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의 소리/이자성] 두 시간의 점심
[독자의 소리/이자성] 두 시간의 점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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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부 유럽이나 라틴 아메리카에 출장을 가면 답답했던 기억이 있다. 오래 전 일이라 지금도 그러는지는 잘 모르겠다. 많은 사람을 효율적으로 만나야 하는 우리 한국인에게 그곳의 점심 시간은 지뢰처럼 피하고 싶은 것이었다. 대한민국이라면 하루에 서너군데 방문할 수 있는데 그곳에서는 많으면 두 군데 방문하면 끝이었다. 점심 시간이 두 시간에 낮잠까지 자야하는 곳은 안되는 것도 많았다.

그렇다고 업무 시간 외에 우리를 만나주는 열린 사람은 많지 않았다. 하루 이틀은 답답해하다 곧 적응이 돼 우리도 점심 시간을 두 시간 넘게 가졌다. 사람은 제 아무리 우쭐대도 환경의 지배를 받는 나약한 존재임에 틀림없다. 바쁘게 살다가 갑자기 주어진 한가한 생활은 잠시의 어리둥절할 시간만 지나면 곧 적응된다. 그리고 더 나른한 행복을 느끼게 한다. 그런 삶이 지속적으로 가능하다면 삶의 질이 향상되었다고 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주제 넘는 짓일 것이다.

​반대의 경우는 어떨까, 점심 시간을 두 시간 넘게 갖던 사람이 한 시간 혹은 30분의 점심 시간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아마 수용하기도 어렵지만 적응은 더 힘들 것이다. 이미 익숙해진 상황에서 생활 수준이 점차 개선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나빠지는 것은 참아내기 어렵다. 제도적으로 확대된 국가 차원의 복지나 고용주와 상급자의 방관 하에 슬금슬금 확대된 두 시간의 점심 복지는 일상이 되고 문화로 굳어질지도 모른다. 그걸 되돌리려는 시도는 엄청난 반발에 부딪히게 된다.

​두 시간의 점심은 이제 남의 나라 일이 아니다. 대한민국의 일이 되었다. 웬만한 직장의 경우 오전 11시 30분이면 직원들이 사무실을 비우기 시작한다. 실용적인 사람들은 구내 식당이나 근처 식당으로, 접대가 있거나 혹은 미식가라면 차까지 동원해서 맛집을 찾아 나선다. 식사를 마치고 커피숍에 들렀다가 다시 사무실에 들어와 이를 닦고 전화를 받을 수 있는 자세가 갖추어지는 시간은 대략 오후 1시 30분은 지나야 한다. 야금야금 늘어나는 점심 시간은 기강이 무너지고 양심이 무뎌지는 환경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이러고도 나라가 번영의 길을 간다면 세상은 불공평할 것이다. 그런 사회는 기울고 쇠락하는 것이 정상이다. 그것이 정의다. 대한민국이 정의의 칼날을 맞고 있다.

​경쟁 상대 국가의 생산성에 비해 우리의 생산성은 50% 수준을 겨우 넘기는 것이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점심 시간은 늘고 있다. 나라에서는 주 52시간 이상은 일하지 말라고 오지랖 넓게 간섭한다. 일부 직원이 의욕에 넘쳐 자발적으로 법정 한도 시간 이상으로 일하면 고용주는 범죄자가 된다. 이런 엄혹한 세상에서 일부 피고용인의 삶은 분명 좋아지는 것처럼 보인다. 저녁이 있는 삶이 가능할 것 같다. 하지만 아직 노동 시장에 진입하지 못한 젊은이들에게는 언감생심이다. 시간은 많다. 그런데 돈이 없다.

​기업 환경이 나빠지면 국민경제도, 국가재정도 나빠진다. 대한민국의 기업가들은 너무 많은 짐을 지고 있다. 법인세 인상, 과도한 최저임금 인상, 근무시간 제한, 무소불위의 노동조합, 거미줄 규제, 반기업 정서, 깡패 같은 권력, 이현령 비현령 법, 자신도 모르는 죄목으로 언제든 감옥에 쳐 넣어질지 모른다는 불안감 같은 감당하기 버거운 짐들이 착착 기업가의 등에 올려지고 있다. 기업가의 등이 휜다. 기업가도 사람이다. 사업보국의 이념으로 기업을 키워왔지만 이젠 생존조차 위협 받고 있다. 잘 하고 싶어도 잘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없다.

​대한민국은 아무리 봐도 샴페인을 터트리고 즐길 상황은 아니다. 한 때 아시아의 네마리 용이라 불리던 홍콩, 싱카포르, 대한민국, 대만 가운데 이미 홍콩과 싱가포르는 멀찍이 우리를 따돌렸다. 그들은 벌써 개인 소득이 우리의 두 배를 넘겼거나 넘기고 있다. 대만은 아직 우리 수준에는 못 미치지만 우리만큼 경제가 급격하게 하강곡선을 그리지는 않는다. 용의 얼굴을 한 대한민국이 몸둥이부터 지렁이로 변하고 있다. 싱가포르와 홍콩은 우리의 시야를 벗어난지 오래다. 이젠 그들의 발자국이나 좇아갈 형편이다.

​모두들 앞으로 달리고 있는데 우리만 뒷걸음이다. 남이 땀흘려 이룬 것에 눈독 들이기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미래는 없다. 부는 철저하게 피와 땀의 결실이다. 노력 없이 되는 일은 없다. 기업하기 어려운 나라가 잘 사는 법도 없다. 자본과 기업가를 적대시하는 나라가 갈 길은 뻔하다. 가난과 옹색함이다. 그들에게 번영은 없다. 쇠락만이 있을 뿐이다. 쇠락은 인간을 동물로 만든다. 곶간에서 인심나기 때문이다. 맹자가 말한 無恒産 無恒心 (무항산 무항심)은 인간의 기본 조건이 경제임을 지적하고 있다.

퇴보하는 나라에 사는 국민의 인간성은 파괴된다. 가난과 부정부패가 그렇게 만든다. 쇠락하는 나라의 국민들에게 강요되는 것은 범죄, 매춘, 구걸이며 비굴함이 몸에 밴 사람들이 동물적 삶을 연장하려 투쟁하는 정글이 있을 뿐이다. 만인의 투쟁은 문명을 물리치고 야만이 판치게 만든다. 그런 세상에서 가장 먼저 희생되는 사람은 여성, 아이, 노약자 그리고 양심적인 사람들이다. 현세에 구현된 지옥이다. 지옥은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니라 어리석은 자들이 지상에 만든 천국의 다른 이름이다.

​정부의 경제 정책이 국민의 삶을 규정한다. 좋은 정책은 국민을 잘 살게 만들고 나쁜 정책은 국민을 노예로 만든다. 나쁜 정책은 화려하고 솔깃하다. 좋은 정책은 국민에게 책임과 피, 땀을 요구한다. 어리석은 국민은 나쁜 정책을 선택한다. 정치인들은 알고 있다.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말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국민을 내세우며 나쁜 정책을 추진한다.

​국가가 나쁜 정책을 추진하고 점심 시간이 두 시간을 넘기는 나라가 도착할 곳은 뻔하다. 지상에 구현된 지옥이다. 그러나 국민을 지옥으로 끌고간 무리는 그곳을 천국이라 우긴다. 국민들이 아우성치면 입바른 소리하는 사람부터 조진다. 국가권력 기관은 모두 주구(走狗)가 되어 맘에 들지 않으면 사정 없이 물어 뜯는다. 원한 맺힌 한이 방방곡곡 메아리치고 염치, 체면이 사라진 야만인이 되어 회한의 가슴을 치며 살다 사소한 사건이 불씨가 되어 억눌린 감정이 한꺼번에 터져 나온다. 민중이 본모습을 드러낸다. 민중의 맨 얼굴은 폭력성이다. 잔인함과 파괴력이다.

​민중이 득세하면 어김없이 무리를 이끄는 소위 지도자를 자칭하는 사람이 나선다. 하지만 그는 저승사자다. 히틀러, 모택동, 스탈린은 그렇게 세상에 제 모습을 드러냈다. 현재 대한민국이 가는 길은 단기적으로는 반역의 길이요, 장기적으로는 반역에 대한 강력하고 극단적인 반동세력이 득세하는 파시즘을 불러오는 길이다. 현 정권의 폭주를 막지 못하고 방치하게 될 경우 역사는 반복된다는 교훈을 목격하게 될지도 모른다.

​역사의 반복을 목도하면서 고통스러워하지 않으려면 어찌해야 하는가, 지금 우리는 어디쯤 서 있는지 각성해야 한다. 지식인이 제 역할을 해야 하고, 언론이 본분을 지켜야 한다. 정치인은 법치를 기본으로 삼아야 하고 국민 각자는 자신의 본분에 충실하면서 깨어 있어야 한다. 어설픈 선동가들의 주장에 넘어가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1차 대전 이후 민주정치를 채택한 나라 가운데 제대로 민주정이 자리잡은 나라는 하나도 없다는 주장이 이를 뒷받침 한다.

​대한민국이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것은 근본적으로 유권자의 책임이다. 유권자가, 국민이 그 길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정치인의 잘못이 아니다. 그들은 그저 국민이 뭘 원하는지 목을 빼고 지켜보다가 국민이 원하는 것을 말하고 시행했을 뿐이다. 정치인을 내세워 남 탓하면서 현실의 문제와 본질을 감추는 것은 비겁하다. 독일 국민들이 히틀러를 희생양으로 바치고 정작 자신들은 뒤로 물러나 면책받은 것과 다르지 않다.

​우리가 풀어야 할 난국의 해법은 과거에서 찾을 수 있다. 성현의 가르침을 언급하려는 것이 아니다. 대한민국은 건국 이후 많은 고난을 겪었지만 성공적인 길을 걸어왔다. 정치 수준은 완벽하지 않지만 민주국가라 불릴만 했고, 경제는 세계인의 찬사를 한 몸에 받았다. 촛불로 권력을 쥐고 대한민국을 성공 궤도에서 급격하게 이탈하게 하는 자들은 역사의 역주행이 몸에 밴 자들이다. 그들은 반산업화 세력이며 경부고속도로 건설 반대자, 포항제철 건설 반대자들의 후예다. 그들은 문명을 거부하고 성공의 공식을 부정한다. 자본과 기업을 적대시 하고 인류 보편의 가치를 능멸하는 반인륜 집단, 전체주의 세력과 손을 잡는다. 현재 대한민국의 위기는 바로 성공 궤도를 이탈해 엉뚱한 방향으로 가고 있기 때문에 발생했고 심화되고 있다. 이미 그 길을 갔던 나라는 지구상에서 사라졌거나 호된 대가를 치루고 있다. 그런데도 그 길을 꾸역꾸역 간다. 국민을 속이고, 거짓말을 하면서 대한민국호를 멋대로 몰고 가고 있다. 나쁜 의도를 갖고 있음이 분명하다.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면 아직은 대한민국호의 선장을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것이다. 그 전에 선장을 포위하고 있는 무리들을 바꿀 기회도 있다. 우리는 선거를 통해 기회를 잡아야 한다. 민주국가에서 정권은 선거로 바꾼다. 때로는 대중의 무리를 동원해 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탈취하기도 한다. 주말만 되면 3년 째 광화문이 태극기로 뒤덮이는 것은 현 정권이 촛불을 동원하여 정권을 찬탈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행동에 나서기 때문이다. 그들은 현 정권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현 정권이 촛불을 등에 업지 않고 정상적인 선거를 치러 집권했다면 이렇게 나라가 혼란스럽지는 않을 것이다. 따라서 향후 집권은 절대로 합법적인 선거를 통해서만 이뤄져야 한다. 선거에 유리하게 여론을 조작하거나 군중을 동원하고, 해상 교통사고를 정치적으로 확산시키는 따위의 짓을 해서는 안된다. 반드시 페어 플레이를 해야 한다.

​2020년 4월 총선거는 대한민국의 명운을 바꿀 수 있는 중대한 기로가 될 것이다. 총선을 통해 현 정권의 폭주를 막는다면 대한민국은 정상 국가로 돌아올 수 있는 기회를 잡게 된다. 그러나 현 정권이 승리한다면 대한민국은 억압과 쇠락이 일상화된 전체주의의 길을 갈 것이다. 민주주의는 타락하고, 경제는 시들고, 인간성이 파괴된 사회에서 살게 된다. 문명이 사라지고 야만이 판치며 여성과 약자는 희생되고, 비열하고 무자비한 완력을 가진 자들만이 생존하는 사회가 될 것이다. 결국 최악의 상황을 맞은 대한민국은 억압의 내부 압력이 증가하면서 사소한 사건이 비화되어 민중이 다시 역사의 전면에 나타나는 지옥을 경험하게 될 수 있다. 피비린내 진동하는 민중혁명이 공포의 옷을 입고 대한민국을 뒤흔들지도 모른다.

​홍콩에서 벌어지고 있는 시위를 보라. 약 700만 홍콩 주민 가운데 100만 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그들이 시위에 참가한 것은 자유에 대한 열망과 위협 때문이다. 그들이 누리는 자유가 침해될 것에 대한 우려가 홍콩인들을 행동하게 했다. 홍콩의 경제는 여전히 견실하다. 우리보다 2배 가까이 소득이 높다. 홍콩인들이 경제가 파탄나 인간성이 파괴되는 지옥을 경험한 것도 아니다. 정치 권력으로 부터 억압을 경험하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100만 명이 모였다. 여기에 누군가 증오의 불화살을 쏜다면 시위는 바로 폭력으로 변할 수 있다. 지금 홍콩의 모습이 미래의 우리 모습이 될 수 있다. 선동가들에게 한국인처럼 남 탓하기 좋아하고 질투와 미움의 포로가 되기 쉬운 국민성을 가진 사람들에게 정의의 이름으로 대중 폭동을 유발시키는 것은 그리 어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이런 무시무시한 시나리오가 실현되지 않도록 지금 당장 우리는 무엇인가 해야 한다. 너무나 힘 빠지는 얘기지만 최선의 길은 국민적 각성이다. 국민이 깨어나는 것이다. 정상인이 되는 것이다. 무지와 선동에 몰려 다니는 국민이 지성(知性)의 힘으로 탈바꿈하는 것이다. 국민의 각성은 정상 국가에 대한 의식의 전환을 불러온다. 추상적이고 먼 나라 얘기가 아니다. 각성을 통해 우리는 근본을 찾는다. 성공 신화의 경험을 다시 우리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유럽인들이 천 년 동안 신의 포로가 되어 살다가 그리스의 전통에서 인간의 모습을 찾고 르네상스 시대를 열었듯이 우리가 경험했던 과거의 성공 스토리를 불러와 우리도 다시 한번 도약할 수 있다.

​현 정권은 국가와 국민을 대상으로 무모한 실험을 하며 지도에도 없는 길을 갈 것이 아니라 검증된 길로 되돌아 와야 한다. 어렵지 않다. 명확한 목표를 세우자. 우리 안의 성공 DNA를 불러오자. 성공의 길로 돌아 온다는 것은 과거를 그대로 답습하자는 것이 아니다. 과거의 성공과 번영이라는 전통 위에 미래를 위한 새로운 밭을 갈고 씨를 뿌리는 것을 말한다. 그것이 가능하려면 의식의 대전환을 바탕으로 우리를 옥죄고 있는 좁은 우물에서 벗어나 미래로 나가는 용기를 펼쳐야 한다. 미래를 준비하지 않는다면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도 미래에 올 후손들도 힘겨운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삶이 고통이 되는 세상을 또다시 경험하게 될 수 있다.

​미래를 준비하지 못하면 오늘을 살고 있는 기득권 세대는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부끄러운 사람들로 지목될 것이다. 자식의 앞 길을 막아서면서까지 자신의 것만 챙기려 떼를 썼으며, 선대가 물려준 부를 따먹기만 했고, 미래를 위한 투자도 노력도 없었던 가장 이기적이고 개념 없는 세대로 손가락질 당할 것이다. 무엇보다 성공의 길에서 탈선해 국가를 무책임하게 파탄의 길로 몰고 갔다. 무자비한 독재자가 나타나 완력으로 끌고 간 것이 아니다. 우리 스스로의 선택이었기 때문에 세계인의 뼈아픈 조롱도 받아야 한다.

​人不通古今 馬牛而襟裾(인불통고금 마우이금거)라는 말이 있다. 사람이 고금의 일(역사)에 통달하지 않으면 개, 돼지나 다름없다는 말이다. 우리는 과연 역사에서 무엇을 배우는가, 역사에는 번영의 길과 쇠락의 길이 명확하게 설명되어 있다. 번영했던 길로 가면 성공하고, 쇠락했던 길을 선택하면 실패한다. 이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우리는 성공의 길을 박차고 나와 스스로 실패의 길로 뛰어 들었다. 이 얼마나 어리석고 기막힌 일인가, 이 나라를 이 정도로 살만하게 만들어 놓은 선대(先代)의 반역자가 되었다. 정치인 탓할 것 없다. 모두 우리가 선택한 길이다.

​마지막으로 한일합방을 막지 못해 지식인으로서 책임을 지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황현의 시를 소개한다.

絶命詩 (절명시)
매천 황현(梅泉 黃玹 1855~1910, 한학자)

​鳥獸哀鳴海嶽嚬(조수애명해악빈), 온갖 짐승 슬피 울고 산과 바다 찌푸린다
槿花世界已沈淪(근화세계이침륜), 무궁화 금수강산 이미 사라졌구나
秋燈掩卷懷千古(추등엄권회천고), 등잔 아래 책을 덮고 옛일을 헤아리니
難作人間識字人(난작인간식자인), 글 배운 선비로서 사람구실 어렵도다​

세상 물정 좀 알고 글 꽤나 안다는 사람들은 국가의 운명과 자신의 목숨을 같이 해야 한다. 나라가 위태로운데 편히 발 뻗고 잠잘 수 있는 사람은 진정한 지식인이 아니다. 어리석은 국민을 선동하고 잘못된 길로 이끄는 사람은 자손만대로 그 죄악 씻을 수 없다. 아무 생각 없이 이리저리 휘둘리며 사는 사람은 자신 때문에 나라가 힘들고, 결국 자신은 물론 자식에게까지 폐를 끼치게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민주사회는 지성인이나 몰지각한 사람이나 반역자나 모두 한 표다. 무개념 유권자, 반역 성향을 가진 유권자가 많아지면 반역자들의 나라가 된다. 그래서 민주정치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유권자의 수준이 그 나라의 민주정치 수준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각성된 유권자가 민주주의를 지탱한다. 각성된 유권자는 국가의 모든 기능이 제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할 때 다수를 차지한다. 다수의 깨어있는 유권자만이 민주정치의 함정을 비켜갈 수 있다. 대한민국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최선책도 유권자들이 깨어나는 것이다. 미몽에서 깨어나 민주정치를 제대로 하는 것이 국가를 번영으로 이끌고 난국을 벗어날 수 있는 최선의 길이자 지름길이다.

이자성 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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