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거일 칼럼] 인공지능에 대한 철학적 고찰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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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초승인 2019.06.11 09:15:13
  • 최종수정 2019.06.11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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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중국이 격렬하게 대결하는 상황이 되면서, 중국 정부가 국민들에게 한국전쟁을 상기시킨다는 보도가 나왔습니다. 1956년에 나온 선전 영화 <상감령(上甘嶺)>을 다시 상영하는 것이 이런 움직임을 상징한다는 얘기였습니다.

영국 잡지 기자가 <상감령>을 보고 나서 쓴 글이 흥미로웠습니다. 오만한 미군이 중공군을 깔보고 공격했다가 용감한 중공군과의 백병전에 져서 두 손 들고 도망친다는 것이 이 영화의 줄거리라고 합니다. 특히 흥미로운 부분은 후퇴하는 미군 병사들이 돌아서서 싸우도록 하려고 그들에게 기관총을 쏘라는 명령을 내리는 미군 장교의 냉혹한 모습입니다.

이 영화의 배경이 된 싸움은 1952년 10월 중순부터 11월 초순까지 강원도 금화의 오성산에서 중공군과 아군 사이에 벌어진 치열한 고지전입니다. 오성산은 워낙 큰 산이라서, 전선이 산의 남쪽 허리에 형성되었습니다. 이곳에서 전술적으로 중요한 지형은 598고지였는데, 이 고지와 둘레 봉우리들이 삼각형을 이루었으므로, ‘삼각 고지(Triangle Hill)’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삼각고지에서 동북쪽으로 2킬로미터 거리에 ‘저격능선(Sniper Ridge)’이 북서에서 남동으로 뻗었습니다. ‘상감령’이란 이름은 분명히 고개를 뜻하는데, 싸움은 봉우리들에서 벌어졌으니, 좀 이상합니다. 상감령이 두 지역 사이에 있는 고개라는 얘기도 있습니다. 어쨌든, 영화는 서쪽 삼각고지에서 벌어진 싸움만을 다룹니다.

휴전 협상이 지지부진하던 1952년 가을, 미군 지휘부는 ‘전선 정리’ 차원에서 삼각고지와 저격능선을 점령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당시 이 지역은 중공군 45사단이 지키고 있었고, 아군은 미군 7사단이 삼각고지 지역을 그리고 국군 2사단이 저격능선 지역을 맡았습니다. [미군 7사단장은 웨인 스미스(Wayne C. Smith) 소장이었고 국군 2사단장은 정일권(丁一權) 중장이었습니다.]

‘공개승부(Showdown) 작전’이라 불린 이 공격 작전을 주도한 8군 사령관 제임스 밴 플리트(James A. Van Fleet) 중장은 삼각고지와 저격능선의 확보엔 각기 미군 1개 대대와 국군 1개 대대로 충분하다고 보았습니다. 야전 지휘관들도 이 작전이 5일 가량 걸리고 사상자는 200명 가량 되리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중공군이 뜻밖으로 완강하게 저항해서, 미군은 힘든 싸움을 치러야 했습니다. 7사단은 9개 보병 대대들 가운데 8개 대대를 투입해서 2천명의 사상자를 내면서 12일 만에야 삼각고지의 대부분을 점령했습니다.

이어 10월 25일 국군 2사단이 7사단을 대신해서 이 지역을 지켰습니다. 그러나 저격능선 싸움으로 지친 2사단은 중공군의 거센 반격을 막아내지 못하고, 11월 1일 삼각고지에서 밀려났습니다. 국군은 여러 차례 반격을 시도했지만, 사상자가 너무 많이 나서, 11월 5일 작전이 중단되었습니다.

저격능선에선 11월 18일까지 고지를 빼앗고 빼앗기는 싸움이 이어졌는데, 국군은 작전이 시작된 뒤 14번째 저격능선의 일부를 점령했습니다. 그 뒤로는 중공군도 지쳐서, 국군은 저격능선의 일부를 지킬 수 있었습니다.

결국 아군은 6주간의 힘든 싸움에서 9천명이 넘는 사상자를 내고 저격능선의 일부를 얻었고 주요 목표인 삼각고지엔 아예 발을 붙이지 못했습니다. 중공군 사상자는 19,000명이 넘었지만, 원래 중공군은 인명을 경시하는 터라서, 이 싸움은 중공군이 이긴 셈입니다.

이 싸움에 관한 미국 육군의 공식 전사인 <휴전 천막과 싸우는 전선(Truce Tent and Fighting Front)>도 중공군의 승리를 선선히 인정했습니다, “삼각고지에서 [중공군은] 그들의 강인한 방어로 백마고지에서의 공세적 패배를 반전시키고 국제연합군 사령부에 공격을 중단하도록 강요함으로써 체면을 세웠다.”

따라서 <상감령>의 내용은 사실과 거리가 멉니다. 공산주의 국가의 선전 영화야 원래 그런 것이니, 이상할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 낡은 선전 영화를 중국 정부가 다시 국민들에게 보이는 뜻은 한국전쟁에서 그들과 피 흘리며 싸운 우리로선 진지하게 살펴야 합니다.

중국 정부의 영향을 받는 매체 책임자의 발언을 인용해서, 그 잡지 기자는 <상감령>을 상영하는 목적은 “싸우지 않으면, 평등한 협상은 없다”는 전언을 국민들에게 일깨우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럴 듯한 얘기입니다. 그래도 중국 정부의 행태는 그런 수준보다 훨씬 깊은 데서 나옵니다.

1842년 ‘아편전쟁’에서 패하고 홍콩을 영국에 넘긴 때부터 1945년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해 중국에서 물러날 때까지, 중국은 서양 강국들과 서양 문명을 먼저 받아들인 일본에 시달리면서 갖가지 굴욕을 맛보았습니다. 스스로 ‘백년국치(百年國恥)’라 부르는 이 경험은 중국이 바깥 세상과 교섭하는 태도를 근본적으로 규정했습니다. 중국이 줄곧 보여온 거센 민족주의는 그런 역사적 치욕을 씻어내려는 열망의 분출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백년국치’는 일본이 물러난 1945년에 공식적으로 끝났습니다. 그러나 일본에 이긴 나라는 미국이지 중국이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당시 중국을 대표한 것은 장제스의 국민당 정권이었습니다. 이런 사실은 중국 공산당 정권으로선 곤혹스럽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중국이 한국전쟁에서 미국에 ‘승리’한 것을 ‘백년국치’의 실질적 종결로 여깁니다.

중국이 한국전쟁을 ‘항미원조(抗美援朝) 전쟁’이라 부르는 데서 그런 역사관이 잘 드러납니다. ‘미국에 대항해서 북한을 도운 전쟁’이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가장 강한 나라인 미국을 공격해서 북한을 지켜냄으로써, 중국은 강대국의 반열에 올라섰습니다. “많은 중국 사람들에게 한국전쟁은 ‘백년국치’의 끝과 ‘신중국’의 탄생을 가리킨다”고 한 정치학자는 썼습니다.

이처럼 한국전쟁은 중국 공산당 정권이 자신의 존재 이유를 확립한 계기였습니다. 당연히, 중국 공산당 정권은 그런 역사관에 바탕을 두고 한반도를 대합니다. 필연적으로 그들에게 한국은 ‘영원한 적’으로 남을 것입니다.

사정이 그러하므로, 중국에게 한국은 성가신 존재입니다. 중국이 ‘항미원조 전쟁’에서 이겼다면, 중국의 지원을 받은 북한이 한반도의 주인이 되거나 적어도 번창해야 하는데, 사정은 다릅니다. 그러니 중국으로선 한국의 존재와 번영이 마음에 걸릴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우리 시민들의 대다수는 한국전쟁이 옛적에 끝난 일이라 여깁니다. 중공군이 침입해서 통일을 막은 일을 떠올리는 시민들은 더욱 드뭅니다. 이런 망각은 날이 갈수록 위험해지는 지정학적 현실을 바로 보지 못하게 합니다. 중국에서 다시 상영되는 <상감령>은 이런 위험을 우리에게 일깨워줍니다.

인공지능의 경제적 영향 (상)

인공지능은 본질적으로 동물의 지능과 같다. 그래서 인공지능은 사회의 모든 분야들에 점점 깊이 스며들어 사람의 지능을 돕고 보완한다. 그런 과정이 전반적이고 지속적이므로, 우리는 인공지능의 확산에 대해 잘 인식하지 못한다. 위에서 얘기한 ‘인공지능 효과’는 앞으로도 이어질 것이다.

지능의 성격을 지닌 기술이므로, 인공지능은 모든 다른 기술들에 적용될 수 있다. 그리고 인공지능이 장착된 기계들은 점점 사람들의 통제에서 벗어나 자율적이 된다. 지금 첨단 공장들은 거의 다 스스로 움직이고 사람의 개입이 필요한 경우는 드물다. 이제는 스스로 움직이는 수송 수단들이 나타났다. 생명체들이거나 기계들이거나 움직이는 것은 힘들다. 원래 지능이 움직이는 생명체들의 적응을 위해 나타났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점이 뚜렷해진다. 따라서 스스로 움직이는 수송 수단들이 발전한 것은 대단한 성취다.

자율적 기계들이 연결되어 움직이면, 지금 큰 관심을 끄는 ‘사물 인터넷(Internet of Things)’이 실현된다. 이 기술은 기계들의 자율성을 극대화해서, 사람들이 개입한 여지를 최소한으로 줄일 것이다.

앞으로 변화는 가속되고, 개인이든 기업이든 나라든 미래를 예측하기는 점점 힘들어질 것이다. 환경이 거의 변하지 않았던 원시 시대에 형성된 터라, 우리의 뇌와 마음은 그런 변화를 상상하기 힘들다. 어느 사회에서나 늘 부족한 자산은 상상력이다. 우리 사회처럼 ‘주어진 물음에 답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지적 활동’이라는 생각을 어릴 적부터 학생들에게 심어주고 젊은이들에겐 ‘그저 안정된 직업을 갖는 것이 삶에서 가장 중요한 목표’라고 이르는 사회에선 특히 그렇다.

다른 편으로는, 대담한 상상력으로 낯선 미래를 예측하면, 우리 마음은 어쩔 수 없이 불안해진다. 이미 너무 낯설어진 환경에서 사는데, 더욱 낯선 사회가 오리라는 전망은 우리 마음을 어둡게 한다. 이럴 때 중요한 것은 삶의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다. 프랑스 격언대로, “바뀔수록 같은 것이다.” 그것이 진화가 궁극적으로 의미하는 것이다.

자연히, 미래를 대담하게 예측하려는 노력은 사회를 활기차게 만들고 방향 감각을 지니는 데 도움이 된다. 그리고 운이 좋다면, 옳은 예측을 통해서 미래를 맞을 준비를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을 명쾌하게 지적한 사람은 영국 과학소설 작가 아서 클라크(Arthur C. Clarke)인데, 그의 관찰은 세 개의 법칙으로 정리되었다.

제1법칙 (First Law): 뛰어나지만 나이 든 과학자가 어떤 것이 가능하다고 언명하면, 그는 거의 분명히 옳다. 그가 어떤 것이 불가능하다고 언명하면, 그가 그를 가능성은 무척 높다. (When a distinguished but elderly scientist states that something is possible, he is almost certainly right. When he states that something is impossible, he is very probably wrong.)

제2법칙 (Second Law): 가능한 것의 한계들을 찾아내는 유일한 길은 그것들을 조금 지나 불가능한 것들 속으로 발을 디뎌보는 것이다. (The only way of discovering the limits of the possible is to venture a little way past them into the impossible.)

제3법칙 (Third Law): 충분히 발전한 기술은 무엇이든 마법과 구분할 수 없다. (Any sufficiently advanced technology is indistinguishable from magic.)

인공지능의 영향은 경제 분야에서 먼저 두드러졌다. 재화들의 생산과 유통에서 근본적 혁신이 일어나서, 생산성이 빠르게 높아졌다. 그런 변화는 전반적이고 가속적이어서, 제4차 산업혁명 (Fourth Industrial Revolution)이라 불리게 되었다. 이 말을 처음 쓴 사람들은 제조업에서의 변화에 주목했지만, 모든 산업에서 나온 근본적 변화를 잘 드러내는 표현이다.

덕분에 많은 사회들에서 경제가 빠르게 성장했다. 대부분의 사회들에서 보통 시민들이 단 한 세대 전만 하더라도 상상하기 힘들었던 풍요와 편리를 누린다. 그리고 그런 경제적 번영은 사람들의 삶의 모습과 행태를 바꾸었고 사회의 구성과 작동 원리에서 미묘한 변화들을 불렀다.

이런 근본적 혁신은 경제에 충격을 줄 수밖에 없다. 미국 경제학자 조지프 슘페터(Joseph Schumpeter)의 ‘창조적 파괴(creative destruction)’는 일상적 현상이 되어서, 기업들과 일자리들이 끊임없이 사라지고 새로 나온다. 게다가 거의 모든 변화들이 점점 가속된다, 이전보다 잘살게 된 사람들도 불안할 수밖에 없다. 전체적으로 혜택이 큰 변화라도, 변화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는 사람들에겐 두렵고 괴롭다.

지금 사람들을 가장 두렵게 만드는 것은 일자리가 줄어들 가능성이다. 인공지능이 점점 발전해서 사람들의 지능을 거의 다 대신하게 되면, 사람들의 할 일들을 거의 다 인공지능이 하게 되리라는 전망이 나오는 것이다. 이미 인공지능이 대신한 기능들과 일자리들은 많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일자리들이 동시에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지적 계산 기능이 상대적으로 중요한 중간 계층의 일자리들이 육체 노동이 상대적으로 많은 일자리들보다 훨씬 빨리 인공지능으로 대치되는 경향이 있다.

이런 경향은 ‘모라벡의 역설(Morvec’s Paradox)’이라 불리는 현상과 관련이 깊다. 1980년대에 로봇 공학을 연구한 사람들은, 로봇 공학의 선구자인 한스 모라벡의 표현을 빌리면, “전통적 가정과는 달리, 높은 수준의 추론은 아주 작은 계산이 필요하지만, 낮은 수준의 지각동작 재능들(sensorimotor skills)엔 엄청난 계산 능력이 요구된다”는 것을 발견했다. 아득한 세월에 걸쳐 진화한 동물들의 지각과 동작을 로봇들이 하도록 하는 것이 무척 어렵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었다. 이런 사정은 “로봇들은 어려운 일들은 쉽고 쉬운 일들은 어렵다는 것을 발견한다 (Robots find the difficult things easy and the easy things difficult)”는 역설의 형태로 단순화되었다.

그래서 별다른 지적 능력은 필요하지 않지만, 손발을 많이 쓰는 일자리들이 다른 일자리들보다 인공지능의 영향을 덜 받는다. 로봇 공학의 발전이 예상보다 훨씬 더디다는 사정을 고려하면, 이런 상황은 오래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인공지능의 확산이 일자리를 줄이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새로운 기술은 묵은 일자리들을 줄이지만, 이어 새로운 일자리들을 만들어낸다. 미국 생물철학자 대니얼 데넷(Daniel Dennett)이 강조한 것처럼, 새로운 기술은 새로운 ‘설계 공간’을 만들어내어, 새로운 산업들과 일자리들이 나타난다. 그리고 장기적으로 경제의 성장을 돕는다. 고대 문명부터 지금까지 늘 그러했다.

그러나 인공지능이 대체하는 것은 사람의 지능이므로, 다른 기술들이 사람의 근육을 대치하거나 보완한 것과는 성격이 다르다. 혹시 이번에는 다를까?

이 걱정스러운 물음에 대한 답을 우리는 ‘세의 법칙(Say’s Law)’에서 찾을 수 있다. 흔히 ‘공급은 자신의 수요를 창출한다’는 표현으로 단순화되는 이 법칙은 공급과 수요가 맞물려 돌아가는 시장 경제의 모습을 잘 설명한다.

인공지능을 갖춘 기계들과 체계들이 올린 소득은 그것들을 생산에 투입한 사람들의 소득이 된다. 그리고 그런 소득은 조만간 다른 재화들에 대한 수요로 바뀐다. 재화들을 공급하기만 하고 거기서 생긴 소득을 퇴장시키는 행태는 너무 비합리적이어서 나올 수 없다. 케인즈(John Maynard Keynes)가 지적한 대로, 사람들은 소득의 상당 부분을 유동적 자산으로 저축한다. 그래서 단기적으로는, 특히 경기가 침체할 때는, 소득의 상당 부분이 퇴장될 수 있지만, 언젠가는 퇴장된 소득도 소비되므로, 이런 현상도 장기적으로는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

그래서 인공지능과 사람의 지능 사이의 경제적 관계는, 적어도 예측가능한 미래까지는, 협력적일 터이다. 모두 인공지능의 도움으로 자신의 생산성을 높이려 애쓸 것이고, 사람들은 인공지능이 없앤 묵은 일자리들에서 인공지능 덕분에 새로 나온 설계 공간의 일자리들로 이동할 것이다.

복거일 객원 칼럼니스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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