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 문제와 직결된 동성애 문제를 탐욕과 같은 교회 내 개혁문제로 단순화시키는 것은 무지의 소산일 뿐
북한체제를 돕는 것과 동포들을 위하는 것조차 구분하지 못하는 기독교 패션 좌파
당신들의 교만과 무지, 그리고 철없는 패션 좌파 놀이는 역사가 심판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이정훈 객원 칼럼니스트
이정훈 객원 칼럼니스트

2015년 영국의 가디언은 설교에서 “사탄적 이슬람”이라는 표현을 한 제임스 맥코넬(James McConnell) 목사가 기소된 사건을 보도했다. 자유민주주의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나라에서 목사가 설교한 내용 때문에 기소되었다는 사실이 충격적인가? 이 나라의 거리에서 “성경은 동성애를 죄라고 한다”라고 설교하면 어떻게 될까? 최근 토론토에서 데이빗 린(David Lynn) 목사가 동일한 이유로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그렇다면 무슬림이나 동성애자가 기독교인을 비하하거나 성경을 모욕하면 어떻게 될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일상에서 자주 발생하는 일이지만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렇게 자유민주주의의 모범이 되어왔던 나라들이 혐오와 차별을 제재한다는 명분 하에 법으로 '종교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고 억압하고 있다. 공권력에 의한 자유권 침해를 용납하지 않았던 영국과 캐나다여서 더욱 충격적이다. 패션 좌파들은 세련되고 멋있게 '정치적 올바름(PC)'을 설파한다. 올바른 말만 용납되며 옳지 못한 말을 하는 그 입을 법으로 막아버리겠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올바름의 기준은 누가 정하는가? 좌파적 사유에 비판적인 의견은 모두 올바르지 않은 혐오와 차별의 표현이다. 법치는 자의적 지배를 배제하기 위해 존재함에도 오히려 그들의 법은 자의적 판단이 기준이 된다.

우리의 자유도 언제까지 보장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으나 현재까지는 헌법 상 '종교의 자유'는 자신의 종교를 전도할 수 있는 자유를 보장하고, 이 '자유'에는 타 종교를 비판할 수 있는 자유를 포함한다. 그러나 벨파스트에서는 기독교인들이 자신들의 자유를 빼앗아 갈 악법에 침묵한 대가로 이제 목사가 이슬람을 신학적으로 비판할 수 있는 자유는 없다. 반면에 무슬림이 기독교를 비난할 자유는 법이 보장하는 자유다. 필자처럼 이런 역설을 설명하는 것 자체가 이슬람에 대한 '혐오'라고 비난받을 수도 있다.

필자는 한국에도 영국과 캐나다처럼 법의 이름으로 시민의 자유를 억압하는 악법이 상륙할 것을 우려하고 '종교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수호해야 하는 자유민주주의의 사명을 대중 강연을 통해 알리고 있다. 표현-사상-종교-양심의 자유는 중요한 기본권이자, 자유민주주의의 초석이기 때문이다. 굳이 미국의 독립선언서를 인용하지 않아도 이러한 기본권들이 양도 불가능한 보편적 인권임은 자명하다.

지금 우리 국민들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나라를 경험하면서 스스로 실험실의 쥐가 되기를 자청했는데 실험용 쥐가 되자고 선동한 패션 좌파들은 아직도 자유가 패션쇼에서 선택적으로 착용하는 악세사리 정도라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기독교계에도 '패션 좌파들'이 기승을 부리고 있는데 일부 목사들이 자신들의 설교할 수 있는 자유마저 위협할 수 있는 법을 한국에도 도입하지 못해 안달이다. 개신교 장로인 손봉호 박사는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키고”라는 마태복음을 인용한 주장을 자신의 저서에서 피력하면서, 동성애 관련 차별금지법에 반대하는 기독교인들을 비판했다. 그의 추종자들이 일제히 각자의 교회에서 같은 내용의 메시지를 전하고 신도들을 이러한 논리로 교육하고 있음이 드러나고 있다.

그들의 논리는 이렇다. 세련되지 못한 방법으로 반대하면 사람들이 “꼰대”라고 비판한다. 대세는 이미 동성애 쪽으로 기울었다. 미국의 장로교단 PCUSA도 남과 여 외의 제3의 성을 주장하는 사람에게 목사 안수를 주기로 했다. 패션 좌파 목사들의 주장처럼 이 대세는 한국에 국한되지 않는 세계적 대세다. 선천적 동성애자들을 함부로 손가락질하면 안 된다는 당부도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는다. 동성애가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는 학술적 주장들은 경시된다. 어디서 많이 본 모습이다. 세련되고 패션지향적인 자신들은 무지한 자들과 격이 다르고 포용력이 뛰어나다는 강력한 표현이다. 이러한 발언에 비판이라도 하면 동성애자들을 박해하는 차별옹호자나 혐오가해자가 될 수 있다.

미국에서도 마르크스를 외치는 패션 좌파들은 스타벅스 커피를 들고 명품으로 치장한 모습으로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평등을 외친다. 최근 평등을 외치는 개그맨 헌법 강사가 뇌물성 고액 강연료를 받는 것과 패션은 무관하지 않디. 세련되고 멋있는 좌파는 그냥 패션이다. “다름과 틀림을 구별하자”라는 주장도 그들은 빠뜨리지 않는다.

필자는 이들에게 말한다. 동성애를 전면에 내세운 '정치적 올바름'의 입법운동은 표현의 자유와 종교의 자유를 억압하는 악법이 될 수 있기 때문에 반대한다. '자유'를 보장하자는 말이 동성애자와 무슬림을 혐오하거나 차별하자는 주장이 될 수는 없다. 동성애에 대한 의학적, 보건적, 신학적, 도덕적 비판과 논쟁이 가능해야만 당신들이 중요하다고 하는 '관용과 “민주주의'가 보존된다. 다수결이 법 위에 존재하고 대중이 독재하는 중우정치와 포퓰리즘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무슬림이 기독교를 비판할 수 있듯이 기독교인도 이슬람을 비판할 수 있어야 자유가 보장되는 사회가 될 수 있다.

손봉호 박사는 성경을 인용해서 동성애 관련 차별금지법의 입법 등에 반대하는 것은 하루살이를 걸러내는 일처럼 아주 사소한 일이고, 오히려 교회가 긍휼과 정의를 상실하고 부패하는 것은 낙타를 삼키는 것과 같다는 주장을 강화한다. 차별금지법에 반대하는 기독교인들이 하루살이는 열심히 걸러내면서 낙타는 삼키는 자들이라는 비판이다. 추종자들은 열심히 이 논리를 각 교회에 보급한다.

PC(정치적 올바름)가 강력하게 법의 영역을 장악한 영국과 캐나다에서 소수자의 권리 보장을 앞세워 법체계 전반이 혁명적으로 변동되고, 자유를 침해하는 것에 동의하는 것은 '하루살이'를 걸러내는 정도의 하찮은 문제가 아니다.

기독교계 패션 좌파들의 낭만적 주장처럼, 교회가 탐욕으로 부패하고 각종 성범죄가 범람하는 와중에 왜 '동성애'만 강조해서 문제 삼느냐는 한심한 주장은 무책임의 전형이자 양비론으로 문제의 본질을 흐리는 물타기 전술에 불과하다. 예를 들어 보자. 탐욕스러운 사람들이 많이 사는 동네에서 탐욕이 성경이 말하는 죄라고 설교한다고 해서 체포되는 법이 입법될 가능성이 존재하는가. 그러나 동성애자 거주지역에서 설교했다는 이유만으로 목사를 체포하는 법은 이미 서구의 자유주의 국가들에서 만들어졌고 이제 한국도 그 흐름에서 표현의 자유를 지켜내느냐 잃어버리느냐의 기로에 서 있는 것이다. 교회는 개혁되어야 하지만 동성애는 단지 탐욕이나 부패와 같은 연장선상의 문제가 아니다. 법과 정치, 기본권인 자유의 문제와 직결된 동성애 문제를 탐욕과 같은 교회 내 개혁문제로 단순화시키는 것은 무지의 소산일 뿐이다.

동성애를 앞세운 성정치-성혁명은 헌법을 개정하고 동성혼을 인정함으로써 친족상속법을 포함한 민사법 전반을 개정해야 하는 혁명을 성공시킬 수도 있다. 캘리포니아주에서 문제가 되었던 것처럼 포르노그라피에 준하는 성교육을 우리 어린이들에게 시행할 수도 있다. 하루살이라고 하기에는 덩치가 너무 크다. 괴물 '고질라'에 가깝다.

자유를 억압하는 법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동성애자를 차별한다고 주장하거나 혐오한다고 주장하는 논리는 말 그대로 논리가 아니라 억지다. 오히려 의료적 도움이나 보건적 지원 그리고 상담이나 신앙적 도움을 혐오와 차별이라는 프레임으로 법이 원천봉쇄하기 때문에 동성애자들도 이 악법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

자유를 침해당한 시민이 된다는 것은 하루살이를 걸러내는 정도의 문제가 아니라 낙타를 통째로 삼키는 것만큼 중대한 문제다. 당신들의 패션을 완성해준 로렉스 시계는 사막에서는 쓸모가 없다. 3일간 사막에서 조난당했다면 1리터의 물과 로렉스는 흥정 대상도 될 수 없을 것이다. 자유는 마치 물처럼 그것을 누릴 때는 귀한 줄을 모른다. 그래서 함부로 자유를 제한하고 억압하자는 주장에 찬동하고 선동될 수 있다. 그러나 자유가 사라지고 나면 그것만큼 귀한 것이 없음을 체험한다. 과거 구소련이 붕괴되고 소련의 위성국이었던 동구의 공산 독재체제가 무너졌을 때 지금 우리가 당연히 누리는 표현의 자유를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렸는지 진실을 접하고 경악한 역사가 있지 않은가?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 한 번 빼앗기면 되찾기 위해 어떤 희생을 치러야 하는지 알 수 없는 귀중한 인권의 본질이다. 당신들이 함부로 흥정할 수 있는 멋있는 패션 ‘악세사리’가 아니라는 말이다.

이왕 시작했으니 패션 좌파들에게 쓴 소리를 하나만 더하자. 인간을 학살하는 북한은 다른 것이 아니라 '틀린' 것이다. 패션 좌파들은 늘 이렇게 북한체제를 돕는 것과 동포들을 위하는 것조차 구분하지 못한다. 다름과 틀림을 구분하자면서 무엇이 틀린 것인지 다른 것인지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은 “패션”이라고 할 수도 없다. 그냥 무책임하고 무지한 자해를 일삼는 한심한 사회적 질병일 뿐이다.

인권은 보편적이고 자유는 민주주의의 초석이라는 사실은 역사가 보증하는 진실이다. 패션 좌파들의 주장처럼 동성애가 '다른 것‘이라면, 소수자를 앞세워 다수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은 '틀린 것'이다. 패션 좌파들의 주장처럼 법으로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고 함부로 국가형벌권을 남용하면, '퀴어 이론'의 대가인 주디스 버틀러의 주장처럼, 역설적으로 성소수자들을 사회로부터 격리시키는 부작용만 발생시킬 수 있다.

패션 좌파이자 강남 좌파인 당신들의 위선적인 선호와 기호는 타인의 자유를 박탈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없다. 한 마디로 장식품으로 자유를 흥정할 수 없다는 말이다. 3일 이상 물 없이 조난당한 사막에서 로렉스 시계로 물의 가치를 흥정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원리다. 당신들의 교만과 무지 그리고 철없는 패션 좌파 놀이는 역사가 심판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지금은 홍콩의 시민들처럼 자유를 지키기 위해 행동해야 할 때임이 분명하다.

이정훈 객원 칼럼니스트(울산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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