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시대 탐험기] 남북한 핵무기 개발에 대한 미국의 이중 잣대
[박정희 시대 탐험기] 남북한 핵무기 개발에 대한 미국의 이중 잣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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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박정희가 미군이 떠나니 나라 좀 지켜보겠다고 절박하게 나섰던 핵무기 개발은 그토록 집요하고 저돌적으로, 온갖 수단방법을 동원하여 좌절시켰다. 그런데 왜 북한 핵폭탄 개발에 대해서는 신기할 정도로 너그럽고 상냥하며, 남의 일처럼 미적지근하게 대응하는 것일까? 대체 그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지난 6월 30일 판문점에서 만난 김정은, 트럼프, 문재인. 세 사람은 한 목소리로 "북핵 폐기"가 아니라 "한반도 비핵화"를 주장하고 나섰다(사진 연합뉴스 제공).
지난 6월 30일 판문점에서 만난 김정은, 트럼프, 문재인. 세 사람은 한 목소리로 "북핵 폐기"가 아니라 "한반도 비핵화"를 주장하고 나섰다(사진 연합뉴스 제공).

김정은과 트럼프, 문재인 3각 북핵 쑈를 구경하고 있노라니 뭐 이따위 저질들이 다 있나 싶어 토가 나올 지경이다. 김정은이야 익히 알고 있는 대로 3대 세습의 미친 군주이니 일단 언급 대상에서 제껴놓자. 아무리 동맹국 대통령이 재선이 급하다 해도 북핵 폐기를 내팽개치고 ‘핵 동결’로 뒤집고, 평양에 무역대표부는 또 뭔가. 북핵이 무슨 어린애 장난인가?

대한민국 대통령 문재인, 이 분은 애초부터 딴 주머니를 차고 있었다. 그는 “평화와 번영”을 외치면서 그 실천적 방법론으로 ‘북핵 폐기’가 아니라 ‘한반도 비핵화’를 줄기차게 주장해 왔다.

문재인은 지난 2018년 4월 27일 김정은과의 판문점 선언을 통해 “남과 북은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국제사회의 지지와 협력을 위해 적극 노력”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9월 19일 평양에서 열린 제3차 남북정상회담 공동선언문에서는 “남과 북은 한반도를 핵무기와 핵위협이 없는 평화의 터전으로 만들어 나가며”라고 합의했다.

문-김만 그런 것이 아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2018년 6월 12일 싱가포르 회담에서  2018년 4월 27일 판문점 선언을 재확인하면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를 위해 노력한다”고 합의했다.

김정은이 외쳐대는 “조선반도 비핵화”, 문재인의 “한반도 비핵화”, 트럼프의 발언을 대조하면 3자가 정확하게 같은 입장이다. 김정은은 핵무기와 운반수단을 확보하고 있다. 수소폭탄으로 의심되는 실험까지 진행한 마당이다. 대한민국은 핵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반도 비핵화라니? 이 사람들 정신상태는 정상이라고 믿어도 되는 것일까?

한 마디로 북한 핵은 문재인의 관심사가 아니다. 그의 정신사적 지향점은 북핵 폐기가 아니라, 북한 핵을 방어하여 한국을 지켜주는 미군의 핵우산을 한반도에서 걷어내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모든 발언에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거의 확신범 수준이다.

‘북핵 폐기’가 아니라 ‘한반도 비핵화’?

문재인이 일개 필부필부(匹夫匹婦)라면 무슨 말인들 못하겠는가. 하지만 그는 현재 대한민국의 국군통수권자이자 대한민국 정부를 대표하는 국가수반이다. 국가수반이 “한반도 비핵화”를 외치고 있으니 그것은 곧 대한민국의 공식 입장이자, 빼도 박도 못하는 국가 정책이 되고 있는 것이 문제의 심각성이다. 여기에 트럼프가 쌍수를 들어 이를 부추기고 있다.

프랑스 시인 앙리 미쇼는 “비누는 때를 바라보지 않는 법이다…. 새가 미치건 말건 나무는 관심 없다”고 썼다. 동맹국 대한민국이 망하든 말든, 5000만 대한민국 국민의 안위와 생사가 어떻게 되든 말든 트럼프의 머릿속에는 재선만 되면 만사 오케이인가?

미국이 한국의 공산화를 막아주었고, 대한민국 건국에 도움을 주었으며, 6·25 남침 때 한국을 구해준 것에 대해서는 지극히 고맙고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미국은 한국을 늘 돕기만 했던 천사 같은 존재만은 아니었다.

1882년 조미우호통상조약 체결 직후 그들은 일본 손을 들어주었다.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자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은 1905년 7월 29일, 미국이 필리핀을 점령하는 대가로 일본이 한반도를 지배하도록 묵인하는 극비 밀약을 맺었다.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루스벨트는 서양 국가들 중 가장 먼저 서울 주재 미국공사관을 폐쇄했다. 월러드 스트레이트는 미국인들이 “침몰하는 배에서 우르르 도망치는 쥐들처럼” 서울에서 도망쳐 나갔다고 기록했다.

박정희는 그의 재임 시절 두 차례 핵 개발을 시도했다. 한 번은 1972년, 두 번째는 1976년이었다. 두 차례 모두 미국의 전방위적인 압력과 강력한 반대로 무산되었다. 박정희가 침략자이자 전쟁광이라서 국제사회의 반대를 무릅쓰고 핵개발에 나섰는가? 아니다. 닉슨 독트린으로 주한미군을 철수시키자 대한민국 생존의 차원에서 핵 개발에 돌입한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을 핵개발로 내몬 것은 미국이다. 닉슨 독트린에 의해 1970년 ‘주한미군 감축 계획’과 ‘5년 후 주한미군 완전 철수’라는 미국 입장이 통보되자 박정희는 김종필에게 “미군이 언제 떠날지 모르는데 원자폭탄을 연구해 보자. 핵무기를 개발하다 미국이 방해하여 못 만들게 되면 언제든지 만들 수 있는 수준의 기술이라도 갖춰놔야 하지 않겠느냐”(김종필 지음·중앙일보 김종필증언록 팀 엮음, 『김종필증언록(1)』, 426쪽)라고 말했다.

1972년 9월 초 대통령 주재 하에 국가안보회의가 열렸다. 이날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김일성의 핵개발 첩보를 보고했다. 긴박한 정세가 이어지자 박 대통령은 핵개발 검토 지시를 내렸다(김광모, 「박정희의 핵개발정책(2)-국가안위 절박상황 결단」, 『경제풍월』, 2017년 2월호).

박 대통령으로부터 핵무기 개발 지시를 받은 오원철 수석은 1972년 9월 8일 대통령에게 「원자 핵(核)연료 개발 계획」(보고번호 제48호)을 보고했다. 원폭 개발은 플루토늄탄으로 가겠다는 의견이었다. 1973년 말 국방과학연구소와 원자력연구소의 특수사업 연구진은 보다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핵폭탄 개발계획서를 작성했다. 소요 예산은 15억~20억 달러, 소요기간은 6~10년이었다.

미국, 한국-프랑스 재처리 시설 도입 계약 파기시켜

박정희 정부는 프랑스와 1974년 10월 19일 프랑스와 원자력협력 협정을 체결했다. 그 결과우리 연구진이 프랑스의 핵폭탄제조연구소에서 핵폭탄 제조기술과 기폭기술을 연구했다. 한국 연구진은 1970년대 중반에 ‘20킬로톤(kt) 이상 급, 중량 1톤 미만’의 원자폭탄 설계를 완성했다. 북한보다 30년 앞서 핵폭탄 개발을 마친 것이다.

1975년 4월 12일 우리 정부는 프랑스와 ‘핵연료 재처리공장 설계 및 기술용역 도입계약’, 캐다나와는 중수로 원자로 도입 계약을 체결했다. 캐나다는 이 거래가 이루어질 경우 핵폭탄 원료인 고순도 플루토늄을 손쉽게 얻을 수 있는 연구용 원자로(NRX) 제공을 약속했다.

이때부터 핵개발을 중지하라는 미국의 강도 높은 압력이 행사되기 시작했다. 1975년 8월 19일, 스나이더 주한 미국대사는 최형섭 장관에게 “재처리시설 도입을 취소하지 않으면 군사원조도 어려울 것”이라고 직설적으로 위협했다. 8월 27일에는 제임스 슐레징거 미 국방장관이 서울로 날아와 박 대통령에게 “미국은 핵확산 금지조약(NPT)을 대단히 중요하게 취급한다”고 강조했다.

미국의 집요한 반대와 압력에도 불구하고 한불(韓佛) 양국은 1975년 11월 13일 11시 30분 프랑스 외무성에서 ‘한·프랑스 간의 원자력 협력 사업에 대한 양해각서’를 교환하기로 했다. 그런데 서명키로 한 예정시간 30분 전에 프랑스는 양해각서 교환 연기를 통보했다.

프랑스 정부는 비밀리에 한국에 재처리 시절 관련 계약 파기를 제의했다. “계약파기에 대한 위약금은 받지 않을 터이니 한국 정부가 먼저 계약을 파기하는 방식을 취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카터 행정부의 국가안보 보좌관이었던 브레진스키는 이 문제와 관련, “카터 대통령이 프랑스의 지스카르 데스탱 대통령과의 사적인 회담을 통해 핵 확산에 따른 문제, 핵 확산 금지협정의 준수 문제를 강력히 이야기하여 프랑스가 핵연료 재처리에 관한 공장을 한국과 파키스탄에 판매하려던 계획을 취소시켰다”(박실, 『박정희 대통령과 미국대사관』, 193쪽)고 밝혔다.

결국 1976년 1월 26일 박정희는 프랑스 정부에 핵연료 재처리시설 도입계약 파기를 통보했다. 또 캐나다에서 도입하려던 ‘연구용 원자로(NRX)’도 미국의 압력으로 포기했다.

박정희는 미국 측의 강력한 압력을 버텨가며 진행해 온 재처리시설 확보의 꿈을 1975년 말에 허무하게 포기했다.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1976년 10월, 미 CIA의 서울 주재 책임자로 3년 간 근무하고 귀국한 도널드 그레그는 미국의 한 대학에서 행한 강연회에서 “한국의 정권이 현재와 같은 정치를 해나간다면 임기 중반쯤에 가서 쿠데타가 일어날 것”이라고 발언했다. 그레그가 한국에서 쿠데타 발생을 예단한 시기는 미국이 한국 정부가 핵개발 계획을 취소하지 않을 경우 “모든 부문에서 한미관계를 끊어 버리겠다”고 최후통첩을 한 시기와 일치한다. 1975년 말에 박정희가 핵개발을 포기하지 않았다면 한국에서는 쿠데타가 일어나 박정희 정권이 종식되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박정희는 1976년 또 다시 극비리에 핵개발을 추진했다. 이번에도 원인제공자는 미국이었다. 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된 지미 카터는 1976년 3월 17일 워싱턴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에서 핵무기를 완전 철수시키고 4~5년 내에 주한 미 지상군을 단계적으로 모두 철수시키겠다”고 선언했다. 닉슨 대통령 시절 한국 주둔 7사단을 철수시킨 데 이어, 마지막 남은 2사단마저 빼내가겠다는 최후통첩이었다.

박정희를 또 다시 핵 개발로 내몬 지미 카터

카터의 주한미군 철수 발언에 대해 글라이스틴 주한 미국대사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카터 대통령의 고집스런 주한미군 철수 노력은 박 대통령의 상처를 소금으로 비벼대는 것과 같았다”고 표현했다(글라이스틴 지음·황정일 옮김, 『알려지지 않은 역사』, 100쪽).

좋다. 미군은 갈 테면 가라. 작심한 박정희는 1976년 말, 김정렴 비서실장과 오원철 수석을 불러 “원자력산업을 종합적으로, 본격적으로 추진하되 떠들썩하게 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박정희가 ‘한국의 핵무기 개발 결사반대’라는 미국의 입장을 잘 알면서도 또 다시 극비리에 핵개발을 재개한 이유는 북한의 핵개발 정보 때문이었다.

당시 북한은 과학원 산하의 원자력연구소, 핵물리연구소, 핵전자연구소, 방사화학연구소에서 극비리에 원자탄 제조 기술 개발에 총력을 기울였다. 이 상태로 개발이 진행되면 1990년대 초반에는 핵무기 보유가 가능할 것으로 관측됐다. 북한은 개량형 스커드 미사일 외에 사정거리 900㎞의 전술 탄도미사일을 개발하고 있었다. 이것이 1990년대 초에 완성되면 핵탄두 운반수단까지 보유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박정희는 계획대로 한국이 1982년에 핵개발을 완성하면 북한과의 핵개발 경쟁에서 10년 정도 앞서갈 수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그리하여 극비리에 핵폭탄 개발을 재개했다. 지난번의 실패를 답습하지 않기 위해 이번엔 외국 기술에 의존하지 않고 재처리 기술과 플루토늄 확보를 위한 연구용 원자로를 국내 기술로 개발을 진행한 것이다.

1976년 12월 1일 핵연료개발공단이 출범했다. 핵연료개발공단은 극비리에 ‘화학처리 대체사업(일명 핵연료 국산화사업)’으로 위장한 재처리 시설 국산화 작업에 돌입했다. 한편에선 ‘기기장치 개발사업’이라는 위장 명칭하에 연구용 원자로 국산화 개발이 시작됐다. 1978년까지 설계 완료, 1979년부터 1981년 사이에 원자로 건설 완성이 예정되어 있었다.

연구용 원자로를 통해 사용 후 핵연료를 얻고, ‘화학처리 대체사업’을 통해 재처리시설을 건설하면 핵폭탄 제조용 고순도 플루토늄 확보가 가능하다. 이 두 가지가 완성되면 핵폭탄 제조는 시간 문제였다. 당시 원자력연구소와 핵연료개발공단은 1981~1982년 사이에 핵무기 보유가 가능할 것으로 판단했다.

한국에서 중수 핵연료봉 공장 시설이 공개되자 미국은 공황 상태에 빠졌다. 워싱턴 당국은 직접 한국의 핵 관련 시설을 살펴보기 위해 1978년 11월 8일, 해럴드 브라운 미 국방부장관이 이끄는 17명의 고위 관료(미 국무부·국방부·국가안전보장회의 소속)들이 한국을 방문했다. 열흘 후에는 멜빈 프라이스 의장을 선두로 한 미 상원 군사위원회 의원 13명이 한국으로 날아왔다.

1979년 농축과 재처리 부분을 제외한 전 부문에서 원자력 산업의 기술적 자립을 이루었고, 같은 해 10월 무렵엔 재처리 설비의 모든 설계가 끝났다. 1979년 신년 초, 박정희는 최측근에게 “핵무기가 1981년 완성되면 그해 국군의 날 여의도 행사를 부활시켜서 사열할 때 원자탄을 세계에 공개하고, 그 자리에서 사퇴 성명을 내고 물러나겠다”고 밝혔다.

1979년 6월 29일 서울을 방문한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 다음날 박정희와 카터는 청와대 회담에서 주한미군 철수, 한국의 인권 문제를 놓고 격렬한 설전을 주고받았다. 그로부터 4개월 후 박정희가 김재규에게 시해되었다(사진 연합뉴스 제공).
1979년 6월 29일 서울을 방문한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 다음날 박정희와 카터는 청와대 회담에서 주한미군 철수, 한국의 인권 문제를 놓고 격렬한 설전을 주고받았다. 그로부터 4개월 후 박정희가 김재규에게 시해되었다(사진 연합뉴스 제공).

김영삼, “박정희 타도” 선언

1979년 9월 10일, 김영삼 신민당 총재는 기자회견을 열고 “박정희 정권 타도에 앞장서겠다, 군은 특정 정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군은 본래의 임무에 충실해야 한다, 국민들이 총궐기하여 항쟁하지 못한다면 우리 모두가 역사의 죄인이 된다”고 선언했다.

9월 16일 김영삼은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카터 미 행정부에 소수독재의 박정희 대통령 정부에 대한 지지 종식을 요구한다. 미국은 근본적으로 독재체제이며 국민들로부터 점점 소외되고 있는 정부와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국민 다수 중에 명백한 선택을 할 시기가 왔다”고 발언했다.

이 발언을 문제 삼아 여당 의원들이 10월 4일 국회에서 김영삼 의원을 제명했다. 다음날 미 국무성은 항의 차원에서 글라이스틴 주한 미국대사를 본국으로 소환했다. 주한 미국대사의 소환은 1958년 이승만 대통령 시절 보안법 파동에 대한 항의 표시로 다울링 대사를 소환한 이래 21년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10월 13일에는 카터 미국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김영삼의 제명을 공개 비난했다.

운명의 10월 26일, 글라이스틴 주한 미국대사는 김영삼을 대사관저로 초청하여 오찬을 함께 했다. 이날 밤, 궁정동 만찬장에서 김재규는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부’를 쏘았다. 박 대통령 시해 사건 이후 미국 정부는 미국이 10·26 사태에 개입하지 않았다는 점을 홍보하는 데 비상한 노력을 기울였다. 서울에서는 대사관 직원들이 주요 신문사를 순방하면서 미 CIA 개입설을 적극 부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는 “박정희 대통령이 미국의 반대를 무릅쓰고 핵개발을 강행하다가 당했다”는 소문이 은밀하게 퍼져나갔다. 당시 미 대사관의 정무관계 직원과 CIA 요원, 주한 미8군 요인들은 한국의 정계와 행정부, 군부와 잦은 접촉을 하고 있었고, 글라이스틴 대사와 부르스터 CIA 한국지부장, 위컴 미8군 사령관은 김재규를 만나 한국의 정치위기 타개 방안에 대해 여러 차례 협의했다. 이 자리에서 CIA의 한 요원이 중앙정보부의 한 고위 간부에게 이른바 ‘집권자 교체론’을 거론했다고 한다.

글라이스틴은 1986년 미 조지타운대학 외교문제연구소에서 발행한 『인권외교』라는 책자에 「한국, 미국 관심의 특별한 대상」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기고했다. 이 논문에서 글라이스틴은 박정희의 죽음과 관련하여 “미국의 총체적인 행동과 발언이 박정희의 몰락에 알지 못하는 사이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해 자문해봐야 한다”고 썼다. 글라이스틴이 언급한 ‘미국의 총체적인 행동과 발언’ 그리고 ‘다른 문제’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자 이제 내용을 정리할 때가 된 것 같다. 미국이 박정희의 핵개발은 그토록 집요하게 온몸을 내던져 막았음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핵개발에 대해서는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온화하고 상냥하게 대응하고 있다. 그 차이는 어떤 논리로 이해해야 할까?

미국 입장에서 볼 때 박정희의 핵개발은 ‘동북아 지역에서 핵확산 저지’라는 미국의 전략 목표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미국은 한국의 핵보유가 동북아의 평화와 안정을 교란하여 미국의 국익을 손상시킬 것이라고 판단했다. 

반면에 박정희는 미국의 대한(對韓) 안보 공약을 신뢰하지 않았다. 미국은 파리에서 엉터리 평화회담을 맺고 베트남에서 미군을 철수하면서 베트남 정부에 막대한 군사원조를 약속했다. 그런데 이를 이행하지 않아 베트남이 공산화되는 모습을 목격했다.

미국의 상업적 이익, 박정희의 안보적 이익과 충돌

미국은 주한미군 7사단을 철수하면서 한국군 현대화 5개년계획을 위해 5년 간 15억 달러의 무상 지원을 약속했다. 하지만 후에 30%가 유상으로 바뀌었고, 시간을 질질 끄는 바람에 물가가 올라 당초 기준으로 하면 10억 달러 정도를 지원받는 효과를 가져왔을 뿐이다. 게다가 전체 액수 중 3분의 1은 한국이 부담했다. 미국의 작동원리와 속성을 꿰뚫어 본 박정희는 자주국방을 위해 ‘핵 개발’이라는 카드를 꺼내든 것이다.

박정희 시절 우리는 미국으로부터 원전 플랜트는 물론, 원전에 들어가는 핵연료(농축우라늄)를 비싼 돈을 주고 수입했다. 당시 한국은 프랑스로부터 재처리시설 도입을 추진 중이었다. 이것을 운영할 경우 한국은 매년 23~28개의 핵폭탄 원료 확보는 물론, 엄청난 외화를 들여 미국에서 도입하는 핵연료의 양을 크게 줄일 수 있게 된다.

한국은 또 캐나다로부터 중수형 원자로를 도입했다. 때문에 핵연료와 원자로에 대한 미국 의존도가 크게 줄어들 가능성이 있었다. 미국의 핵개발 포기 압력의 본질이 핵폭탄 개발이 아니라 ‘경제적 문제’라고 꿰뚫어본 사람은 얼마 전 작고한 오원철 수석이다.

오원철 수석은 한국이 캐나다에서 중수로 원전을 도입하자 미국은 한국의 핵개발에 대한 우려와 함께 자신들의 상업적 이익이 침해되는 것을 크게 불안해했다고 한다. 미국 관련업계는 한국에 원전 및 관련기기 수출을 통해 1000억 달러, 핵연료 수출로 450억 달러의 수익을 예상하고 있었다고 한다.

한국의 핵연료 개발 및 원자로 다변화, 재처리시설 건설은 미국 정부와 미국 기업이 누려야 할 원자력 분야의 ‘독점적 이익’에 크게 방해가 되는 선택이었다. 미국은 한국에 필요한 핵연료와 원전 플랜트를 동맹국인 미국에 종속시키는 것이 급선무였다. 이를 위해 미국은 “한국이 핵폭탄을 제조하려는 목적”임을 요란하게 떠들어 프랑스로부터 재처리시설 도입을 저지시켰고, 한국의 핵무기 개발을 파탄 냈다.

결국 미국이 추구하는 ‘상업적 차원의 국가 이익’과 박정희와 한국이 절실했던 ‘안보적 차원의 국가 이익’이 충돌하는 지점에서 박정희의 핵개발은 파경을 맞았다. 북한이 핵을 개발하든 말든 문재인과 트럼프 대통령은 애오라지 “한반도 비핵화”를 주장한다.

대체 미국은 박정희가 나라 좀 지켜보겠다고 절박하게 나선 핵개발은 그토록 심하게 때려잡아놓고, 북한 핵개발에 대해서는 신기할 정도로 너그럽고 상냥하며, 때로는 유화적일까? 그 이유가 무엇인지 우리는 알고 싶다. 또 한 가지, 박정희 대통령의 죽음에 대해 미국은 좀 더 책임 있는 답변을 내놓기 바란다.

김용삼 대기자 dragon0033@pennmik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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