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훈 칼럼] 1919년 건국설(說)을 다시 개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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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초승인 2018.02.05 10:51:52
  • 최종수정 2018.02.12 17:36
  • 댓글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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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건국설은 근거없는 주장이며 지적 사기
매국·매족 행위로 치부된 이승만의 편지, 제대로 한번 읽어보라
1919년에 나라를 세웠다고 주장한 어떤 정치세력이라도 있었는지 묻는다
이영훈 객원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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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에 제기되어 그 세를 확산해 온 1919년 건국설은 한마디로 대한민국의 천박한 지성수준을 국제사회에 폭로하는 수치이다. 지난 칼럼에서 지적한 한 가지 이유는 이승만, 이동휘, 안창호, 김구 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주역 가운데 어느 누구도 그런 주장을 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들의 말과 행동은 그들이 새로운 나라를 세우기 위해 힘겹게 투쟁하고 있다는 것 이상을 넘지 않았다. 다시 말해 원인 행위와 주체가 없는데 후대의 역사가와 정치가가 새로운 나라가 세워졌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이다. 

임시정부의 조직과 행태를 새로운 나라의 건립으로 볼 수 있다는 일부 역사가의 해석은 근거가 되지 못한다. 새로운 나라의 건립을 선포하고 관철하고 나아가 1948년의 ‘정부수립’까지 주도한 정치세력의 존재야말로 1919년 건국설의 마땅한 근거이다. 그렇지만 아무리 살펴도 그런 정치세력은 찾아지지 않는다. 근거도 없는데 주관적 해석만으로 새로운 국가가 건립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솔직히 말해 지적 사기이다. 낮은 수준의 후진국에서나 통하는 공공연한 역사 조작이다. 그 허위의 역사상에 절반의 국민이 몰입하고 심지어 대통령까지 가세하고 있다. 그래서 개탄하지 않을 수 없는 나라의 수치라고 한 것이다.

한 나라가 세워짐은 영토와 주민을 합법적으로 지배하는 권력의 성립이 국제사회의 공인을 받음을 말한다. 모든 건국은 본질적으로 국제적 사건이다. 쉽게 이야기해서 세계지도에 자기 국호와 국경을 가진 나라가 그려지는 것이 건국이다. 1919년의 임시정부가 이 같은 요건의 어느 하나도 갖추지 못했음은 삼척동자도 아는 일이라 새삼 지적하기가 민망할 정도이다. 여기서 1919년 건국설의 지지자들에게 상기해 주고 싶은 것은 건국이란 사건이 지니는 문명사적 의의에 관해서이다.

국가를 성립시키는 합법적 권력은 이념의 결정체이다. 조선왕조는 유교를 국시로 받드는 정치세력에 의해 세워졌다. 미국은 자유민주주의를, 중국은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정치세력에 의해 세워진 나라이다. 1919년 임시정부를 세운 정치세력의 이념은 무엇이었던가. 주지하듯이 임시대통령 이승만은 최초의 자유민주주의자이다. 국무총리 이동휘는 최초의 공산주의자이다. 임시정부 논의에 참여한 신채호는 최초의 민족주의자이다. 임시정부 의정원과 국무원을 구성한 20여 명은 이 세 부류의 어느 하나였다. 

국무총리 비서로 근무한 경력의 이강훈은 임시정부를 두고 “악착스런 지방열, 사상적 대립과 편견 때문에 일제에 대한 투쟁보다 동족끼리 싸우는 데 정력을 소모하는 비중이 훨씬 컸다,” “아직 한 치의 땅도 회복하지 못한 가운데 서로 시기, 질투, 중상, 사분오열하였다,” “임시정부라는 위대한 간판 밑에 애국지사의 탈을 쓴 무리들이 빗나간 정치극을 반복하였다.”고 혹평하였다(『대한민국임시정부사』). 이 말을 두고 한국인은 천성에서 분열하고 당쟁을 일삼는다고 치면 큰 잘못이다. 그런 인종주의적 편견은 단호히 배격되어야 한다. 사람들이 이념을 공유하지 못할 때 어느 인종이건 그런 상태에 빠질 수밖에 없다. 

나는 최초의 자유민주주의자와 최초의 공산주의자와 최초의 민족주의자가 모인 임시정부에서 분열과 쟁투는 불가피했다고 생각한다. 역사와 세계를 이해하는 식견에 큰 차이가 있었고, 지향하는 미래도 같지 않았다. 1919년 4월 11일 불과 몇 사람이 서둘러 결성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임시헌장 제1조에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하였다. 이후 그 임시정부를 허물고 한성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중심으로 동년 9월 11일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새롭게 조직되었다. 연해주의 공산주의자들로 이루어진 대한국민회의도 스스로를 해체하고 임시정부에 참여하였다. 그렇지만 통합 임시정부의 부풀어진 인적 구성은 대한민국의 정체가 민주공화국임에 합의할 수 없었다. 그래서 임시헌법 제1조는 “대한민국은 대한 인민으로 조직함.”이라 했는데, 있으나마나 한 동어반복에 불과하였다. 

이들이 한자리에 오래 앉을 수 없는 관계임은 동년 3월 2일 이승만이 국제연맹이 완전 독립을 전제로 한국을 일본에서 분리하여 위임통치해 줄 것을 청원하는 편지를 미국의 윌슨 대통령에 보낸 사건을 둘러싸고 벌어진 논란의 과정을 들여다보면 더 없이 명백하다. 신채호는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았지만, 이승만은 있지도 않은 나라를 팔았다.”는 더없이 독한 욕설을 남기고 임시정부에서 탈퇴하였다. 임시정부의 외무총장으로 영입된 박용만도 동일한 이유로 취임을 거부하였다. 

동년 9월에 성립한 통합 임시정부의 국무총리 이동휘 역시 동일한 빌미로 대통령 이승만을 공격했으며, 여의치 않자 임시정부와 결별하였다. 폭로된 바에 의하면 공산주의자들은 분열을 조장한 다음 임시정부를 접수할 요량이었다. 1921년 4월 54명의 명의로 발표된 이승만 성토문은 그의 위임통치 청원을 나라를 미국의 식민지로 넘긴 매국·매족 행위로 단죄하였다. 단언컨대 그들 중 어느 누구도 그 편지를 읽지 않았으며, 읽더라도 그 내용을 이해할 지력을 소지하지 않았다. 그 점은 2018년 오늘에조차 마찬가지일지 모른다. 그 편지는 한국을 중립적 상업국으로 분리함이 동양의 평화와 세계 민주주의의 발전에 얼마나 긴요한 일인지를 열강에 호소한 당대 최고지성의 웅변이었다. 

최정운 교수의 『한국인의 탄생』이 설파하듯이 20세기 초 한국인은 홉스적 자연상태에 빠져 서로를 증오하며 거칠게 싸웠다. 독립운동은 한국인들끼리의 투쟁이었다. 나라는 망하였고 사회는 해체되었다. 인간들을 신뢰와 협동으로 이끌 새로운 질서는, 공화의 커다란 틀은, 아직 미발견 상태였다. 최정운 교수는 이승만을 매국노로 성토함에 앞장 선 최초의 민족주의자 신채호의 정신세계를 “근대에서 중세 또는 전근대의 지하감옥으로 끌려가는 포로”와 같은 것으로 진단하였다. 한국인이 홉스적 자연상태에서 탈출하여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기에는 훨씬 더 많은 세월이 필요했으며, 1919년은 겨우 첫 발걸음을 뗀 단계에 불과하였다.

나는 지난 칼럼과 이 칼럼을 1919년 건국설을 제기한 한국근현대사학회, 특히 한시준 교수, 그것을 단체의 주의로 채택한 광복회, 이들과 협력한 민주당, 그리고 공공연하게 그것을 지지한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공개질의서로 제출한다. 나는 묻는다. 1919년에 새로운 나라를 세웠다고 주장한 어떤 정치세력이 있기라도 했던가. 그 나라의 정치이념은 무엇이었던가. 해방 후 임시정부가 주장한 법통은 새로운 나라를 건립할 과도정부의 역할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었던가. 대한민국이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었다는 주장은 역사의 진실이 아니다. 몇몇 하찮은 인물의 음모로 1987년 헌법 개정 당시 그 같은 취지의 역사 조작이 이루어진 경위를 조사할 의향은 없는가.

이영훈 객원 칼럼니스트(전 서울대 교수/이승만학당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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