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선생', '노털상'... 좌파진영 老시인 K씨 떠올리는 사람 많아
13년 전 좌파 S씨 지칭 논란 있었던 '돼지의 변신'도 재조명

(사진제공=연합뉴스)최영미 시인
(사진제공=연합뉴스)최영미 시인

 

최영미 시인은 지난해 12월 계간 문예지 '황해문화' 겨울호를 통해 좌파진영 내에서 '어른' 대접을 받아온 한 원로(元老) 시인의 상습적인 성추행을 고발하는 시 '괴물'을 발표했다. 최근 여검사들에 대한 검찰 간부의 성희롱 논란 파문으로 이른바 '미투(Me too) 현상'이 나타나고 최 시인의 시가 재조명되면서 문단 내에서 파장이 확산되고 있다.

"En선생 옆에 앉지 말라고 / 문단 초년생인 내게 K시인이 충고했다 / 젊은 여자만 보면 만지거든 // 옆에 앉은 유부녀 편집자를 주무르는 En을 보고, / 내가 소리쳤다 / "이 교활한 늙은이야!""

시 '괴물'은 추행을 저지른 비판 대상을 ‘En선생’으로 칭하고 최영미 시인 자신이 문단 초년생일 당시 당한 성추행 경험부터 다른 문단 유부녀 편집자를 주무르며 성추행하는 장면을 목격하고 들이받은 경험까지 폭로했다.

"100권의 시집을 펴낸 / "En은 수도꼭지야. 틀면 나오거든 / 그런데 그 물은 똥물이지 뭐니" //노털상 후보로 En의 이름이 거론될 때마다 / En이 노털상을 받는 일이 정말 일어난다면, / 이 나라를 떠나야지 / 이런 더러운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아 "

‘100권의 시집을 펴낸’이나 '노벨상 후보'를 뜻하는 은어 '노털상 후보'라는 수식어를 적시했다. 이 내용을 접한 많은 독자들은 'En선생', '노벨상'을 통해 좌파 원로 시인 K씨를 떠올리고 있다.

지금까지 국내 문학계에서 일단 노벨상 후보로 거론된 사람은 이문열 작가와 황석영 작가, K시인 등이다. 이 작가와 황 작가는 시인이 아닌 소설가이므로 시인으로는 가해 당사자로 지목된 K 씨가 유일하다.

괴물
                    최영미

En선생 옆에 앉지 말라고 
문단 초년생인 내게 K시인이 충고했다 
젊은 여자만 보면 만지거든 
  
K의 충고를 깜박 잊고 En선생 옆에 앉았다가   
Me too

동생에게 빌린 실크 정장 상의가 구겨졌다 
  
몇 년 뒤, 어느 출판사 망년회에서 
옆에 앉은 유부녀 편집자를 주무르는 En을 보고, 
내가 소리쳤다 
"이 교활한 늙은이야!" 
감히 삼십년 선배를 들이박고 나는 도망쳤다 
  
En이 내게 맥주잔이라도 던지면 
새로 산 검정색 조끼가 더러워질까봐 
코트자락 휘날리며 마포의 음식점을 나왔는데, 
  
100권의 시집을 펴낸 
"En은 수도꼭지야. 틀면 나오거든 
그런데 그 물은 똥물이지 뭐니" 
(우리끼리 있을 때) 그를 씹은 소설가 박 선생도 
En의 몸집이 커져 괴물이 되자 입을 다물었다 
  
자기들이 먹는 물이 똥물인지도 모르는 
불쌍한 대중들 
  
노털상 후보로 En의 이름이 거론될 때마다 
En이 노털상을 받는 일이 정말 일어난다면, 
이 나라를 떠나야지 
이런 더러운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아 
  
괴물을 키운 뒤에 어떻게 
괴물을 잡아야 하나 

시 '괴물'이 화제가 되면서 최영미 시인의 2005년도 시집 '돼지들에게'에 수록된 '돼지의 변신'도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당시 '돼지의 변신'에서 탐욕스러운 돼지를 표현하고 있는 '돼지'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오랜 투옥 생활 후 모 대학 교수를 지내다 세상을 떠난 좌파 진영의 또다른 '거물' S 씨를 지칭한다는 논란이 적지 않았다. 이에 대해 최 씨는 당시 해당 시가 어떤 실제 인물의 사생활을 겨냥했다는 점은 부인했다.

돼지의 변신
                    최영미

그는 원래 평범한 돼지였다
감방에서 한 이십 년 썩은 뒤에
그는 여우가 되었다

그는 워낙 작고 소심한 돼지였는데
어느 화창한 봄날, 감옥을 나온 뒤
사람들이 그를 높이 쳐다보면서
어떻게 그 긴 겨울을 견디었냐고 우러러보면서
하루가 다르게 키가 커졌다

그는 자신이 실제보다 돋보이는 각도를 알고
카메라를 들이대면 (그 방향으로) 몸을 틀고
머리칼을 쓸어 넘긴다
무슨 말을 하면 학생들이 좋아할까?
어떻게 청중을 감동시킬까?

박수가 터질 시간을 미리 연구하는
머릿속은 온갖 속된 욕망과 계산들로 복잡하지만
카메라 앞에선 우주의 고뇌를 혼자 짊어진 듯 심각해지는

냄새나는 돼지 중의 돼지를
하늘에서 내려온 선비로 모시며

언제까지나 사람들은 그를 찬미하고 또 찬미하리라.
앞으로도 이 나라는 그를 닮은 여우들 차지라는
변치 않을 오래된 역설이... 나는 슬프다.

서울 출생으로 서울대 서양사학과를 졸업한 최영미 시인은 1992년 '창작과 비평'으로 등단했다. 1994년 '서른, 잔치는 끝났다'를 발표해 베스트셀러에 올리며 큰 반향을 일으켰고 2006년에는 제13회 시부문 이수문학상을 수상한 바 있다.

성기웅 기자 skw424@pennmik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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