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연 낙성대경제연구소 연구위원, 13일 오후 펜 앤드 마이크 스튜디오 찾아 '징용의 모든 것' 주제로 두 시간 강의
"흔히 아는 ‘강제연행’은 6.25전쟁 때나 있었지 일제시대 때는 없었다"
"일제 말 ‘노무동원’은 ‘모집’, ‘관(官)알선’, ‘징용’ 세 가지 유형 있었어".
"총 72만4천 명 조선인 노동자가 본인 의사로 일본으로 건너 가"...‘강제연행’도 없었고 ‘노예노동’도 없었다
"조선인 노동자들은 1년 급여만으로 고향의 논 한두 마지기를 살 수 있었기에 많이들 가려했다"
"한일 정부 모두 역사적 사실에 따라 원칙 바로 세우지 않으면 계속해서 시비문제에 시달릴 것"
"청구권협정을 한국정부가 정권의 유불리에 따라 제멋대로 흔들면 안된다"
"일본도 한반도 내 천문학적 자산들에 대한 권리를 일절 주장하지 못하게 했다"
"반일(反日) 종족주의 어떻게 발본색원할 수 있을지 노력해야../비난할 것도 미화할 것도 없이 있는 그대로를 봐야"

이우연 박사(낙성대경제연구소 연구위원)가 13일 오후 2시부터 정규재 펜 앤드 마이크 주필 겸 대표와 ‘징용의 모든 것’을 주제로 대담을 나눴다. 대담이었지만 사실상 강의 형식으로 진행돼 그간 미처 알려지지 못했던 일본 식민지 시절의 조선인 징용 전반에 대한 역사적 맥락을 조망해볼 수 있었다. 특히 이 박사는 한국의 근현대사학자들이 흔히 놓치는 실증적 자료들을 제시해 “일본인들도 동원됐던 징용은 조선인들에게도 마찬가지로 노예노동이 결코 아니었으며 임금에 따른 정상적 계약관계였다”라는 사실을 입증했다. 끝으로 이 박사는 한국사회가 감정이 불편하더라도 최대한 진실에 가까운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 일본을 상대로 원칙있는 행동에 나설 것을 주문했다.

 

◇"‘징용’은 ‘노무동원’의 3가지 형태 중 하나. '강제연행' 없었고 주로 삼남지방(경상도 및 전라도)에서 갔어"

이 박사는 강제로 사람들을 끌고 갔다는 식의 흔히 아는 ‘강제연행’은 6.25전쟁 때나 있었지 일제시대 때는 없었다고 설명했다. 국가가 인적자원을 동원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징발’로 군인을 뽑는 것이고 둘째는 ‘징용’으로 노동자를 모으는 것이다. 이중에서 일본은 ‘징용’의 방식으로 조선인 노동자들을 모집했을 뿐이며 개인의 의사에 반하도록 강제로 끌고 가서 일을 시킨 적은 없었던 것이다.

우선 ‘징용’은 ‘노무동원’의 한 형태로 일제 말 ‘노무동원’으로 근로하게 된 조선인은 총 72만4천 명이었다. 이들은 각각 ‘모집’, ‘관(官)알선’, ‘징용’ 세 가지 유형에 따라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와 관련 없이 순수하게 직장을 구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간 인원만 170만 명이었다.

이 박사는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총 250만 명의 조선인 노동자들이 이동한 현실을 설명하면서 당시 조선인들에게 일본은 밀항을 해서 갈 정도로 선진문명이자 선진경제의 국가였다고 말했다. 그러나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뒤로 전시체제에 돌입하며 일본인과 조선인을 대상으로 한 ‘노무동원’의 필요성이 생겼다. 쉽게 설명하면 조선인인 일반취업자들이 정작 일본이 전시체제에서 필요로 한 탄광과 군수기업 등에선 일을 안 하려고 하니 ‘모집’부터 시행하게 된 것이다.

‘모집’은 오늘날 취업처럼 자진해서 입사한 것으로 근로자 신분으로 채용된 경우다. 조선인 노동자들을 원하는 일본 기업들이 정해진 절차에 따라 모집한 것이다. 조선총독부가 채용 가능한 인력을 통계를 통해 각 지자체마다 할당해놓으면 기업이 능력껏 인원을 모집하는 방식이었다. 이렇게 고용된 조선인은 20만 명이었다. 50만 명이 필요했으나 1942년까지 40%만 달성됐다고 한다.

‘관(官)알선’은 국가가 개별기업에 맡겨놓으니 ‘모집’이 잘 안된다고 생각해 필요인원을 정한 뒤 직접 숫자를 채운 경우다. 주체가 일반기업의 노무과가 아니라 국가의 행정기관이 된 것이다. 실제로 면사무소가 나서서 조선인 노동자들을 동원한 것으로 대략 33만 명이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한다.

세 번째로 ‘징용’은 가지 않으면 법률적 처벌을 받는 경우다. 대신 ‘징용’은 ‘모집’과 ‘관(官)알선’보다 월급이 훨씬 높았다고 한다. 일본은 1939년 9월 9일부터 일본인 상대로만 ‘징용’을 실시했고 조선인들은 대상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노무동원'은 삼남지방(경상도 및 전라도) 사람들 대부분이 자원해서 일본에 간 것으로 마침 1939년 이후 거듭된 흉년 때문에 더욱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징용’에 대한 오해와 진실...'노예노동'이 아닌 임금체계에 따른 고용 및 근로관계. 1년 급여만으로 논도 살 수 있어 많이들 가려 했어"

이 박사는 영화 ‘군함도’에서 조선인 노동자들이 총칼을 들고 감시하는 일본인들 때문에 도망가지 못하는 장면은 거짓이라고 한다. 실제로 군함도엔 군경이 상주하지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전시체제 당시 ‘노무동원’으로 와서 도망가는 조선인들이 상당히 많았다고 한다.

일본으로 건너오는 것을 알선해주는 조선인 브로커들도 많았는데 조선인들은 브로커의 도움으로 ‘노무동원’에 편승해 일본회사 측이 마련해준 티켓으로 배를 타고 내린 뒤 도망가거나 잠시 일을 해보다가 도망가는 경우도 많았다. 이 박사는 ‘모집’으로 뽑혀 간 사람들이 더 오래 근로했다는 통계가 있긴 하지만 워낙 소수 사례이고 ‘노무동원’ 유형에 따른 근로기간 비교 연구는 아직 미진한 편이라 단언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조선인들을 상대로 한 ‘징용’은 1944년 9월부터 관부연락선(關釜連絡船, 1905년부터 1945년까지 부산항과 시모노세키항 사이를 정기적으로 운항한 여객선) 운행이 중단된 1945년 3월까지 있었다. 바로 이 6개월 동안 조선인 15만 명 정도가 ‘징용’된 것이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징용자는 6개월 정도 일한 뒤에 돌아온 사람들이다.

이 박사는 지금 세워지고 있는 ‘징용자 동상’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마치 그들을 일제라는 악마들에 의해 장기간 노예노동을 한 사람처럼 처참하게 묘사하는 것을 경계했다. 그는 “‘강제연행’도 없었고 ‘노예노동’도 없었다. 일본은 일본인들에 대한 처우와 마찬가지로 조선인 노무동원자들에게도 합당한 임금을 주고 일을 시키는 노동계약관계에 의거했지 주인노예관계를 만들지 않았다”면서 “그동안 임금을 주지 않고 혹사를 시켰다는데 현실적으로 틀린 얘기다. 조선인 노동자들은 1년 급여만으로 고향의 논 한두 마지기를 살 수 있었기에 많이들 가려했다”고 말했다.

이 박사는 추상적인 이념이 개입할 여지없이 엄연한 현실원리로서 작동했던 당시의 자본주의를 설명했다. 그는 “단순한 경제학 논리로 보더라도 많이 생산할수록 이윤은 늘어난다. 그 이윤을 노동자들에게 임금체계에 맞게 나눠주면서 더 많이 생산할 수 있는 구조를 갖추기 위한 순환체계를 만드는 것이다. 이런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예가 어떻게 있겠나. 조선인들은 받은 임금을 가지고 ‘주색잡기’ 할 정도로 자유로웠다. 모은 돈을 탕진한 조선인 노동자들도 적지 않았다”라고 사례를 언급했다.

이어 그는 “일본정부의 걱정 중 하나가 조선인들 모이면 독립운동할까봐 걱정하는 게 아니라 조선의 청장년들이 일본에 와서 내지(일본인)의 여인들과 결혼하는 게 늘어나는 문제였다. 이게 일본의 사회문제였던 거다”라고 생생한 당시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는 정규재 펜앤드마이크 주필이 “조금 전에 조선인 노동자들이 도망을 갔다고 하셨는데 이와 관련한 기록들도 있느냐”고 묻자 “상당히 많은데 번역되지 않은 현실”이라며 “나가사키에서 일하다가 1945년 6월에 도쿄로 도망간 조선인 노동자의 사례가 있다. 그는 일본이 패망한 뒤 원래 몸담았던 회사를 통해 귀국하기 위해 경찰에 자진신고를 했다. 일본경찰의 취조에 그간 자신의 행적을 소상히 밝혔다. 취조서가 남아있다”

 

◇정규재 “미불금이 있었다는 얘긴 뭔가? 대법원 판결도 있었는데 그 내용은 어떤가?”

정규재 펜앤드마이크 주필은 이 박사에게 “일본이 조선인 노동자들에게 지급하지 않은 미불금이 있었다는 얘긴 뭔가?”라고 물었다. 이 박사는 “‘미불금’은 ‘미수금’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징용자들이 종전 이후 미처 정산 받지 못하고 귀국해 남아있게 된 돈”이라고 답했다.

이 박사는 “72만4천명 모두에게 미수금이 남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전체 징용자의 40% 정도에게만 미수금이 있었다”라면서 “60%는 일본에 체류 중인 250만 명의 조선인 노동자들이 일시에 귀국하려고 하니 배가 없어서 순위를 정해야 할 정도로 지체되는 상황에서 정산하고 왔다. 여기서 40%는 정산하지 않고 급하게 각자 수단을 구해서 귀국한 사람들이다”라고 말했다. 액수의 크기에 대해선 “이 금액이 당시 상황에서 꼭 받지 않아도 될 정도의 금액이라 끝까지 정산하지 않고 귀국한 것으로 봐도 될 정도다”라고 설명했다.

이 박사는 지난 한국 대법원 판결 당시 원고 측이었던 징용자들의 발언을 신뢰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임금을 아예 받지 못했거나 미미한 용돈 수준으로만 받고 나머지를 직원기숙사의 사감에게 거의 다 줘버렸다는 원고 측 증언은 당시 법령 및 시행령과 큰 차이가 있는 등 상당한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를 반박하기 위해 실증적 자료들을 제시했다.

조선인들에게 월급을 주고 있다는 기업의 회계장부들은 기업만 관리하는 게 아니라 당국도 늘 주시한 공탁 자료였다. 당시 외지인 노동자들인 조선인 노동자들은 처우가 좋지 않으면 저항을 했다. 직원 급식이 부실하면 단체행동을 할 정도였다. 따라서 노동자들에게 월급을 몇 프로만 주고 90몇 프로를 죄다 뺏었다는 원고 측 주장은 신뢰하기 어렵다는 게 이 박사의 주장이다.

이 박사는 “회계장부를 보면 월급여가 나오고 지급 못한 정산금도 산정돼있다. 원고 측 주장대로 월급을 다 주지 않고 일부를 강제저금시킨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강제저금은 전시체제 당시 인플레이션을 방지하기 위한 국가 정책이었다. 그 방법으로는 첫째가 우체국이 강제로 하는 것으로 귀국 전까지 인출 불가였다. 둘째는 회사가 저금해주는 것으로 소액 수준이었다. 논란이 불거질 것은 대개 후자다“

이 박사는 “대법원이 임금을 안줬다곤 안했지만 강제 노역을 시켰다고 판결문에 기재했다”며 사실상 원고 측 주장에 손을 들어준 사실에 허탈해했다. 그는 또 한국인 1103명이 일인당 1억을 요구하며 한국정부를 상대로 소송한 상황도 설명했다. 이중에 상당수는 이미 노무현 정부 당시 위로금 명목으로 나눠준 돈을 수령한 사람들이라고 한다. 앞서 박정희 정부 당시인 1975년에도 7,700여건의 '미수금'에 대해 보상을 실시한 바 있다.

이 박사는 문재인 정부가 새로운 합의안으로 눈앞에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앞으로도 시비가 불거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한국과 일본 모두 역사적 사실에 의거해 원칙을 바로 세우지 않고 합의나 일삼는다면 차후에 문제를 유보시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경고다. 그는 청구권협정도 한국정부가 정권의 유불리에 따라 제멋대로 흔들면 안된다고 개탄했다. 일례로 그는 "우리는 못 받은 임금이 일부 있지만 일본은 한반도의 6% 면적을 차지하는 농지와 수없이 많은 개인의 부동산들, 그리고 기업 자산들을 두고 갔다. 지금 환율에 맞게 환산하면 비교도 안 되는 거액이다. 청구권협정을 통해 일본인의 한반도 내 자산도 권리를 일절 주장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고 청구권협정이 갖는 역사적 의의를 평가했다.

 

끝으로 이 박사는 실체를 보려하지 않는 한국 지식인들에게 큰 문제가 있다며 “역사를 왜곡하도록 만드는 반일(反日) 종족주의를 어떻게 발본색원할 수 있을지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비난할 것도 미화할 것도 없이 있는 그대로를 최대한 복원해내는 게 역사학자의 소명이라는 듯이 "조선인들이 거칠고 위험한 산업현장에서 일했다. 말까지도 잘 안 통했으니 충돌이 많긴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임금에 기반한 당시 고용 및 근로제도 자체를 왜곡해서 죄악시하는 문제와는 차원이 다르지 않느냐"고 답답해했다. 

그가 공저자로 참여한 최근 신간, <반일 종족주의: 대한민국 위기의 근원>(미래사, 2019) 일독을 권한다.

 

김진기 기자 mybeatles@pennmik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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