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삼의 현대사 추적] 역사를 오판하고도 반성조차 없이 혹세무민하는 6·3 세대
[김용삼의 현대사 추적] 역사를 오판하고도 반성조차 없이 혹세무민하는 6·3 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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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세대여. 당신들은 역사를 오판한 죄인들이다. 역사를 오판하고도 비판, 반성 한 마디 없는, 비겁하기 짝이 없다. 이 미친 광기의 세대들이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민주화 운동 운운하며 국민 혈세인 보상금 배상금 타먹는 재미에 빠져 망언을 서슴지 않고 있다. 미쳐도 단단히 미친 세대다. 역사를 오판하고도 반성조차 없는 6·3 세대 늙은이들 얼굴에 침을 뱉고 싶다.
한일회담 반대데모가 극성을 부리자 박정희는 1964년 6월 3일 밤 10시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한일회담을 성사시켰다. 사진은 비상계엄 선포를 보도하는 동아일보 보도.
한일회담 반대데모가 극성을 부리자 박정희는 1964년 6월 3일 밤 8시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한일회담을 성사시켰다. 사진은 비상계엄 선포를 보도하는 동아일보 보도.

오늘은 소위 말하는 6·3사태가 발발한 지 55주년 되는 해다. 6·3사태란 무엇인가? 한일 국교 정상화를 반대하는 시위가 폭동화하여 정권퇴진운동으로 번지자 박정희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하여 한일 수교를 추진한 사건이다.

필자는 이 사건을 박정희 재임 18년 간 국가 근대화를 위해 추진한 박정희의 3단계 쿠데타 중 2단계로 정의한다. 즉 5·16(1961)으로 권력을 획득하고, 한일 수교로 근대화 자금 마련을 위해 6·3 비상계엄을 선포(1964)했으며, 중화학공업과 자주국방 완수를 위해 10월 유신(1972)을 추진한 것이다.

그렇다면 박정희는 왜 자신의 대통령 취임 6개월 만에 정치적으로 큰 부담을 안고 한일회담 반대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비상계엄이란 초강수를 두었을까?

박정희는 1963년 10월 15일 선거에서 46.6%를 득표, 45.1%를 획득한 민정당의 윤보선 후보를 15만 6,026표차로 간신히 승리했다. 한국의 대통령 선거사상 가장 근소한 표차였다. 박정희는 대통령 취임 직후부터 한일 수교를 적극 추진하기 시작했다. 1962년부터 시동을 건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에 필요한 투자재원을 조달하기 위해서였다.

한일회담이 왜 하필 그 시기에?

박정희가 한일 국교 정상화를 추진하게 된 이유는 첫째 한국의 경제개발에 필요한 자금 확보와 안보 차원, 둘째, 미국의 글로벌 냉전전략 추진 차원, 셋째, 일본의 경제적 필요 때문이었다.

미국도 한일 국교를 정상화하라고 계속해서 한일 양국에 권유와 회유, 압력을 행사했다. 이유는 중국의 핵실험, 베트남 전쟁 악화를 틈 타 중공·소련·북한이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데 맞서 한국·미국·일본의 공조 필요성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6·25에서 입증되었듯이 한반도가 전쟁에 돌입했을 경우 후방기지가 되어줄 일본이 필요했다. 일본도 자신들의 안보에 한국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극동지역에서 반공전선 구축을 위해 한국과 일본의 지지와 협력이 필요했던 미국은 한일 양국을 설득, 회유, 압박하여 회담을 밀어붙인 것이다. 윌리엄 번디 미 국무부 동아시아 차관보는 1964년 한일 양국을 방문하는 도중에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한국은 극동의 평화를 위협하는 침략 세력에 맞선 보루 역할을 하고 있으며, 일본의 안보는 한국민이 독립을 유지하고 강력하고 번영하는 경제를 개발하는 능력과 불가결하게 연관되어 있다. 한일 관계 정상화는 아시아 평화라는 목적에 중요한 공헌을 하게 될 것이다.”

국제전략이라는 거시적 차원에서 볼 때 박정희의 한일 수교를 단순히 일본으로부터 자금·기술·경협을 위해서였다고 판단하면 큰 덩어리 하나를 놓치는 셈이다. 미국의 변화하는 글로벌 안보전략의 틀에 부응하기 위한 한국의 필수불가결한 선택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미국은 한일 회담이 파행을 거듭할 때마다 배후에서 양국에 강력한 압력을 행사했다. 1962년 5월 17일, 딘 러스크 국무장관은 케네디 대통령에게 제출한 한일관계 보고서에서 “한국은 전에 요구했던 청구권 금액을 낮춰 타결하겠다고 우리에게 시사했는데, 일본은 지난번보다 더 비타협적이다. 미국은 일본에 요시다 전 총리를 통해 이케다 총리에게 더 강한 압력을 넣어야 한다”고 보고할 정도였다.

한 달 후인 6월 13일 러스크 국무장관은 버거 주한 미국대사와 라이샤워 주일 미국대사에게 전문을 보내 “한일 두 나라 최고위층 인사에게 영향력을 행상하여 두 나라 국교정상화 회담을 촉진시켜라”라는 훈령을 보냈다. 1963년 2월 12일에도 미 국무부는 버거와 라이샤워 주일 미국대사에게 “정치적 요소는 접어두고 한일협상을 강력하게 추진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한일국교 정상화는 미국 입장에서는 동북아의 군사·정치적 안정 차원에서, 일본에게는 일본 기업들의 한국 진출 및 대미 무역적자 보전 차원에서, 한국은 경제개발 자금의 도입 및 안보 차원에서 한·미·일 세 나라 간 상호 유익한 거래였다.

하지만 한국인들의 반일 감정이 큰 걸림돌이었다. 당시는 해방된 지 20년도 안 되어 식민지 시절의 어두운 기억이 생생하게 남아 있던 시절이었다. 절대다수의 국민들, 특히 양반 지주 출신들로 구성된 야당 지도부와 지식인, 먹물 학자들은 근본도 잘 모르는 빈농 출신의 총잡이 군인들에게 정권을 탈취당하여 분기탱천해 있었다.

박정희, 독이 든 성배(聖杯)를 마시다

때문에 어느 누구도 일본과 수교의 필요성을 이성적으로 호소하여 국민을 설득하려 하지 않았다. 한일회담은 박정희의 정적(政敵)들에게는 갓 출범한 박정희 정부를 두들겨 팰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불과 15만 표 차이로 석패하여 정권을 날치기 당했다고 피해망상에 사로잡힌 야당 입장에서 볼 때 한일회담 반대투쟁은 빼앗긴 정권을 되찾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 아닌가!

이처럼 한일 수교는 박정희 정권의 명운이 걸린 일대 도박이자 ‘독(毒)이 든 성배(聖杯)’였다. 하지만 박정희는 “조국 근대화를 위해”, 그리고 “국민들에게 세 끼 밥을 배불리 먹이기 위해” 독배를 피하지 않았다.

1964년 3월 6일, 야당 의원들이 주동이 된 대일굴욕외교반대특위가 구성되었고, 3월 9일 야당과 사회 각계 대표 200여 명은 ‘대일굴욕외교 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를 결성하여 한일 회담 중단을 요구하는 선언서를 발표했다.

이 단체는 3월 15일부터 20일까지 부산과 목포, 마산과 광주 등 전국 주요 도시를 순회하며 시국강연회를 열었다. 1961년 5·16이 일어났을 때 “혁명”이라고 역사적 의미를 부여했던 장준하, 함석헌이 박정희 공격의 선봉에 섰다. 대선에서 박정희에게 석패한 윤보선은 3월 19일, “민의가 무시된 한일협정이 타결되면 의원직을 사퇴하겠다”고 선언, 반정부 시위를 부추겼다.

3월 24일 서울대 교정에선 서울대·고려대·연세대 학생 5,000여 명이 소위 ‘제국주의자 및 민족반역자 화형식’을 벌이고 태평로의 국회의사당으로 몰려가 경찰과 투석전을 벌였다. 이후 이틀 동안 학생들의 시위가 격화되어 10만여 명이 참여했다.

5‧16 이후 군사정부는 사이비 언론기관과 언론인을 대거 정리했는데, 이로 인해 정리대상에서 제외된 언론사와 언론인들은 “언론의 자유를 침해당했다”면서 저항을 폭발시키는 과격한 보도를 일삼았다.

회담 반대 시위에 나선 학생들의 요구는 야당이나 시민들의 주장보다 더 과격하고 파괴적이었다. 학생 시위는 ‘굴욕 외교 반대’에서 ‘박정희 대통령 퇴진’으로 바뀌었다. 시위대는 박정희와 김종필을 “제2의 매국노 이완용”이라고 비난하며 박정희의 하야를 요구했다. 취임한 지 6개월도 안 된 박정희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학생 시위는 6월 3일, 절정에 달했다. 18개 대학 1만여 명의 학생들이 청와대를 비롯하여 정부 기관에 난입을 시도했다. 시위대에 의해 서울 중심부의 경찰서 하나가 불에 탔고, 군 차량을 탈취하여 시가지를 질주했다. 수도경비사령부 소속 군인들이 경비를 서고 있는 중앙청 울타리를 넘은 학생들이 현관까지 뛰어 들어와 군인들과 난투극을 벌였다. 시내 곳곳에서 화염이 치솟고 최루탄 냄새가 진동했다. 가히 제2의 4·19를 방불케 하는 열기였다. 

박정희는 불법 시위가 도를 넘었다고 판단, 제2의 5·16을 감행하는 심정으로 6월 3일 밤 8시 서울시 일원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박 대통령은 박상길 대변인을 통해 “지금 일부 몰지각한 학생들에게는 헌법도 없고 국회도 없고 정부도 없다”고 개탄했다. 그 후 며칠에 걸쳐 352명의 학생들이 투옥되었고 307명이 추가로 학교에서 정학 처분을 받았다.

박정희, 피해의식·열등감에 사로잡힌 지식인을 꾸짖다
 
박정희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20여 일 간 침묵을 지키다가 1964년 6월 26일, 국회 본회의에 자진 출석하여 ‘시국수습에 관한 특별교서’를 발표했다. 이날 박정희는 작심한 듯 야당 국회의원과 언론, 학생들을 향해 신랄한 비판을 가했다.

그는 “내가 국민의 직접선거에 의해 집권한 지 불과 6개월도 지나지 않았는데 왜 타도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지”를 반문하면서 자신의 집권이 헌법적으로 정당함을 당당하게 주장했다. 국민 직선을 통해 선출된 대통령으로서의 정치적 정당성을 앞세워 박정희는 “언론의 자유도 무한정 보장될 수 없다”면서 민주주의의 남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면 도전을 선언했다.

“언론의 자유는 헌법에 명시되어 있는 국민의 기본권일 뿐만 아니라 헌법을 초월하는 인간의 기본권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언론의 자유도 다른 자유와 마찬가지로 무한정한 것은 아닙니다.”

박정희는 “언론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것과 언론의 무책임한 자유, 왜곡된 자유, 과잉된 자유를 방치한다는 것과는 구분되어야 한다”면서 “만약 우리에게 자유를 수호할 의무가 있다면 타인의 자유나 타기관의 자유를 침해하는 자유를 규제할 의무도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박정희는 “우리는 언제까지나 외국 원조에 의존할 수는 없다. 자립이 없다면 진정한 독립이 있을 수 없다”면서 한일 수교의 불가피성을 역설했다.

1965년 6월 22일, 전 국민의 열화와 같은 반대를 뚫고 한일 수교협정이 조인되었다. 다음날 박정희는 ‘한일회담 타결에 즈음한 특별담화문’에서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나는 우리 국민의 일부 중에 한일 교섭의 결과가 굴욕적이니, 저자세니, 또는 군사적 경제적 침략을 자초한다는 등 비난을 일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매국적이라고는 극언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그들의 주장이 정부를 편달하고 정부가 하는 교섭의 입장을 강화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는 점에서 이것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여 왔습니다.

그러나 만일 그들의 주장이 진심으로 우리가 또다시 일본의 침략을 당할까 두려워하고, 경제적으로 예속이 될까 걱정을 한다면 나는 그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그들은 어찌하여 그처럼 자신이 없고 피해의식과 열등감에 사로잡혀서 일본이라면 무조건 겁을 집어먹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비굴한 생각, 이것이 바로 굴욕적인 자세라고 나는 지적하고 싶습니다. 일본사람하고 맞서면 언제든지 우리가 먹힌다 하는 이 열등의식부터 우리는 깨끗이 버려야 합니다. (중략)

또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비생산적인 사이비 행세 이것들입니다. 또 있습니다. 속은 텅텅 비고도 겉치레만 번지레 꾸미려 하는 권위주의, 명분주의, 그리고 언행 불일치주의들입니다. 이러한 요소들은 과감하게 씻어버려야 합니다. 그리하여 자신을 가진 국민이 됩시다. 자신은 희망인 것입니다. 희망이 있는 곳에 민족의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박정희가 굴욕적으로 타협했다고?

당시 미국의 아시아 지역 외교정책은 중대한 국면을 맞고 있었다. 첫째, 미국이 본격적으로 월남전에 개입하면서 대규모 병력이 투입되기 시작했다. 둘째, 1964년 중공의 핵실험 성공 등으로 인해 동북아 지역의 안보 지형이 급격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미국으로서는 자유민주주의 가치를 공유하는 반공 동맹을 시급히 강화해야 하는 문제에 직면했다. 

이러한 배경 아래 미국은 한일 국교 정상화를 위해 딘 러스크 국무장관이 직접 한일 당국자에 압력을 가하여 한일 양국의 이견이 완전히 해소하지 않은 상태에서 신속히 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심지어 배상금(일본 측에선 경협자금이라고 표현) 액수까지도 미국 측에서 조정해서 타결된 것이다. 따라서 박정희 대통령이 친일파 출신이어서 굴욕적으로 일본과 조약을 체결했다는 주장은 명백한 허위 선동이다.

라이샤워 전 주일 미국대사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김-오히라 회담이 있기 전 국무성은 사무엘 버거 주한 미국대사에게 ‘한일 회담이 타결되지 않는다면 미국은 미국대로의 대책이 서 있음을 통고하라’고 지시했다. 한국이 이 비밀 접촉에서 크게 양보한 데 대해 미국이 무관했다고 보는 사람은 없다고 소식통들은 믿고 있다”고 전하고 있다.

당시 박정희는 여러 경로를 통해 일본이 국교 정상화 과정에서 한국에 제공할 수 있는 금액을 파악했다. 당시 일본의 외환보유액은 14억 달러였다. 이런 상황에서 아무리 많은 금액을 요구해 봐야 일본 측이 감당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 받아낼 수 있는 최대치를 8억 달러로 상정했다.

이런 예상치를 가지고 김종필에게 “국민들은 불만이겠지만 8억 달러로 종합제철소도 짓고 기계공장도 만들자”는 인디케이션(지침)을 준 것이다. 1964년 한국의 수출규모가 1억 달러를 처음으로 넘었던 것을 고려할 때 8억 달러는 1964년 우리나라 수출대금의 8년 치에 해당하는 엄청난 금액이었다.

한일 수교가 조인되자 또 다시 학생·지식인·언론·정치인 등이 저항하기 시작했다. 당시 한국의 지성으로 알려진 박두진 시인은 다음과 같은 시를 발표하여 한일협정 조인을 반대하고 나섰다.

‘(중략) 우리는 알고 있다/ 누가 또 이 나라와 백성을 팔아넘기려 하는지를/ 우리는 이미 똑똑히 보아 알고 있다/ 어떻게 또 우리가 지금 팔려 넘어가려 하는지를/ 조국 또 민족의 이름으로/ 자주, 자유, 독립국가의 시민/ 그 당당해야 할 민권의 이름으로 요구한다!/ 우리는 다만 한 가지/ 한일 굴욕 매국협정 일체를 즉각 파기하라!/ 그 더러운 당국 협정의 비준을 즉각 파기하라’

박두진의 한일회담 비판 시는 북한이 6·3사태를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재침 책동을 짓부시고 민족적 존엄을 지켜내기 위해 남조선 청년학생들과 인민들이 펼친 정의의 애국투쟁”이란 주장과 어찌 그리 닮은꼴인가.

거의 모든 지식인·언론인·예술인들 총체적 저항

한일회담을 거국적으로 반대하는 데 앞장섰던 사람이 한 두 명이 아니다. 박종화, 박두진, 김수영, 박화성 등 저명한 재경 문학인 82명의 비준 반대 성명, 역사교육연구회(대표 김성근)·역사학회(대표 고병익)·한국사학회(대표 김성준)의 비준반대 연합성명, ‘4월혁명 동지회’의 성명, 기독교인들의 전국적인 비준 반대 구국기도회, 재경 대학교수단 354명의 비준 반대 선언문 발표가 잇따랐다.

서울시내 6개 대학 학생회장단(고려대 유유길, 서울대 서성준, 숙명여대 박경자, 연세대 권상운, 이화여대 진민자)은 ‘한일협정 비준 반대 각 대학 연합체’(한비연)를 결성해 연대운동을 도모했다.

7월 14일에는 김홍일(육군 중장·전 외무부 장관), 김재춘(육군 소장·전 중앙정보부장), 박병권(육군 중장·전 국방부 장관), 박원빈(육군 준장·전 무임소장관), 백선진(육군 소장·전 재무부 장관), 송요찬(육군 중장·전 육군참모총장), 손원일(해군 중장·전 국방부 장관), 이호(육군 준장·전 법무부 내무부 장관), 장덕창(공군 중장·전 공군참모총장), 조흥만(육군 준장·전 치안국장), 최경록(육군 중장·전 육군참모총장) 등 예비역 장성 11명도 ‘한일협정 반대’ 성명을 발표했다.  7월 20일에는 대한변호사협회(회장 고재호)도 한일협정 반대 성명을 냈다.

7월 31일에는 비준 반대 단체들이 모여 서울 대성빌딩 강당에서 ‘조국수호국민협의회’를 결성했다. 대표적 인물은 다음과 같다.

▲학계 권오돈·조윤제·정석해
▲독립운동가 김홍일·신봉제
▲기독교계 서병호·박윤영
▲경제인 유창순
▲문인 양주동·박두진
▲법조인 이인·김춘봉
▲천도교 박연수
▲여성계 최은희
▲유림 오양
▲종교인 함석헌
▲청년대표 하은철·정원찬
▲예비역 장성 박원빈·손원일·박병권 등

한일회담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결성한 단체가 6·3동지회다. 이 단체는 1964년 9월 20일 조직되었고, 1999년 8월 9일 사단 법인으로 전환했다. 2006년 12월 22일 「민주화 운동 관련자 명예 회복 및 예우에 관한 법률 개정안」 국회 통과로 6·3 학생 운동이 민주화 운동으로 법적으로 공인되었다. 이명박 대통령이 6·3동지회의 제6대 회장을 역임한 바 있다.

이명박이 대통령 재임 시절인 2011년, “6·3항쟁 47주년”을 기념하여 청와대에서 이명박 대통령 초청으로 6·3동지회원 200여 명이 만찬회를 열었다. 이날, 이명박 정부의 실세 정치인이었던 이재오는 트위터에 “오늘은 1964년 6월3일 군이 계엄령을 내려서 학생운동을 탄압한 그날입니다. 굴욕적인 한일회담 반대 학생운동으로 군이 대학을 점령하고 저는 대학에서 제적과 함께 수배가 됐습니다. 제 인생의 갈림길이었습니다”라는 내용을 올렸다는 언론 보도가 있었다. 

6·3이 민주항쟁이었다고?

뭐라고? 6·3이 민주항쟁이며, 학생운동을 군인들이 짓밟았다고? 한일 굴욕 매국협정 일체를 즉각 파기하라고? 박정희가  이 나라와 백성을 팔아넘겼다고? 이 사람들은 말끝마다 항쟁이란다. 6·3이 항쟁이었다면, 대체 무엇을 위한 항쟁이었단 말인가?

6·3 데모를 추억으로 끌어안고 사시는 ‘늙은 분’들에게 묻는다. 당신들은 한일회담 반대를 금지옥엽의 대단한 자랑으로 내세운다. 그것이 진정한 민주화 운동의 출발이었다는 것이다. 당신들은 지금도 그때의 한일협정이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고 생각하는가? 당신들은 박정희가 당신들의 시위에 굴복하여 한일회담을 중지시키고 하야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당신들은 일본과의 수교로 산업화에 필요한 자금이 들어오고, 일본의 앞선 기술과 경험이 유입되면서 한국의 산업 각 분야가 일취월장하기 시작한 역사적 사실을 모를 만큼 무지하고 무식한 인간들인가?

한일 수교의 결과 미국, 일본과의 협력 강화로 한미일 3각 해양 동맹이라는 기회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는 사실도 모르는가? 일본으로부터 들여온 자금과 기술, 경험을 토대로 공장을 짓고, 여기서 생산된 제품을 미국 시장에 수출하여 외화를 획득하는 극적인 기회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한 것도 부정하는가?

6·3세대여. 당신들이 박정희가 품었던 생각의 10분의 1, 100분의 1, 아니 1000분의 1이라도 이해했다면 그런 식의 철부지 행동은 자제했어야 마땅하다. 아니, 그때는 분위기에 휩쓸려 경거망동했다 해도, 이제는 솔직하고 과감하게 지난날의 과오를 인정하고 잘못을 시인하고 역사의 제단 앞에 무릎 꿇고 용서를 빌어야 한다.

하지만 당신들은 곡학아세, 혹세무민하여 나라 망친 행위를 끝까지 변명하고 정당화하면서 기득권의 단물을 빨았다. 당신들은 역사를 오판한 죄인들이다. 역사를 오판하고도 비판, 반성 한 마디 없는, 비겁하기 짝이 없는 인간들이다.

이 미친 광기의 세대들이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민주화 운동 운운하며 국민 혈세인 보상금 배상금 타먹는 재미에 빠져 망언을 서슴지 않고 있다. 미쳐도 단단히 미친 세대다. 역사를 오판하고도 반성조차 없는 6·3 세대 늙은이들 낯짝에 침을 뱉고 싶다. 하는 짓마다 토악질이 난다.

김용삼 대기자 dragon0033@pennmik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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