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일 이사장, "문재인 親北정부, 세 차례나 되는 정상회담서 납북자 문제 의제화 안 해"
"나라가 너무 풍요로워서 좋은 밥-옷에만 관심...전쟁납북자 문제는 역사에서 사라질 위기"
납북자가족협의회, 6·25전쟁 69주년 맞아 "민간인 납북범죄 해결촉구 결의안 국회통과" 궐기대회 열어
심재철 의원 "文정권, 김원봉 띄우고 6·25를 쌍방과실처럼 얘기하는 잘못된 인식 보여"
공식조사결과 따르면 대한민국 고위인사 10만여명 계획적으로 납치돼
평양 대동강 인근에서 1,800~2,000명 남한 민간인 학살당한 美CIA 조사결과도 나와
납북자 자녀들 당시 납북 정황 설명..."아버지, 그 긴 세월 험한 정치상황 속에서 어떻게 사셨어요?"

24일 국회도서관 지하 소회의실에서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 주최로 ‘6·25전쟁 민간인 납북 범죄 해결 촉구 국회통과 궐기대회’가 열렸다. [펜앤드마이크-조준경 기자]
24일 국회도서관 지하 소회의실에서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 주최로 ‘6·25전쟁 민간인 납북 범죄 해결 촉구 국회통과 궐기대회’가 열렸다. [펜앤드마이크-조준경 기자]

6·25전쟁 69주년을 하루 앞둔 24일, 국회도서관 소회의실에서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이하 가족협의회·이사장 이미일) 주최로 ‘6·25전쟁 민간인 납북 범죄 해결 촉구 국회통과 궐기대회’가 열렸다.

현 가족협의회는 1951년에 공식 창립됐던 6·25사변피랍치인사가족회의의 후신으로 2000년 11월에 남은 납북자 가족들이 모여 재결성됐다.

이날 궐기대회는 지난 4월 18일 자유한국당 김재경 의원(진주시을) 대표 발의로 동료 의원 14명(김무성·김영우·유기준·심재철·정양석·이정현·정진석·강석호·조훈현·김정재·권성동·주호영·김정재·원유철·윤상현)이 참여한 ‘북한에 의한 6·25전쟁 남북범죄해결 촉구 결의안’(결의안)이 조속히 국회에서 통과되기를 촉구하기 위해 개최됐다.

가족협의회 이미일 이사장은 “저 자신의 부친과 백부가 납북되셨고 어머니께서는 전쟁 중 창립된 가족회의 임원으로 활동하셨다”라며 “지금까지 저희 피해가족들의 염원은 납북된 가족의 소식을 알고 돌아가셨다면 유해를 송환하고 생존해 계시다면 인권보호와 자유왕래에 이은 송환”이라고 강조했다.

이 이사장은 “그러나 문재인 친북(親北)정부는 세 차례나 되는 정상회담에서 피해가족들의 지속적인 납북자 문제 의제화 요청을 묵살했고, 전쟁납북이라는 단어조차 거론하지 않았다. 전쟁범죄자 김정은과 공조하며 10만 전쟁납북자의 존재를 지웠다”며 “또한 무조건 휴전선의 무장해제를 하고 종전선언만 하면 한반도에 평화가 온다고 국민들을 선전 선동해 왔다”고 비판했다.

이미일 이사장[펜앤드마이크-조준경 기자]
이미일 이사장[펜앤드마이크-조준경 기자]

이어 “언젠가 나라가 부강해지면 국가적 인적 피해인 10만 자국민 납북 문제를 가장 먼저 해결해주리라 믿어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경제발전의 기적을 이룬 대한민국은 친북 좌파세력들이 득세하여, 전쟁납북자 문제는 역사에서 사라질 위기에 놓여 있다”라며 “나라가 너무 풍요로워서 어떻게 하면 맛있는 것을 먹을까, 좋은 옷을 입을까, 권력을 가질까 등 자기 자신만을 위해 국민들이 살고 있다”고 지적했다.

심재철 의원은 축사에서 “정부에서 지금까지 납북자 문제에 별다른 관심을 가져오지 않았다. 문재인 뿐만이 아니라 과거 어느 대통령도 그렇게 지적하지 않았다”라며 “이런 부분들은 앞으로 풀어가야 할 문제”라고 비판했다.

심 의원은 “최근 들어 문재인 정권이 북한에 대한 태도를 보면 고개가 갸웃거려 진다”라며 “최근에 김원봉 얘기를 하고, 마치 6·25를 남북 쌍방과실처럼 얘기를 하고, 그런 잘못된 인식을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심재철 의원 [펜앤드마이크-조준경 기자]
심재철 의원 [펜앤드마이크-조준경 기자]

결의안은 “6·25전쟁 당시 북한 당국에 의해 납치된 10만 납북자와 그 피해 가족들의 고통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으며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우리 정부의 공식적인 기록과 2017년 활동이 종료된 6·25전쟁납북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결과에 따르면 10만여명의 남한 민간인이 납북된 사실이 인정됐다.

북한은 정치인, 공무원, 법조인, 언론인, 종교인, 의료인, 사회단체원, 학자, 사업가, 예술가, 기술자, 학생, 농민 등 대한민국의 고위인사 다수를 6·25전쟁 당시 계획적으로 납치해갔다.

휴전회담 당시 포로교환 분과위원회에서 유엔군 측은 공산군 측에 북한에 억류된 남한 민간인(납북자)도 포로교환에 포함시킬 것을 주장했으나, 공산군 측은 먼저 회담초기 납치한 외국 민간인들을 무조건 석방한다는 협상카드로 유엔군 측을 압박하여 남한 민간인 납북문제 거론을 저지했다.

이에 따른 결과로 1952년 2월 7일 참모장교회의에서 북한에 억류된 한국 민간인 송환문제가 공산군 측의 주장대로 자발적으로 헤어지게 된 “실향사민(displaced civilian)”에 병합됐다. 북한 이후 1954년 3월 1일 실향사민 교환일에 “남한으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남한민간인은 없다”며 납북자를 한 명도 송환하지 않았다.

북한은 우리 국민들을 납치해 갔을 뿐만 아니라 집단 학살을 자행했다.

미국 중앙정보부(CIA)가 1950년 10월 15일에 입수해 본부에 전달한 ‘북한 당국에 체포된 서울거주자명단’과 미국의 한국전쟁범죄조사단 기록(KWC #141)에 따르면, 1950년 10월 8일에서 10일 사이 대동강 인근 기암리 북서쪽 일대에서 약1800명에서 2000명의 남한 민간인이 학살당한 정황이 담겨 있다.

결의안은 ▲2014년 유엔 COI보고서와 한국정부의 조사결과 북한 정권은 6·25전쟁 남침 직후부터 10만여명의 남한 민간인들을 불법 납치하고, 납치 이후 계속적 억류, 학살, 고문 등 일련의 범죄를 저지른 것을 시인할 것 ▲북한 정권은 오랜 세월 가족을 잃고 소식이 두절됨으로 해결의 실마리도 주어지지 않은 채 고통받아온 전쟁납북 피해자들에게 진심으로 사죄할 것 ▲한반도의 참된 종전체제 확립과 평화정착의 중요 선결요건 중 하나는 6·25전쟁 납북자 전원 생사확인과 생존한 납북자 송환 및 유해를 송환할 것 ▲한국 정부는 이와 같은 전시납북자 문제해결을 위한 정책을 이산가족문제와 분리하여 별도로 수립하고 시행한 결과를 매년 국회에 보고할 것 ▲한국 정부가 북한 정권이 자국민에게 위해를 가한 모든 납북 관련 가해 행위에 대하여 국제적으로 알리고, 북한 정권으로 하여금 법적 책임을 지도록 할 것 ▲미국 의회에서도 북한의 비핵화 문제 뿐 아니라 북한의 명백한 범죄인 ‘전쟁납북자 문제해결 촉구 결의안’을 상정 채택하도록 한미양국이 협력할 것 등을 촉구하는 내용을 담았다.

납북자 딸 김지혜씨 [펜앤드마이크-조준경 기자]
납북자 딸 김지혜씨 [펜앤드마이크-조준경 기자]

이날 결의대회에는 납북자 자녀들도 나와 납북 당시의 상황을 증언하는 시간도 가졌다.

납북된 김점석 변호사의 딸 김지혜씨는 검사로 재직한 적이 있는 아버지가 서울의 집 앞에서 '잠깐 조사만 받으면 된다'는 얘기를 듣고 동네 청년과 인민군에 의해 끌려간 뒤 영원히 돌아오지 못했다고 밝혔다.

김 변호사는 1940년부터 부산·평양·군산·청진에서 검사로 1945년 해방 이후에는 서울에서 검사로 재직하다 50년 당시에는 변호사로 근무했다. 그는 46년 고하 송진우 암살사건 담당검사를 맡았고 대한 변호사회 총무, 서울 변호사회 총무를 역임했다.

김 변호사는 북한의 6·25남침 다음날인 1950년 6월 26일, 전황이 궁금해 법원에 들렸다. 이후 현직에 있던 친구 두 명과 지프차로 부산으로 가던 중 남영동 대로변에 있는 집에 가서 가족들과 인사를 했다. 김 변호사는 병약한 아내와 어린 세 딸(당시 만8세, 5세, 2세)를 두고 차마 떠날 수가 없다며 서울에 남게 됐다.

김 변호사는 7월 8일까지 친척 집에 피신해 있다가 가족이 걱정돼 다시 집을 찾았다. 그러나 당시 집 앞을 지키고 있던 동네 청년과 인민군이 ‘잠깐 조사만 받으면 된다’라며 용산경찰서로 김 변호사를 끌고 갔다. 김 변호사는 이후 가족과의 일체의 면회도 허락받지 못했다.

주변인 등의 증언에 따르면 김 변호사는 용산경찰서, 정치보위부, 서대문 형무소, 평양, 만포로 끌려가 결국 대한민국으로 생환하지 못했다.

김씨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아버지 그 긴 세월 그 험한 정치상황 속에서 어떻게 사셨어요? 평생 힘들게 사셨던 어머니는 2015년에 돌아가셨습니다”라며 “통일이 오면 제일 먼저 북으로 가겠습니다”라고 증언을 끝마쳤다.

납북자 아들 최창림씨 [펜앤드마이크-조준경 기자]
납북자 아들 최창림씨 [펜앤드마이크-조준경 기자]

전시 납북자 최광욱(崔光昱)씨의 장남 최장림씨의 증언도 이어졌다.

최씨의 친부는 황해도에서 과수원, 논, 밭, 임야, 건물을 소유하고 있던 지역 유지였다. 해방 전에는 경성매일신문 지국을 운영했고, 건축업에도 종사했다. 그러나 북한에 공산정권이 들어서자 추방명령이 내려왔고 최씨의 가족은 해주 근방의 작은 초가집을 배정받았다.

친부는 압류되지 않은 동산(벼, 가축 등)을 친척을 통해 처분했는데, 그 일로 몰수한 국가재산을 매각했다는 이유로 사복의 내무서원이 친부를 체포하기 위해 최씨의 집에 와 출타 중인 친부를 기다렸다.

최씨의 어머니는 보따리를 하나 주면서 “사리원역에 가서 해주에서 서사리원역까지 운행하는 협궤(狹軌)열차에서 내리시는 아버님을 만나거든 그 길로 다시 해주로 가서 월남하시라고 전하라”고 했다. 최씨와 친부는 안내원을 통해 38선을 넘어 월남했고, 어머니와 동생들도 얼마 후 월남해 서울 가회동에 자리를 잡고 살게 됐다.

그러나 6·25전쟁이 터지고 서울이 북한군에 의해 함락된 후 최씨의 친부는 정치보위부에 연행됐다. 친부는 조사 후 풀려나왔고 최씨의 어머니는 “신변의 위험이 닥쳤으니 피하시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친부는 “어린 6남매를 두고 내가 어디로 피신한단 말이요”라며 “남한에 연고도 없고 고향사람 외에는 아는 이가 없으니 그냥 다락방에 숨어있겠다”고 답했다.

1950년 9월 15일 UN군과 국군이 인천 상륙 후, 21일 저녁에 반장이 찾아와 “큰 남자 나오시오”하고 말해 최씨는 “내가 우리 집에 큰 남자요”하고 집을 나섰다. 최씨는 서울에 막다른 골목길이 많아 북한군 패잔병이 후퇴할 때 골목길로 가지 말고 삼청공원으로 유도하라는 지시를 받고 오후 2시까지 대기하다가 집으로 돌아갔다. 최씨가 집에 돌아왔을 때 친부는 이미 북한군 3명에 의해 끌려간 뒤였다.

최씨는 서울 수복 후 삼청공원, 화신백화점 지하, 종로경찰서 사택 지하실 등 많은 반공인사가 학살당한 장소를 찾아다녔으나 친부를 찾을 수 없었다.

최씨는 “어머님은 아버님이 쓰시던 놋그릇에 매일 아침밥을 담아 아랫목에 묻고 식탁포로 덮어놓고 밤에는 대문을 열어놓으시며 그 집에서 홀로 지내시다가 몇 년 전 94세로 세상을 떠나셨다”라며 “아버님은 광복 후 공산치하에서 32개월, 월남 후 대한민국에서 28개월을 사셨다. 자수성가하시고 열심히 사셨던 아버지! 자손들이 건실하게 성장하는 것도 보지 못하시고, 정치범 수용소나 아오지 탄광에서 모진 고생을 하셨을 것이라 생각되니 비통한 마음을 어찌 말로 표현하겠나”라고 말해다.

그러면서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으나 사람이 사람대접 받고 인권이 보장되고, 직업, 거주, 사상, 양심의 속박을 받지 않는 그런 통일이 이루어지는 날, 자유경제가 실현되는 그런 날을 소망한다”고 덧붙였다.

가족협의회는 25일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전쟁 납북 범죄 규탄대회를 연다. 

조준경 기자 calebcao@pennmik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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