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는 공기처럼 있는지도 모르고 사는 것
정부의 역할은 국민 생명과 재산 지키는 것
자유주의 시장 체제만이 사람들 품위있게 만들어

문근찬 숭실사이버대학교 교수
문근찬 숭실사이버대학교 교수

요즘 '자유'라는 단어가 새삼 뉴스거리가 되고 있다. 개헌 논의에서 이 단어를 빼려 하고 있다는 소리도 들린다.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것은 말 안 해도 당연하므로 이 단어를 빼고자 하는 것인지, 아니면 뭔가 다른 저의가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 탓에 자유나 자유주의 같은 단어에 새삼 관심이 간다. 공기가 있는지도 모르고 살다가 공해가 심해져서 숨쉬기 어려워지니 공기의 소중함을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것인데, 자유란 단어가 다 아는 것 같지만 막상 정리해 보려니 그리 쉬운 주제도 아니다.

자유의 의미를 생각해 보기 위해서 자유의 종류를 열거해볼 수도 있지만, 그보다 더 빠른 방법은 그 반대쪽의 이미지를 떠올려 보는 것이다. 아래에 최근에 읽은 사례를 소개한다.

"2017년 11월 18일 저녁 6시경, 북경 남쪽 대흥구(大興區)의 한 2층 건물에서 치솟은 불길이 19명의 귀중한 생명을 앗아갔다. 북경의 번화한 도심에서 약 18킬로 정도 떨어진 사고현장은 가건물, 아파트, 봉제가게, 의류공장이 어지럽게 섞여 있는 교외의 빈촌이었다. 그곳에 살고 있는 17만5천명의 인구 중에서 약 15만 명(85.7%)이 농촌에서 일자리를 찾아 몰려 온 "외래(外來)" 노동자들이었다. 2011년에도 화재가 발생했던 장소라 이미 화재위험지구로 지정되어 있었지만, 17만5천 명의 저임금 노동자들이 모여사는 보금자리로서 최소 기능은 하고 있었다. 화재가 재발하자 중국정부는 일주일만에 군사작전 치르듯 철거를 결정하곤, 그 지역을 싸그리 갈아엎어 버렸다. 철거 몇 시간 전에 급작스럽게 축출 통보를 받은 주민들도 있었다. 그렇게 17만5천의 노동자들은 엄동설한에 둥지를 잃고 말았다. “ (출처 : 펜앤드마이크2018-01-08 기획연재 칼럼, 송재윤)

사람들은 흔히 중국을 떠올리면 고도성장으로 곧 세계적인 선진국이 될 것이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다. 그러나 위 사례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이런 이미지는 중국이라는 빙산의 맨 위에 떠 있는 ‘선택 받은 사람’들에 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윗글에는 농촌에 사는 국민은 사는 곳을 선택할 자유가 없어서 당국의 허가 없이 몰래 대도시에 몰려와 ‘외래’ 노동자로 어렵게 사는 모습이 보인다. 어렵사리 대도시 변두리에 둥지를 틀고 살다가, 그나마 화재 사고를 기회 삼아 정부 당국이 즉각 철거를 통보하고 엄동설한에 거리에 나앉은 최근의 실제 상황이다. 전체주의 국가에서는 이런 일이 일상적으로 일어나며, 한 걸음 더 나간다면 역사적인 대 학살, 홀로코스트로 발전한다. 전체주의 국가에서 개인은 전체의 도도한 흐름에서 볼 때는 작은 부속품 취급을 받는다. 반면에 자유주의 국가에서는 사람의 생명과 행복권을 위협하는 일, 개인의 재산을 몰수하는 일은 극도로 삼가고 조심한다.

자유주의 전통은 오랜 역사를 갖고 그리스, 로마의 철학자를 들먹여야 할 정도로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오늘날 생각하는 자유주의의 이미지는 서구가 근대화할 즈음, 그중에서도 영국적 전통의 자유주의가 그 뿌리라고 할 수 있다. 각 개인은 신의 본성이 표현된 자연권을 타고 났는데 이것이 바로 존 로크가 말한 생명권, 자유권, 행복 추구권 같은 것이다. 자연권 보호를 공정하게 하는 역할이 필요해서 정부를 만든 것이다. 이런 이념에 따라 최초로 세워진 나라가 미국이며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로크의 뜻을 헌법에 명시했다. 또 조금 늦었지만 1945년 제헌헌법에 이런 이념을 본받아 세운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따라서 자유주의 국가로서 대한민국 정부의 역할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일이 가장 기본이므로, 국민의 자유를 통째로 위협하는 외세로부터 국가안보를 지키는 일이 국가의 최우선 과제가 된다.

그런데 한 걸음 더 분석해 보면 자유주의 전통은 영국에서 생겨나 미국에서 꽃핀 시장경제와 동전의 양면으로 시장 자본주의가 곧 자유주의임을 알 수 있다. 서구의 역사에서 르네상스 후 근대화기에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났는데, 이 과정에서 사람들은 분업과 협동을 통해서 자원의 희소성을 완화할 수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 분업과 협력 하에서 개인은 근면하고 혁신적으로 된다. 분업과 협력을 통해 사람들은 자신의 지적 결함을 극복하고, 더 생산적이 되며, 양질의 재화를 더 많이 생산할 수 있게 되고, 결과적으로 더 많이 누리게 되었다. 하지만 데이비드 흄이 말했듯이 사람이란 자원이 풍요로워진다고 욕심이 없어지는 존재는 아니다. 물질적으로는 풍부해졌지만, 인간의 탐욕을 잘 조절하지 못한다면 재화를 둘러싼 갈등으로 사회를 분업과 협력으로 묶어주는 구심력이 깨어질 수 있다. 어쩌면 이 국면에서 자유주의 세계관과 전체주의 세계관이 갈리는 것이 아닌가 싶다.

하나의 세계관은, 이런 재화를 둘러싼 투쟁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므로 오직 강력한 정부의 권위로 질서를 잡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발전했다. 모든 생산에 대한 계획, 생산수단의 소유도 정부가 계획해야 한다. 전체주의 계획경제가 바로 이런 전통을 계승했다. 흄이나 애덤 스미스가 보았던 또 하나의 세계관은, 사람은 신의 본성을 타고 난 존재로서 어떻게 행동해야 서로 평화롭게 사회를 발전시켜 나갈 수 있는지의 방법을 깨달을 수 있다고 보는 입장이다. 이것을 가능하게 해 주는 방법이 바로 ‘시장’이다. 시장은 장구한 세월 속에서 어떤 행동이 보상을 받고 어떤 행동이 제재를 받는지를 사람들이 보면서 자연스럽게 진화한 하느님의 선물이다. 시장 체제는 단지 재화가 거래되는 장소를 의미할 뿐 아니라, 분업과 협동, 타인의 소유물을 존중하는 태도, 약속이행 등 시장이 평화롭게 유지, 성장할 수 있는 정의의 규칙까지를 포함하는 말이다. 따라서 자유주의 전통의 시장 체제야말로 사람들이 품위 있게 행동하게 하는 사회, 자유주의 세계 그 자체이다.

자유주의 전통의 세계관을 갖는 사람들은 사람이 갖는 이성의 능력을 과신하지 않는다. 그들은 책상머리에 앉아서 이리저리 자원을 배치하겠다는 생각이 얼마나 낭비적이고 터무니없는 것인지 안다. 그런 계획을 억지스럽게 실천에 옮기려면 소유권을 얼마나 짓밟을 것인지, 그 과정에서 빈부의 차이를 미움의 에너지로 써서 평화로운 분업, 협동체제를 얼마나 심하게 훼손할 것인지는 굳이 이론적으로 설명을 안 하더라도 마오쩌둥의 문화혁명, 스탈린의 집단농장, 캄보디아의 킬링필드 등 역사 속 사례들 통해서 실사구시적으로 그냥 안다.

역사에 의해서 다 검증된 것임에도 뒤늦게 한국에서 이 두 세계관 간에 힘겨루기가 시작된 것 같은 징조가 일고 있다. 나라의 근간을 정의하는 헌법에서 ‘자유’라는 단어를 빼겠다는 발상은 자유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을 뭔가 다른 정체성을 갖는 국가로 바꾸겠다는 속마음을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자유주의 국가로서 한국의 정체성이란 대체로 개인의 자유 즉 사유재산 제도, 시장, 인권을 존중하고, 법치 즉 법 앞에 누구나 평등해야지 특정 집단을 위한 법을 만들거나 집행해서는 안 되며, 언론의 자유를 통해 사람들이 선동하여 전체주의적으로 변하도록 하지 않아야 하며, 다수의 독재를 피할 수 있는 제도로서 대의제와 삼권 분립을 존중해야 하고, 그리고 전체주의 세력으로부터 나라를 지키는 안보를 위해 자유주의 국가와의 집단 방위체제 동맹을 지키는 일 등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소중한 국가의 정체성을 폄훼하는 주장들에 속지 말아야 한다. 민족을 내세우는 사람은 민족이 자유보다 소중하다고 억지를 부리며 대한민국이라는 우리의 자랑스러운 국가 위에 관념적인 가치를 덫 씌우려는 것이다. 시장의 오작동을 말하는 사람은 시장이라는 것이 오랜 세월에 걸쳐 진화적으로 살아남은 전통임을 모르고 자신의 짧은 머리를 써서 사회를 이리저리 재단하고 싶다는 의사를 드러내는 것일 뿐이다. 안보의 실천은 없으면서 평화를 외치는 사람은 전체주의 세력에 나라가 점령당해도 큰 차이를 느끼지 않는다는 의중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들 모두 자유의 소중함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문근찬 숭실사이버대학교 경영학과 교수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저작권자 © 펜앤드마이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