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거일 칼럼] 인공지능에 대한 철학적 고찰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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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초승인 2019.07.16 09:32:06
  • 최종수정 2019.07.16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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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주의 특질 짙게 띤 정권 출범 후의 시장경제 체제 위축은 확인 가능
그러나 도덕적-문화적 수준 저하는 인식 어렵고 다시 세우기도 어려워
복거일 객원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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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 12월 초순(음력)의 제물포. 급진적 개화파가 일으킨 갑신정변이 ‘3일 천하’로 끝났을 때의 일입니다. 거사 주도 세력은 일본으로 망명하려고 제물포항에서 일본 선박 ‘치도세마루(千歲丸)’에 몰래 탔습니다.

조선 정부의 외교 고문으로 세관 업무를 관장하던 폰 묄렌도르프(Paul Georg von Möllendorff)가 병력을 이끌고 이들을 쫓아왔습니다. 그는 ‘치도세마루’에 타려던 일본 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郞)에게 도피한 조선인들을 하선시키라고 요구했습니다. 국법을 어긴 죄인들을 인도하라는 폰 묄렌도르프의 요구에 밀려, 다케조에는 배 안에 숨은 조선인들에게 배에서 내리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일본인 선장 쓰지 가쓰사부로(辻勝三郞)가 다케조에를 힐난했습니다, “내가 이 배에 조선 개화당 인사들을 태운 것은 공사의 체면을 존중했기 때문이오. 이 분들은 공사의 말을 믿고 모종의 일을 하다가 잘못되어 쫓기는 모양인데, 죽을 줄 뻔히 알면서도 이들더러 내리라는 것은 도대체 무슨 도리이오? 이 배에 탄 이상 모든 것은 선장인 내 책임인데, 인간의 도리로는 도저히 이들을 배에서 내리게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쓰지는 직접 폰 묄렌도르프를 만나 선언했습니다, “당신들이 찾는 사람들은 이 배에 없습니다. 당신들은 이 배를 임의로 수색할 권한이 없습니다. 만일 당신들이 나의 동의 없이 임의로 내 배를 수색한다면, 나는 본국에 통보해서 외교 문제로 삼겠습니다.”

선장의 기세에 눌려, 폰 묄렌도르프는 선박의 수색을 포기하고 돌아섰습니다. 선장의 승낙 없이 일본 선박을 수색해서 조선인들을 끌어내리면, 일본은 틀림 없이 트집을 잡을 터였습니다.

덕분에 갑신정변을 주도했던 김옥균(金玉均), 박영효(朴泳孝), 서광범(徐光範), 서재필(徐載弼), 변수(邊帥), 정난교(鄭蘭敎), 신응희(申應熙), 유혁로(柳赫魯), 그리고 이규완(李圭完)은 가까스로 목숨을 건져 일본으로 도피했습니다. (불행하게도, 그들의 가족들은 모두 화를 입었습니다. 남성 가족들은 모두 처형되었고 여성 가족들은 모두 자결하거나 관비가 되었죠.)

당시 배에 탄 갑신정변의 주역들은 개항기 개화파의 중심 인물들이었습니다. 만일 이들이 배에서 쫓겨나서 조선 정부에 의해 처형되었다면, 조선의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 것입니다. 특히 조선의 근대화는 지지부진해서 조선 인민들의 역량이 줄어들었을 것입니다. 독립신문도, 독립협회도, 만민공동회도 지워진 역사가 대신 나왔겠죠.

이 장면을 글로 쓸 때면, 저는 오금이 저려옵니다. 기개가 있고 국제법에 대한 이해가 깊고 자신이 이끄는 배는 조국의 영토라는 점을 깊이 인식한 일본인 선장 덕분에 조선의 역사는 더 암담한 길로 들어서지 않았습니다.

그 때부터 20년이 지난 1904년 2월 초순(양력)의 제물포. 일본 연합함대 2함대 4전대 사령관 우리유 소토기치(瓜生外吉) 소장은 러시아 방호 순양함 ‘바리야크(Varyag) 호’를 비롯해서 당시 제물포에 머물던 중립국 함정들에 일본과 러시아 사이엔 적대적 관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통보했습니다. 그리고 러시아 함정들이 2월 9일 12시까지 제물포를 떠나지 않으면, 일본 함대가 오후 4시에 러시아 함정들을 공격하겠으며 중립국 함정들은 피해를 입지 않도록 정박지를 옮기라고 요구했습니다.

중립국 함정들의 함장들은 영국 순양함 ‘톨버트(Talbot) 호’에 급히 모여 일본의 일방적 통고에 대한 대응을 협의했습니다. 그들은 제물포가 중립적 항구라는 점을 들어 정박지를 옮기기를 거부하는 답신을 작성했습니다. 그리고 ‘톨버트 호’ 함장 데니스 배글리(Denis Bagly) 대령이 일본 함대 기함 ‘나니와(浪速) 호’에 올라 우리유 소장에게 중립국 함장들의 답신을 전달했죠.

장갑 순양함 1척, 방호 순양함 5척, 통보함 1척 및 어뢰정 8척으로 이루어진 일본 함대는 방호 순양함 1척과 포함 1척뿐인 러시아 함대가 대항하기엔 너무 강대했죠. 그래서 중립국 함장들은 ‘바리야크 호’ 함장 프세볼로트 루드네프(Vsevolod Rudnev) 대령에게 항복하라고 권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 함장들은 항복을 거부하고 길목을 막은 일본 함대와 싸워 외양(外洋)으로 나아가기로 결정했습니다.

1120시 ‘바리야크 호’가 앞서고 ‘코리에츠 호’가 바로 뒤에 서서, 외로운 러시아 함대는 거대한 일본 함대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영국 선원들과 이탈리아 선원들은 러시아 선원들을 함성으로 응원했습니다. 이탈리아 순양함 ‘엘바(Elba) 호’에선 러시아 국가가 연주되었죠.

저는 여기서 러시아 함대의 용감한 선택이나 장렬한 최후를 얘기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중립국 함정들이 일본 함대 사령관의 일방적 요구에 결연히 맞서 중립적 항구의 지위와 거기 따른 권리를 주장했다는 점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한 세기 이전 제물포에서 일어난 이 두 일화들은 국제 질서와 국제법에 관해 많은 것들을 우리에게 일깨워줍니다. 무엇보다도, 배마다 국적이 있고 그래서 배는 그 국가의 영토라는 사실을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당연히, 선장의 허락 없이 배를 수색할 수 없고, 국제법에 보장된 중립적 항구에 머무는 배에 정박지를 옮기라고 강요할 수도 없습니다. 그것은 그 배가 속한 국가의 주권을 침해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선장들은 조국의 주권을 지키기 위해 위협에 맞서 왔습니다.

지난 6월 13일 호르무즈 해협 인근 오만해에서 유조선 두 척이 공격을 받았습니다. 노르웨이 선적 유조선의 선원들은 한국 선박인 ‘현대 두바이 호’가 구조했고 일본 선적 유조선의 선원들은 네덜란드 선박이 구조했습니다.

그러자 이란 ‘군용 선박들’이 두 배를 에워싸고 구조된 선원들을 자기들에게 인계하라고 요구했습니다. 한국 선박의 선장은 ‘현대상선’ 본사로부터 이란의 요구를 거부하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무장한 이란 해군의 위세에 눌린 선장은 “다른 방도가 없다”면서 구조된 선원들을 이란 해군에 넘겨주었습니다. 네덜란드 선박은 끝내 그들의 요구를 거부하고 이동해서 미군에 구조된 선원들을 인계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미군 정보기관의 보고서를 인용한 미국 CBS가 방송한 내용입니다. ‘현대상선’의 발표는 위의 얘기와 다르지만 신빙성이 전혀 없고 한국 외교부는 “관여한 부분이 없다”고 발을 뺐습니다.

한국 국적 선박은 대한민국의 영토입니다. 피격된 유조선의 선원들을 우리 배가 구출했으면, 그 사람들에 대한 책임은 대한민국이 지는 것입니다. 제3국이 해군을 보내서 위협한다고 대한민국의 영토에 있는 사람들을 넘긴 것은 대한민국의 주권을 스스로 허문 행위입니다.

선장이 한국인인지 아닌지 보도에 나오지 않았습니다만, 어느 쪽이든, 대한민국의 주권과 위신은 훼손되었습니다. 그렇게 작은 일들로 조금씩 허물어지는 주권과 위신이 국제적 평판을 낮추고 국력을 줄입니다.

이번 사건엔 실제적 위험도 있었습니다. 구조된 선원들은 23명인데, 국적이 러시아, 필리핀 그리고 조지아였습니다. 만일 이스라엘이나 미국 국적의 선원이 있었다면, 이란이 억류했을 가능성이 크고, 그런 사태가 나오면, 우리 나라는 국제적 망신을 당하고 해결하기 힘든 문제에 대해 책임을 지게 됩니다.

한국 배의 선장은 자신의 책무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거나 그것을 수행할 도덕적 자질이 부족했습니다. 그 일은 예외적 사건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 늘 일어나는 일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안에서 사는 바가지 밖에 나간다고 안 새나?’라는 속담이 떠오릅니다.

하긴 그 선장을 크게 탓할 것도 아닙니다. 현 정권의 외교를 보면, 한숨만 나옵니다. 국제 질서에 대한 기본적 지식이 부족하고 국제법을 존중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자연히, 우리 나라의 국제적 위상이 점점 낮아지고 눈에 잘 뜨이지 않는 국가적 손실이 늘어납니다.

이번에 일본의 ‘경제 보복’을 부른 과정에서 이 점이 괴롭게 드러납니다. 한번 조약을 맺으면, 그것을 지키려고 애써야 합니다. 국내적 상황의 변화를 들어 그것을 지키지 않거나 파기하는 것은 정당화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분명히 해롭습니다. 우리가 힘이 약할 경우엔 특히 그렇습니다.

일본과의 관계가 험악해지자, 일본 제품 불매 운동이 일었습니다. 그런 움직임이 일본의 대응을 부르리라는 생각도, 그렇게 다툴 경우에 우리가 입을 손해는 일본이 입을 손해보다 훨씬 크리라는 생각도, 그렇게 되어 이익을 볼 나라들은 우리에 적대적인 중국이나 북한이리라는 생각도 들지 않는 듯합니다. 더욱 가관인 것은 자신의 정치적 이익만을 고려해서 그런 움직임을 ‘의병 운동’이라고 부채질하는 여당의 모습입니다.

이런 모습을 보노라니, 오래 전에 싱가포르의 이광요(李光耀) 수상이 한 얘기가 떠올랐습니다. 아시아의 ‘네 소룡들’이라 불린 한국, 대만, 싱가포르 및 홍콩이 빠른 경제 성장을 이룬 것을 세계가 찬탄할 때였습니다. 이광요는 ‘경제 발전은 쉽게 이루었지만, 문화에서 서양을 따라잡기는 훨씬 어려워서, 앞으로 50년은 걸릴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때부터 어언 50년이 다 된 지금, 우리 사회는 서양 사회를 많이 따라잡았지만, 도덕과 문화에서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이번에 호르무즈 해협에서 우리 배의 선장과 네덜란드 배의 선장이 무력 앞에서 보인 행태의 차이는 바로 그런 도덕적 및 문화적 수준의 차이였습니다.

그러면 우리 사회의 도덕적 및 문화적 수준을 높일 방책은 무엇일까요? 네덜란드 배의 선장이 보인 태도가 답을 내놓습니다. 네덜란드가 모든 면들에서 뛰어난 사회로 발전한 과정을 살피면, 네덜란드가 일찍부터 교역에 종사해 왔다는 사실이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네덜란드의 수도 암스테르담은 14세기에 북부 독일 도시들의 무역 동맹인 ‘한자 동맹(Hanseatic League)’에 참가해서 꾸준히 발전했습니다. 17세기 초엽에 ‘화란 동인도 회사(Dutch East India Company)’와 ‘화란 서인도 회사(Dutch West India Company)’가 설립되면서, 네덜란드는 세계에서 무역을 가장 활발히 하는 나라로 떠올랐습니다. 덕분에 암스테르담은 유럽의 금융과 교역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비록 1780년대의 영화전쟁(Anglo-Dutch War)에서 져서 영국에 해양 패권을 내주었지만, 여전히 활발하게 교역에 종사했습니다. 일본이 쇄국 정책을 택한 뒤, 네덜란드는 유일하게 교역을 허락 받았습니다. 그 기지인 나가사키(長崎)를 통해서 일본에 유입된 지식들이 난학(蘭學)으로 자라나서 일본의 개화에 결정적 도움을 준 일은 잘 알려졌습니다.

교역에, 특히 국제 무역에 종사하려면, 도덕적으로나 법적으로나 재산권에 대한 인식과 옹호가 필수적입니다. 낯선 사람들이 서로 믿고 거래를 해서 함께 이익을 보려면, 상대의 재산권을 지켜주고 자신의 재산권은 어떤 경우에라도 지키겠다는 태도가 긴요합니다.

특히 교역과 금융의 중심지가 되려면, 외국인들과 외국 법인들을 차별하지 않는 공정한 법 집행이 보장되어야 합니다. 네덜란드 헤이그에 상설중재재판소(Permanent Court of Arbitration)가 있다는 사실이나 런던의 법원들이 일찍부터 공정하고 외국인들을 차별하지 않기로 명성이 높았다는 사실은 이 점을 일깨워줍니다.

재산은 사람의 노동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재산이 자신의 삶에 필요하기 때문에 사람은 노동을 해서 재산을 만듭니다. 자연히, 재산은 한 사람의 권리의 핵심입니다. 재산권이 인권을 포함하는 것은 바로 그런 사정 때문입니다. 재산권은 ‘가진 자들’만을 호호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보호합니다. 사람들이 모두 지닌 것은 목숨이고, 재산권은 바로 목숨을 보호합니다.

2차 대전에서 유럽의 대부분은 나치 독일에 점령되었습니다. 그렇게 독일에 점령된 나라들에선 유대인들이 체포되어 독일과 폴란드의 강제수용소들로 이송되어 처형되었습니다. 당시 그런 나라들 가운데 자국 시민이었던 유대인들을 끝까지 지키려 한 나라가 네덜란드였습니다.

개항 이후 우리 사회가 발전해온 과정을 살피면, 우리 사회의 풍요와 자유는 재산권의 발전과 대체로 비례했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그리고 재산권의 발전은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보장하는 시장경제 체제의 발전과 대체로 비례했습니다.

전체주의의 특질들을 짙게 띤 정권이 들어선 뒤로, 우리 사회의 시장 경제 체제는 점점 위축되었습니다. 그런 사정을 우리는 일상 생활에서 겪고 갖가지 지표들로 확인합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도덕적 및 문화적 수준이 낮아지는 것은 인식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허물어진 도덕적 및 문화적 바탕은 다시 세우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인공지능의 경제적 영향 (중)

시장 경제의 진화

인공지능의 발전은 본질적으로 정보 처리에서의 혁명을 뜻한다. 컴퓨터의 보급과 인터넷의 출현은 정보 비용을 크게 낮추었고 온 세계를 경제적 및 문화적 측면들에서 하나의 체계로 만들었다.

이런 사정은 시장의 경쟁에서 이긴 기업들과 개인들이 이익의 대부분을 차지하는(Winner-take-almost-all) 상황을 낳았다. 인공지능을 이용하는 산업들에서 아주 짧은 기간에 Microsoft, Apple, Google, Amazon, Facebook, Alibaba와 같은 세계적 대기업들이 자라났다는 사실은 이 점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자연히, 이들의 성공이 소득 불균형을 심화시킬 수 있다는 걱정이 나온다.

다행히, ‘시장이 자유롭게 움직여서 최대의 성과를 거두도록 하고, 시장에서 성공한 사람들에게서 거둔 세금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지원한다’는 자유주의적 처방은 효력을 조금도 잃지 않았다. 시장의 움직임이 본질적으로 진화의 과정이므로, 시장의 움직이는 과정에 정부가 개입하는 것은 진화의 과정을 방해한다. 결과가 좋을 리 없다. 시장이 효율적으로 움직인 뒤에 나온 결과가 문제적이라면, 그때 그 문제를 누그러뜨리는 것이 합리적이다.

앞으로 새로운 일자리들의 상당 부분은 오락, 관광, 연예, 운동 경기 및 취미 생황을 아우르는 분야에서 나올 것이다. 산업혁명 이후 인류의 소득이 늘어나서 경제적 여유가 생긴 사회들에선 여가 활용 산업에 점점 많은 자원이 바쳐졌다. 중세엔 음유시인들이나 남사당패들이 대표적 연예인들이었지만, 이제는 발전된 사회들에선 이 분야가 이미 가장 크고 가장 빠르게 성장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 분야는 본질적으로 ‘사람들만의 리그’라는 사실이다. 사람들만이 참가해서 경쟁하고 다른 동물들이나 인공지능은 참가하지 못하는 분야다.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인공지능은 국외자로서 사람들 사이의 경쟁을 돕는 역할만을 한다.

‘알파고 충격’ 이후의 바둑을 살피면, 이 점을 이내 깨닫게 된다. 한국 사회가 인공지능의 발전을 실감한 것은 2016년 3월에 바둑 프로그램 알파고가 이세돌 9단에 이긴 일이었다. 예상과 달리, 알파고가 수월하게 이기자, 온 사회가 큰 충격을 받았고, 직업 기사들은 공황에 빠졌다. 2017년 5월 알파고가 당시 세계 순위 1위인 중국의 커제 9단을 일방적으로 이기자, 사람은 도저히 바둑 프로그램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모든 사람들이 받아들였다.

이런 상황은 바둑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줄어들도록 만들어서 바둑이 쇠퇴하리라는 전망을 낳았다. 비록 자연스러운 전망이었지만, 그것이 빗나갔음이 드러나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사람들은 여전히 바둑을 즐길 뿐 아니라, 인공지능 바둑 프로그램을 교사나 해설자로 이용해서 바둑을 더 잘 즐기는 방안을 찾고 있다. 직업 기사들의 대국에선 한 수마다 형세에 대한 인공지능 프로그램의 판단이 나온다.

현재 한국 기사들이 ‘사범’으로 삼는 인공지능 바둑 프로그램은 Facebook이 개발한 ‘엘프 오픈고(ELF Open Go)’다. 중국 기사들은 중국에서 만들어진 ‘줴이(絶藝)’를 이용한다. 일본 프로그램들 가운데에선 ‘딥젠고(DeepZenGo)’가 가장 기력이 높다.

인공지능 알파고가 사람보다 잘 둔다 해서, 애기가들이 바둑을 마다할 리는 없다. 바둑은 여전히 ‘사람들만의 리그’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사람에게 궁극적으로 흥미로운 것은 사람들이다.

흥미롭게도, 레이 커즈와일은 <특이점에 가깝다>에서 다르게 진단했다.

내가 <지능적 기계들의 시대 (The Age of Intelligent Machines)>에서 한 또 하나의 예측은 체스에서 컴퓨터들이 사람들과 같거나 사람들보다 잘 두게 되면, 우리는 컴퓨터 지능을 보다 높이 평가하거나, 인긴 지능을 보나 낮게 평가하거나, 체스를 보다 낮게 여기거나 할 터인데, 만일 역사가 안내자라면, 이들 가능성들 가운데 마지막이 가장 나올 가능성이 높은 결과이리라는 것이었다. 정말로, 그것이 정확하게 일어난 일이었다…

몇 해 뒤면 보통 개인 컴퓨터들로 작동되는 딥 프리츠(Deep Fritz)와 비슷한 프로그램들이 모든 인간들을 으레 이기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체스에 대한 관심을 정말로 잃게 될 것이다.

인공지능 판경기(board game) 프로그램들이 인간 고수들에게 완벽한 승리를 거둔 뒤, 바둑과 체스가 맞은 상반된 결과는 어떻게 설명되어야 할까?

아마도 가장 큰 이유는 바둑은 국가 대항 경기들의 특질을 짙게 띠었다는 사실이다. 바둑은 중국에서 유래해서 일본과 한국에서 사랑 받은 경기다. 그리고 세 나라는 사이가 좋은 편이 아니어서 매사에서 늘 서로 치열하게 경쟁한다. 따라서 개인 자격으로 참가하는 국제 대회들도 국가간 경기들로 여겨진다. 민족주의가 가장 강렬한 감정을 불러 일으키는 현대에서 이런 상황은 기사들의 경쟁과 경기에 대한 높은 관심을 보장한다.

물론 이것은 바둑에 국한된 얘기가 아니다. 축구가 재미있는 경기이긴 하지만, 월드컵이 그렇게까지 범지구적 관심과 강렬한 열정을 불러 일으키는 것은 그것이 국가들 사이의 명예가 걸린 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팬들의 구단들에 대한 충성심도, 따지고 보면, 부족주의(tribalism)에서 나온다.

이런 사정은 체스가 사람들의 사랑을 다시 받을 방안을 제시하는 듯하다. 체스를 ‘사람들만의 리그’로 만들고, 특히 월드컵처럼 국가 대항전을 도입하고, 인공지능 체스 프로그램들을 해설자로 기용한다면, 체스처럼 멋진 경기가 사람들의 관심을 받지 못할 까닭은 없다.

인간 노후와의 역설

인간은 끊임없이 노후화된다. 처음엔 인간 육신의 힘이 기계들로 대치되었고, 이제는 점점 많은 분야들에서 인간 지능이 인공지능으로 대치된다. 사람들의 일자리들을 인공지능이 대치하는 것은 인간 노후화의 한 부분일 따름이다.

역설적으로, 인간이 노후화되면서, 사람들은 자신들의 육신을 더욱 숭상하게 되었다. 인간의 노후화를 부른 문명의 기계화는 인류에게 지난 세기만 하더라도 상상하기 힘들었던 물질적 풍요를 가져왔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회들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존의 걱정에서 벗어났고 자신의 욕망에 따라 쓸 수 있는 자원을 지니게 되었다.

사람의 많은 욕망들은 본질적으로 생식의 욕망으로 환원된다. 사람은 성선택(sexual selection)을 통해서 진화했다. 이성이 매력적이라고 여긴 개체들이 좋은 배우자를 만나서 자식들을 널리 퍼뜨렸고, 그런 과정을 통해서 이성이 매력적이라고 여긴 특질들을 갖추게 된 것이다. 자연히, 사람의 궁극적 욕망은 이성에게 매력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런 존재의 핵심적 특질은 물론 이성에게 매력적인 육신이다.

이제 사람들은 자신의 몸을 보다 매력적으로 만드는 데 점점 많은 자원을 들인다. 미용과 치장이 지출의 가장 중요한 항목이 되었다. 성적 매력은 생식 능력과 비례하므로, 젊음은 성적 매력의 본질적 요소다. 자연히, 모두 젊은 모습을 오래 지니려고 애쓴다. 운동과 절식으로 젊은 몸매를 유지하려 하고, 염색과 성형 수술로 늙음을 가린다.

사정이 그러하므로, 큰 성적 매력을 지닌 사람들이 영웅들이 된다. 아름다운 얼굴, 날씬하고 튼튼한 몸매, 노래나 운동을 잘 하는 능력과 같은 자질들은 모두 훌륭한 유전자들을 지녔음을 암시하므로, 그런 특질을 지닌 사람들의 성적 매력을 높인다. 그래서 아름다운 얼굴과 몸매를 지닌 사람들과 노래와 운동을 잘 하는 사람들이 돈과 명예를 얻고 모두 그들을 부러워한다.

그런 특질들의 내재적 가치는 그리 크지 않다. 100 미터를 남보다 0.1초 더 빨리 달리는 능력이나 공을 잘 차서 좁은 곳에 넣는 재주에 무슨 대단한 가치가 있겠는가? 그런 일들은 치타나 코끼리 같은 다른 포유류 종들이 훨씬 잘 한다. 그래도 성적 선택을 통해서 진화한 우리 마음은 그것들에 절대적 가치를 둔다. 앞으로 인간의 노후화가 더욱 깊어지면, 육신의 숭상도 따라서 커질 것이다.

인간의 노후화와 그것에 따른 육신의 역설적 숭상은 현대 인류 사회를 다듬어낸 근본적 힘들이다. 그것들은 사람들의 행태부터 산업의 구조까지 인류 사회의 모든 면들에 작용한다. 자연히, 우리 자신을 이해하고 현대 사회를 이해하는 데는 그것들을 살피는 것이 긴요하다.

복거일 객원 칼럼니스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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