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 5세의 퇴위에 따라 합스부르크 가문은 펠리페 2세의 스페인 왕실과 페르디난트 1세의 오스트리아 왕실로 분리되었지만 유럽 최고 명문가의 결속을 위하여 두 왕실 간의 정략 결혼을 계속한다. 여러 세대에 걸친 근친혼은 유전적 결함에 따른 남자 후손의 절멸을 가져오게 되고 결국 합스부르크 제국은 부르봉 가문과 로트링겐 가문에게 넘어간다.

Ⅰ. 스페인의 합스부르크 왕가

1. 해가 지지 않는 제국 스페인 (1556년 - 1700년)

분명히 펠리페 2세는 아버지 카를로스 1세로부터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토 중 가장 중요한 지역들을 물려 받았다. 1571년 레판토에서 오스만 투르크 해군을 격파하고 1580년 포르투갈의 왕위까지 차지하면서 아메리카 대륙을 독점적으로 지배하게 되자 이제 그를 저지할 수 있는 유럽 내 국가는 단 하나도 없었다.

스페인 합스부르크 가문의 몰락은 1588년 잉글랜드에 의한 스페인 무적함대의 패배 또는 1648년 네덜란드의 독립 등 대외 정책의 실패보다 펠리페 2세, 그의 아들 펠리페 3세 그리고 손자 펠리페 4세가 모두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의 공주들과 혼인하여 후계자를 얻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펠리페 2세 이후 스페인 국왕들은 근친혼에 따른 부작용으로 모두 신체적 결함을 가지고 있었고 숙적 프랑스의 국왕 루이 13세와 루이 14세를 상대할 수 있는 지적 능력도 없었다.

카를 5세의 서자 돈 후안 오스트리아, 펠리페 4세의 서자 돈 후안 호세 오스트리아가 모두 당대의 가장 우수한 인물들 중 하나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근친혼에 의한 유전적 결함이 스페인 합스부르크 가문의 몰락을 가져왔다고 볼 수 있다.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조의 마지막 국왕 카를로스 2세 - 펠리페 4세의 아들 - 는 곱사등이에 학습 능력도 현격하게 떨어지는 인물이었는데 첫번째 부인 마리 루이제 폰 오를레앙에게도 두번째 부인 마리아 안나 폰 데어 팔츠에게도 자녀를 얻지 못 한 상태로 사망하면서 누가 스페인의 다음 국왕이 되어야 할 지 불분명한 상황이 되었다.

2 스페인 계승전쟁 (1701년 - 1714년)

카를로스 2세의 부왕 펠리페 4세가 첫번째 부인 이사벨라 폰 부르봉에게 얻은 딸 마리아 테레지아는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와 결혼했고 두번째 부인 마리아 안나 폰 오스트리아에게 얻은 딸 마르가리타 마리아 테레지아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레오폴트 1세와 혼인했다.

사망한 카를로스 2세도 펠리페 4세의 두번째 부인 마리아 안나 폰 오스트리아가 낳은 아들이었기에 레오폴트 1세의 후손이 스페인의 왕위를 계승하는 것이 유력해 보였다.

하지만 루이 14세는 그의 결혼 당시 신부 마리아 테레지아가 50만 에스쿠도의 지참금을 가져온다는 전제 하에 스페인의 영토에 대한 모든 상속권을 포기했었는데 카를로스 2세의 사망 시까지도 스페인이 프랑스에 지참금을 지불하지 못 하고 있었던 점에 근거하여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였다.

여기에 더하여 두번째 부인 마리아 안나 폰 데어 팔츠를 증오하던 카를로스 2세가 루이 14세의 손자이며 프랑스 왕세자의 차남인 앙쥬 공작 필립을 상속인으로 지명하는 유언장을 남겼기에 필립이 스페인 국왕 펠리페 5세로 즉위하게 되었다.

이에 대항하여 신성로마제국 황제 레오폴트 1세는 그의 차남 카를 대공을 합법적인 스페인 왕국의 상속자로 선언하고 영국, 네덜란드, 사부아, 포르투갈, 독일의 주요 제후들과 동맹을 맺은 후 프랑스에 대하여 전쟁을 선포했다.

전쟁은 프랑스 측에 불리하게 전개되었으나 1705년 아버지 레오폴트 1세의 사망, 1711년 형 요제프 1세의 사망에 의하여 카를 대공이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6세로 즉위하게 되자 영국과 네덜란드는 과거 카를 5세 치하의 합스부르크 제국 시대가 다시 재현되는 것을 두려워하여 전선에서 이탈하였다.

결국 부르봉 가문 출신의 펠리페 5세가 스페인과 아메리카 대륙의 영토를 차지하는 대신 스페인 합스부르크 가문이 지배하던 스페인령 네덜란드, 밀라노, 나폴리, 사르디니아를 카를 6세에게 양도하면서 스페인의 합스부르크 가문은 소멸했다.

Ⅱ.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

1. 카톨릭 세계의 수호자 오스트리아 (1556년 - 1740년)

페르디난트 1세는 형 카를 5세에게 신성로마황제의 직위와 가문의 본거지 오스트리아를 상속받았는데 그의 후손들인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의 국왕들은 장기간에 걸친 근친혼에도 불구하고 스페인의 친척들보다 훨씬 건강했다.

남편 페르디난트 1세에게 15명의 자녀를 낳아 줄 정도로 육체적으로 매우 강인했던 헝가리 출신 왕비 안나 폰 보헤미아의 유전자가 합스부르크 가문에 만연해 있던 근친혼의 부작용을 억제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페르디난트 1세의 후손들은 독일에서 벌어진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 간의 종교 전쟁 (30년 전쟁: 1618년 - 1648년)에 시달렸고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군대에게 1683년 수도 빈이 함락당할 위기에 처했다가 폴란드, 바이에른, 작센 등의 도움으로 간신히 위기를 모면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으나 결국 오스트리아를 유럽의 주요 강대국들 중 하나로 성장시켰다.

프랑스가 카톨릭 국가이면서도 종교보다 국가 이익을 우선시하여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오스만 투르크 제국과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고 30년 전쟁에서 프로테스탄트의 편에서 참전했던 것과 대조적으로 오스트리아는 로마 교황과 지속적으로 충돌하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항상 카톨릭 교회의 편이었다.

2. 폴란드 계승전쟁 (1733년 - 1735년)

스페인의 국왕이 되는 대신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된 카를 6세는 1713년 4월 19일 합스부르크 가문의 모든 영토는 임의로 분배할 수 없고 분리할 수도 없다는 원칙을 담은 국본조서 를 작성하여 국제적으로 인정받으려고 했다.

국본조서에 의하면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토가 남자 후손들에게 출생 순서에 따라 차등 분배되던 기존의 승계 원칙이 폐지되고 카를 6세의 자녀들 중 한 명이 가문의 모든 영토를 통치하는 국왕이 된다.

1716년 아들 레오폴트 요한이 사망한 이후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유일하게 생존해 있는 남자였던 카를 6세는 장녀 마리아 테레지아를 자신의 후계자로 만들기로 결심하고 로트링겐 (Lorraine) 공작 프란츠 스테판과 결혼시켰다.

프랑스 왕국의 영토 내에 자리잡은 로트링겐 공국이 오스트리아의 영향력 하에 들어가는 것에 위협을 느낀 프랑스 국왕 루이 15세는 폴란드의 전 국왕 스타니스라우스 레슈친스키의 딸 마리와 결혼하여 카를 6세에 대항하였다.

1733년 폴란드의 국왕 아우구스트 2세가 사망하자 폴란드의 왕위를 두고 레슈친스키를 지원하던 프랑스와 아우구스트 2세의 아들 프리드리히를 지지하던 오스트리아 및 러시아 사이에 전쟁이 발생했다.

결국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가 폴란드 국왕 아우구스트 3세로 즉위하고 레슈친스키는 프란츠 스테판의 로트링겐 공국을 차지하면서 자신의 후계자로 사위인 루이 15세를 지명하였다. 자신의 영토를 잃어버린 프란츠 스테판 공작에게는 남자 후손이 단절된 메디치 가문 소유의 토스카나 공국과 샤를 드 부르봉이 통치하던 파르마 공국이 주어졌다. 샤를 드 부르봉은 파르마 공국을 양도하는 대가로 카를 6세가 다스리던 나폴리와 시칠리아 왕국을 얻었다.

 

3. 오스트리아 계승전쟁 (1740년 - 1748년)

1740년 카를 6세가 사망한 후 프란츠 스테판과 마리아 테레지아가 오스트리아를 계승하고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와 황후가 되는 것에 대하여 비텔스바흐 가문의 카를 알프레히트 바이에른 공작이 이의를 제기하며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7세로 즉위하였다.

그의 승계권 주장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남성들이 소멸할 경우 당시 사돈이던 비텔스바흐 가문이 오스트리아를 상속한다는 내용의 1546년에 작성된 양피지 조각에 근거하고 있었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도 1573년에 체결되었으나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승인을 받지 못 했던 브리크 조약 (Treaty of Brieg)에 근거하여 슐레지엔의 양도를 요구하며 오스트리아를 침공하여 보헤미아까지 진군하였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슐레지엔을 프로이센에게 양도하는 대신 프리드리히 2세의 지지를 얻어냈고 5년간의 전쟁 끝에 오스트리아군이 바이에른 공국을 점령했다.

1745년 카를 7세가 사망하자 프란츠 스테판이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란츠 1세로 선출되었고 결국 바이에른 공국도 오스트리아에게 점령당한 영토를 돌려받는 조건으로 프란츠 1세의 황제 즉위를 인정하였다.

국본조서에 따라 프란츠 1세와 마리아 테레지아가 통치하는 합스부르크 - 로트링겐 왕조가 성립하면서 영토 보전을 위한 합스부르크 가문 구성원 간 혼인의 필요성은 사라졌다. 이에 따라 근친혼과 그에 따른 유전적 결함이 가져온 육체적 고통에 시달리는 합스부르크 왕족들의 숫자도 급속도로 줄어들었다.

합스부르크 왕조의 연대기는 정략 결혼으로 집안을 일으키고 바로 그 후유증으로 몰락했던 유럽 최고의 명문가를 다룬 한편의 서사시(敍事詩)이면서 고귀한 신분으로 태어난 사람들의 인생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극심한 고통의 연속이라는 사실의 확인을 통하여 불만에 가득 차 있는 현대인들에게 일종의 카타르시스(katharsis)를 선사하고 있다.

유태선 시민기자 (개인사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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