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을 장악한 스탈린과 히틀러는 일당독재와 개인숭배를 통하여 그 지배체제를 강화하면서 영구집권을 추구해 나간다. 큰 차이점은 스탈린은 공산당을 완전히 장악함으로써 가능한 한 국가지도자의 지위에 오르지 않으면서도 독재자로서 소련을 지배하였던 반면 히틀러는 헌법 개정을 통하여 독재권을 획득하였고 국가원수의 지위에 기반하여 기존의 관료조직을 통하여 독재자로서 독일을 통치하였다.

소련의 경우 인민은 직접선거로 소비에트 대회 대의원을 선출하고 소비에트 대회는 중앙집행위원회를 선출하였다. 소련의 유일한 합법정당인 공산당의 당직에 해당하는 중앙집행위원회는 전국을 대표하는 연방의회와 주요 민족들을 대표하는 비례대표로 구성되었다. 소비에트 대회는 공산당 내의 중앙집행위원회뿐만 아니라 각각 입법부와 행정부에 해당하는 간부회와 인민위원회의도 선출하였는데 간부회 의장은 소련의 국가 수반을 인민위원회 의장은 내각 수반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1936년의 헌법 개정으로 기존의 소비에트 대회는 인민들의 직접선거로 대의원들을 선출하는 최고소비에트로 대체되었는데 간부회는 선출하고 인민위원회의는 지명하였다. 1930년대 인민위원회의 의장이었던 뱌체슬라프 몰로토프 (Vyacheslav Molotov)에 의하면 인민위원회의 (1936년 이후에는 최고 소비에트)는 모든 의사결정에 있어서 공산당의 중앙위원회와 당 서기장 스탈린의 조언과 지시를 구하도록 되어 있었다. 스탈린은 자신이 독재자라는 비난을 받을 것을 우려하여 국가 최고위직의 자리에 오르지 않고 공산당을 장악하는 것으로 최고권력자의 권한을 행사했다.

나치 독일의 경우 1933년 히틀러의 수상 취임, 입법권을 행정부로 이관하는 수권법의 통과와 1934년 "장검(長劍)의 밤" 사건, 대통령 힌덴부르크의 사망 이후 국민투표를 통하여 히틀러가 대통령과 수상의 권한을 모두 가지는 총통 취임의 단계를 거치면서 나치스 일당독재를 넘어선 히틀러 개인독재의 길로 나아가게 된다.

여기서 "장검의 밤" 사건은 1934년 6월 30일 헌법 질서에 어긋나는 행위를 처단한다는 명분으로 히틀러의 개인 호위대인 친위대 (SS)가 나치 청년조직인 돌격대 (SA) 및 히틀러의 정적들을 처단한 일을 말한다.

이 사건의 배경을 분석해 보면 에른스트 룀 (Ernst Rohm)이 지도하던 돌격대는 히틀러에게 자신들이 독일 국방군의 장교 및 하사관으로 임명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기존의 군 수뇌부는 이에 대하여 반발하면서 힌덴부르크 대통령에게 계엄령을 선포할 것을 요구하게 된다 히틀러는 자신의 실각을 우려하여 하인리히 힘러 (Heinrich Himmler)의 친위대에게 룀 등 돌격대 수뇌부를 체포하여 처형하게 하고 나치스 내의 경쟁자이던 슈트라서 (Strasser)와 전임 수상이었던 슐라이허 (Schleicher)까지 반역 혐의로 암살하는데 이 날 이후 독일 내부에는 히틀러에 대항할 정치세력이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돌격대는 주로 프롤레타리아 출신들로 구성되었고 스스로 군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던 반면 친위대는 치안유지 등 경찰의 보조적 역할을 하기를 희망하였고 아리아 인종임을 증명하는 혈통증명서를 가진 자들에 한하여 가입이 인정되었으며 부르주아 출신들이 많았다고 한다. 이는 독일의 기존 상류층이 돌격대에게는 상당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으나 친위대에 대하여는 경찰의 업무를 대행하는 일종의 공무수탁사인 (公務受託私人)으로 인식하게 되는 주요한 원인이 되었다.

동일한 일당독재체제이기는 하나 스탈린의 소련에서는 공산당이 정부보다 우위에 있다가 점차 정부가 강화되어 가는 반면 히틀러의 독일에서는 정부가 나치스보다 우위에 있다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정당의 권한이 강화되어 가는 차이점을 보인다. 즉, 미개발 지역이 많은 후진국이었던 소련에서는 공산당이 지방의 국가 행정조직을 만들어 가는 역할을 하였던 반면 당시 영국, 프랑스와 동등한 수준의 선진국이었던 독일에서는 나치스가 기존의 지방 행정조직을 장악해 가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국가 발전의 공헌도에 있어서는 소련의 공산당이 독일의 나치스보다 높게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두 독재자는 개인숭배를 통하여 자신의 권력을 더욱 강화하려고 노력하는데 스탈린은 제정 러시아의 차르 (Tsar) 숭배의 전통을 이용하여 레닌의 시신을 방부처리하고 그를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순교, 부활, 불멸의 존재로 신격화한 후 자신을 그의 가장 가까운 동지였던 것으로 선전하여 당내 권위를 확보한 이후 서서히 레닌의 자리를 자신의 모습으로 대체해 나갔다. 1920년대에는 레닌을 주인공으로 하고 그 옆에 스탈린을 배치하는 포스터가 작성되었으나 1930년대부터는 스탈린이 중심에 위치하고 레닌은 그림자 내지 배경인물로 하는 인쇄물이 대량으로 배포되었다.

히틀러는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 (Friedrich Nietzsche)가 언급한 초인이라는 개념을 독일 민족을 구원할 지도자로 해석하면서 자신에 대한 숭배를 정당화했다. 나치 독일에서는 인쇄물보다는 나치당 대회나 연설장면 등을 포함한 영화 등의 영상을 통하여 히틀러는 위대한 인물이라는 이미지를 대중 속에 심어주려고 하였는데 이는 히틀러가 게르만족의 이상적인 외모, 키가 큰 금발의 파란 눈을 가진 남자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개인적 숭배는 두 사람이 도덕적 속박에서 해방되는 효과를 가져와서 헌법과 법률에 위배되는 결정을 하여도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는 정도의 강력한 일인 독재체제까지 나아가게 되었다.

소련과 나치 독일 모두 국가 내부의 적들을 제압하기 위하여 국가적 차원의 폭력을 활용하였는데 각각 엔카베데 (NKVD)와 게슈타포 (Gestapo)로 대표되는 비밀경찰이 동원된다. 엔카베데의 경우 사상 검증을 통하여 국내의 우익 반동분자들을 색출하여 강제수용소로 보내는 역할을 맡게 되는데 그 기준이 주관적이어서 수많은 사람들이 무고한 희생자가 되었다. 이에 따라 모든 소련인들이 대숙청의 공포를 일상생활 속에서 체감하며 살아가게 되었다. 결국 이에 따른 책임을 지고 엔카베데의 수장이었던 니콜라이 예조프 (Nikolai Yezhov)마저 처형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반면 게슈타포는 독일 내의 비독일민족 (非獨逸民族)의 추방과 절멸에 목적을 두고 있어서 유대인들에게는 죽음의 공포를 가져오는 악몽과 같은 정부기관이었고 반체제 성향의 정치인, 언론인, 학자들에게는 영장 없는 긴급체포라는 두려움의 대상이었지만 독일 민족에 속하는 일반 시민들에게는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실제로 유대인 학살은 독일 영토가 아닌 폴란드 영토 내에서 비밀리에 이루어졌으며 이에 따라 독일인들 중에 이러한 비인륜적 국가행위에 대한 소문이 사실이라고 믿은 사람이 거의 없었다.

스탈린의 소련과 히틀러의 독일은 현실 세계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들의 이념에 부합하는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이를 향하여 나아가려고 하였다. 두 체제 모두 계급 없는 유기적인 공동체로서의 국가, 즉 전체주의 국가 건설을 추구하였는데 스탈린은 사회학적 유토피아, 히틀러는 생물학적 유토피아라는 목표를 위하여 인간 자체의 개조(改造)를 추구하는 것까지 시도하게 된다.

즉, 소비에트 연방은 장 라마르크 (Jean Lamarck)의 견해에 따라 인간의 형질은 환경 변화에 적응하면서 변화한다는 인식 하에 사회제도를 인위적으로 바람직한 방향으로 개혁하는 것으로, 나치 독일은 찰스 다윈 (Charles Darwin)의 진화론에 기반하여 적자생존 (survival of the fittest)을 실제로 적용하려 하였는데 우수한 아리아인의 유전자를 보호하기 위하여 기타 민족들과 생활공간을 분리하는 것으로 새로운 이상적 인간형을 창조하려 하였다.

이러한 양자의 차이는 자국 내의 소수민족 정책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스탈린의 소비에트 연방에서는 민족주의 (nationalism)를 계급해방과 사회주의 혁명의 수단으로 활용하여 적국과 관련이 있다고 의심되는 소수민족들 (독일인, 유대인과 한국인)을 강제이주 등으로 억압하는 한편 영토 내의 모든 민족들을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공동의 책무에 동원하기 위하여 그들의 자치권을 인정하는 한편 러시아어 교육을 장려하여 소비에트 연방의 행정체계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도록 유도하였다.

이에 비하여 히틀러의 나치 독일에서는 민족주의를 게르만 민족의 게르만 국가인 독일이라는 배타적, 방어적인 개념으로 이해하여 일관되게 생물학적으로 우월한 독일인의 장기적 생존을 위하여 유럽 내의 유대인, 집시, 슬라브인을 희생시키는 민족차별정책을 추진하였다. 이는 유럽 내의 유대인과 집시의 대량학살로 나타났으며 만약 나치 독일이 소련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였다면 히틀러는 동부 유럽에 거주하던 슬라브 민족들에게 시베리아로의 강제이주를 명령했을 것이다.

유태선 시민기자 (개인사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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