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삼 칼럼] 대통령 문재인이 급칭송한 김원봉에 대해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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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초승인 2019.06.07 15:47:39
  • 최종수정 2019.06.07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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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민테른 자금 받아 의열단 활동, 중국 정부 지원받아 조선의용대 조직, 의용대에서 왕따 당한 후 임시정부와 손잡고 광복군 부사령관, 해방 후엔 좌우합작운동을 펼쳤던 폭력·암살·파괴 독립운동의 대부(代父). 1948년 남북협상 위해 월북했다가 북에 정착하여 노동상, 국가검열상을 역임하며 이승만 노선의 대척점에 서 있었던 인물이 김원봉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런 인물을 지속적으로 띄워야 하는 무슨 특별한 사연이라도 있는 것일까?

먼저 현충일 기념사 이야기부터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대한민국 대통령 문재인은 다른 날도 아닌 6월 6일 현충일 기념사에서 김원봉과 조선의용대, 광복군이 대한민국 국군 창설의 뿌리가 되었다고 급칭송했다. 대체 김원봉이 누구이기에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이 잠든 국립현충원에서, 그 분들의 희생을 기리는 날을 골라 칭송을 했을까?

이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필자는 김원봉이 해방 공간에서 월북하여 북한 탄생에 일조했고, 북한을 위해 일했다는 원죄를 바탕으로 그의 활동을 싸잡아 비난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그가 택했던 그 길과 방법론이 과연 이 민족, 이 국가가 나가는 장도(壯途)에 있어 올바른 방향이었는지를 따져보고 싶을 따름이다. 

김원봉은 무력·폭력·암살·군대 조직 등의 방법을 통해 ‘강도 일본’과 싸워 독립을 쟁취하겠다고 나섰던 대표적인 무장 독립투쟁론자였다. 자신의 신념을 위해 그는 중국으로 망명했고, 중국에서 3·1운동 소식을 듣고 크게 실망했다. 동포들의 궐기가 무력항쟁이 아닌, 비폭력 운동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선택한 길은 선명한 폭력투쟁이었다. “끊임없는 폭력만이 강도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마침내 조국광복의 대업을 성취할 수 있는 길”(박태원, 『약산과 의열단』, 깊은 샘, 2000, 31쪽)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김원봉은 신흥무관학교에서 1~2개월 동안 폭탄제조법을 배웠다.

코민테른 자금 지원받아 의열단 활동

1919년 11월 9일 중국 길림성 파호문(把虎門) 밖 중국인 반모(潘某)의 집에서 의열단을 조직했다. 3·1운동의 미지근한 비폭력 투쟁의 비판적 대안으로 과격하고 급진적인 폭력투쟁을 전개키로 한 것이다. 단장에 해당하는 의백(義伯)에 김원봉이 선출되었다. 김원봉의 의열단 활동에 대한 김삼웅의 평은 다음과 같다.

“그들은 거의 종교적인 열광으로 테러 활동을 숭상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정예 용사들로서 오직 모험적인 행동만이 능히 일제의 식민통치를 뒤엎을 수 있다고 굳게 믿었고, 망국의 치욕을 자기들의 피로써 능히 씻을 수 있다고 믿었다.”(김삼웅, 『약산 김원봉 평전』, 시대의 창, 2019,88쪽)

의열단 활동을 위해서는 많은 자금이 필요했다. 그 중요한 자금 제공자는 소련공산당, 즉 코민테른이었다. 그는 ‘일제’를 타도하기 위해 이념과 노선을 따지지 않는 인물이었다. 공산주의, 아나키스트가 그가 추구했던 길이다.

김원봉은 베이징에 의열단 본부를 두고 임시정부를 반대하는 신채호·박용만·이회영 등과 손을 잡았다. 그가 임시정부에 등을 돌린 것은 안창호로부터 “폭탄을 함부로 사용하지 말고 (임시정부) 군사당국에 예속하여 실력을 쌓은 후 시기가 무르익었을 때 거사할 것, 모험 행동을 피하고 필요한 시기에 대대적으로 행동할 것”을 요구받았기 때문이다(한상도, 「1920년대 의열단의 노선 재정비과정」, 『독립운동사의 제문제』, 범우사, 1992, 168쪽).

베이징파 요인들이 상하이에 와서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 타도 시위를 할 때 김원봉도 여기에 참여해 연설을 했다고 한다. 또 이승만이 국제연맹에 위임통치 청원을 했다는 이유로 신채호 등 민족주의자들로부터 격렬한 비난을 받고 있을 때, 이승만을 암살하기 위해 의열단원이 상하이로 파견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여차하면 암살이요, 테러를 가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승만은 "왜적보다 더 무서운 것이 우리 동포"라고 말했을 정도다.

당시 임시정부의 국무총리 이동휘는 고려공산당 소속 공산주의자로서 상해 임정은 출범부터 좌우합작 형태를 취했다. 그러니 이념갈등, 지역갈등, 노선갈등으로 자고 일어나면 싸웠고, 회의가 열렸다 하면 아귀다툼이 일었다.

이동휘는 소련이 제공한 40만 루블의 지원금을 임시정부 자금으로 내놓지 않고 고려공산당 운영자금으로만 사용했다. 소련은 임시정부를 뒤흔들어 소련을 추종하는 공산주의 정부로 돌려세우기 위해 공산주의자 이동휘에게 엄청난 금액을 지원한 것이다. 소련공산당이 제공한 40만 루블 중 일부가 의열단에 제공되었고, 의열단은 이 돈이 소련공산당의 돈이란 사실을 알고 활동자금으로 썼다. 

의열단과 소련과의 관계에 대해 동아일보는 “(의열단은) 계속하야 각종 음모를 계획하여 왔으나 재정의 궁핍으로 자금을 변통하기에 고심하던 차에 마침 로국공산당(소련공산당)이 일부 조선인을 이용하여 적화선전을 하려고, 단장 김원봉도 자금을 얻어서 목적한 계획을 달함에는 공산당과 악수하는 것이 가장 유리하다 하여 대정 10년 말 경에 드디어 공산당과 결탁…”이라고 보도했다(동아일보, 1923년 4월 12일).

민중이 우리 혁명의 대본영,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무기

의열단의 투쟁을 기리기 위해 쓴 글이 신채호의 ‘의열단 선언’이다. 이 글에서 신채호는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과 그의 추종자들이 주창한 외교독립론, 실력양성론, 준비론을 격렬하게 성토했다. 그러한 독립운동 방략은 칼 한번, 총 한방 쏘지 않고 편지질이나 하고, 조선의 독립을 외국의 처분에 맡기고 기다리는 것이라며 질타한 것이다.

신채호와 의열단원들이 원했던 노선은 “외교, 준비 등의 미몽을 버리고 민중직접혁명의 수단을 취함을 선언하노라”였다. 즉 폭력적 암살·파괴·폭동을 줄기차게 일으켜야 한다는 것이다. 신채호는 또 “우리 민족의 신생명을 개척하자면 양병 10만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그리하여 2000만 민중이 일치하여 폭력파괴의 길로 나가야 한다면서 다음과 같이 ‘의열단 선언’을 끝맺고 있다.

<민중이 우리 혁명의 대본영이다.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무기이다. 우리는 민중 속에 가서 민중과 휴수(携手·손을 잡고 함께 간다는 뜻)하야, 부절하는 폭력-암살·파괴·폭동으로써, 강도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 생활에 불합리한 일체 제도를 개조하야, 인류로써 인류를 압박치 못하며, 사회로써 사회를 박삭지 못하는, 이상적인 조선을 건설할지니라.>

김원봉의 생가터인 밀양에 '의열기념관'이 작년 3월 7일 문을 열었다.(사진 연합뉴스 제공)
김원봉의 생가터인 밀양에 '의열기념관'이 작년 3월 7일 문을 열었다.(사진 연합뉴스 제공)

이 무렵 이승만은 의열단이 추구했던 암살·파괴·폭력투쟁 방식에 대해 가혹한 비판을 제기했다. 그가 투항주의자이고 개량주의자 내지 일제 통치 협조자여서가 아니다. 이승만이 무장투쟁이나 의거와 같은 유혈 봉기에 거부감을 가지게 된 이유는 미국 유학 시절인 1908년과 1909년에 발생한 스티븐스와 이토 히로부미 암살 사건 때문이다. 이승만의 자서전에서 당시 상황을 옮겨본다.

‘내가 하버드대학에 재학하고 있을 때 일본이 한국을 말살하기 위해 한국정부의 고문으로 앉혀놓았던 더함 스티븐스가 두 한국 사람에 의해 샌프란시스코에서 암살되었다…. 그리고 안중근 열사가 이등(이토 히로부미)을 하얼빈에서 살해했다. 신문에는 한국 사람들은 잔인한 살인광들이며 무지몽매해서 그들의 가장 좋은 친우인 이등과 스티븐스를 살해했다는 기사들이 가득 실리곤 하였다. 어떤 학생들은 나와 이야기하는 것을 두려워했고, 나의 교수는 나를 얼마나 무서워했던지 나의 석사논문을 나에게 우송해 주고는 (여름방학에 피서지로) 떠나기 전에 나를 만나주지 않았다.’(이승만, 「청년 이승만 자서전」, 원영희‧최정태 편, 『뭉치면 살고…』, 조선일보사, 1995, 119~121쪽)

장인환·전명운 두 의사의 스티븐스 암살은 미국 내에 혐한(嫌韓) 분위기를 조성했다. 그 여파로 이승만은 하버드대 대학원 담당교수로부터 면담은 물론 논문심사까지 거절당했다. 한국인들 입장에서는 잃었던 나라를 되찾기 위한 정당한 의거라도 미국 언론이나 시민들의 눈에는 ‘암살자는 흉악한 악당’ 식으로 해석되는 것을 보면서 폭력을 동원한 독립운동은 한국의 독립을 앞당기는 것이 아니라 일본의 지배를 정당화해 줄 뿐이라는 교훈을 얻었던 것이다.

칸트는 『영구평화론』에서 전쟁을 방지하기 위해 꼭 해야 할 세 가지와, 하지 말아야 할 일 6가지를 꼽았다. 하지 말아야 할 내용 중 여섯 번째 항목이 “어떠한 국가도 다른 나라와의 전쟁 동안에 장래의 평화 시기에 상호 신뢰를 불가능하게 할 것이 틀림없는 다음과 같은 적대 행위, 암살자나 독살자의 고용, 항복 조약의 파기, 적국에서의 반역 선동을 해서는 안 된다”라는 내용이다.

무기 들고 투쟁보다 국제법 공부가 더 중요

칸트의 영구평화론 제6조에 의거하여 이승만은 암살이나 테러, 파괴공작이 독립을 가져올 수 없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깨닫게 된다. 그리하여 스티븐스 사건이 발생한 후 이승만은 의병 활동에 비판적인 글을 1905년에 창간된 재미동포단체 신문인 『공립신보』에 기고했다.

이 글에서 이승만은 “의병 활동이 세상의 조소거리가 될까 우려된다”면서 제대로 된 군사 조련을 받지 못한 점, 조직에 체계와 규율이 없는 점, 만국공법을 알지 못해 남에게 개명한 애국당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민란당으로 취급당하는 점을 들어 의병 투쟁으로는 국권을 회복할 수 없다는 견해를 밝혔다.

반면에 일본은 서양과 통상 후 외국의 선진 학문과 문물제도를 도입하여 안으로 군사를 조련하고, 밖으로 영국 미국과의 외교에 힘써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했다면서, 남과 대적하려면 내가 먼저 준비해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학문의 숭상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무기를 들고 무장투쟁을 하는 것보다 공부가 더 중요하다고 절절히 외친 것이다(이승만, 「남을 대적하려면 내가 먼저 준비할 일」, 『공립신보』, 1908년 8월 12일).

그의 의병 비판은 9월 9일 『공립신보』에 기고한 「일본의 기탄하는 일이 곧 우리의 행복된 일이라」 라는 제하의 논설에서도 계속 이어졌다. 이 글에서 이승만은 의병이 자기 형세와 세상 공론을 돌아보지 않고 용진하는 마음으로 도처에서 일어나 지방을 소란스럽게 하는 것은 일본이 오히려 반기는 바라고 주장했다. 공법으로 세상에 알린 뒤 군사를 보내 하나씩 무찌르면 그만이고, 그로 인해 도탄에 빠진 백성들이 차라리 일본의 보호라도 받아 편하게 살기를 원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의병투쟁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학문을 배워 부강문명으로 나가는 것이라 주장했다. 이승만의 글을 소개한다.

“일본이 가장 꺼리는 바 외국에 나오는 조선 학생들이라. 지금은 앞뒤길 다 막아놓고 더 나올 수도 없으나, 기왕 나온 자만 가지고라도 모든 문명한 각색 학문을 배워 자유 자치하는 법과 부강문명에 나가는 이치를 알아 일변으로 글도 짓고 말도 하여 일본의 야심을 세상에 반포하며, 일변으로 제 나라 동포를 가르치며 인도하여 장래에 후환이 될까 두려워하는 바요,”(이승만, 「일본의 기탄하는 일이 곧 우리의 행복된 일이라」, 『공립신보』, 1908년, 9월 2일)

이승만이 외교독립론을 주창한 또 한 가지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다. 당시 일본은 1차 세계대전을 통해 세계열강으로 발돋움하여 동아시아에서 대적할 상대가 없는 강국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일본의 판도는 북쪽으로는 바이칼 호 동쪽의 시베리아 지역에서부터 북만주 일대, 중국에서는 산동과 화중(華中)지역 양자강 일대, 남쪽으로는 태평양의 남양군도까지 광활한 지역을 장악했다.

그전까지 전 세계를 호령하던 서양 열강들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전승국이나 패전국을 가릴 것 없이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다. 러시아에서는 공산 혁명이 일어나 갈등과 대립이 격화되었다. 따라서 동아시아 전역으로 뻗어나가는 일본을 억제하거나 견제할 세력이 없었다.

조선의용대는 중국 정부가 조직한 부대

열강으로 급부상한 일본은 산업력이나 군사력에서 다른 서양 열강들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았다. 제1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 일본은 해군력 확장에 전력을 기울여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미국과 비슷한 수준에 올랐다. 급기야 1922년 워싱턴에서 군축회의를 열어 일본의 해군력 확장을 제한해야 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이처럼 강력한 일본을 상대로 김원봉의 의열단이나 박용만, 노백린 등이 구상한 수백 명 규모의 빈약한 무장을 한 군대가 독립을 위한 무장투쟁을 벌일 경우 얼마나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둘 수 있었을까? 더구나 한국의 독립군은 체코 군단처럼 국제적 지원이나 관심도 끌지 못했다. 숭고한 이상은 현실이 뒷받침될 때 비로소 빛나는 법인데, 우리의 무장 독립운동은 이상은 원대했으나 현실이 따라주지 않았다.

1938년 10월 10일 김원봉이 만든 것으로 알려진 조선의용대도 심각하게 따져봐야 할 점이 너무나 많다. 이 부대는 중국 정부의 정치부가 관할하는 조건으로 조선의용대의 창설을 승인했다. 좀 더 엄밀하게 말하면 중국 정부가 김원봉에게 의용대를 창설하라고 하여 부대가 만들어지자 김원봉을 대장에 임명한 것이다. 

중국 정부 산하에 소속되어 있던 조선의용대 대원들은 중국 정부로부터 매월 식비 20원과 공작비 10원씩을 지급받았다. 이런 한계 때문에 아무리 이 부대를 미화찬양해도 국민당 정부군 산하의 지원부대 성격을 벗어나지 못했다. 인원도 약 100여 명으로 출발하여 1940년대에는 최대 314명까지 늘어났다. 무장한 군대도 아니어서 주로 포로 심문과 일본군에 대한 비라 살포 등 반전(反戰)활동이 고작이었다.

조선의용대는 1940~1941년에 걸쳐 이념과 투쟁 방향을 놓고 갈등을 빚으면서 김두봉, 최창학 등 대원의 대다수가 중공 치하의 연안으로 탈출하여 팔로군 산하로 들어갔다. 김원봉은 중국 공산당의 반대로 화북으로 가지 못하고 충칭(重慶)에 남게 되었다. 이유는 김원봉이 조직생활을 한 적도 없고, 오로지 극소수 인원을 중심으로 테러 암살 활동을 하던 아나키스트였기 때문이다.

김원봉이 마오쩌둥 산하로 떠나지 못하고 충칭에 남게 된 이유에 대해 김학철은 “만일 김원봉이 중경을 떠났다면 수백 명의 망명객 가족들은 무엇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겠는가. 이들은 김원봉을 믿었고, 김원봉은 국민당 정부의 지원금으로 이들을 먹여살려야 했다. 때문에 김원봉은 이들을 버리고 혼자만 연안으로 갈 수 없었다”고 증언했다.

동료들에게 왕따 신세가 된 김원봉은 연안으로 가지 못한 일부 조선의용대를 수습하여 그가 그토록 혐오했던 임시정부와 손잡고 군무부장을 맡았고, 광복군 부사령관을 맡게 된다. 광복군이 출범한 날은 1940년 9월 17일이다.

중국군이 광복군 지휘권 행사

임시정부는 광복군을 유지 운영할 재정적 여력이 없었다. 그 결과 1941년 11월 19일 임정은 중국 정부와 협상 끝에 중국 정부로부터 광복군의 훈련과 무기·장비·급여 및 경비 일체를 지원받는 조건으로 광복군의 모든 행정과 작전은 중국군사위원회의 통할 지휘를 받는 것을 수락했다.

즉 광복군의 활동자금을 지원받는 대가로 지휘권을 중국군 참모총장에게 넘긴 것이다. 그 결과 광복군 지휘부의 모든 요직은 중국군 장교에게 넘어갔다. 김삼웅은 광복군의 상황에 대해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고 해명한다. 비록 중국군의 명령과 지휘감독을 받을지언정 일본군을 격멸하고 조국의 자주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연합군의 일원으로서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항일전에 나서는 것만이 민족적 대의(大義)였다는 것이다.

좌익·공산전체주의자들은 지금도 이승만이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유엔군에게 넘긴 것을 “자주권의 포기”니 뭐니 하며 극악무도한 언어를 동원하여 비판한다. 그렇다면 의아한 것이 있다. 광복군의 작전지휘권을 중국군에게 넘긴 것은 민족적 대의라고 미화찬양하면서, 6·25 남침전쟁이 벌어졌을 때 한국군이 유엔군의 일원이 되어 싸울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유엔군에게 위임한 이승만의 행위가 그토록 비난받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신채호가 ‘의열단 선언’에서 그토록 열망했던 양병 10만도 환상의 목표에 불과했다. 태평양전쟁 말기인 1945년 초 일본은 중국대륙, 태평양에서 미국·중국·영국 등 연합국과 싸우느라 720만 대군과 항공모함·전함·전투기·폭격기·전차 등 최신 무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광복군은 출범 당시 창립 1년 후 최소 3개 사단 편성을 목표로 삼았다. 거창했던 창군 당시의 계획에도 불구하고 1945년 4월 광복군의 규모는 541명(중국인 장교 65명), 종전 시점에도 682명에 불과했다. 682명이든 6820명이든 숫자가 중요한 게 아니다. 임시정부는 광복군에 대한 명목상의 통수권만을 가지고 있었을 뿐, 작전에 대해서는 어떠한 의견도 낼 수 없는 고단한 처지였다.

이러한 광복군을 대통령 문재인은 국군의 뿌리이자 모체라고 선언했고, 소련공산당의 자금을 받아 의열단 활동을 했고, 중국 정부 자금을 받아 활동했던 조선의용대를 칭송했다. 그가 참여한 광복군이 국군 창설의 뿌리라고 언급했다. 아나키스트 테러리즘, 중국 정부 산하의 조선의용대, 광복군 통수권 및 지휘권은 중국군 보유로 점철된 존재를 '국군의 모태'라 한다면 대한민국 국군의 뿌리는 중국군이 되어야 마땅하다는 뜻인가?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대한민국 대통령인데, 그 분 지금 제 정신인가?

김원봉은 해방이 되자 귀국하여 서울에서 김구와 함께 좌우합작운동을 벌였다. 당시 정치 정세 하에서 좌우합작의 마지막 종착역은 ‘공산화’라는 사실을 꿰뚫어본 인물은 이승만이 유일했다. 이승만은 끝까지 좌익과의 투쟁을 통해 남한만이라도 정부를 세워 공산화를 막아야 한다고 주장한 선각자였다.

김원봉은 1948년 김구와 함께 평양의 남북협상에 참여한 후 북한에 그대로 정착했다. 이후 한국의 국회에 해당하는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 초대 내각의 국가검열상, 6·25 전쟁 때는 군사위원회 평북도 전권대표로 북한 정부의 훈장을 받았다. 전후에는 노동상(한국의 노동부장관에 해당)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한국의 국회부의장에 해당) 등을 지냈다. 그는 1958년 김일성 유일지배체제 구축 과정에서 숙청당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김원봉은 독립운동 과정에서 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 열심히 한다고 했지만, 그가 선택한 길은 결코 성공을 담보한 길이 아니요, 역사를 후진시킨 원동력이 되었다. 그는 이승만의 대척점에 서서 이승만과 반대 노선을 줄기차게 걸었고, 대한민국 건국이 아닌 북한 건국에 앞장섰다. 문재인 대통령은 위험천만한 길을 스스로 선택해서 걸은 김원봉을 미화찬양할 수밖에 없는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것일까?

김용삼 대기자 dragon0033@pennmik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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