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시대 탐험기] '민주화' 팔이 지식인들이 박정희에 저항한 진짜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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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초승인 2019.05.14 09:20:40
  • 최종수정 2019.05.14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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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구한말 위정척사 세력들처럼 근대화 자체를 부정하는 입장은 아니었다. 한국이 처한 현실에서 근대화는 필수불가결 했지만, 근대화를 통해 다수의 정치 참여가 가능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즉 자신들도 정치에 참여하여 권력의 단맛을 볼 수 있기를 학수고대했다. 하지만 박정희가 근대화라는 명목 아래 계속 집권을 이어가자 자신들이 정치에 참여할 기회, 권력의 단맛을 볼 수 있는 기회는 점점 멀어졌다.
한국의 지식인들이 '민주화' 팔이를 하면서 박정희에 반기를 들기 시작한 것은 1963년 8월, 박정희가 군 원대복귀 약속을 깨고 현실정치에 참여하면서부터다. 자신들이 권력을 잡을 기회가 멀어지자 일군의 지식인들은 박정희 저항세력으로 변해 '민주화'를 외치며 반정부 세력화 했다. 사진은 5.16 당시 서울시내에 출동한 박정희와 쿠데타 지도부(사진 연합뉴스 제공).
한국의 지식인들이 '민주화' 팔이를 하면서 박정희에 반기를 들기 시작한 것은 1963년 8월, 박정희가 군 원대복귀 약속을 깨고 현실정치에 참여하면서부터다. 자신들이 권력을 잡을 기회가 멀어지자 일군의 지식인들은 박정희 저항세력으로 변해 '민주화'를 외치며 반정부 세력화 했다. 사진은 5.16 당시 서울시내에 출동한 박정희와 쿠데타 지도부(사진 연합뉴스 제공).

5·16이 다가오고 있다. 매년 이 시즌이 되면 좌파독재에 길들여진 부류들은 박정희를 물고 뜯느라 밤잠을 설친다. 박정희는 군사쿠데타의 원흉이요, 인권탄압과 종신 독재를 밀어붙이다가 부하 총탄에 비명횡사했다는 류의 저주가 또 다시 공영방송의 전파를 통해, 혹은 온라인 공간에 횡행할 것이다.

그렇다면 건국 시기부터 1987년 6·29로 인한 민주화 시대로의 이행까지 40여 년, 한국에 독재정권이 아니라 국민 의사를 존중하는 민주정부가 들어섰다면 오늘과 같은 수준의 경제성장이나 민주주의가 가능했을까? 이것은 미국의 정치학자 그렉 브라진스키가 자신의 저서 『대한민국 만들기, 1945~1987』를 통해 세계의 독자들에게도 똑같이 던졌던 질문이었다.

기자는 개발연대에 등장했던 지도자들의 시대를 독재정권이라고 정의하는 것을 반대한다. 그 시대는 독재가 아니라 권위주의 체제가 더 적절한 표현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어쨌든 한국 현대사에서는 ①1945~48년, ②1960~61년, ③1979~80년 등 세 차례의 중요한 정치적 고비가 있었다.

①은 한국 사회가 좌우익으로 갈려 대립 격돌하다 분단된 시기다. 만약 이 시기에 미국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한반도에는 좌익이 주도하는 혁명이 일어나 공산화되었을 것이다. ②의 시기에 박정희는 쿠데타로 합헌적 민주정부를 몰아냈는데, 미국은 쿠데타 초기에 박정희에 대해 중립적 입장을 보이다가 박정희를 적극 지원하는 쪽으로 돌아섰다.

결정적인 고비 때마다 미국은 한국의 독재자(권위주의자)들이 국민이 지지하는 정치체제나 정치인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하도록 지원하거나 방관했다(그렉 브라진스키 지음·나종남 옮김, 『대한민국 만들기, 1945~1987』, 책과 함께, 2012, 418쪽).

미국이 5.16 반대하고 장면 정권 복원시켰다면?

만약 이 시기에 미국이 쿠데타를 반대하고, 전복된 민주당을 복원하기로 결정했다면 한국은 어떻게 되었을까? 이것이 그렉 브라진스키가 궁금해 했던 부분이다. 미국이 장면 정부를 복원시키려 했다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쿠데타 참여 세력은 65만 대군 중 불과 3,500여 명의 극소수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장면 정부가 복원되었다면 한국 사회에서는 언론의 자유, 종교의 자유, 표현의 자유 등 민주사회의 기본적 권리가 침해받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정권은 사회적, 정치적 다수로부터 소외받는 계층의 기본권을 옹호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한 정부는 못되었을 것이다. 장면 정부는 국민을 대상으로 공권력을 사용하는 것조차 망설였다. 따라서 국가 발전을 이루고, 민주사회를 만드는 데 전제조건인 사회 안정 유지조차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그렉 브라진스키는 분석했다.

미국 정부는 1963~66년 사이 국가전략 추진 과정에서 한일 국교 정상화, 한국군 베트남 파병이라는 두 가지 과제에 직면했다. 미국 정부는 베트남전 개입을 확대하면서 한국에 대한 경제 지원과 원조 부담을 일본이 담당하기를 기대했다. 이 두 과제는 한국 경제를 발전시키는 데 필수적인 사안이었지만, 한국 국민의 격렬한 반대가 불을 보듯 뻔했다.   

한일 국교를 정상화하려는 박정희의 노력은 전 국민적 저항에 직면했다. 대통령에 취임한 지 불과 6개월 만에 박정희는 촛불시위, 광우병 난동 같은 결정적 위기를 맞은 것이다. 쿠데타로 군인들에게 권력을 빼앗긴 야당 정치인과 지식인, 언론, 학생이 중심이 된 거대한 반정부 세력은 ‘극도로 불확실하고, 무질서하며 혼란스러운 상황’을 연출했다.

1964년 5월 20일 서울대학생들은 교정에서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을 열고 반외세·반독재·반매판의 민족·민주정신을 강조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날을 계기로 대일 굴욕외교 반대시위는 반정부 투쟁으로 성격이 바뀌었다. 대규모 시위에 굴복했다면, 그건 박정희가 아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국민적 저항에 맞서 6월 3일 저녁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대를 동원했다. 사실상 제2의 쿠데타를 감행한 것이다.

한일 국교 정상화를 반대하는 집회와 시위가 점차 격렬해지자 미국 정부는 한국에 이보다 더 발달된 정도의 민주화가 필요한지에 대해 의심했다. 미국에서 한국 관련 주요 사안을 담당했던 국가안전보장회의의 로버트 코머(Robert Komer)는 “한국에서는 아직 민주주의를 실시할 준비가 부족하며, 1950년대에 이승만이 실시했던 독재정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박정희는 6·25 때 남침을 자행한 공산세력을 물리쳐준 자유세계에 대한 보답으로 베트남전에 전투부대를 파병했다. 야당 정치인·지식인·언론·학생으로 구성된 반정부 세력은 6·3 사태 때만큼 격렬하지 않았지만, “미국 용병” 운운하며 참전 동기에 대해 강력하게 시비를 걸었다.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박정희는 뚝심 있게 밀어붙여 성사시켰다. 그 대가로 박정희는 무엇을 얻었는가?

1965년부터 1968년 사이, 한국은 베트남에 대한 수출, 미군부대에 대한 보급품 납품, 전쟁에서 발생하는 기타 경제 특수 등으로 무려 4억 200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1964년 한국의 연간 수출액이 1억 달러를 돌파한 사례와 비교할 경우 한국군 전투부대 베트남 파병이 갖는 경제적 의미가 얼마나 의미심장한지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지식인들은 왜 저항에 나섰나?

그렉 브라진스키는 한국의 지식인 그룹이 정치권력에 본격적으로 등을 돌리기 시작한 것은 1963년 여름부터라고 분석했다. 박정희가 원대복귀 약속을 깨고 현실정치에 참여하여 권력을 장악하려 하자 저항 전선을 형성한 것이다. 그 선두에 선 인물이 ‘한국의 간디’라 불리던 함석헌이었다.

함석헌은 5·16을 적극 부추겼고, 쿠데타가 발생하자 이를 적극 환영했다. 그는 5·16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민족개조’ 내지 ‘인간개조’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전형적인 먹물 지식인이었던 함석헌의 세계관에서 군인(즉 武人)이 통치의 주역이 된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고, 인정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함석헌은 진정한 혁명은 ‘순수 인간’인 민중이 자발적으로 하는 것이며, 학생과 군인이 할 일은 아니라고 보았다. 그의 세계관에 의하면 학생과 군인은 인간이 아니었다. ‘순수 인간’은 민중이었다. 그는 4·19를 일으킨 학생은 잎이요, 5·16으로 거사한 군인들은 꽃이라고 해석했다. 잎과 꽃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열매를 맺는 것은 몸통의 나무로서 곧 민중이다. 함석헌은 꽃이 찬란하게 져야 열매를 맺을 수 있듯이 5·16 세력에게 조속히 민간 정치인에게 권력을 이양하라고 촉구했다(이영훈, 「저항의 이론-대중경제론」, 이승만학당 강의록 참조).

하지만 ‘한국의 간디’ 선생의 기대와 달리 박정희는 군복을 벗고 정치세력을 형성하여 선거를 통해 대통령에 당선됐다. 함석헌은 군인들의 통치에 격렬하게 저항하는 선봉에 서서 반정부 세력의 정신적 리더가 되었다.

국가발전의 결정적 고비마다 지식인 사회의 저항을 경험한 미국 관료들은 한국의 지식인들이 국가 발전 과정에 새로운 인식을 가지도록 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 결과 한국에 근대화 이론을 소개하는 데 주력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한국의 지식인 사회는 1960년대 초까지 전통적·봉건적·성리학적 근본주의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때부터 근대화 이론을 선도한 경제학자 월터 로스토(Walter Rostow), 사회학자 대니얼 러너(Daniel Lerner), 정치학자 루시안 파이(Lucian Pye) 등의 이론이 한국에 대대적으로 소개되었다. 미 공보원이 후원하는 번역 사업을 통해 미국 학자들의 근대화 이론 관련 저작이 한국어로 번역되어 한국의 관료와 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번역 사업을 통해 한국에서 출간된 대표적인 서적은 월터 로스토의 『경제성장의 여러 단계』를 비롯하여 맥스 밀리킨의 『신생국가론』, 에드워드 메이슨의 『저개발 지역의 경제발전』, 로버트 알렉산더의 『경제발전 입문』, 존 갤브레이스의 『경제발전 전망』 등이었다.

미 공보원은 미국 서적의 한국어 번역 출판사업과 함께 「논단」이라는 계간지도 발간했다. 이 저널은 미국 학계에서 최근에 발표된 경제학·역사학·사회학 분야의 논문을 국내에 소개하는 통로였다. 그 중에서도 근대화 이론에 관한 논문이 핵심을 이루었다.

당시 「논단」을 통해 소개된 근대화 관련 해외 학자들의 논문은 레스터 살라몬의 「비교사와 근대화 이론」, 사무엘 아이젠스타트의 「지식인과 전통」, 로버트 플러커의 「지역협력과 동남아시아의 근대화」, 데이비드 파월의 「근대화의 사회적 비용」 등이었다.

“저개발 국가가 근대화 이루려면 지식인이 주도적 역할 해야”(군나르 미르달)

미 공보원은 또 서울중앙방송국과 협력하여 ‘한국의 근대화’라는 주간 뉴스 프로그램을 방송했다. 1965년 12월 시작된 이 프로그램은 시청자에게 한국에서 진행되고 있는 근대화에 대한 주제를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1960년대 초부터 미국인들이 집중적으로 소개한 근대화 개념은 한국의 지식인들을 매료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런 일련의 작업을 통해 근대화의 핵심 본질을 이해한 일군의 학자와 지식인들은 박정희 정부를 지지하는 대열에 합류했다. 1972년 유신체제가 출범할 때 중앙대 법대 교수였던 갈봉근은 유신헌법 초안 작성에 참여했다. 이후 그는 유신체제 옹호의 선봉이 되었다. 갈봉근 교수는 저개발 국가에서 권력의 독재는 국가 발전을 이루기 위한 첫 번째 과정이며, 국가를 통치하고 국민적 통합을 이루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주장했다(갈봉근, 「유신헌법 정치철학과 지도자상」, 신동아 1972년 12월호 54~60쪽).

이밖에도 국가 발전과정에 대한 연구를 한 전문가, 학자, 언론인들이 군사독재의 필요성과 그 논리를 수용하여 유신체제를 지지하는 대열에 합류했다. 그 대표적 인물 중의 한 사람이 한국일보 기자·논설위원으로 활동했던 임방현이다.

그는 1966년 니만 펠로십(Nieman Fellowship) 프로그램을 통해 하버드대학에서 1년간 공부할 기회를 얻었다. 그는 하버드대학에서 당시 미국에서 유행하던 최신 근대화 이론을 공부했다. 그에게 영향을 미친 학자들은 에드워드 실스를 비롯하여 동아시아 역사 연구에서 근대화에 대한 해석 방법을 제시한 존 페어뱅크, 러시아 정치 전문가 머를 페인소드 등이었다.

임방현은 스웨덴 경제학자 군나르 뮈르달의 저작에 큰 자극을 받았다. 저개발 국가가 근대화를 이루려면 지식인이 주도적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는 뮈르달의 주장이 지식인과 국가의 관계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하게 만든 것이다.

임방현은 정부 정책에 대해 비판하는 것이 지식인이 담당해야 할 중요한 역할이지만, 경제·사회·문화·정치·행정과 같은 근대적 특화 분야의 전문성을 갖춘 지식인이 정부에 협력하지 않는다면 그 혁명은 성공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또 영국이나 미국 같은 발전된 민주주의 국가들의 경우 지식인과 정권이 매번 대립하지 않는데, 이것이 바로 러시아와 다른 점이라고 보았다. 영국이나 미국의 학계나 언론계 전문가들은 정부가 필요로 하는 경우 적극적으로 협력한다는 점을 주목했다(임방현, 『내가 겪은 한국전쟁과 박정희 정부』, 한국정신문화연구원, 344~346쪽). 이런 깨달음을 정리하여 발표한 논문이 「개발도상국의 지식인과 정치지도세력의 역할」이다.

지식인이 국가 발전에 적극 동참해야 한다는 임방현 같은 지식인들의 통렬한 깨달음은 1년간의 미국 연수, 미 문화원의 근대화 서적 번역의 영향 탓이다. 이처럼 적극적으로 근대화의 세례를 받은 지식인 계급은 박정희 정권이 비록 서구식 민주주의 원칙에서 벗어나 있고, 천부적 인권을 다소 침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정권을 지지하고, 그 정권에 참여했다.

지식인들의 시대착오, 비겁성

임방현 같은 언론인은 민주주의가 정착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전제조건’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즉 경제성장과 산업화의 성공 없이는 민주주의의 성립과 발전도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유명한 법학자이자 연세대 교수였던 함병춘도 근대화와 민주주의가 공존할 수 있는가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박정희 정권을 지지했고, 그 정권에 참여했다. 함병춘은 정부가 국가 안보를 확고히 하지 않거나, 반대 의견을 통제하지 못할 경우 근대화에 성공하기 힘들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근대화에 대한 매료에도 불구하고 국가가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에 대해 저항하는 세력들도 늘어났다. 이러한 양자 간의 차이는 근대화를 수용하는 시각의 차이였다. 박정희 유신체제에 저항하는 세력들은 “진정한 근대적 가치는 인간해방”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인간 해방을 그들은 한국 역사 속의 농민 폭동이나 노비 반란 등에서 찾았다.

민주주의와 근대화를 연결하여 연구한 대표적 학자는 강만길이다. 그는 한국 근대사를 민중으로 대표되는 진보 계층과 변화를 거부하는 보스 엘리트 사이에 지속되는 갈등 관계로 재해석했다.

그의 기본적 가치관은 내재적 발전론이다. 서양이나 일본이 한국을 침략하기 훨씬 이전부터 한국 내부에는 자본주의적 근대화 성향이 존재했으며, 외부 세력은 한국의 내부적 근대화 발전을 방해했다는 입장이다. 그는 또 역사의 변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것은 국가가 아니라 민중이었다는 종족주의적 민중중심적 사관을 통해 국가주의의 화신인 유신체제를 공격하고 저항했다.

이들 저항세력들은 천부적 인권이니,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니, 사상과 표현, 학문의 자유니 등등 그럴 듯한 구호를 앞세워 박정희 정권에 저항했다. 하지만 그들의 내면 정신세계에는 면면히 흐르는 공통점이 잠복해 있음이 발견된다.

그들은 완벽한 수구꼴통이었던 구한말 위정척사 세력들처럼 근대화 자체를 부정하는 입장은 아니었다. 한국이 처한 현실에서 근대화는 필수불가결하다고 판단했다. 그들은 근대화를 통해 다수의 정치 참여가 가능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즉 자신들도 정치에 참여하여 권력의 단맛을 볼 수 있기를 학수고대한 것이다.

하지만 박정희가 근대화라는 명목 아래 계속 집권하자 자신들이 정치에 참여할 기회, 권력의 단맛을 즐길 수 있는 기회는 점점 멀어졌다. 그들은 박정희의 근대화 논리에 속았다고 생각했다. 박정희가 자신들을 속였고, 정치 참여 기회를 박탈한 것에 대해 반발했고 저항했다. 이 과정에서 '민주화'라는 그럴 듯한 위장막이 훌륭한 소도구로 등장했다

1971년 박정희가 3선 개헌을 추진하자 그들은 격렬한 반대운동을 전개하며 반정부 세력 편에 섰다. 그들의 주장이나 이론이 어떻든 “내가 권력을 잡고, 그 권력을 마음껏 향유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한 것에 분노했다.

그들은 30여 년 세월을 오로지 '민주화' 간판을 앞세워 절치부심하여 촛불 난동으로 '독재자의 딸' 박근혜를 탄핵시키고 권력 탈취에 성공했다. 그리고 조직적으로, 정권적 차원에서 박정희 시대를 통째로 삭제시키고 있다. 오늘날 근대화 혁명가 박정희가 적폐로 몰려 청산당하고 있는 근본 이유가 이제 이해 되시는가?

김용삼 대기자 dragon0033@pennmik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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