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스부르크 왕조 - 살아남은 자가 모든 것을 얻는 가문 (上) [유태선 시민기자]
합스부르크 왕조 - 살아남은 자가 모든 것을 얻는 가문 (上) [유태선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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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초승인 2019.05.07 09:35:54
  • 최종수정 2019.05.07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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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수저, 은수저, 흙수저 등을 논하며 인간의 삶은 부모의 사회적 신분에 따라 절반 이상 결정된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과거의 유럽 대륙에서 왕실의 일원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선망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과거의 기록들을 살펴보면 유럽 왕족들의 일생은 매우 고단했다.

프랑스 대혁명 이전 유럽에서 국왕의 아들로 태어나 왕위를 계승하게 되면 군대를 훈련시키고 그 재원을 마련하는 문제에 평생 몰두하다가 원인불명의 질병에 감염되어 그의 일생을 마감한다. 만약 국왕의 딸로 태어난다면 부왕의 뜻에 따라 결혼하여 다른 나라의 왕비가 되거나 공작 부인이 되어 아이를 많이 낳는 것에만 신경을 쓰다가 주로 출산 중에 사망한다.

왜 이렇게 유럽 왕족들의 일생은 고난의 연속이었을까? 이는 고귀한 신분의 부모에게 태어난 왕족들은 장기간에 걸친 근친혼(近親婚)에 의하여 태생적으로 그들의 육체가 매우 허약하였기 때문이다. 주요 왕가들 간의 장기간에 걸친 정략 결혼은 불가피하게 그 구성원들에게 신성한 왕권(王權)에 더하여 근친혼에 의한 유전적 결함까지 물려 주었던 것이다.

특히 유럽 최고의 왕가 합스부르크 가문의 경우 그들의 결혼 상대가 될 만한 집안이 유럽의 왕족들 밖에 없었기 때문에 근친혼에 의한 부작용이 더욱 심각하였다. 그 결과 어린 시절부터 각종 질병에 시달리면서도 끝내 살아남은 소수의 성인 남자들이 합스부르크 가문의 광대한 영토를 모두 물려받는 일종의 생존 게임이 몇 세기 동안 지속되었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연대기를 쉽게 이해하려면 다음의 두 가지 관습을 기억해야 한다. 첫째 일부다처제는 허용되지 않으며 만약 왕비 이외의 여자에게 태어난 국왕의 자식이 있다면 부모의 승인이 없이 왕족으로 인정될 수 없다. 둘째, 가문의 영지는 - 1713년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토가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의 국본조서(Pragmatic Sanction)가 선포되기 전까지 - 남자 후손들에게 출생순서에 따라 차등 분배되었다.

1. 루돌프 1세 (1218년 - 1291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로마 교황의 승인이 아니라 제후들의 선거에 의하여 선출되는 것으로 변경된 후 쾰른, 마인츠, 트리어의 대주교, 라인의 왕령지 백작, 작센의 대공,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그리고 보헤미아의 왕은 1273년 9월 29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스위스의 루돌프 폰 합스부르크 백작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선출하였다.

루돌프 폰 합스부르크 백작은 황제 직위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으나 호엔촐레른 가문의 뉘렌베르크 백작 프리드리히가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 루돌프는 신의가 있는 사람이며 합스부르크 가문의 세력이 약하여 그가 황제가 되더라고 누구에게도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설득하여 보헤미아의 왕 오토카르를 제외한 모든 선제후들의 동의를 얻어냈다.

후일 프리드리히의 후손들은 프로이센 왕국을 건설하는데 1866년 루돌프의 후손들이 지배하던 오스트리아를 격파하고 분열되어 있던 독일을 통일하게 된다.

신성로마황제가 된 루돌프는 보헤미아 국왕 오토카르가 자신이 관직을 수여하는 것에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이자 오토카르의 군대를 격파하고 그가 지배하던 오스트리아 백작령을 자신의 영지로 만든다. 나아가 그는 합스부르크 가문을 공작으로 격상시키면서 제국 내 주요 가문들 중의 하나로 만들었다.

2. 알프레히트 2세 (1298년 - 1358년)

단기간에 급속도로 성장한 합스부르크 가문 내에서 내분이 일어나서 친족들 간의 암살사건이 발생한다. 이 기간 중 스위스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에서 벗어나 연방 공화국으로서 독립한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많은 남자들 중 루돌프 1세의 손자 알프레히트 2세만 부인 요한나 폰 피르트를 통하여 남자 후손들을 남기면서 그의 자손들이 모든 영토를 승계한다.

요한나가 큰 아들 루돌프 4세를 낳았을 때 과연 이 아이가 독살 음모에 의하여 팔과 다리가 마비된 알프레히트의 아들일 수 있는가 하는 뒷말이 있었으나 그 후 다섯 아이가 더 태어났고 아버지와 너무도 닮은 아들의 모습에 모든 의심은 사라졌다.

루돌프 4세는 카이사르와 네로의 편지를 위조한 후 이 문서를 근거로 합스부르크 가문이 모든 귀족들 중 가장 높은 지위를 차지해야 한다고 로마 교황에게 주장하였으나 이탈리아의 인문학자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 (1304년 - 1374년)의 의혹 제기에 의하여 당대에는 그 뜻을 이루지 못 한다.

요한나의 강하게 튀어나온 아랫입술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후손들에게 계속 유전되어 프랑스 혁명 당시 처형당한 오스트리아 출신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1755년 - 1793년)도 주걱턱을 가지고 있었다.

3. 프리드리히 3세 (1415년 - 1493년)

장자 상속의 관행이 확립되어 있지 않은 합스부르크 가문은 살아있는 남자 형제들이 여러 명일 경우 끊임없는 내분에 시달렸다. 여기에 더하여 정략 결혼을 통하여 합병하려고 했던 보헤미아와 헝가리의 지배자들과 끊임없이 전쟁을 벌여야 했다. 이는 합스부르크 가문 전체의 자산을 완전히 고갈시켰다.

1442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선출된 프리드리히 3세는 돈이 없으니 군대도 없었고 그 결과 주변 나라의 국왕들과 제국 내의 영주들에게 멸시를 당하며 평생을 보냈다. 자신의 영지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 시민들까지도 황제를 미워하면서 도시 밖으로 몰아내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그는 1452년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에서 교황에게 황제의 관을 받고 1454년 루돌프 4세가 위조했던 문서들을 황제의 자격으로 모두 승인하는 등 합스부르크 가문의 후손들이 유럽의 지배자로 군림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축적해 놓았다.

프리드리히 3세는 엄청난 부를 누리고 있던 포르투갈의 공주 이사벨라와 결혼하여 유럽 최고의 용맹한 군주로 성장하게 되는 막시밀리안 1세를 낳았다.

그는 53년의 재위기간 동안 각종 어려움을 겪었으나 결국 남자 후손을 남기지 못 한 보헤미아, 헝가리 왕실 및 다른 합스부르크 일족의 영토를 모두 아들 막시밀리안 1세에게 승계하도록 하는데 성공하였다.

4. 막시밀리안 1세 (1459년 - 1519년)

자신을 제외한 합스부르크 가문의 모든 남자들이 사망하면서 광대한 영토를 승계한 막시밀리안 1세는 부르군트 공국의 상속녀 마리아와 결혼하면서 재정적 위기를 모면하게 된다. 그는 아내의 재산을 담보로 차입한 자금을 이용하여 강력한 군대를 육성하면서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자격으로 유럽 대륙에 군림한다.

막시밀리안과 마리아의 결혼은 합스부르크 가문 구성원들의 결혼 상대가 가난한 보헤미아, 헝가리 등의 왕족에서 부유한 서유럽 국가 출신으로 교체되기 시작하는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그는 마리아와의 사이에 1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 필립과 딸 마르가레테를 각각 스페인의 공주 후아나 및 왕자 후안과 결혼시킨다. 아들 필립은 카를과 페르디난트의 두 아들을 두었으나 30세 이전에 사망하였고 딸 마르가레테는 남편이 요절하고 아이도 유산하는 비극을 겪는다.

필립의 큰 아들 카를은 스페인 왕실이 남자 후손을 두지 못 한 상태에서 외할아버지 스페인 국왕 페르디난트 1세가 사망하자 1516년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1세로 즉위한 데 이어 1519년 친할아버지 막시밀리안 1세의 뒤를 이어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로 선출된다.

5. 카를 5세 (1500년 - 1558년)

친할아버지에게 오스트리아, 보헤미아, 헝가리를 친할머니에게 네덜란드를 포함한 부르군트 공국을 외할아버지에게 아라곤 왕국과 나폴리 왕국을 외할머니에게 카스티야 왕국과 아메리카 대륙의 식민지를 물려 받은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는 사실상 유럽의 지배자였다.

카를 5세가 1525년 이탈리아 파비아에서 프랑스 군대를 격파한 후 국왕 프랑수와 1세를 스페인으로 압송하고 1527년에는 로마로 쳐들어가 교황 클레멘스 7세를 감금하여도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 했다.

다만 프랑스와의 이탈리아 전쟁 및 신성로마제국 내 프로테스탄트들과의 분쟁에 따른 후유증으로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헝가리 침략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 하여 1529년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이 오스만 투르크 군대에게 포위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카를 5세는 포르투갈의 공주 이사벨라와 혼인하여 펠리페 2세를 낳았고 그를 포르투갈의 공주 마리아와 혼인시켰는데 그 결과 1580년 펠리페가 포르투갈 국왕의 자리를 차지하는 큰 소득을 얻었다.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다스리던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1세)는 1556년 친할아버지 막시밀리안 1세에게 상속받은 영토인 오스트리아와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지위는 동생 페르디난트 (신성로마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1세)에게 양도하고 그 이외의 모든 영토는 장남 펠리페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에게 물려주고 퇴위한다.

유태선 시민기자 (개인사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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