등에서 추천한 인사 등 9명(신원 미공개)으로 구성된 국방부 5·18특조위는 이날 이런 내용의 조사 결과 보고서를 발표했다.

특조위는 구체적인 헬기 기종명과 함께 당시 지휘관 성명까지 밝히면서 헬기 사격 지시가 있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헬기가 수 대 무장 비행했다는 것 외에는 사격의 물리적인 흔적 등 증거나, 이를 지시받거나 이행했다는 조종사 증언은 확보하지 못했다.

특조위는 또 광주에 계엄군을 투입한 육군 외에도 공군 전투기·공격기에 대한 '폭탄 장착 대기', 해군(해병대)에 대한 '출동 준비'를 확인했다면서 광주 진압을 "3군 합동작전"으로 규정했으나, 실제로 광주 지역을 타깃으로 한 군(軍) 동향인지도 증명하지는 못했다.

7일 오전 서울 용산구 국방부에서 이건리 5·18 특별조사위원회 위원장이 각종 서류 자료를 전시하듯 쌓아놓고 조사결과를 발표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7일 오전 서울 용산구 국방부에서 이건리 5·18 특별조사위원회 위원장이 각종 서류 자료를 전시하듯 쌓아놓고 조사결과를 발표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5·18 특조위는 이날 용산구 국방부에서 수많은 서류 자료를 쌓아놓은 채 발표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들은 "5·18 당시 육군은 공격헬기 500MD와 기동헬기 UH-1H를 이용해 광주시민을 향해 사격을 가했다"며 "공군도 수원 제10전투비행단과 사천 제3훈련비행단에서 이례적으로 전투기와 공격기에 MK-82 폭탄을 장착한 채 대기시켰다"고 밝혔다.

그러나 공군의 폭탄 장착 대기가 광주지역 폭격을 목적으로 한 것인지는 자료 부족과 관계자들의 조사 거부로 결론을 못 내렸다고 설명했다. 해군(해병대)도 광주 출동을 목적으로 1980년 5월 18일부터 마산에 1개 대대를 대기시켰다고 특조위는 주장했다.

특조위는 육군이 광주에 출동한 40여 대의 헬기 중 일부 공격헬기 500MD와 기동헬기 UH-1H를 이용해 1980년 5월 21일과 5월 27일 광주시민을 상대로 수 차례 사격을 가했다고 발표했다. 

특조위는 "5월21일부터 계엄사령부는 문서 또는 구두로 수차례에 걸쳐 헬기 사격을 지시했다"면서, "무차별적이고 비인도적인 것이며, 계엄군의 진압 작전의 야만성과 잔학성, 범죄성을 드러내는 증거"라고 감성적 수사를 늘어놓았다.

헬기 사격 지시의 근거는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조사에 따르면 계엄사는 5월 21일 도청 앞에서 집단 발포하고 시 외곽으로 철수한 후, 5월 22일 오전 8시 30분경 전투병과교육사령부(전교사)에 헬기 사격이 포함된 '헬기 작전계획 실시지침'을 하달했다. 

지침에는 '상공을 비행 정찰해 버스나 차량 등으로 이동하면서 습격, 방화, 사격하는 집단은 지상부대 지휘관의 지시에 따라 사격 제압하라' '지상부대 진입 시는 보병을 엄호하기 위해 전차와 헬기의 공중 엄호 등을 계획 실시하라' '시위 사격은 20㎜ 발칸, 실사격은 7.62㎜가 적합' 등이 포함됐다.  군을 '습격·방화 ·사격하는 집단'에 한해 대응 사격하고, 지상부대 엄호에 집중하라는 취지로 해석된다.

계엄사는 헬기 사격을 실시할 경우 3~5회 경고방송을 하고, 경고방송 종료 즉시 '발칸 위협사격 실시로 양민 경고 분리 및 위압감과 공포감 효과를 달성하라'는 지침을 내렸고, '무장한 자나 사격을 하는 자는 사살하고 계속 저항하는 자는 집중 사격하라'는 지시를 하달했다고 한다. 일방적인 양민학살이라는 좌파진영의 주장과는 거리가 있다.

헬기 사격 명령 계통에는 황영시 당시 계엄사령부 부사령관, 김재명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김순현 전투병과교육사령부(전교사) 전투발전부장 등이 포함돼 있다. 

특조위는 "계엄사 부사령관 황영시는 5월 23일경 전교사 부사령관 김기석에게 '미온적인 충정작전으로 광주사태를 수습하려 하지 말라, 전차와 무장헬기를 동원하여 강경하게 충정작전을 실시하라, 전차는 기갑학교에 있는 것을 투입하고, 무장헬기는 UH-1H 10대, 500MD 5대, AH-1J 2대 등을 투입하여 신속히 진압작전을 수행하라'는 취지의 명령을 하는 등 5월 20일부터 5월 26일까지 4회에 걸쳐 김기석에게 같은 내용의 구두 명령을 했다"고 브리핑했다.

이어 "육본 작전참모부장 김재명도 5월 23일 소준열 전교사 사령관, 김기석 부사령관 등에게 '왜 전차와 무장 헬리콥터를 동원하여 빨리 광주사태를 진압하지 않고 그렇게 미온적으로 대처하느냐'고 질책하는 등 사격 명령을 하달했다"고 발표했다.  

아울러 "계엄사 부사령관 황영시 등은 5월 22일경 전교사 전투발전부장 김순현에게 '무장헬기 코브라 2대를 광주에 내려보내니 광주 시내에 있는 조선대학교 뒤쪽의 절개지에 위협 사격을 하라'고 명령했다"며 이어 "김순현은 5월 22일경 103항공대장 이○부에게 '코브라로 광주천을 따라 위협 사격을 하라'고 명령하고 506항공대장 김○근에게 '광주천에 무력시위를 하라'고 명령했다"고 밝혔다.

특조위는 또 "5월22일 103항공대장 이○부 등 조종사 4명은 AH-1J 코브라 헬기 2대에 발칸포를 500발씩 싣고 광주에 출동하였다고 진술하고 있고, 20사단 충정작전 상보 첨부 자료에 의하면 103항공대는 5월 23일 전교사에서 발칸포 1500발을 수령했기 때문에 코브라 헬기에서 발칸포를 사격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주장을 폈다.

특조위는 이와 함께 1985년 6월 안기부(옛 국가안전기획부)가 주도하는 범정부 차원의 기구인 '광주사태진상규명위원회'가 조직되고 1988년 국방부 산하에 '5·11연구위원회'가 만들어지면서 군에 불리한 자료를 은폐·왜곡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특조위는 헬기의 무장 비행 자체를 사격 실시를 확신하는 근거로 삼았다. 이들은 "광주에 출동했던 헬기 조종사 5명은 특조위 조사에서 '헬기에 무장한 상태로 광주 상공에서 비행했다'고 진술했다"면서도 "조종사들은 조사에서 '헬기 사격은 하지 않았다'고 부인했다"고 스스로 밝혔다.

그럼에도 이들은 "5월 21일 헬기 사격과 5월 27일 헬기 사격은 그 의미가 완전히 다르다"며 "5월21일의 헬기 사격은 전남도청 인근과 광주천을 중심으로 이뤄졌는데, 시위 군중을 강제로 해산시키는 한편 전남도청 앞에 있던 공수부대와 새로 광주에 투입된 20사단 병력을 교체하려는 과정에서 비무장 상태의 시민들을 향해 헬기 사격을 가한 것"이라고 단정했다.

또한 "5월21일의 헬기 사격은 무차별적이고 비인도적인 것으로 계엄군의 진압 작전의 야만성과 잔학성, 범죄성을 드러내는 증거"라며 "특히 시민들과 물리적 충돌 과정에서 실시됐던 지상군의 사격과 달리 헬기 사격은 계획적·공세적 성격을 띤다"고 보고서에 적시했다. 

특조위는 "계엄군 측은 지금까지 5월21일 오후 7시30분 자위권 발동이 이뤄지기 이전에는 광주에 무장헬기가 투입되지 않았다고 주장해 왔으나, 실제로는 5월 19일부터 (광주 인근) 31사단에 무장헬기 3대가 대기하고 있었던 사실이 기록을 통해 밝혀졌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당시 40여 대의 헬기가 광주에서 헬기 사격을 비롯한 병력 이동, 보급품 수송 등 많은 시간을 운행했다며 헬기 운행일지 등을 찾고자 했으나 확인에는 실패했다고 밝혔다.

이밖에 특조위는 공군의 전투기·공격기 폭탄 장착 대기와 해군(해병대) 출동 준비를 확인했다면서 "5·18민주화운동 진압은 육군과 공군, 해군(해병대)이 공동의 작전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군사활동을 수행하거나 수행하려 한 3군 합동작전이었음을 사상 처음으로 확인했다"고 덧붙였다. 

한기호 기자 rlghdlfqjs@pennmik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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