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찬식 칼럼] 오키나와 흥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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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초승인 2019.06.22 18:46:15
  • 최종수정 2019.06.24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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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요충으로 150년 번영 누리다가 3000명 日병력에 순식간 소멸
‘수례지방’ ‘동방예의지국’ 등 한국과 같은 역사적 행로의 비극 공유 
홍찬식 객원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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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서남단 오키나와를 처음 방문한 것은 1994년 문화부기자 시절이었다. 섬유예술 교류 행사를 취재하러 갔는데 오키나와 작가들이 한국과 일본 교토의 미술가들을 초청해 마련한 전시회였다. 섬유예술에서 오키나와는 ‘빙가다’라는 염색 기법으로 유명한 곳이고, 교토는 “입다가 망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일본에서 직물이 발전한 곳이다. 오키나와 측은 특이하게도 ‘한일 교류전’ 대신에 ‘오키나와 한국 일본 교류전’이라는 명칭을 썼다.

우리 미술가들을 대하는 오키나와 측의 태도에서는 진심과 정성이 느껴졌다. 처음에는 다소 의아하기도 했던 그들의 마음이 헤아려지기 시작한 것은 오키나와를 떠날 때 쯤 되어서였다. 그들은 한국을 같은 역사적 아픔을 간직한 나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굳이 ‘오키나와 한국 일본 교류전’이라는 명칭을 붙인 것도 오키나와의 정체성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이국적인 곳을 찾아갔다는 기분에 멋모르고 들떠 있던 내 스스로가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당시 우리 문화계나 학계에서는 오키나와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별다른 연구가 없던 상태였다. 오키나와에 다녀온 뒤 1997년 연세대 설성경 교수가 “오키나와의 민중 영웅으로 홍가와라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홍길동”이라고 주장해 눈길을 끌었다. 홍길동이 조선을 떠나 정착한 율도국이 오키나와라는 얘기였다. 또한 오키나와에서 고려시대 양식의 기와가 출토되었다거나, 조선 사신들이 묵었던 조선관이 오키나와에 있었다는 소식 정도가 간간히 들려왔다.

그러나 한국과 오키나와의 관계는 우리가 쉽게 잊어서는 안 되는 동질성과 연관성을 갖고 있다. 오키나와의 옛 이름인 류큐(琉球) 왕국이 고려 조선과 빈번한 교류를 해왔던 것은 조선왕조실록 등 문헌에 나와 있는 사실이지만 개인적으로 좀 더 관심 있는 것은 두 나라의 국제정치적 유사성이다.

중국의 명나라가 직접 사신을 보내 책봉 의식을 거행했던 나라는 여러 주변국 가운데 조선과 류큐 두 나라뿐이었다. ‘특별대우’의 배경은 위치의 중요성 때문이다. 오키나와는 동중국해와 남중국해를 연결하는 중간 지점에 있다. 참으로 절묘한 자리다. 위쪽으로 일본을, 아래쪽으로 동남아시아를 이어줄 수 있는 오키나와와 친밀한 관계를 맺어두는 게 중국으로선 필요했다. 오늘날에도 미국이 중국의 팽창을 견제하기 위한 군사기지로서 오키나와를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이유다.

이젠 사라진 나라가 되어버린 류큐 왕국의 번영은 바로 지리적 이점에서 비롯됐다. 오키나와는 14세기 말부터 16세기 중반에 걸쳐 150년간의 ‘대(大)교역 시대’를 누린다. 이 시기는 세계적으로 중계무역이 성행하던 때였다. 당시 해상 운송의 한계로 중국 일본 동남아시아의 상품들을 상호 교역하려면 직접 연결은 어려웠고 중간 기착지를 거쳐야 했다. 그 길목에 자리 잡은 오키나와는 최대 수혜자였다.

국제 정세도 오키나와 편이었다. 명나라를 건국한 주원장(1328-1398)은 국내 경제와 치안 유지의 명목으로 바닷길을 막는 해금(海禁) 정책을 폈다. 대외 교역이 금지되고 주변국 외교 사절들의 조공 무역만 허용했다. 게다가 명나라와 일본 사이의 조공 무역이 16세기 초반 중단된다. 중국 일본의 대외 무역이 오키나와를 통해 이뤄질 수밖에 없는 구도가 형성됐다.

오키나와 슈리 성에 있는 ‘수례지방(守禮之邦)’ 현판이 걸린 문. ‘수례지방’은 ‘예의를 지키는 나라’라는 뜻이다.

이 시기의 스타 지도자는 류큐 왕국의 쇼신(尙眞)왕(1465-1527)이다. 그는 명나라에 대한 조공 횟수를 ‘2년 1회’에서 ‘1년 1회’로 늘리는 외교 수완을 발휘하면서 수도 나하를 국제적 항구로 번성시켰다. 오키나와는 조공 사절이 중국 황실로부터 받은 하사품을 조선 일본 동남아시아에 팔고 그 돈으로 현지 물건을 구입해 다시 중국에 진상하는 방식으로 큰 부를 일궜다. 

류큐 왕조는 자국 번영의 기념물로 1548년 왕궁인 슈리 성(城)에 ‘만국진량의 종’을 만들고 그 위에 다음과 같은 명문을 새긴다. ‘류큐 국(國)은 남해의 은혜로운 지역에 위치하여 조선의 풍부한 문화를 한 손에 받아들이고, 중국과는 위턱과 아래턱과 같은 밀접한 관계를, 일본과는 입술과 이와 같은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실로 이상향이라고 할 만 하다. 류큐는 여러 외국에 다리를 놓듯이 배를 놓아 교역하고 있다. 그 때문에 외국의 희귀한 품물, 보물이 나라 안에 가득 넘치고 있다.’ 류큐 왕국은 이 시기 조선에 고려대장경 책을 7차례 요청하고 실제로 4차례 받아갔다는 기록이 있다. 오키나와의 황금기라고 부를 만하다.

이제부터는 오키나와의 흥망(興亡) 중에서 망(亡)에 대해 이야기할 차례다. 류큐가 무너지는 과정은 포르투갈 등 서구 세력이 아시아로 진출하고 해운 기술의 발전으로 중계무역이 불필요하게 된 탓이 크지만 근본적으로는 약소국의 한계에 기인한 것이었다.

류큐는 1609년 일본 사츠마 번(현 가고시마) 병력 3000명의 공격을 받고 사츠마에 예속된다. 그토록 경제력을 뽐내던 나라가 사츠마의 소규모 병력에 무릎 꿇은 것은 몹시 허망했다. 이후 일본과 중국 양쪽에 조공 관계를 유지하며 위험한 줄타기를 해오던 류큐는 1879년 일본의 ‘류큐 처분’으로 완전히 일본 손에 넘어가게 된다.

한국과 오키나와의 국제정치적 연결성이 급속히 커지는 시기가 바로 이때다. 류큐를 일본이 갖게 되자 청나라는 충격에 빠진다. 중국 주변의 두 요충지 가운데 하나인 오키나와를 빼앗긴 상황에서 조선에 대해서만큼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벼르고 나선다. 류큐 처분 이듬해인 1880년 작성된 청나라 문서 ‘삼책(三策)’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조선을 손에 넣기 위한 세 가지 방책이 제시되어 있는데 오늘날 한중 관계에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삼책’ 가운데 상책(上策)은 조선을 중국의 군현(郡縣)으로 삼는 것이고 중책(中策)은 조선에 중국 관리를 파견해 내정과 외교를 장악하는 것이었다. 하책(下策)은 조선이 외국과 체결하는 조약이 청나라 지시를 받고 이뤄지는 것임을 명백히 하라는 것이다. 조선이 ‘청나라 속국’이라는 사실을 널리 알리려는 목적이다. 아울러 조선의 외교관들이 미국 등에 부임하면 가장 먼저 중국 외교관을 찾아가 신고해야 하고 외교 행사에서는 반드시 중국 외교관의 아랫자리에 앉히도록 했다. 

‘삼책’은 1882년 임오군란 때 3000명의 청나라 병력을 조선으로 보내 내정을 장악한 뒤 그대로 실행됐다. 당시 중국 대표 격으로 조선에 온 원세개가 조선 궁궐에 제멋대로 가마를 타고 드나들고 고종을 협박하는 등 안하무인의 행태를 보인 것은 100% 계산된 행동이었다. 중국이 조선을 실질적 속국으로 만들려고 덤벼든 것은 결국 오키나와 멸망의 여파였다. 조선이 일본의 오키나와 침략 때와 같은 숫자인 3000명의 중국 병력에 뿌리 채 흔들린 것은 기이한 일치다. 

한국과의 닮은꼴은 계속 발견된다. 오키나와 슈리 성의 정문에는 ‘수례지방(守禮之邦)’이라는 커다란 현판이 걸려 있다. ‘예의를 지키는 나라’라는 뜻이다. 한국이 중국으로부터 ‘동방예의지국’이라는 말을 들었던 것과 같다.

슈리 성에는 중국 사절을 맞이하던 ‘환회문(歡會門)’이 자리잡고 있고 서울 서대문 밖 독립문이 있던 자리에는 같은 성격의 ‘영은문(迎恩門)’이 있었다. 류큐는 늘 ‘평화의 섬’을 내세웠고 한국 정부는 강대국들이 한반도에서 힘겨루기를 하는 지금 어느 때보다 ‘평화’를 자주 입에 올린다. 그러나 ‘예의’와 ‘평화’라는 단어는 현실에선 아무 쓸모가 없었다. 

한국의 독립문 자리에 있었던 ‘영은문(迎恩門)’. 조선시대 중국 사절을 맞아들이기 위한 문이었다.

한때 활발했던 조선과 오키나와 관계가 16세기 초반부터 거의 끊기게 된 것은 오키나와가 조선과 명나라로부터 ‘못 믿을 나라’로 의심 받았기 때문이다. 특히 류큐가 일본의 속국이 되고 나서는 의심이 더 짙어져 조선은 명나라를 통해서만 류큐와 인적 물적 교류를 해야 했다. 힘없는 류큐 입장에서는 양다리를 걸칠 수밖에 없었으나 국제 관계에서 한번 강대국의 의심을 사면 그때나 지금이나 치명적이다.

140년 전 마련된 조선에 대한 중국의 ‘삼책’이 지금까지 생생히 살아 있는 점도 흥미롭다. 한국과 북한을 의도적으로 중국의 ‘동북 4성과 5성’ 정도로 몰고 가려는 태도는 ‘삼책’ 가운데 상책에 해당하고, 한국의 최고지도자를 포함한 중요 인사들을 의도적으로 아랫자리에 앉히고 하대(下待)하는 것도 조선조 말과 똑 같은 풍경이다.

개인적으로 오키나와 재방문은 2016년 이뤄졌다. 나하 중심가와 바닷가에는 1994년 첫 방문 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많은 한국 관광객들로 붐비고 있었다. 반면 오키나와 사람들이 한국인들을 여전히 동지적 관계로 바라보고 있는지는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 

재방문을 마치고 오키나와를 떠나면서 오키나와에 150년의 황금기가 있었다면 한국의 번영기는 언제였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우리 역사에서 그나마 꼽아보자면 아마 지금일 것이다. 오키나와가 한순간에 꺾여버린 것을 떠올리면서 한국인들이 모처럼의 봄을 얼마나 오래 지켜낼 수 있을지 궁금해진다. 

홍찬식 객원 칼럼니스트(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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